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강화고려박물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인천 강화도(江華島)의 가장 옛적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다. ‘갑비고차’는 우리말 ‘가비고지’, 곧 ‘갑곶’을 한자로 나타낸 말이다. 이 이름은 지금도 ‘갑곶리’에 남아 있다. 이 가비고지가 ‘혈구군(穴口郡)’과 ‘해구군(海口郡)’을 거쳐 고려 태조 때인 서기 940년에 ‘강화현(江華縣)’으로 바뀌었다. 지금 이름의 나이만 따져도 이처럼 1천살을 훌쩍 넘긴 강화도는 흔히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린다. 곳곳에 퍼져 있는 수많은 유적들 덕분에 생긴 별명이다. 그만큼 오랜 역사와 사연을 안고 있는데, 단군 할아버지와 고인돌을 비롯한 선사시대의 내용을 빼면 단연 고려시대의 유적들이 눈에 띈다. 이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서기 1232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도가 고려의 임시 수도(首都)였기 때문이다. 고려 고종 임금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최씨 무인(武人) 정권은 1231년 몽골군이 침입하자 이듬해 수도 개경(개성)을 버리고 강화로 도읍을 옮겼다. 그 뒤 1270년 무인 정권이 무너지고 개경이 다시 수도가 되면서 강화 임시 수도 시대는 막을 내린다. 강화를 ‘강도(江都)’라 부르기도 하는데, ‘강화도(江) 수도(都)’라는 뜻이다. 이렇게 40여년 동안 수도 역할을 했으니 강화도에는 고려의 유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왕궁이 있었던 터와 외성(外城), 4기(基)의 왕릉을 비롯한 여러 무덤, 팔만대장경을 새겨 보관했던 절터... 개성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다른 곳에서 강화도 외에 이렇게 비중 있는 고려의 유적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 달리 없을 것이다. 강화군이 이런 의미를 살리고 후대에 전하기 위한 ‘국립 강화 고려 박물관’ 건립 사업에 나섰다. 중앙정부의 박물관·미술관 진흥 계획에 이 사업을 반영해 국가 차원에서 추진할 것을 요구하며 주민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인천시박물관협의회와 인천지역 10개 구·군의 단체장들도 이 같은 뜻의 공동 건의문을 냈다. 우리는 흔히 반만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곤 한다. 하지만 박물관이나 기념관·연구원처럼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여러 주제별로 집중해 연구하고, 보여주고, 교육하는 기반시설은 무척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그런 면에서 아마 남한 땅에서는 고려와 가장 관계가 깊은 곳에, 고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에, 고려의 역사를 각별히 조명하는 국립박물관이 생긴다면 분명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물론 무인 정권이 강화로 도읍을 옮긴 것에는 많은 비판이 있다. 겉으로는 몽골과의 타협 없는 투쟁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편안함만을 위해 백성들을 육지에 내팽개치고 섬으로 달아난 사건이라는 역사가들의 평가가 적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강화도로 올 때뿐 아니라 도망쳐 와서도 새로 궁궐을 짓고 온갖 사치를 부리느라 백성들을 끝없이 괴롭힌 사실이 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고려의 역사를 보여주되 권력자들의 이런 못된 행태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시각의 균형을 이루는 ‘국립 강화고려박물관’이 꼭 생기기를 바란다.

[인천시론] 시를 잊은 그대에게 권하는 시 낭송

지나간 시절 ‘라디오키즈’가 있었다. 라디오를 끼고 ‘밤을 잊은 그대에게’ 를 들으며 울고 웃었다. 잠 못 드는 한밤중, 하얗게 지새우는 밤을 채우는 건 노래였다. 흥얼대며 따라 부를 노래가 없다면 제 아무리 그리운 이가 새벽길을 건너온다 해도 어둡고 길기만 한 게 밤이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밤을 선생으로 삼았지만 범인들이 날로 새우는 밤은 허적하다. 밤을 선생으로 떠받드는 데는 광막한 시공과 침묵만으로도 족하다. 밤을 벗 삼아 마음을 달래려는 이들에겐 길라잡이가 필요하다. 별빛조차 없는 밤길에선 휘파람과 콧노래가 길을 인도한다. 외로이 밤을 건너야 하는 청춘들 곁에 달랑 라디오만 있던 시절, 밤을 잊은 사연들이 모여 별빛이 되고 달빛이 돼 줬다. 낭만이 밤과 라디오를 타고 흐르던 시절이었다. 라디오키즈로 자라서였을까. 정재찬 교수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로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최고” 시 선생이 됐다. 숫자와 수학기호만 알아도 생은 충분하다 여겼던 공대생들이 시 강좌에 열광했다. 시를 소개하고 시인을 알린 강좌를 에세이로 엮은 책은 공전의 베스트셀러로 남았다. 시를 잊어도 무방한 게 삶이지만 밤이 사람에게 깊이를 안기듯 시야말로 사람을 흔들어 존재를 일깨운다. 저자가 소개한 여러 시편들 중, 소월이 남긴 ‘부모’를 따라 읊는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의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옛이야기 들어라//나는 어쩌면 생겨나와/이 이야기 듣는가?/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소월이 어머니를 통해 듣는 애닯은 사연이 몸에 와 박힌다. 이미 부모가 돼버린 이들은 섧게 따라 부르며 소주잔 기울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를 잊은 삶일지라도 노랫가락에 얹힌 시구는 밤과 함께 찾아든다.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 부르던 시절, 뒷골목마다 노랫말이 흥건했다. 가락에 시를 얹은 노래로 그날 시름을 달랬다. 시를 잊은 게 아니라 시만으로 족하지 않아서 고래고래 시를 읊었다. 노래방이거나 단란주점이거나 노랫말로 신분을 바꾼 시들이 밤을 채웠다. 그리운 이들을 그리워할수록 시가 고팠다. 시를 낭송하는 이들이 ‘생겨나왔고’ 자연스레 시 낭송 모임으로 뭉쳤다. 낭송자들을 만나면서 시는 제대로 시가 됐다. 인천에는 ‘섬섬옥수커뮤니티’가 시 낭송회를 열어 박제된 글자들을 소리로 살려냈다. 눈으로 훑어 내려가는 감상에선 맛볼 수 없던 가락이 입말로 되살아났다. 지난주, 섬섬옥수커뮤니티가 아홉 번째 시낭송회를 가졌다. 소월 시집 ‘진달래꽃’ 출간 100주년을 기념해 스무 명 낭송자가 소월 시를 읽었다. 노래가 된 소월의 시들 몇 편은 가객 목소리에 실려 객석으로 퍼져나갔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는 다 함께, ‘개여울’은 가수가 홀로 불렀다. 신포동 소극장 ‘떼아뜨르 다락’에 밤이 깊어 가면서 시를 잊었던 이들은 귀와 입으로 소월을 다시 만났다. 고재봉 교수는 소월 시를 낭송하는 의미를 “저마다 느낌과 해석이 다르므로 상대방 의견을 귀담아 듣고 존중”하면서 “노래와 같이 유려한 리듬감을 함께 읊으며 즐기는 사이에 어느덧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생긴다”고 해제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노래가 시절을 견디는 힘이 됐듯 ‘우리’와 시를 잊은 그대에게 시 낭송을 권한다. 소월이 100년 전 남긴 시집은 여전히 낭송자를 기다리고 있다. 시를 비롯해 문화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스스로 해 보는 일이라면 시낭송은 참 만만한 문화 향유법이다.

