[삶, 오디세이] 일상의 틈 여는 ‘영화’

하루를 다 살아내고 나면 우리는 불을 끄고 화면을 켠다. 영화관의 어둠이든, 집 안의 작은 스크린이든 그 앞에 앉는 순간만큼은 잠시 가쁜 호흡을 멈출 수 있다. 바쁘게 밀려오던 일정과 생각들이 한 걸음 물러서고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앉는다. 영화는 그렇게 일상의 틈을 연다. 영화의 가장 큰 유익은 삶을 대신 살아준다는 데 있다. 스크린 속 인물의 선택과 실패, 후회와 용서를 지켜보며 우리는 울고 웃는다. 아직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미리 통과하고 언젠가 마주할 감정을 예행연습하듯 건너간다. 영화는 현실에서 도망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필자는 두 주 전에 24년간 살았던 단독주택에서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가 사다리차를 이용해 전문적인 기술로 아파트 4층으로 짐은 옮겨줬지만 집 안 곳곳에는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이삿짐 상자들을 정리하는 것은 오롯이 아내와 필자의 몫이었다. 일주일간 정리해도 버릴 것과 남길 물건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 채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월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짐 정리를 잠시 멈추고 영화 한 편을 보자고 의기투합해 요즘 박스오피스에서 조용히 역주행하고 있는 ‘신의 악단’이라는 영화를 봤다. ‘신의 악단’은 북한 보위부 소속 장교가 외화벌이를 위해 가짠 찬양단을 조직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휴먼 드라마다. 김형협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박시후, 정진운, 태항호, 서동원 등 개성파 배우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헝가리와 몽골 등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북한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며 음악과 유머, 감동을 더해 ‘가짜’ 찬양단이 ‘진짜’ 하모니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렸다. 처음 그들의 이야기는 음악보다 계산에 익숙했고 믿음보다는 형식이었다. 음악은 있었지만 감동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짜로 진짜 찬양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진짜로 변화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우리가 연기하듯 선택한 행동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든다”라며 겉으로 착한 척하는 행동조차 계속 반복되면 실제 인격을 빚어 간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감동이 있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출발선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 찬양단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방향이 맞으면 결국 진짜가 된다는 것이다. 진짜 찬양단이 돼 눈 덮인 산을 오르는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이삿짐 상자들 사이에 숨어 있는 나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처럼 아직 완전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일상 말이다. 빠르게 일상의 시간이 지나가지만 우리는 무엇이 힘든지도 모른 채 다음 일정으로 밀려간다. 새로운 아파트에서는 조금은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르게 정하는 삶이 됐으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오늘도 이어진다

‘연기를 보는 이는 법을 볼 것이며, 법을 보려는 이는 연기를 볼 것이다.’ 불교의 오래된 경전인 중아함경에서 부처님이 자신이 깨달은 법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줄임말로 인연이 생겨나고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법(法)’이란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인연에 의한 것이고 그 인연은 자신과 더불어 생겨나고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난 것에는 그 원인과 더불어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된 작용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법이며 가르침이다. 점차 가족이라는 개념이 옅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나 혼자 사는 것이나 싱글라이프가 젊은 시절에 멋지게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채우며 살아가는 성공한 모습이라 여겨지고 있다. 결혼을 했어도 성격 및 취향이 조금만 다르면 큰 고민없이 이혼이나 돌아온 싱글로 살아가면 된다고 가볍게도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유행은 심지어 방송과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안방에서도 전혀 불편함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모두가 혼자 살거나 돌싱이 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사는 게 힘들어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생활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멈추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처럼 일생의 중요한 결정이 유행과 같이 여겨지고 우리 주변에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면 이는 분명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이고, 지금 분명 사회 문제이기도 하다. 가족의 개념이 옅어진다는 것은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붕괴되면 가장 중요한 자신이 머물 곳이 사라진다. 가족은 자신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중추이기도 하다. 작은 단위의 가족 한 집이 모여 마을이 되고 그 마을이 사회와 나라와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또 가족에 대해 가벼이 여기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없다. 단순히 내가 공부를 잘해서, 능력이 좋아서 이뤄지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 가족의 보살핌과 주변의 배려와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런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까지 그 가족이 존재하고 있기에 자신이 태어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생활이 어렵고 지금의 자신이 부족하더라도 그 뒤에는 언제나 가족이 자신을 받쳐주고 있다. 어제가 지나야 오늘이 오고 오늘이 지나가야 내일이 온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 속에도 이어짐이라는 이치가 담겨 있다. 이처럼 ‘나’ 역시 홀로 존재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 내 속에는 또 다른 나인 가족이 항상 함께 한다. 가족은 바로 나의 이어짐이다. 한 해의 시작을 온 가족과 함께 맞이할 수 있는 설날이 이제 곧 다가온다. 먼저 떠나가신 분도, 지금 함께 있는 분도,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분도, 모든 분들이 가족으로 자신과 함께 오늘을 이어 가고 있다. 이 오늘에 감사하듯 가족의 인연에 자신이 있음을 감사히 느끼는 2월의 하루가 되자.

