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식 시인·문학평론가
‘열자’의 탕문 편에 중국의 유명한 ‘우공이산’이라는 우화가 나온다. 우공이산은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우공은 90세 가까운 나이에 사람의 왕래를 불편하게 하는 태형산과 왕옥산을 옮기려 시도한다. 이에 감동한 옥황상제가 산을 옮겨줬다는 내용이다. 이로부터 우공이산은 사람이란 꾸준히 노력하면 산과 바다라도 옮길 수 있다는 의미가 됐다. 필자는 현대판 우공이산인 박홍 작가를 알고 있다. 선생은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누나 밑에서 자라면서 작가를 꿈꾸었다. 그 후 그는 2025년 83세의 나이에 ‘빗물 속에 영혼이 녹아 있다면’이라는 장편소설을 펴냈다.
박홍 선생이 노벨 문학상을 꿈꾸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를 읽은 후다. 파스테르나크는 본래 시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소설 문장은 시적 표현으로 묘사력이 풍부하다. 혹자는 닥터 지바고를 시소설로 보기도 한다. 파스테르나크는 소설을 모스크바 문예지에 발표하려 했지만 거부당한다. 어쩔 수 없이 타국인 이탈리아에서 출판한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다. 그는 혁명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속죄 의식으로 소설을 썼다. 이 때문에 작가동맹에서 제명되고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다. 반골 기질이 강했던 박홍 선생은 중학생 때 파스테르나크를 인생의 롤모델로 삼는다.
노벨 문학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선생은 먼저 파스테르나크처럼 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나라 시단의 빛나는 존재였던 청록파 시인들로부터 시적 감각을 익혔다. 그 결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의 시에서 자연의 본성을 깊이 깨닫고 인간 존재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는 시 공부를 통해 세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냉철한 이성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런 노력으로 선생은 2010년 시 전문지 ‘시안’으로 등단한다. 등단 5년 후인 2015년 선생은 나이 73세에 첫 시집 ‘나의 옥상 와이너리’를 출간했다. 선생의 시 세계는 청록파의 서정성과 세상을 향한 저항의식으로 가득하다. 이처럼 선생은 60년이 지나 자신의 꿈에 다가섰다.
선생의 소설가가 되기 위한 과정은 더욱더 치열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소설에 운명을 건 사람처럼 사고했고 행동했다. 그는 경희대 화학과를 3학년 때 휴학한다. 그리고 천호동에서 배추 장사를 하며 세상과 만난다. 이 모든 과정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선생은 직업도 소설 작업을 고려해 신중히 선택했다. 그렇게 고른 직업이 소설 쓰기에 최적화된 2함대의 군무원이었다. 선생은 신혼여행도 포기하고 소설을 썼다. 이때 썼던 소설이 권위 있는 문예지에 연속 최종심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 신춘문예와 문예지에 계속 투고하는데도 낙선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선생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일찍이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곳에선 대부분의 문예지가 추천제였기 때문이다.
박홍 선생이 드디어 작가의 꿈을 이뤘다. 83세에 자전적 성장 소설인 ‘빗물 속에 영혼이 녹아 있다면’을 출간했다. 선생이 시인과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과정이 놀랍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과 문학으로 삶의 전 과정을 관통한 시간이 경이롭다. 선생은 노벨 문학상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목표를 세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빛난다. 선생은 지금도 실존주의적 존재의 본질에 치열한 질문을 던지며 글을 쓴다.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기 때문에 노벨 문학상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필자는 지금 여기 ‘열자’의 탕문 편에 나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을 박홍이산(朴弘移山)이라고 바꿔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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