[인천시론] 젊은 도시 꿈꾸는 인천, 청년 놀거리 부족

인천은 오랜 도시의 역사와 공항, 해양, 산업 등 다양한 산업자원을 지닌 기회의 도시다. 그러나 서울 외곽으로 저평가된 과거의 인식이 있었기에 이를 탈피하기 위한 여러 분야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에게 인천은 여전히 ‘지나가는 도시’로 인식된다. 특히 대학생들의 일상은 강의실과 카페, 집과 편의점 사이에 갇혀 있는 듯하다. 교육 인프라는 풍부하지만 정작 ‘놀거리’와 ‘문화적 실험’이 부족한 도시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놀거리란 단순한 소비나 오락을 넘어 청년이 스스로 만들어 가고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자율성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포함한다. 도시의 매력은 곧 청년의 자율적 상상력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인천의 대학생들이 중심이 돼 지역 속에서 놀거리와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도시는 청년을 실험자이자 창조자로 인정할 때 비로소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행정은 공간과 재정의 ‘플랫폼’을 제공하고 청년은 콘텐츠를 실험하며 도시에 생동감있는 문화를 불어넣는다. 일방적인 공급이 아니라 참여와 창조의 여지를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인천은 지금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 상상력은 대학생들이 참여를 통해 함께 기획하고 놀 수 있는 즐거운 도시를 만들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놀 줄 아는 청년이 떠나지 않는 도시야말로 진짜 미래를 가진 도시다. 인천대와 연세대, 카톨릭대, 국제캠퍼스 등 11개 대학이 입지한 송도의 경우에도 정작 그곳에 머무는 청년들은 “이 도시에 추억이 없다”고 말한다. 반듯한 도로, 여유로운 녹지, 최첨단 국제학교와 캠퍼스들이 자리한 이곳은 대한민국의 미래도시 모델로 소개되는 계획도시이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고,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고, 자기만의 문화와 감성을 축적할 수 있는 공간은 드물기에 청년의 감성을 담아낼 그들만의 이야기는 비어 있는 셈이다. 왜 송도는 청년의 도시가 되지 못했을까. 문제는 도시 설계가 기능과 이미지 중심으로만 짜여 있다는 데 있다. 주거, 교육, 비즈니스라는 목적이 도시를 채우고 있지만 그 사이에 일상과 유희, 감정이 흐를 공간이 없다. 청년들이 같이 웃고, 무대에 서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그런 장면이 송도에서는 연출되지 않는다. 청년에게 도시는 ‘기억의 무대’가 돼야 한다. 장소성이 있는 골목, 모르는 친구와도 우연히 함께할 수 있는 골목안 가게들, 공감하며 아우성칠 수 있는 열린 광장, 아무 때고 몰려와 창작 활동을 벌일 수 있는 지하작업실 같은 것들... 우연한 청년의 감정과 창작이 스며들며 도시의 장면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자기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무대가 절실하다. 기억이 있는 도시는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싶은 도시가 된다. 도시는 단순히 기능과 효율로 완성되지 않는다. 청년에게 도시란 단순히 거주하거나 공부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추억과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무대여야 한다.

[인천시론] 인천 바다와 백사장

인천은 태생이 ‘물의 도시’다. 인주(仁州)라 불리던 이름이 조선 태종 때 인천(仁川)으로 바뀐 것도 물(川), 곧 바다가 있는 고을이어서였다. 하지만 지금 인천시내에서 바다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해안 대부분이 철책 등으로 막혀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막아 놓은 가장 큰 이유는 안보(安保)와 보안(保安)이다. 북한과 가까운 지리적 상황, 항구와 같은 국가 중요시설의 안전 때문이니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같은 최첨단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요즘 시대에 이런 구태의연한 방법밖에는 바다를 지킬 다른 수단이 과연 없을까. 다행히 인천시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해안 철책들이 조금씩 걷히고는 있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강화·옹진군의 북한 접경지를 뺀 인천지역의 바다 경계 철책 67㎞ 중 21㎞가 그동안 철거됐다. 또 올해 4.2㎞가 철거되며 나머지의 철거 문제도 시와 군(軍)이 계속 논의 중이다. 이 같은 철책 철거에 맞춰 제안하고 싶은 것이 백사장이다. 연수구와 연수문화재단은 지난해 여름 송도달빛공원에서 연 ‘해변축제’ 때 행사장 안에 인공 백사장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제공했다. 넓지는 않았지만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모래놀이를 하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한 주일가량의 축제가 끝나니 많은 돈을 들여 애써 만든 백사장을 모두 철거해야만 해 아쉽고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자못 들었다. 이런 면에서 철책이 없는 바닷가 중 가능한 곳에 시가 백사장을 하나씩 만들어 가면 어떨까 한다. 비록 거기서 바다에 들어가 물놀이까지는 못 한다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멋지고 운치 있는 인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해서다. 전문 지식이 없어 무척 조심스럽지만 인천 앞바다의 큰 조수간만(潮水干滿) 차이 때문에 썰물 때 모래가 바다로 쓸려나가는 문제만 막을 수 있다면 이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이라 본다. 인천시가 요즘 추진 중인 중구 을왕동 왕산지구 연안 정비사업에서 그 방안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 사업은 왕산마리나 시설을 만들면서 생긴 조류 변화 때문에 왕산해수욕장의 백사장이 자꾸 깎여 나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시는 이곳 백사장에 4만6천㎥의 모래를 채워 넣은 뒤 모래가 쓸려나가지 않도록 바다 쪽에 둑을 쌓을 계획이라고 한다. 인천시내의 다른 해변에서도 이런 방법을 쓰면 되지 않을까. 물론 이렇게 백사장을 만드는 데는 많은 예산이 들어간다. 또 만들면 끝이 아니라 계속 깨끗하고 안전하게 관리를 해야 하니 시로서는 부담이 꽤 클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 인천에서는 인천이 부산을 넘어 대한민국 제2의 도시가 됐다는 자랑이 많이 들린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인정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면이 너무나 많다. 해운대로 상징되는 바다와 백사장만 떠올려도 인천이 환경이든, 관광이든, 도시의 품격이든 부산을 넘어서려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해안 백사장 조성은 그 고개를 넘어가기 위해 쓸 여러 방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시론] 배다리 지하차도