[삶, 오디세이] 글로벌 라이프스타일이 된 K-시대극

영상산업이 총체적 위기를 겪고 있는 요즘도 한국 콘텐츠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K’라는 기호는 이제 한국인의 국적성을 넘어 전 세계인이 공유하고 즐기는 하나의 문화적 감각 장치이자 보편적 언어로 진화했다. 과거 한국에서 제작해 해외로 수출하던 일방향 단계를 지나 현재는 타 문화와 융합하고 상호작용하는 이른바 한류 4.0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드라마와 음악에서 시작된 한류 열풍은 여행, 푸드, 패션, 리빙 등 한국인이 즐기는 삶의 방식 전반에 대한 총체적 관심으로 전이됐으며 세계인은 이를 하나의 세련된 라이프스타일 양식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K-시대극’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기호 K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폭군의 셰프’나 현재 방영 중인 ‘은애하는 도적님아’는 이 현상을 잘 보여준다. 현대의 셰프가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해 절대 미각의 폭군을 만난다는 폭군의 셰프는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켰다. 도적이 된 여인과 그녀를 쫓는 조선의 대군이 서로 영혼이 바뀌는 사건 속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를 그리는 은애하는 도적님아는 넷플릭스 공개 3일 만에 ‘대한민국 톱10 시리즈’ 부문 1위에 올랐다. 두 작품은 북미 최대 영화정보 사이트 IMDB와 초대형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Reddit) 게시판에 팬들의 폭발적 시청 소감과 별점 평가를 끌어내며 글로벌 화제를 낳고 있다. 만화적 상상력이 개연성의 문턱을 넘어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적 외피를 입을 때 그 허구성은 오히려 신선한 유희가 된다. 두 작품은 각각 K-푸드와 한복의 탐미적인 미학을 현대적 감각으로 투영하며 시청자의 오감을 매료시킨다. 이렇듯 보편적인 장르 문법 위에 한국 고유의 미감을 영리하게 덧칠한 전략은 로컬을 넘어 글로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연산군을 상기시키는 궁을 배경으로 하며 대체 역사물로서 공식 역사를 뒤집는 재미,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순한 역사 드라마를 넘어 한식, 한옥, 한복, 한약을 조선 역사라는 패키지로 엮어낸 이 드라마들은 한국의 이미지를 현대적이고 매력적으로 융합한 문화 콘텐츠가 됐다. 과거 문화적 거리는 해외시장 진출에 큰 장애물이었으나 이제 한국의 로컬 특수성은 오히려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매력 자산이 됐다. 보편적인 장르적 틀 안에서 한국만의 독특한 색채를 전달하는 방식은 글로벌 시청자에게 문화적 교육 효과까지 창출하고 있다. 결국 한류 4.0의 진정한 완성은 한국적 특수성이 세계의 공통 가치와 만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끌어내는 데 달려 있다. 이처럼 역사적 상상력과 K-미학이 결합한 로맨스 판타지는 일시적으로 즐기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넘어 세계가 한국이라는 고유한 브랜드를 경험하고 열광하게 만드는 세련된 창구가 돼가고 있다. 로컬의 특수성을 보편 장르 문법으로 번역해내는 이러한 시도는 앞으로 한류의 글로벌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삶, 오디세이] 기다림과 용서

2026년 새해가 시작됐다. 많은 이들은 새해를 맞아 새로운 계획과 희망찬 다짐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올해 그동안 쉽게 꺼내 들지 못했던 한 가지 난제를 마주하고자 한다. 사랑이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하게 한다면 용서는 그 관계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닐까. 어느 책에서 용서란 나 자신을 지배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용서를 도덕적 의무나 종교적 요구 이전에 자유를 향한 결단으로 바라보게 한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들고 쉽게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한 사건일 수도 있고 잊히지 않는 기억이나 특정한 사람일 수도 있다. 특히 그 대상은 나 자신보다 타인인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용서는 늘 어렵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도,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받는 일도 자존심을 건드리고 마음을 소모하게 한다. 때로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삶의 어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끝내 자유로워질 수 없다. 분노와 원한을 붙잡은 채 살아간다면 그 어둠은 점점 우리의 삶 전체를 물들이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용서는 상대를 위한 행위라기보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선택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용서해야 할까. 진심이 없는 용서에 의미가 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 분노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말로만 내뱉는 용서는 오히려 용서의 의미를 가볍게 만들 뿐이다. 용서가 되지 않을 때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충분히 시간을 갖자.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그 대상에 더 이상 과도하게 반응하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려보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감정의 바람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때까지 말이다. 힘은 억지로 빼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처럼 용서 역시 그렇지 않을까. 억지로 놓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기다림의 시간 안에서 본인은 이 한 가지를 기억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히 선하고 의로울 때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 안에 단 1%의 선함, 1%의 용서에 대한 가능성만 있어도 그 가능성을 통해 자비를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다. 사도 바오로가 전하듯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부족함과 실패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지는 분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 27)는 말씀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도 은총 안에서는 가능해질 수 있다. 용서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길 위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선택이기도 하다. 그 선택 앞에서 조급해하지 말고 스스로 단죄하지 말며 우리 안의 작은 가능성을 믿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유로워질 것이다. 2026년 새해에는 필자를 비롯해 모두가 자신을 지배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삶 오디세이] 태도는 관계에서 결정된다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태도로 쉽게 평가한다. 태도가 중요하다. ‘친절하다. 무례하다. 냉소적이다. 밝다, 어둡다. 적극적이다. 소극적이다’라는 말은 모두 태도에서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태도가 개인의 의지나 성품이나 교육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은 오래전부터 ‘태도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고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했다. 애착 이론의 창시자 존 볼비는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기본 태도는 어린 시절 맺은 ‘안전한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봤다.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사람은 탐색하고, 도전하고,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관계가 불안정하면 태도는 조심스러움이 아니라 방어가 된다. 이 이론은 교실, 가정, 직장 어디에서나 반복 확인된다. 안전한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은 말투가 낮고 선택이 느리다. 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늘 평가받고 비교당하는 환경에서는 태도가 예민해지고 날이 선다. 그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을 대하는 태도의 결과다. 신약성경 중에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빌립보서의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십니다.”(빌 1:8) 연애편지 마지막 문장으로 적으면 당장이라도 결혼 승낙을 받아낼 수 있을 정도의 애절한 표현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왜 이토록 부드러웠던 것일까. 우리 중에 바울을 만나 본 사람은 없지만 바울이 쓴 성경을 읽어 보면 대체로 바울은 근엄하고 엄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유독 빌립보서에서 발견하는 바울의 모습은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운 모습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목회자의 스타일은 그 교회가 만들어간다. 같은 목사님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인자한 목사님’이라고 하는 반면 어떤 교인은 ‘엄격한 목사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목사님이 이중적인 태도로 교인을 대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의 평가가 다른 것은 목사님과 맺은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였고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근심을 주는 교회였다. 그래서 고린도교서에서 발견하는 바울은 아주 엄격하고 단호한 모습이다. 태도는 관계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태도를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고 “왜 저렇게 행동할까”보다 “저 사람은 지금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건 아닐까” 이 질문을 먼저 해 보자. 신뢰 없는 조직에서 태도는 계산이 되고 의미 없는 일상에서 태도는 무기력이 된다. 태도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태도를 바꾸고 싶다면 훈계보다 관계를, 지적보다 신뢰를 먼저 맺어야 한다. 사람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만 가장 인간다운 태도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새해 목표는 ‘웃으면서 말하기, 먼저 인사하기, 악수할 때 눈을 맞추기’로 좋은 관계로 사람을 만나려 한다.

