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원 세종사이버대 한국어학과 교수·한국어교육원장
언어는 삶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낯선 사회에 적응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언어는 무기이자 방패이며 때로는 유일한 친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어는 국내에 정착한 이주민들에게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닌 그들의 존엄을 지켜주는 방언이자 내일로 향하는 다리가 돼 왔다. 병원에서 몸 상태를 설명하고, 자녀의 담임교사와 대화를 나누며, 일터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힘. 이 모든 것이 한국어라는 언어에서 비롯되는데 그 출발점에 한국어능력시험(TOPIK·이하 토픽)이 있다.
이 시험은 한국 사회의 여러 문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해 왔다. 외국인에게는 대학 입시, 취업, 체류 자격 심사, 귀화 등에서 필수 혹은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 시험이기에 단지 점수를 매기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이어가기 위한 생존 보트인 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중요한 제도가 디지털 전환이라는 이름 아래 민간 기업에 넘겨질 위기에 놓여 있다. 정부는 이 시험의 운영을 네이버 컨소시엄에 맡기려 하며 그 대가로 민간은 10년에 걸쳐 전면 운영과 수익 창출권을 보장받는다. 3천억원이 넘는 사업비는 모두 민간 자본이 부담하는 대신 그 안에서 이윤을 회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다.
하지만 한국어교육에서 가장 대표적이고도 중요한 시험이 공공의 품을 떠날 때 그것은 언어교육 전체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됨을 의미한다. 응시료는 지금보다 두 배 가까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고 시험 준비를 위한 학습 콘텐츠는 인공지능(AI) 알고리즘에 따라 유료로 제공될 가능성이 크다. 한 사람의 삶이 달린 시험이 이제는 지불 능력에 따라 접근 가능한 공산품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기술이 교육을 대신하고 이윤이 권리를 대신하는 시대.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이 변화는 시험장 너머의 세계, 곧 한국어교육 현장에서 이미 고단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교사들에게도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다. 오늘도 수업을 준비하며 밤 늦게까지 강의안을 다듬는 이들 중 다수는 몇 달짜리 초단기 계약서에 서명한다. 유급휴가는커녕 퇴직금조차 꿈도 꾸기 어렵다. 학생 상담, 평가, 외부 활동 같은 수업 외 활동은 사명감과 봉사정신이란 이름으로 무보수로 강요되고 현재 교육법상의 교원으로도 명시돼 있지 않아 그 어디서도 정식 교원의 신분을 인정받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헌신 위에 한국어의 세계화를 쌓아 올렸지만 그 누더기 같은 노동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무심했다.
국외를 보면 외국인을 위한 자국어 시험이 공공 기관이나 비영리 단체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TOEFL은 비영리단체가, DELF·DALF는 프랑스 정부가, JLPT는 일본 외무성이, HSK는 중국 교육부가 운영한다. 이들은 언어를 통해 문화를 전파하고 교육의 신뢰를 지키며 국제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토픽이 민간 기업의 독점 체제로 넘겨진다면 그것은 국제적 기준에서나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기본선에서 한참 벗어난 결정이다. 무엇보다 이 시험은 수많은 이주민과 외국인에게 처음으로 만나는 한국이나 다름없다. 시험장에서 느끼는 존중, 결과에 담긴 공정함, 응시 과정의 접근성은 한국 사회에 대한 첫인상으로 각인된다. 그 첫인상이 이윤에 의해 재단된다면 우리는 언어와 교육을 통해 다가가야 할 세계와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토픽이란 단순히 언어 시험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길 위에 서 있는 삶이다. 말은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고, 삶을 설명하게 하며, 꿈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언어는 고립된 사람을 세상으로 꺼내주는 손길이자 존재의 근거다. 그러니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누군가가 시험 비용 때문에 그 문턱에서 돌아선다면 그것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서로의 권리를 함께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시험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언어는 누구의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모두의 것이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교육의 본질에서 멀어진 것이다. 시험은 문을 열기 위한 것이지 닫기 위한 것이 아니며 언어는 서로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결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한국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한국 사회에서 뿌리 내리기를 꿈꾸는 수많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보자. 그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워 가는 과정이 고통이 아닌 기회가 되려면 교육은 언제나 공공의 이름으로 존재해야 한다. 누구든, 어디서든, 조건 없이 배우고 자랄 수 있는 언어 환경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한국어 교육의 미래다. 그 길 위에 토픽이 다시 공공의 이름으로 서야 하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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