‘배다리’라는 우리말이 있다. 이는 ‘작은 배 여러 척을 한 줄로 띄우고 그 위에 널판을 건너질러 깐 다리’나 ‘교각(橋脚) 대신 널조각을 놓아 만든 다리’를 말한다. 정식으로 다리를 만들 시간이 없을 때 급하게 작은 배들을 이어 다리 구실을 하게 하거나, 물길이 넓지 않아 널조각으로 다리를 대신했을 때 이르는 단어다. 따라서 배다리는 땅 이름으로 쓰였다 해도 본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고, 강원 강릉시나 충남 공주시 등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이 이름을 가진 곳들이 있다. 인천에도 동구 금곡동 경인전철 다리 아래 일대에 배다리라는 동네가 있다. 이곳에는 옛날에 인근 괭이부리 쪽에서 갯골을 따라 바닷물이 흘러들어왔기에 배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모양으로, 어디에, 언제까지 놓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진이나 영상 자료가 아직 발견된 바 없고, 이에 대한 옛 분들의 기록이나 증언도 엇갈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전 이곳에 배다리가 있었으니 동네 이름이 배다리가 됐을 텐데, 이젠 머리가 허옇게 센 인천 토박이들에게 이곳 배다리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라 해야 옳다. 그들의 젊은 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숱한 추억들이 그 이름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일대에는 1897년 있었던 경인철도 기공식(起工式) 자리, 개교한 지 100년이 훌쩍 넘은 영화학교와 창영초등학교 등 많은 역사 유적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그 무엇보다 헌책방 골목으로 유명했다. 1970~80년대에는 50여곳의 헌책방이 모여 있어 이곳을 자주 찾아온 학생과 시민들, 특히 청춘(靑春)들에게 많은 사연을 안겨줬다. 지금은 많이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1973년 문을 연 ‘아벨서점’을 비롯해 10여곳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2022년 착공한 ‘숭인 지하차도’가 내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이 지하차도는 중구 신흥동~동구 송현동을 잇는 산업도로의 일부다. 주민들은 이 지하차도가 배다리의 역사·문화적 분위기를 해칠 것을 걱정해 강하게 반대했었다. 이 때문에 인천시가 차도 계획을 세우고도 20년 넘게 진행을 못 했다. 그러다가 ‘지하차도 위에 문화센터와 공원 건설’ 등 여러 조건에 어렵게 합의가 이뤄지면서 공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최근 동구 의회의 유옥분 의장이 임시회 의정 발언을 통해 ‘숭인 지하차도’라는 이름을 ‘배다리 지하차도’로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극히 당연하고 타당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시민들은 물론 인천시나 관할 동구도 그 뜻을 잘 모른다는 ‘숭인’이라는 이름이 붙을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땅 이름은 그 지역의 역사와 특성을 담은 문화적 표현이다. 또 세대를 넘어 전해지면서 주민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담아내는 소중한 그릇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이름을 ‘듣도 보도 못한’ 것으로 마구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배다리에 아련한 추억을 여럿 간직한 인천 토박이로서 유 의장의 제안대로 지하차도의 이름이 정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인천시론] 고귀한 영성에 빚진 도시

‘어른 김장하’에서 우리는 고귀한 영혼을 본다.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거룩함을 확장하고 고양해 기어이 다다르고야 만 신성과 조우한다. 대개 사람들은 지상에 발 디디고 진토에 몸 더럽히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퍼뜩 정화수를 들이부은 듯 영혼이 깨어날 때가 있다. 종교가 담당해 온 순기능이 있다면 그것이다. 세례 의식이 잘 보여주듯 인간은 타락에도 능한 존재라서 씻김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본다. “내 영혼, 내 영혼”을 부르며 찾는 순간, 인간 안에 숨어있던 영성이 화들짝 반응한다. 성인들은 영성의 부름 앞에 진솔하고 범인들은 자주 외면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 겨우 회개한다. 그렇게나마 인간은 신성을 닮으려 몸부림치는 존재라서 갸륵하다. 김상봉 교수는 ‘영성 없는 진보’라는 진단서로 오늘 우리가 마주한 위기를 예견했다. 우리는 물질로도 진보했고 민주 정치 체제로도 진보해 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계엄과 탄핵을 거치며 혐오와 배제로 점철된 일상이 내전인 사회와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영성 없이 진보해 온 업보라고 여기며 70년대 개신교와 가톨릭을 되돌아본 김 교수의 글을 다시 펼친다. 그는 전태일이 믿었던 기독교가 타자를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 있었던 영성의 토대라고 봤다. “종교는 나와 타인, 나와 세계가 하나의 절대자 속에서 하나라는 믿음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기희생적 응답을 가능하게” 만든다. 기독교를 통해 영성과 만나 거룩한 영혼 전태일이 탄생했다. 일찍이 신학자 서남동 교수는 전태일을 ‘우리 시대의 예수’라고 칭했다. 예수가 부활을 예고하며 십자가에 달리던 고난 성주간에 자유공원 초입 성공회 내동교회에서 ‘닥터 랜디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랜디스(남득시) 박사는 1865년 미국에서 태어난 의사이자 선교사다. 개항기 인천에 성 루가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돌보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둬 가르쳤다. 한국문화를 사랑하며 연구해 후학들은 그를 ‘한국학’의 선구자로도 여긴다. 이날 추모사는 인천 개신교 역사에 남은 슈바이처, 예수 말씀대로 실천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그를 불러냈다. 불과 32세 젊은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오전 7시에 진료를 시작해 오후 8시30분에 일과를 마감했다는 기록을 보면 예수만큼 치열했을 그의 생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낯선 나라 헐벗은 고장 제물포를 위해 생을 바친 그의 영혼에 인천이 진 빚이 크다. 답동성당 옆 천주교 인천교구 역사관에서는 ‘바다가 불러 세운 교회’라는 특별기획전이 진행 중이다. 메리놀외방전교회가 한국 사회와 인천을 위해 헌신해 온 선교 기록이자 사회 구원 역정이 펼쳐져 있다. ‘메리놀’은 미국 선교 본부 건물이 자리한 마리아의 언덕(Mary’s Knoll)에서 유래했고 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창립했다. 전쟁 피란민 구제 사업으로 인천과 인연을 맺었고 당시엔 선교 활동이 활발했다. 이 전시는 ‘배고픈 이에게 음식을’, ‘집 잃은 자에게 안식을’, ‘앓는 이에게 돌봄을’ 베푸는 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바다 위에 세워진 교회’의 역할로 조명한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소멸은 언제나 서글픈 것이지만 무용해 질 때 비로소 임무가 끝났음을 실감하는 존재들”을 자처했다. ‘씨 뿌리는 자의 사명은 무용해 질 때 완수’된다는 그들의 믿음은 우리 인천이 영성에 빚진 도시임을 일깨운다. 이 자각이 인천에 내재한 고귀성을 되살려낼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인천시론] 글로벌 인천의 매력적 관광자원 ‘전통시장’