[삶, 오디세이] 오늘에서 한 걸음

붉은 태양이 새해를 알리며 2026년 병오년 붉은 말의 해가 힘차게 열렸다. 언제나 새해를 맞이하며 모두가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생기고 나름대로 여러 계획과 목표를 세운다. 매년 비슷한 마음과 목표이지만 이런 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이며 기분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작년 한 해도 분명 새해가 있었고 어느새 연말이 돼 이렇게 또 다른 올해의 새해가 된 것이다. 특히 작년 한 해는 다양한 일들이 있었기에 올해 붉은 말의 새해는 모두에게 조금 더 특별할지 모른다. 붉은 새해의 태양이 무거웠거나 힘들었던 지난 일들을 타 태워주고 힘차게 앞을 향해 내달리는 말의 기상과 같이 올 한 해는 모든 인연이 자신의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나 바라는 일을 원만하게 이루는 시절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말은 잘 달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말이 잘 달릴 수 있는 건 뒤의 땅을 박차고 나와 지금의 땅에 발을 잘 내딛고 다음의 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르침이 바로 말의 이 모습과 같다. 지나간 어제를 박차고 나와 지금의 오늘에 잘 이르러 다음의 내일을 향해 힘차게 자신이 나아가게 해야 한다. 지난 시간에 어려움과 문제가 있었더라도 지금도 그것에 얽매여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지난 일을 지우거나 잊어서도 안 된다. 지난 시간이 바로 오늘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간과 삶에 불만족스럽거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토대인 어제를 반성하고 그를 통해 오늘을 다시 이끌고 나아가야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 수 있다. 숭산 스님의 ‘오직 할 뿐’이라는 가르침과 같이 이제 오늘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오직 해야 한다. 그럼 그것을 하는 자신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백천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불교 선종의 화두가 있다. 어떤 수행과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더라도 마지막 그곳에서는 자신의 한 걸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우리의 새해는 지난 수많은 해의 이어짐이다. 그 이어짐이 오늘의 백천간두를 이루고 있다. 백 척이나 되는 긴 장대의 끝은 매 찰나의 연속에서 계속 길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끝없이 그곳에 매달려 아래만 쳐다보며 두려워하고 있다. 얼마나 높은지 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에서 한 걸음 내딛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오직 그것을 할 수 있는 그 행동이 중요하다. 오늘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잠시 후면 어제이고 내일은 오늘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새해의 여러 마음과 목표는 어느새 지난날의 추억이 돼 버릴 것이다. 올해만큼은 모든 순간의 삶을 살아보자.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 밀도는 자신에 의해 달라진다. 2026년이라는 시간의 장대 끝에서 참된 자신의 의지로 붉은 말과 같이 힘차게 한 걸음 내디뎌 작년의 그 오늘과는 다른 올해의 진짜 이 오늘을 살아가자.

[삶, 오디세이] 저패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

2025년을 마무리하며 올해 최고 흥행 영화 순위를 살펴봤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한국 영화 ‘좀비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영화시장에서 일본 영화가 연간 흥행 1위를 기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작품만 있는 게 아니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 5위에 오르며 일본 애니메이션 두 편이 각각 568만, 342만 관객을 동원해 천만 관객에 육박하는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우리들의 공룡일기’까지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명실공히 저패니메이션 붐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올해에만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이 극장가를 휩쓴 2023년의 경험에서 봤듯이 현재 한국 극장가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장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한국의 젊은 관객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성 팬이 된 현상은 시간은 비싸지고 선택은 더 예민해진 동시대의 조건과 맞닿아 있다. 이들이 극장을 떠난 이유는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라 체험의 부재 때문이다. 2030세대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서사보다 스스로 발견하는 감각을 선호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 지점을 잘 파고든다.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세계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주인공은 목적을 잃고 윤리는 불완전하며 결말은 종종 허무하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체인소 맨: 레제편’의 흥행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목표 없는 주인공, 주변 인물들의 반복되는 배신과 죽음, 더 나빠지는 삶이 영화에 그려진다. 인권과 젠더 감수성의 기준으로 보면 불편한 요소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서사는 젊은 관객에게 묘한 쾌감을 준다.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보상받고, 올바르면 구원받는다는 도식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 대신 폭력과 액션이 터뜨리는 즉각적인 감각이 전면에 놓인다. 이는 청년세대가 느끼는 동시대적 리얼리즘에 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오타쿠의 은신처가 아니다. 2030세대에게 일본은 여행과 대중문화로 이미 친숙하며 팬데믹 시기 OTT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상적 시청 경험이 됐다. 극장에서 이를 극장용 버전으로 다시 보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연속이다. 한국의 극장은 현재의 급격한 변화를 잘못 판단해 왔다. 메시지와 완성도를 강화하면 관객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집에서 눕고, 멈추고, 재생하는 관람 방식은 이미 뉴노멀이 됐다. 이를 밀어낼 힘은 ‘더 나은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경험’에서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대형 스크린과 사운드가 만드는 감각적 밀도, 그리고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 집단적 반응을 만족시킨다. 극장의 표값 논란은 결국 체험의 문제로 환원된다. ‘어쩔수가없다’의 골든글로브 3개 부문 후보지명만으로는 타개하기 어려운 한국영화의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서 체험이 있고 발견이 있으며 참여할 여지가 있는 극장의 재설계가 절실해진 이유다.

[삶, 오디세이] 그루터기에서 시작되는 기쁨

한 해를 돌아보면 기쁨이 아닌 다른 감정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웃기보다 울 때가 더 많았고 감사보다 근심과 걱정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만남보다 이별이, 열매보다 상실이 더 가까이 있었다. 그 자리는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그루터기’(이사야 11, 1)와 같다. 잎도 꽃도 열매도 사라진 자리 말이다. 한때 풍성했던 삶의 흔적만 남겨둔 채 베어진 밑동처럼 적막하게 남은 자리 말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제 끝이구나.’ 그리고 그 끝에서 고개를 숙이고 깊은 한숨과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작은, 그러나 전혀 새로운 희망을 건넨다. 그루터기에서 새싹(이사야 11, 1)이 돋아난다고 말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는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신다. 적막한 절망이 드리워져 있던 곳에서, 끝이라 여겨졌던 곳에서 미세한 생명의 싹이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새싹이자 우리의 눈물자리와 같은 그루터기에서 움튼 햇순이다. 그분은 조용히 말씀하신다. ‘네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끝처럼 보이는 이 자리에서 나는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종종 기쁨을 거창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은 새싹 한 줄기의 침묵 같은 기쁨, 아픔 속에서 잔잔히 스며드는 위로의 기쁨이다. 어느새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 힘이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 9, 12).”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기쁨이 완벽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부족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는 은총, 곧 선물임을 알려준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우리의 눈물 앞에 오신 까닭은 우리의 그루터기 같은 마음을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다.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성탄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하는 새로운 구원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세계 곳곳에서 이 노랫말 가사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힘차게 외쳐 부른다.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 기쁨은 멀리 있지 않다. 그루터기 같은 내 삶의 눈물자리 한가운데, 이미 와 계신 그분 안에 있다.

[삶, 오디세이] 기다림의 골든타임

‘골든타임(Golden Time)’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뜻한다. 이 시간을 놓치면 회복이 어렵거나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의료 현장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 말은 응급 상황에서 골든타임을 놓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아침, 테니스 레슨을 마친 뒤 갑작스러운 전신 무력감과 심한 가슴 압박이 찾아왔다. 9년 전 심근경색으로 스텐트 시술을 받았던 경험이 있어 증상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시 운동을 멈추고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골든타임 안에 도착해 긴급 시술을 받을 수 있었고 의료진의 도움으로 무사히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지금도 회복의 골든타임을 잘 지키기 위해 의료진의 조언을 따르며 몸과 생활을 관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골든타임을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삶에는 그와 반대로 속도를 늦춰야 지켜지는 골든타임, 곧 ‘기다림의 골든타임’도 존재한다. 며칠 전 TV 프로그램에서 90년대 음악계를 풍미했던 한 가수의 일화가 소개됐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였던 ‘내 인생은 나의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노래였다. 교육심리학에서는 청소년기의 정서 발달에도 골든타임이 있다고 한다. 이 시기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때로는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청소년의 외침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자기 삶을 찾아가는 과정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지나치게 억압하면 자녀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다시 회복하기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해진다. 성경의 역사 속에도 기다리지 못해 더 큰 것을 잃어버린 이야기들도 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불안과 압박 속에 있었다. 블레셋의 대군을 보며 병사들은 공포에 휩싸여 하나둘 흩어져 버렸고 약속한 시간이 됐는데도 제사를 집례해야 할 사무엘 선지자는 오지 않았다. 사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스스로 제사를 드렸다. 그의 결정은 당시에는 불가피한 행동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로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 됐고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세웠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지킬 수 있었던 골든타임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와 즉각적인 답을 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신속하게 돌아가다 보니 기다림을 하나의 능력으로 보는 시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은 서두를수록 틀어지고, 기다릴수록 더 선명해지는 법이다. 건강에서도, 관계에서도,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서도 기다림이라는 골든타임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 해의 문턱에 선 12월은 우리의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다. 너무 빠르게만 달려오느라 놓친 것이 없는지, 기다려주지 못해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볼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골든타임을 맞고 있는 것이다. 변곡점에 선 이 시간에, 서두름을 잠시 내려놓고 새해를 준비하기 바란다. 기다림을 잘 지킨 사람에게는 더 단단한 내일이 열릴 것이다.

[삶, 오디세이] 업에서 법으로

불교에서 인간의 삶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업’이다. ‘업’의 원어인 ‘Karma’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 있던 통념이다. 일반적으로 ‘행위(行爲)’라고 번역한다. 즉, 업은 우리의 행위(행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서는 업이 사람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한 사람이 태어나면 그의 집안, 성별, 이름 등에 의해 모든 것이 이미 결정돼 있다고 여겼다. 이렇게 업을 차별적이고 부정적으로 사용해 만든 것이 ‘카스트’라는 신분제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카스트 제도는 한 사람의 ‘태어남(출생신분)’에 의해 모든 것이 정해지고 그 태어남은 전생의 업의 결과이기에 이번 생에도 그 업대로 이어진 삶을 살아야 하고 결국 다음 생에도 이번 생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여긴 차별적 신분제도다. 지금 사람들이 이런 카스트에 대해 들으면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불평등한 제도라고 여길 것이다. 그럼 인도인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우리보다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다. 바로 카스트의 불평등이 불평등인지 느낄 수 없고 사회 전반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가르치고 여기게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느껴지지만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점차 그 불평등한 제도 속으로 자신을 서서히 밀어넣어 끝내 그 제도의 일원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2천600년 전 태어난 태자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청년은 그렇게 고정돼 있고 결정된 삶과 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출가해 수행한 끝에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맨 처음 한 것이 바로 사람은 ‘태어남’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에 의해 삶이 만들어진다고 설하였고 그 가르침이 훗날 불교라는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고정적이고 정해진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모든 것은 변하고 노쇠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삶과 힘을 갈구하지만 그런 고민의 순간에도 결국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살아 있는 모든 시간 우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살아감이라는 것이 무엇을 하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르고 놓치는 순간이 많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한순간도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 하는 2025년과 맞이할 수밖에 없는 2026년의 사이를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한 찰나도 허투루 놓치는 시간 없이 모든 일상을 업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법으로 행위하며 이끌고 가는 시간으로 살아가야 한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업이라 해도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법의 자리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내일의 삶이 나타날 것이다. 살아있기에 살아가도록 업이 아닌 법으로 지금을 행위하여 2025년 연말의 오늘을 살아가자.