최근 들어 각종 도시여행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야시장 등 먹거리 가득한 전통시장이다. 21세기 도시들은 도시 간 경쟁 속에서 도시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으며 인천도 이를 위해 다양한 도시관광 전략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형마트, 온라인 쇼핑 시대에도 여전히 전통시장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상업공간을 넘어서 지역공동체의 중심이자 역사와 문화의 보존 공간이며 도시관광의 중요 자원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일본 와카야마현의 인공섬 ‘마리나시티’에 위치한 수산시장인 구루시오시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와카야마 시정부는 쇠락해 가는 지역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1990년대 초에 약 49만m² 규모의 인공섬을 조성하기로 했는데, 그 중심부에 일본의 전통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전통시장을 배치해 지역경제의 구심점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핵심적 앵커시설로 계획된 구루시오시장은 풍부한 해산물과 특산품으로 유명한 와카야마현의 지역 자원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참치 해체쇼 등 재미있는 이벤트와 함께 신선한 해산물을 현장에서 바로 맛볼 수 있는 바비큐 코너 등이 마련돼 일본 국내뿐 아니라 한국 등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유명한 관광지로 이미 알려져 있었다. 도시관광에서 멋지고 세련된 신도시의 현대적인 건축물에서보다 지역의 맛스러운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의 장소가 기억에 강하게 인식된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그래서 도시 여행객은 빠지지 않고 전통시장을 찾게 되는데 정작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그 정체성을 잃거나 도시개발 사업에 밀려 흔적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전통시장은 소상공인의 생계와 관련되는 지역경제 활성화 측면에서도 그 의미가 있겠지만 이웃 간의 교류와 공동체 문화 형성 등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 보존의 장소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시설 노후화나 접근성 등 현실적 한계를 지녔지만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 공간마케팅 등 좀 더 계획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구도심에 위치한 전통시장은 재개발사업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고 개발사업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사라지거나 소규모 슈퍼처럼 한편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또는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전통시장의 유휴공간을 활용해 청년의 창업을 지원하고 전통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목표로 청년몰 사업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가 일부 지역에서는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저조한 매출, 상인들과의 갈등 등 여러 이유로 현재는 이렇게 조성된 청년몰은 빈 상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역의 특성을 살리면서 교통이나 편의시설 등 물리적 환경을 조성하고 다양한 즐길거리와 문화적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도시의 가치를 높이고 매력적인 도시로서의 장소 만들기 핵심전략으로 전통시장은 소중하고 귀하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구루시오시장처럼 도시를 계획함에 중심부에 전통시장을 배치하고, 특색을 살리는 공간디자인과 지역사회와 연계된 프로그램 등 아낌 없는 투자와 지원을 통해 도시의 상징으로서 자리매김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항과 항만을 지닌 글로벌 도시로의 전통시장은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소중한 지역자원이며 정책적, 시민적인 측면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공간으로의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인천시론] 인천 짠물과 소금박물관

인천은 흔히 ‘짠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짠 바닷물을 맛볼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유독 인천만 ‘짠물’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사실 바다가 아니라 염전 때문이다. 1907년, 바닷물을 햇볕에 말려 소금을 만드는 천일제염(天日製鹽) 방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곳이 바로 인천의 주안염전이다. 조선 중기 문헌에서부터 보이는 ‘주안’은 원래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과 부평구 십정동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 천일제염 방식이 십정동 일대 염전에서 처음 성공하자 동네 이름을 따서 이곳을 ‘주안염전(정식 명칭은 ‘주안 천일제염 시험장’)’이라 이름 짓고 사업을 본격화했다. 이어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삼은 일제(日帝)는 질 좋은 소금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 주안염전을 확장하는 한편 남동과 소래, 군자 등지에도 계속 염전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이후 인천의 소금 생산량은 전국 최고 수준이 됐다. 1940년대 정부에서 운영한 전국의 천일염전 면적 통계를 보면 인천의 염전 면적이 1천664정보(1정보는 3천평)로 나온다. 이는 당시 정부가 운영한 전국 천일염전 전체 면적 5천925정보의 28.1%로 다른 행정구역에 비해 가장 넓은 면적이었다. 이뿐 아니라 이들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을 정제(精製)하는 공장들까지 계속 늘어나 인천은 온통 ‘짠 동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천 짠물’은 이런 이유로 탄생한 별명이다. 그러나 그 뒤 인천의 도시 규모가 점점 커지고, 여기에 정부의 수출 주도 정책에 따른 산업단지 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주안염전은 1968년 무렵부터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 대신 그곳에는 수출공단 5·6 단지가 만들어졌다. 1980년대에는 남동·군자염전 등지에도 줄줄이 공단이 들어섰다. 그래서 이제 인천은 염전과는 거의 관계없는 도시가 됐지만 한때를 풍미했던 소금밭의 기억은 ‘짠물’이라는 별명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이런 역사를 따져보면 인천에는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시설이 진작에 생겼어야 옳았다. 하지만 십정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이 있었음을 기념하는 ‘천일제염 시험장 표지석’이 1989년 세워진 것 이외에는 지금까지 별다른 후속 사업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얼마 전부터 부평구의 구의회와 주민들을 중심으로 소금박물관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제염 발상지인 십정동에 박물관을 만들어 인천과 소금에 얽힌 여러 역사적 사실과 가치를 널리 알리자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2천여년 전 주몽의 아들 비류가 굳이 인천(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던 것도 소금 무역을 통한 해상권(海上權) 장악을 꾀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짠물 인천’에 당연히 있었어야 할 박물관의 건립이 이제야 논의되다니 반가움과 함께 시민의 한 사람으로 그동안의 무심함을 반성하게 된다. 부평구뿐 아니라 인천시 차원에서 적극적인 동참과 지원이 이뤄져 멋진 소금박물관이 태어나길 기대한다.