[삶 오디세이] 독립영화의 조용한 반격

극장 산업의 침체는 팬데믹 이후 변화한 관객성과 밀접하다. 팬데믹 동안 OTT에서 장르성이 뚜렷한 콘텐츠를 손쉽게 접한 관객은 더 이상 극장까지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돈과 시간을 들여 외출할 만큼 확신이 드는 작품이 아니라면 발걸음은 집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 클릭 한 번으로 시청을 시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바로 멈춘다. 편리하지만 공허한 풍경이다. 그래서 화제도 빠르게 불붙고 금세 꺼져 버린다. 이 환경을 위기로 보는 시각이 크지만 또 다른 변화를 품고 있다. 극장의 필연적 쇠퇴 속에서도 관객은 더 신중하게 영화를 고르고 더 깊게 작품을 만난다. 유행 따라 소비하던 방식은 힘을 잃고 영화를 하나의 세계로 대하는 시네필의 태도가 새로 부상하고 있다. 2025년은 독립예술영화가 작품성과 관객 동원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만든 해처럼 보인다. 계절마다 시대정신과 실험정신을 품은 영화들이 극장을 지켜냈다. 올해 큰 울림을 준 작품들은 ‘아침바다 갈매기는’(박이웅), ‘여름이 지나가면’(장병기), ‘3670’(박준호), ‘3학년 2학기’(이란희), ‘세계의 주인’(윤가은), ‘사람과 고기’(양종현) 등이다. 이 영화들은 사회적 소수자와 노동계급을 중심에 놓고 현실의 문제를 진지한 리얼리즘으로 응시한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젊은 어부를 위해 침묵을 택하는 괴팍한 노인을 따라간다. 양희경·윤주상 등 중견 배우들의 앙상블, 이주 외국인 여성과 청년 노동자의 삶이 교차하며 바닷가 마을의 비극과 이웃의 연대가 잔향을 남긴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소년들이 겪은 한여름 해프닝을 통해 ‘어른의 규칙 밖’에서 벌어지는 비정함을 보여준다. 10대 소년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3670’은 탈북한 게이 청년이 정체성을 찾아 게인 친구들과 만나다가 고립및 상처와 맞닥뜨리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어디에나 살고 있을 이웃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3학년 2학기’는 특성화고 실습생의 노동 현실을 조용히 파고든다. 대졸 중심의 고용 구조에 가려진 청소년 노동 문제를 진지하게 드러낸다. 올해의 영화로 불릴 만한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다움의 허구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큰 상처를 겪은 여고생이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를 스스로 증명해 내는 기특한 영화다. ‘사람과 고기’는 박근형, 장용, 예수정 등 노년 배우들의 힘으로 빛을 발한다. 평생 열심히 살았으나 고기 한 점 맘 편히 먹지 못하는 노년이 된 이들의 치기 어린 행동은 웃음과 슬픔이 묘하게 섞인 해방감을 안긴다. 이 여섯 편의 영화는 스펙터클보다 인물의 심리와 관계를 좇으며 도파민 소비에 길든 감각을 향해 거꾸로 나아간다. 여백을 남기고 인위적 연출을 줄였으며 절제된 대사와 현장 사운드, 침묵의 리듬을 내세운다. 로컬의 감각도 핵심이다. 지역 소도시, 공장, 학교, 바다, 골목 같은 장소가 익숙하면서도 갇힌 공간처럼 그려지고 그 안에 삶의 무게가 켜켜이 자리 잡는다. 교훈보다 체험과 공감을 중시하는 내러티브다. 천만 관객 영화는 신화가 됐고 중심이 흔들리자 작은 영화들이 균열을 만들고 있다. 한국 영화는 플랫폼 시대에 더 작고, 더 느리고, 더 일상적인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산업은 위축됐지만 감각은 깊어졌고 영화의 폭은 오히려 넓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쇠퇴가 아니라 조용한 반격이다.

[삶, 오디세이] 죽음을 마주하며 배우는 삶

가톨릭교회에는 ‘성월(聖月)’이라는 개념이 있다. 특정한 달에 특별한 지향을 두고 신앙 안에서 기념하는데 11월은 ‘위령성월’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다. 매년 위령성월이 다가올 때마다 필자는 자연스레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을 기억하는 이달은 역설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문하게 된다. 호주 간호사 브로니 웨어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여러 해 동안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돌보며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공통으로 하는 후회를 기록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들에는 ‘돈을 더 벌었어야 했는데’, ‘좋은 집에서 살고 고급 차를 탔어야 했는데’, ‘대통령이 되고 사장이 돼야 했었는데’같이 돈, 물질, 지위에 관한 말이 아니었다. 그가 정리한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다섯 가지 후회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기대했던 삶이 아닌 진정한 나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친구들과 계속 연락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더 행복해지도록 내버려뒀더라면 좋았을 텐데’ 였다. 그는 이 후회들을 단순히 세상에 알리려고 쓰지 않았다. 그는 많은 이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행복이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 글을 썼다. 안락함을 주는 삶의 익숙한 방식과 습관에 갇혀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진정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선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삶은 선택이며 그 선택이 우리의 삶을 이루기에 의식적으로, 현명하고 솔직하게, 진정 자신이 바라는 행복을 잘 선택하라고 힘줘 말한다. 가수 고(故) 신해철씨도 생전에 한 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히 꿈을 이루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꿈이 곧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신은 네가 무슨 꿈을 이루는지보다 네가 행복한지 아닌지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니 꿈을 이룬다는 성공의 결과보다는 자신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꿈과 행복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많은 이들이 꿈과 목표를 향해 달리느라 자신이 진정 바라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상에서 오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행복마저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통으로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며 매일의 선택 속에 있다고 말한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위령성월,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기 바란다. ‘삶의 마지막 순간, 미소 지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 오디세이] 감사의 계절 11월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남겨 놓기 전 아직은 여유를 부릴 수 있고 마지막 한 달을 준비하는 달이 11월이다. 유난히 길고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가 지나가고 비가 잦았던 가을도 어느새 끝자락에 서 있다. 집 앞의 나무는 여름의 푸른 옷을 벗고 붉은빛으로 물들었다가 이제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울을 재촉하는 세찬 바람에 길거리에 나뒹구는 나뭇잎이 겉으로는 쓸쓸해 보이지만 하늘을 향해 치솟았던 푸른 잎에 담았던 생명을 땅속 깊이 나무의 뿌리로 내려보내 추운 겨울에도 나무의 생명을 지키려는 고귀한 결단이 낙엽이다. 11월은 그렇게 ‘비움’ 속에서 새로운 ‘채움’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목회자인 필자에게 11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교회는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며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고백한다. 농부가 땅에 씨앗을 심고 열매를 거두기까지의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리는가, 그리고 가을 추수의 마당에서 돌아보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고백하듯 우리의 일상과 가정, 직장 속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축복을 기억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날이 추수감사절이다. 1621년 미국 플리머스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청교도들은 낯선 땅에서 첫 수확을 한 후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들을 도운 원주민들과 함께 축제를 열었다. 그 감사는 풍요의 열매만이 아니라 이웃의 도움과 함께 이겨낸 절망 속에서 드린 생명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감사는 형편이 좋아서 하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선택이자 태도다. 우리의 삶이 농경사회가 아니더라도 삶에는 여전히 ‘수확’이 있다. 직장에서의 성과, 가정의 평안, 자녀의 성장, 그리고 일상의 숨결까지 모두 우리의 노력 이상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단지 한 해의 마무리가 아니라 삶의 모든 자리에서 ‘은혜’임을 고백하는 기회다.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 그래서 11월의 감사는 더욱 소중하다. 감사는 마음의 온도를 높이고 관계의 거리를 좁힌다. 경험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감사는 행복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다.” 감사는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지름길이며 행복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감사할 때 불평은 사라지고 감사할 때 마음은 따뜻해진다. 11월, 감사로 살아내는 시간 단풍이 지고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듯 우리도 감사로 마음을 다잡는 11월을 살았으면 좋겠다. 감사는 잎을 버림으로 뿌리를 지키는 힘이며 잃어버린 관계를 되살리는 생명의 통로다. 11월, 우리는 무엇을 거뒀고 또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감사의 계절에 마음을 낮추고 서로의 삶을 향해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나누기 바란다. 11월은 다시 감사를 시작하는 달이다.