[인천시론] 시집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인천은 ‘한국문학의 산실’이다. 인천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서는 ‘신’ 소설은 불가능했다. 봉건과 근대가 격돌했고 외세와 자주가 각축하는 사이에 낀 장소로 인천만 한 곳이 없었다. 신소설 곁에는 신체시가 자리했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기로 치자면 문인들이야말로 첫손이다. 소설가와 시인들이 인천을 배경 삼아 앞다퉈 글로 시대를 녹여 냈다. 인천은 싫든 좋든 신문물이 창조해 낸 당대 ‘핫플’이었다. 객지인들은 인천역에 내려 근대 문물을 훑어보고 바다에 반했다. 김소월도 제물포 바다 근처에 묵었다. 그가 1922년 ‘개벽’에 발표한 시구가 전하는 정경이다. ‘밤’의 첫 제목이 ‘제물포에서 밤’이었듯 소월은 인천이라는 장소와 자신의 정조를 얽어 시로 남겼다. “이곳은 인천에 제물포, 이름난 곳”이지만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바닷 바람이 춥기만 한” 인천이라서 그를 더 외롭게 몰아댄 듯하다. “홀로 잠들기가 정말 외로와요/맘에는 사무치도록 그리워와요/이리도 무던히/아주 얼굴조차 잊힐 듯해요.” 20대 초반이었을 그는 오늘날 젊은 독자들 정서를 끌어당길 정도로 ‘모던’하다. 대중음악가 장범준이 소월의 이 노랫말에 곡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제물포가 들어간 구절만 쏙 빼놓은 게 몹시 아쉽지만 애절한 곡조와 특유의 음색이 사무치게 임을 그리는 청년 소월을 빼박았다 해도 손색없다. ‘인천문학전람’은 <밤>과 ‘한국시의 최고봉’ ‘진달래꽃’이 몇 달 간격으로 이어져 있다고 분석한다. 이별과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 감정을 우리말 어감을 잘 살려 탁월하게 표현한 두 편의 시 발표 시차는 불과 다섯 달이다. 소월 개인사에 비춰 이야기를 구성한다면 진달래꽃에서 이별하는 임과 제물포 바닷가에서 그리는 임은 동일인이라고 추론해 봄직하다. 멀리 인천으로 떠나와 밤 바닷가에서 가다듬어 부르던 노래가 진달래꽃이라는 절창을 꽃피운 토양이었다는 서사도 그려 볼 수 있겠다. 시중에는 ‘초혼’이 소월이 여자 친구 장례식장을 다녀와 부른 진혼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독자들은 소월이 쏟아낸 정한을 받아안아 자기만의 서사를 창조하고 있다. 지난해 동구 배다리 아벨서점이 소월시집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건축가이자 수서가로 이름높은 이일훈 선생님이 평생 모아 둔 소월 시집 165권을 한자리에 펼쳐 놓았다. 작은 공간이지만 한쪽 벽면이 진달래꽃 분홍빛으로 가득 찼다. 분홍빛 벽 아래 시대를 건너뛰며 독자들을 만나온 책 표지만으로도 소월은 인천의 요즘을 살고 있는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아벨서점이 운영하는 위층 시다락방은 2007년 11월 랑승만 시인 시낭송회를 필두로 지금껏 시낭송회를 진행해 온 곳이기도 하다. 아벨서점 곽현숙 대표는 소월 시집을 전시하면서 소월시 낭송회도 개최했다. 그가 시를 사랑하고 시인들을 챙기게 된 연원을 따져 보면 소월이 등장한다. 소월시집 전시회가 열리기 전에도 그는 소월이 남긴 유일한 시론인 ‘시혼’을 작은 책자로 만들어 지인들과 나눴다. 인천과 소월이 그렇게 만났다. 봄이 왔고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올해는 진달래꽃 피는 산에만 오르지 말고 시집 ‘진달래꽃’이 피어난 지 어언 100년이라는 데 눈길을 주면 좋겠다. 건축물과 거리에 남은 근대 인천뿐만 아니라 인천이 지닌 문학 자양분도 캐고 챙겨야 인천 것으로 남는다.