[삶, 오디세이] 손에 손잡고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지금 천년고도인 경주에서 열리고 있다. 필자는 경주에서 강의를 하기에 이번 APEC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부지런히 준비하고 함께했는지를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이번 APEC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정상까지 참석하게 돼 어느 때보다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으며 한반도를 비롯해 전쟁과 긴장 상태인 국가 간의 대화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APEC 개최를 앞두고 준비 상황이나 모습에 대해 여러 의견이 분분했다. 그럼에도 이제 APEC은 시작됐기에 더 이상 서로에 대한 책임 문제나 엇갈린 의견을 멈추고 대한민국에서 지금 APEC이 열리고 있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성공적 개최라는 희망에 앞서 원만하고 무탈하게 이번 국가적 행사가 잘 진행되도록 응원하고 화합해야 한다. 그렇기에 오늘도 많은 경주시민과 각 지역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이 바쁘고 힘든 일정에도 보람되고 뿌듯한 마음으로 APEC에 참석한 각국의 정상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APEC은 우리나라에서 열린 주요 국제 행사 중 하나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게 된 첫 번째 국제 행사라면 단연 88서울올림픽을 꼽을 수 있다. 그때의 공식 주제가는 ‘손에 손잡고’였다.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아픔을 비롯해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차별을 넘어 우리나라에서 하나 되기를 염원하는 내용을 담은 주제가였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불교에서 함께한다는 의미는 ‘화합(和合)’이다. 표현 그대로 ‘화목하게 함께하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신의 입장과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이 우선 이익돼야 다른 사람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공동체를 화합승가, 화합대중이라 해서 함께 화합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하나의 수행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화합은 적극적 동참(同參)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함께 있기 위해 타협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서서 손잡아 이끌어 줘 공동의 목표와 서원을 함께 성취하고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는 모든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으로 나아가겠다는 대승 보살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88서울올림픽이 그랬듯 이번 APEC도 이제 시작됐다. 앞선 과정과 모습보다는 지금은 이 순간과 이 시간에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손에 손잡고 화합해 우리나라의 모습을, 우리나라의 친절을, 그리고 우리나라를 각국 정상들과 세계인들에게 아름답게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각자의 생각과 이익만을 내세워 이 시기를 자칫 후회로 남긴다면 그 후회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후회가 될 것이다. K-문화 콘텐츠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이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문화가 알려지면 다음은 그 나라를 찾게 된다. 어쩌면 이번 APEC은 K-문화를 넘어 우리 대한민국에 찾아오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 하는 세계인의 기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에도 2025 APEC을 위해 모든 국민들이 손에 손잡고 아름답게 화합했고 모두가 하나 돼 원만하게 회향할 수 있었다고 남겨졌으면 한다.

[삶, 오디세이] 이념의 종말 이후

세계가 극단의 정치로 몸살을 앓는 지금,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 불안한 징후를 예리하게 포착한 두 편의 영화가 있다. 극장에서 상영 중인 할리우드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그리고 지난 주말 OTT로 공개돼 화제가 된 한국 영화 ‘굿뉴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언어로 좌우의 유령을 그린다. 두 영화는 다른 땅에서 만들어졌지만 같은 싸움을 기록한다. 좌파 혁명가와 우파 국가권력, 두 세력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지만 결국 같은 본능을 드러낸다.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이다. 이들은 교훈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오락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영상 문법으로 전체주의적 국가의 허위를 겨눈다. 정치나 좌우 대립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피로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 두 영화는 각각 액션과 코미디의 외피로 다가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극단의 정치 현실 속에서 이보다 더 유효한 상업 전략은 없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민자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첨예한 정치적 갈등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1960년대 흑표범당을 연상시키는 급진단체 ‘프렌치 75’는 자본과 폭력의 회로 안에서 신앙으로 변질된다. 혁명가였던 가장은 체제를 뒤집겠다는 신념 대신 삶의 방향을 잃은 채 딸을 찾아 나선다. 그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빛나던 과거를 되풀이하며 생존하는 낡은 세대의 초상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저항이 상업적 언어로 변질된 시대에 폭력은 신념의 도구가 아니라 생존 제스처가 됨을 보여준다. 굿뉴스는 1970년대 냉전 한복판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일본 좌익 무장단체 적군파가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요도호 사건’을 영화적 은유로 차용하는 영화는 사건을 관리하고 조작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풍자한다. 정부는 김포를 평양으로 꾸며 가짜 납치극을 벌인다. 작전은 성공하지만 이를 수행한 개인은 지워진다. 변성현 감독은 국가권력을 거대한 무대로, 정보기관과 군인을 그 무대의 배우로 그린다. 이 블랙코미디는 냉전의 미디어적 본질을 폭로한다. 두 영화 속 좌파 청년들은 여전히 이상을 말하지만 그 언어는 낡았고 그들의 혁명은 또 다른 권위로 변질된다. 반면 우파 중년들은 애국을 외치며 공작을 꾸민다. 두 진영 모두 자신이 진실의 편이라 믿지만 결국 서로 닮아 간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극좌 혁명가는 권력의 언어를 배우고 굿뉴스의 우파 정권은 혁명의 연출을 모방한다. 좌와 우는 거울처럼 서로를 반사하며 생존한다. 폭력 기호, 선전 기술, 희생 미학이 거대하고 매혹적인 스펙터클로 전시된다. 두 영화는 현실의 극단 정치를 장르 유니버스 안으로 끌어와 오락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놀랍도록 효과적이다. 관객은 웃고, 긴장하고, 그 속에서 좌우 대립이 결국 같은 회로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앤더슨은 비극의 언어로, 변성현은 희극의 언어로 권력의 스펙터클을 해부한다. 서로 다른 결의 영화지만 둘 다 ‘이념의 종말 이후’를 냉정하게 기록한다. 영화가 다시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됐음을 확인하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는 아직 살아 있구나.

[삶, 오디세이] 상대를 위한 선택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인기가 연일 뜨겁다. 애니메이션 뮤지컬이자 판타지 액션인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오래전부터 악마들이 세상에서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귀마’가 있었다. 이를 막고자 노래의 힘을 이용하는 ‘여성 그룹(헌트릭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노래를 통해 ‘혼문’이라는 마법의 장벽을 세워 인간 세계를 보호하고자 한다. 한편 귀마는 과거 인간이었던 ‘지누’를 중심으로 ‘남성 그룹(사자 보이즈)’을 조직해 헌트릭스의 팬들을 빼앗고 혼문의 힘을 약화시켜 자신이 더 강해지려 한다. 귀마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진행될 무렵 지누의 행동이 영화의 반전을 일으킨다. 귀마와 루미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귀마의 공격에 루미가 점점 밀리고 있는 상황, 지누가 루미를 구하기 위해 귀마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낸다. 지누는 루미 덕분에 비로소 자신이 양심을 따를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자신이 진정 자유로워졌음에 감사한다. 그 순간 지누의 영혼은 루미의 칼 속으로 옮겨지고 루미는 그 칼로 귀마와 사자 보이즈를 무찌르며 새로운 혼문이 세워진다. 많은 관객이 이 장면에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누의 선택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과거와 달리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세상이 ‘나를 위한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 케데헌은 ‘너를 위한 방식’이라는 역설적 선택을 보여준다. 바로 ‘너를 위해 나의 목숨까지 내어 주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지누의 이러한 선택은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천주교에서는 지누와 같은 선택을 가리켜 ‘대속·속량’이라 칭한다. 그리고 이미 2천년 전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대속·속량의 삶을 선택한 이가 있다. 그는 온 인류가 자신들이 지은 죄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는 생전에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했는데 실제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완성했다. 이 사랑이야말로 천주교 신앙의 본질을 이루며 교회를 움직이는 힘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자의 두 눈에 들어오는 이 세상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중심으로 가난보다는 풍요를, 비판보다는 안정을, 사람보다는 규범을, 관계보다는 제도를, 수용보다는 폐쇄를, 자비보다는 단죄를 더 선호하고 선택한다. 이는 ‘너를 위한 방식’이 아닌, 철저히 ‘나를 위한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세계 곳곳을 불안하게 만드는 지정학적 갈등과 전쟁으로, 세계 무역질서를 뒤흔드는 특정 국가의 과도한 관세 정책으로, 비국가 세력의 잇따른 공격으로 인한 테러와 안보 불안으로, 그리고 사회·정치적 양극화의 심화로 이어지며 결국 우리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에서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위협하고 있다. 영화 속 루미와 지누의 장면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가.’ 이 시대야말로 우리의 대속·속량의 선택들이 모여 ‘사랑의 새로운 혼문’이 세워져야 할 때다.

[삶, 오디세이] ‘카이로스’의 시간

자연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계절에 따라 맺는 열매가 다르다. 그래서 제철에 맺는 열매가 가장 맛있다. 봄에는 딸기가 맛있고 요즘은 문경 사과와 제부도 포도가 제맛이다. 시간을 계절로 나누기도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헬라어는 시간을 ‘크로노스’ 와 ‘카이로스’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으로 순차적, 연속적인 의미로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쉽게 우리의 일상과 관계된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 혹은 기회의 시간을 의미한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이다. 며칠 전 4년 전에 결혼한 둘째 아들이 첫딸을 얻었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한 아들에게 병원에서 전화가 와 조퇴하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간다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 엄마를 반씩 빼닮은 아기 사진을 보내왔다. 며느리는 지난 열 달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심한 입덧과 잠을 설치고 손발이 붓는 고통스럽게 보낸 열 달이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열 달 동안 음식을 가려먹고, 건강하고 지혜로운 아이의 출산을 위해 기도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태교하고 무거워지는 몸을 버티며 보낸 결과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다. 우리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은 아기의 아빠를 분만실에 들어오라고 해 탯줄을 끊게 한다고 한다. 아들에게 아기의 탯줄을 끊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한 생각이 없었단다. 갑자기 물어 서둘러 대답하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첫아이의 탯줄을 자르면서 왜 특별하지 않았겠는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줬다. “열 달 동안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통해 생명을 공급받다가 이제부턴 아빠가 너의 생명의 보호자가 돼 네가 살아갈 이 세상의 필요를 책임져 줄게. 내가 아빠야.” 그 의미가 아니었을까 했더니 아들이 ‘맞다’고 했다. 이 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한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과정은 열 달의 크로노스의 시간을 거쳐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카이로스의 시간은 매우 중요하고 위험하다. 생명이 엄마의 몸에서 분리돼 이 땅에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완성되는 이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순간은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삶의 자리가 흔들릴 때도 그 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을 수 있다. 기회는 당연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고통과 수고가 수반된다. 그 과정을 통해 생명이 탄생하고 인류가 보전된다. 근래 우리나라 젊은이의 사망 원인 최고가 자살이라는 통계가 발표됐다. 힘들지 않았던 시대가 어디 있었겠는가.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다만 그 힘든 삶의 무게를 받아 주고 보듬어 줄 사람이 없으면 크로노스에 혼자 머물다 카이로스에 이르지 못해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음을 명심하라. 성경의 인물 다윗은 아버지가 맡겨준 양치기에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의 양을 지키기 위해 물맷돌을 던져 사자와 곰을 물리쳤다. 또 한가로운 시간에는 수금을 연주하며 음악적 재능을 배양했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는 훗날 왕이 돼 어린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물맷돌을 던지던 그 실력은 나중에 적군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키는 능력자가 됐고 그의 음악 실력은 사울왕이 악령에 시달릴 때 찬양을 통해 악령을 물리쳐 줬다. 다윗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게으름과 원망으로 보냈다면 그는 결코 골리앗을 쓰러뜨리지 못했고 유대의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간을 성실과 인내로 미래를 준비했다가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