[인천시론] 루원시티, 양보·타협으로 큰 그림 그려야

수도권 집값 전망에 대한 전문가들의 하락을 예견하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강남 아파트는 급등해 해제됐던 토지거래허가제를 부활한다는 기사를 봤다. 동시에 인천은 송도에서조차 마이너스 피가 등장했다는 소식이 서로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왜 강남의 집값은 오르기만 하는데 인천은 부동산의 가치를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출생률 1위라는 인천은 여러 면에서 이와는 대조적인 상황이다. 미분양 사태를 걱정해 공급자들은 분양을 미루는가 하면 이미 공급된 아파트에서는 분양가에서 마이너스 피로 거래가 조성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구 가정동 일원의 루원시티는 국내외 대기업을 유치해 주거, 상업, 업무시설이 혼합된 복합도시로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계획된 대규모 도시개발사업이었다. 그러나 공기업과 금융기관 등 기업 유치에 실패해 업무와 상업 기능을 중심으로 한 도시 비전은 공염불이 됐다. 양질의 일자리를 기반으로 하는 도시계획의 실패에 인천시와 LH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다투는 사이 분양 열기에 편승한 장벽 같은 아파트들로 채워졌다. 아파트의 그림자와 함께 어둡고 침침한 방음벽 그늘에 경인고속도로대로는 멈춰 서 있는 듯하다. 그런데도 아직도 토지 매각 과정에서 발생한 금융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 등에 따른 LH와 인천시와의 갈등은 좀처럼 타협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둘 다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공적 기관이기에 주인없이 길어지는 갈등으로 인한 난개발을 일반 시민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까지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와 고속도로는 서울을 목적으로 향하는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양질의 일자리를 통해 인천으로 그 방향을 돌려야 한다. 루원시티는 인천으로 향하는 나들목으로서도 중요한 입지에 있으며 공항 및 항만 등과의 접근성에도 허브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애초에 금융 등 업무와 상업 기능을 중심으로 계획된 일자리 중심의 도시개발 사업이었으며 과감한 인센티브를 부여해서라도 기업을 유치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주거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핵심이라 할 것이다. 원도심의 핑크빛 청사진으로 여겨지는 인천시의 야심찬 프로젝트 제물포르네상스도 양질의 일자리를 견인할 대표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일 것이다. 앵커로서 기능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를 파생할 수 있다면 특혜시비를 넘어설 과감한 인센티브를 주어서라도 유치하는 것이 투자이기 때문이다. 공공정책의 목적이 특정 집단의 이익과 맞물리는 경우 우리는 유치와 특혜의 논란 속에서 움츠러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센티브가 특정집단의 이익이 아닌 공익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안전망을 탄탄하게 마련한다면 지역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경관에 대한 고려가 상실된 인천대로의 루원시티의 아파트 그림자를 보며, 하루빨리 공공기관 간의 갈등을 타협하고, 도시와 공공정책에서도 과감한 투자를 통해 멈춰진 루원시티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노선을 정비하기를 기대해본다.

[인천시론] 진흥왕의 꾸짖음

고대에 우리 선조들은 줄을 튕겨 소리를 내는 현악기들을 ‘고’라고 불렀다. 거문고의 ‘고’가 바로 이 말이다. 검은 색깔의 나무로 만들어진 현악기라는 뜻이다. 가야금도 원래 이름은 ‘가얏고’였다. ‘가야+ㅅ+고’ 형태이니 가야국의 현악기라는 뜻이다. 이 가야금의 대가로 유명한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의 악사였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들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귀순했다. 진흥왕은 그의 뛰어난 음악 실력을 높이 사 후하게 대우했다. 그러자 왕의 주변에서 권세를 누리고 있던 신라의 귀족들이 우륵을 시샘하고 경계했다. 진흥왕은 만덕 대사 등 세 사람에게 우륵의 음악을 전수받게 했고, 이들은 우륵에게서 배운 곡들을 정리해 진흥왕 앞에서 연주했다. 왕이 이를 듣고 무척 좋아하자 신하들은 “멸망한 가야국의 음악이니 취할 것이 못 됩니다”라며 막고 나섰다. 물론 우륵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진흥왕은 “가야국의 왕이 음란하여 자멸(自滅)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음악과 아무 상관이 없다”며 이 곡들을 궁궐에서 쓰는 음악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이 내용을 보면 진흥왕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가야금이 살아남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왕이 문제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느냐”라는 그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사람의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문제’임을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법규 및 제도 등을 놓고 어느 것이 더 낫네 못하네 하는 말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개헌 논의 등으로 시끄러운 요즘 우리나라 역시 딱 이런 상황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에 ‘의원내각제’, ‘상·하원 양원제 국회’ 등 여러 의견이 날마다 신문과 방송을 가득 메운다.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으니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 바꾼들, 지금처럼 국민과 국가는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자기 당의 이익을 지키는 데만 열심인 정치인들이 그 운용을 맡는다면 과연 뭐가 얼마나 달라질지 의심스럽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보호한다는 비난을 받고, 걸핏하면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을 일삼아 인공지능(AI) 판사로 바꾸는 게 더 낫겠다는 조롱을 받곤 하는 우리의 사법부는 또 어떤가. 이게 과연 법관들과는 상관없이 우리나라의 사법 제도가 엉망이어서 생기는 일일까. 최근 감사원이 밝힌 선거관리위원회의 황당한 부정 채용 실태 역시 그 채용 제도가 잘못돼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법규라 해도 제대로 활용되거나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를 어지럽히는 흉기가 될 뿐이다. 또 문제가 있는 규정일지라도 그를 대신할 새로운 규정이 생기기 전까지는 일단 지켜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제 잇속에 따라 스스럼없이 실정법을 어기거나 악용하는 사례들을 끝없이 보게 된다. 이런 일이 거듭되는 한 개헌이든, 새로운 법규든 다 공염불일 뿐이다. 제도가 무슨 죄가 있는가. 1천500여년 전 진흥왕의 일갈이 계속 떠오르는 요즘이다.

[인천시론] 이처럼 사소한 말들

거칠고 격한 말들이 귀를 찢는다. 전쟁이라는 끔찍한 단어가 휘저어 놓은 일상이 난리다. 내전이니 내란이니 쉽게 내뱉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수명을 단축할 무서운 살기가 실린다. 내전이라는 말은 같은 편끼리 죽도록 싸운다는 뜻이다. 같은 편이라면 등을 보여도 안심이 되는 동료거나 이웃이다. 친근한 얼굴로 다가와 칼을 내미는 서스펜스 영화 장면이 관객을 더 전율케 하듯 바깥에서 온 적보다 안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적이 몇 배 더 무섭다. 공포감에 배신감이 더해지고 미련스럽게 당하고 말았다는 자괴감까지 끼어들면 그런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다. 전쟁은 정전협정이 가능하지만 내전에는 정전이라는 개념조차 들어서기 어렵다. 전쟁보다 추스르기 어려운 게 내전에서 입은 상흔이다. 상처를 주고받은 이들이 응어리를 풀어야 새살이 돋는 화해를 도모할 수 있다. 말부터 바꿔야 한다. 악마라는 수식어가 너무 쉽게 나오는 정치는 내전을 부르는 선전포고다. 극한 표현을 써대며 먼저 도발한 이가 누구인가를 서로 따질 때, 우리는 도발이라는 단어 주변부터 서성거려 봐야 한다. 남침, 북침, 도발은 붙어 다니는 전쟁 용어 묶음이다. 오죽하면 악마라고 불렀을까 싶은 감정을 다독이는 편에 서야 2차 도발, 3차 도발을 거치며 확전하는 내전을 예방할 수 있다. 국민저항권이라는 오염된 말에 저항하는 말도 필요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소수자 인권이 아니라 기득권자들에게 인권이라는 날개까지 달아 줄 때, 가치 전도에 저항하는 게 원뜻에 부합하는 국민저항이다. 계몽령은 또 어떤가. 계엄이 무력을 사용해 피를 부르겠다는 말이라면 계몽은 국민에게서 주권을 빼앗아 종처럼 부리겠다는 말이다. 똑똑한 주인이 무지한 종에게 한 수 가르치겠다는 속셈이 ‘계몽이라는 영’을 내리게 했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수거한다는 퇴역 군인 수첩 메모야말로 어긋난 말의 정점을 찍는다. 수거는 대상자들에게서 인격을 박탈하고 개체성을 지워 쓰레기 더미로 만든다. 쓰레기조차 분리해서 수거해야 남은 가치를 되살릴 수 있는데 인간 수거에는 그러한 고민조차 없다. 최근에는 폭탄교사라는 교육계 은어가 언론을 타고 퍼져 나간다. 폭탄은 터지라고 만든 대량 살상 무기다. 표현 하나가 평화로워야 할 학교 이미지를 처참하게 훼손해 버린다. 크고 드센 말들이 작은 소리들을 윽박지르고 있을 때 클레어 키건에게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해 듣는다. 주인공 펄롱은 존재감조차 희미한 어린 사람을 억압하는 사회로부터 구해 낸다. 그는 그저 마음에서 벼르고 벼르던 작디작은 말을 건넬 뿐이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 말 한마디가 밤을 낮으로 바꾸듯 세라의 삶을 진흙탕에서 건져 올려 구원에 이르게 한다. 우리네 일상은 거대한 음성들이 지배하는 듯 보여도 대다수 삶은 ‘이처럼 사소한 말들’이 채워 낸다. 다중을 향해 일방에서 쏟아내는 주장들은 떠다닐 뿐 사회적 의미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정작 세상을 움직이는 말들은 펄롱이 들은 나지막한 음성이다.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펄롱은 이 소리와 함께 들린 내면의 소리에 행동으로 응답한다. 인천은 도움을 청하는 낯선 음성이 늘어나는 도시다. 낯선 외국어에 익숙해지라고 등 떠미는 ‘외국어 친화 도시’보다 다정하게 말하는 인천은 어떤가? 우리끼리 쓰는 같은 말이 다르고 생경한데다가 거칠어지고 있다. <말에 구원받는다는 것>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어떤 기분 나쁜 말들이 넘쳐흐르는 데 맹렬한 위기감”부터 느껴야 한다.

[인천시론] 새해의 윷놀이

설이 지나고 곧 대보름이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예전에는 설 무렵이면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하는 ‘까치 까치 설날’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런데 이 노랫말 속의 ‘까치’는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라. ‘작은’이라는 뜻의 우리 옛말 ‘아츤(앛+은)’의 발음이 바뀐 단어다. 따라서 ‘까치 까치 설날’은 ‘작은설(아츤설)’, 즉 섣달그믐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 우리 설날’은 ‘큰설날’이라고도 불렸던 ‘설날’, 즉 정월 초하루다. ‘설’은 나이를 말하는 ‘살’에서 나온 말이다. 설이 지나면 한 살을 더 먹으니 ‘살’과 ‘설’은 같은 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뜻이 갈라져 지금과 같은 차이를 갖게 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짐승의 숫자를 세는 데 쓰는 단어 ‘마리’가 원래 사람의 ‘머리’와 같은 뜻이었다가 모음 ‘아’와 ‘어’의 차이 때문에 뜻이 조금 갈라진 것과 똑같은 경우다. 이 기간, 곧 설부터 대보름까지 예전 우리 선조들은 윷놀이를 즐겼다. 요즘은 윷놀이를 아무때나 하지만 처음에는 이 시기에만 하는 놀이였다고 한다. 이는 윷놀이가 본래 놀이보다는 한 해를 시작할 때 농민들이 모여 그해 농사의 결과를 점치던 일종의 민속점(民俗占) 성격이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 편을 갈라 경기를 해서 이기는 쪽의 농사가 더 잘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놀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간이 지나면 윷놀이를 안 했는데 차츰 그런 점술(占術) 성격이 없어지면서 언제나 즐기는 민속놀이가 됐다고 한다. 윷놀이가 언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윷놀이에서 사용하는 사위의 이름 ‘도, 개, 걸, 윷, 모’는 우리 고대 국가인 부여(夫餘)의 벼슬 이름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 부여의 관작(官爵)이었던 저가(豬加), 구가(狗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등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각각 동물과 연결돼 있는데 ‘도’는 돝(돼지·猪), ‘개’는 개(狗), ‘윷’은 소(牛), ‘모’는 말(馬)을 말한다. ‘걸’은 양(羊)을 가리킨다는 의견이 많지만 노새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들의 순서는 몸집이 얼마나 큰지와 얼마나 빠른지에 따라 정해진 것으로 본다. 윷판이 네 구역으로 나뉘는 것도 부여의 행정구역인 사출도(四出道)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석한다. 윷놀이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지역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민속놀이다. 그만큼 ‘정통성’이 뚜렷할 뿐 아니라 윷가락이나 윷판, 말 등의 도구는 만들기가 쉬우면서도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규칙이 복잡하지 않고 눈속임 같은 속임수가 통할 여지가 없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어 공동체 의식을 살리는 데도 제격이다. 2021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리즈에 딱지치기와 공기놀이 등 우리 민족의 여러 민속놀이가 등장해 세계적으로 큰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다. 윷놀이가 이런 식으로 소개될 수 있다면 훨씬 더 큰 반향(反響)이 일어나지 않을까.