[삶, 오디세이] 달 밝은 가을 저녁, 추석

식을 줄 모르던 한여름의 무더위도 시간 앞에 덧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은 그 이름에서부터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전해주는 계절이다. 높디높은 하늘과 청아한 날씨는 어디로든 떠나고 싶게 만들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그저 반갑고 즐겁게 만드는 시기다. 가을의 이러한 매력은 아무래도 1년의 후반부에 접어드는 시기이기에 다소 불안해지고 걱정도 있지만 그것들을 아름다운 날씨에서 좋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며 해소할 수 있게 하기에 우리는 가을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을 대변이라도 하듯 가을에 접어들어 맨 처음 맞이하는 명절이 바로 ‘추석’이다. 민족의 대명절이라 불리며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는 모습만으로도 어느덧 가을이 왔고 우리도 추석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요즘 추석이 갖는 ‘가족’의 울림이 다소 약해지는 듯해 안타깝다. 모두들 바쁜 일상을 살고 명절에도 일할 수밖에 없는 시기를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거나 가족들과 모여 식사 한 끼 하는 것조차 어려운 모습이다. 반면 추석 연휴를 이용해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준비하며 추석 차례상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에 부탁하거나 생략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이때만이라도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간 별일은 없었는지 혹은 가족들이 도와줄 일은 없는지 등을 물으며 결코 이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가족들이 있고 그들이 나를 믿고 지탱해 주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시기가 추석이다. 여러 뉴스와 미디어에서도 홀로 사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는 인간성이 상실된 황당한 사건 사고가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이 둘 사이에 중요한 관계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람다운 삶’이다. 홀로 태어나 홀로 살다 홀로 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상이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무수한 인연들과 함께하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고 더불어 살다 그들의 곁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밖에 없다는 식의 삶을 살아가려 하기에 점차 피폐해지고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秋夕’은 가을 저녁을 의미한다. 달 밝은 가을 저녁에 가족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저녁 식사 한 끼를 하는 그런 일상적 삶. 그런 일상을 보내본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자. 다시금 찾아온 추석에 가장 소중한 인연인 가족과 함께 내가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행복한 존재인지를 느끼는 가을 저녁을 맞이해 보자.

[삶, 오디세이] 기억의 파편 모아내는 대중문화의 힘

1970년대 할리우드를 빛낸 황금 아이콘, 로버트 레드퍼드가 17일 눈을 감았다. 193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90세 노인이건만 필자는 그의 주름진 얼굴을 모른다. 그저 ‘추억’의 번듯한 순정남, ‘스팅’의 능청스러운 사기꾼으로 그를 기억한다. 올해부터 동네 책방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독서모임에 들어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이 독서모임에서는 서로 이름도, 성도, 직업도, 고향도, 출신 학교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책으로만 만나 깔끔하게 토론하고 헤어진다. 쿨한 이웃들과 함께하는 느슨한 모임이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적절한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아침에 부고를 접하고 독서모임 단톡방에 영화 ‘추억’의 한 장면을 올리자 댓글이 쏟아졌다. 레드퍼드 영화 리스트, 미남 스타 사진, 스트라이샌드의 노래 영상 등이 줄줄이 올라왔다. 누군가는 마이클 잭슨을 추억하고 또 누군가는 잭 니컬슨의 근황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름도, 고향도 모른 채 책으로만 만나는 사이지만 대중문화의 기억을 나누는 순간 성큼 가까워졌다. 어느새 독서모임 이웃들이 친근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고향, 직업, 사는 곳, 출신 학교, 결혼 여부를 물어보는 건 실례지만 각자 좋아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펼쳐보이는 건 서로를 묶는 단단한 끈이 된다. 같은 노래, 같은 영화, 같은 스타를 나눈다는 건 이데올로기, 지역, 배움의 정도와 관계 없이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그 시절 추억을 털어놓는 일이다. 이런 점 때문에 대중문화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잇는 타임머신이며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데 묶는 언어다. 정치의 협소한 편가르기를 넘어 같은 노래와 같은 스타를 기억하는 경험이야말로 연대의 시작이다. 최근 영화 ‘얼굴’(연상호)과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도 그 힘을 보여준다. ‘얼굴’은 1970년대 동대문 피복공장의 현실을 소환하고 ‘은중과 상연’은 IMF 외환위기 직후의 불안한 사회상을 서사로 엮는다. 통계나 분석보다 영화와 드라마가 불러내는 기억의 힘이 크다. 극단의 정치 진영과 유튜브 알고리즘 현상으로 우리 편과 남의 편을 나눠 사고하는 현실은 부박하다. 대중문화는 이 같은 현실을 순화시키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나아가 연민해 연대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얄팍한 정치물로 같은 편끼리 위안하는 건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빛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이젠 숨지 않아”라는 가사를 품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세대를 넘어선 희생으로 마무리된 ‘오징어게임’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대중문화는 시대를 증언하고, 낯선 이들을 친구로 만들며,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다. 레드퍼드의 퇴장은 끝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한 추억의 시작을 다시 확인시키는 사건이다. 한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그의 영화와 그에 대한 추억 속에서 한 시대가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확인하고서 가슴이 뭉클했다.

[삶, 오디세이] 유능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

유능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필자는 유능한 사람을 ‘맡은 일을 잘해내는 똑똑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반면 위대한 사람은 능력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의 사제는 어떠해야 할까. 두말할 것 없이 위대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 엄중한 부름 앞에 서 계신 분이 바로 김대건 신부다. 그는 한국 최초의 방인(邦人) 사제로 신자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사람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의 권위를 내세워 신자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6개월의 사목활동 동안 안타깝게 체포돼 옥중에 있으면서도 신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격려했다. 또 혹독한 문초 가운데서도 신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질문에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25년이라는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희생과 헌신으로 한국 교회의 주춧돌이자 사제들의 수호자가 됐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2025년 현재, 한국 교회에는 7천명이 넘는 사제가 탄생했다. 필자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많은 사제 중 과연 몇이나 ‘위대한 사제’일까. 다른 이들에게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유능한 사제가 되고 싶은가, 위대한 사제가 되고 싶은가.’ 사제로서 15년 남짓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남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순간이 더 많이 떠오른다. 입술로는 사랑과 희생을 말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했다. 칭찬과 인정이 사제로서 잘 살고 있다는 증거라 착각하며 살아왔던 지난날을 마주한다. 유능함이 존재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능력이라는 조건으로 공허한 자존감을 채우려 했음을 고백한다. 초라하고 가난한 필자의 빈 마음 속에 김대건 신부의 옥중 서한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진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마음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主祐)를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혼 대사(大事)를 경영하라. ...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 하노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한국교회사연구소·1996·384-386) 필자를 포함한 이 시대의 사제들은 유능함이 아니라 위대함,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 바쳐지는 희생과 헌신의 삶임을 위대한 목자의 진심 앞에서 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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