[인천시론] 영화 ‘3학년2학기’ 인천 상영회

‘‘고양이를 부탁해’ 살리기 인천 시민 모임’이 있었다. 이미 개봉했다가 흥행에 실패한 영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인천시민들을 불러 모았다. 문화계는 물론 정•관계 인사들까지 참여했고 2001년 11월20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특별시사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인천을 배경으로 막 여고(인천여상)를 졸업한 여성들이 사회에 발을 내디디며 겪는 혼란과 갈등, 우정을 그린 이 영화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차이나타운, 월미도, 북성동, 1호선 전철 등 친숙한 인천 곳곳이 배경으로 등장했다. 당시 ‘고양이살리기모임’ 사무국장이었던 송성섭은 “우리 사회의 주변부, 마이너리티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내고 있다”고 평했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인천 영화이자 직업계고 졸업생들 성장 영화로 기억하는 이들에게 새해 반가운 영화가 찾아온다. 영화 ‘3학년2학기’는 직업계고(특성화고) 졸업반 교실을 배경으로 찍었다. 영화를 프로듀싱한 작업장 ‘봄’ 대표 신운섭은 이란희 감독과 손잡고 고공농성 노동자와 가족 이야기 ‘휴가’로 여러 영화상을 휩쓸기도 했다. 그들은 교육 현장 이야기로 차기작을 예고했고 특성화고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인터뷰해 대본을 썼다.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2학기는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해야 하는 시기다. 학생과 노동자 사이 어중간한 존재로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사고가 터져야 겨우 시선을 돌린다. 수능과 대학입시만이 유일한 성장 과정인 양 보여주는 사회에서 취업 준비 청소년들은 현실 바깥에 비존재로 존재한다. 프로듀서와 감독은 인천 특성화고등학교와 노동 현장에서 어른이 돼가는 청소년들의 일상을 포착해 화면에 옮겼다. ‘3학년2학기’는 부평공고와 인천 남동산단에서 80% 이상을 촬영했다. 장례식장과 주인공 가족이 사는 빌라는 촬영 장소를 구하지 못해 가까운 부천과 안산에서 찍었다. 내용으로 보면 교육영화이기도 하고 노동영화로 볼 수도 있으며 청소년 성장 영화이자 한부모가족의 잔잔한 생활 이야기다. 어떻게 이름을 붙여도 좋을 이 영화는 무엇보다 인천이 주무대이므로 ‘인천영화’임이 분명하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여러 상도 수상하며 2학기가 시작되는 9월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이 영화에 인천시민들이 주목해야 할 이유다. 필자는 지난해 11월 말, 인천인권영화제를 놓쳐 인천에서 이 인천영화와 만나지 못했다. 12월 서울독립영화제에 겨우 한 좌석을 얻어 만석 관객 틈에서 관람했다. 영화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때론 답답하기도 하다. ‘파업전야’처럼 뜨겁게 현장을 뒤엎는 드라마도 없고 ‘다음소희’가 던지는 묵직한 사회 고발 메시지도 남기려 들지 않는다. 졸업 예정자인 주인공 창우가 만 19세가 돼가는 과정 자체를 무덤덤하게 보여준다. 극적 사건이 일어나 파국에 이르지 않지만 필자는 한 관객으로서 내내 조마조마했다. 작업 현장은 언제 산재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현실 그대로를 재현한다. 소심한 주인공은 착해빠져서 대들지도 못하고 묵묵하게 견딘다. 공장에서도 견디고 집에서도 참아내고 학교에도 순응한다. 근데 그 주인공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바로 내 곁에서 살아내고 있는 삶으로 다가온다. 그의 감정이 몰입한 내 감정을 끌고 다닌다. 로맨스로 청춘을 치장하거나 젊은 격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 어른이 돼가는 따뜻하고 착한 삶은 숭고하다. 그렇게 어른이 돼가는 이들이 만들어 낼 사회 또한 기대해 볼 만하다. 어리숙한 듯하지만 인간 자체를 신뢰하게 만드는 게 이 영화가 지닌 큰 미덕이다. 이 영화에 공명하는 인천 사람들이 모여 상영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2월26일 오후 7시, 영화공간 주안이다.

[인천시론] 짠물 당구 김가영

‘당구 여제(女帝)’ 김가영 선수의 활약이 갈수록 눈부시다. 지난달 강원 정선군에서 열린 ‘하이원리조트 챔피언십 2024’ 대회 여자부(LPBA)에서 우승한 그녀는 이로써 2024년 5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일궜다. 또 이 ‘하이원리조트’ 대회에서 결승전을 끝낼 때까지 30연승 기록도 세웠다. 이는 프로당구 남자부(PBA)에도 아직 없는 신기록이라고 한다. 포켓볼로 시작했다가 3쿠션 선수로 변신한 그녀에 대해 “여자 당구에서는 적수(敵手)가 없다”는 말이 돈 지 이미 오래다. 이렇듯 큰 활약을 하고 있으니 그녀는 이제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나에게는 그녀와 했던 재미있는 인터뷰의 추억이 있다. 24년여 전인 2000년 10월, 그녀가 인천여자정보산업고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신문기자로 그녀를 만났다. “당구를 기가 막히게 잘 치는 여고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취재를 위해 찾아간 곳은 동인천에 있던 ‘김가영 당구장’. 딸의 대성(大成)을 원했던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는 당구장에 딸의 이름을 붙였고, 당시 그녀는 이미 여자 포켓볼 분야에서 4년째 국내 1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인천에서 초·중·고교를 다닌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당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창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나이에 당구에만 매달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습을 많이 했는데 경기가 안 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다 아버지에게 무섭게 혼이 날 때는 다 그만두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동안 당구에 투자한 만큼 투자할 만한 다른 일을 못 찾겠고, 기왕 이만큼 투자했으니 본전은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했다. 당시 4구 당구는 700점 수준이었던 그녀는 매일 당구장에서 훈련을 하던 중에 오빠나 아저씨뻘 손님들과 자주 시합도 했다. 그러고는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며 두 가지를 물어 왔다. ‘남자들은 왜 경기에 지면 졌다고 깨끗이 인정을 하지 않느냐’는 것과 ‘당구장에서 왜 짜장면을 시켜 먹느냐’는 것. 대개 4구 150~200점, 잘 쳐야 300점 정도인 남자들이 어린 여학생이라고 우습게 보고 경기를 요청했으니 무참히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같이 “오늘은 이상하게 공이 안 맞는다”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자의 자존심’을 끌어대 어찌어찌 설명했지만, ‘당구장과 짜장면의 오묘한 조화(調和)’는 도무지 설명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꼭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던 그녀는 이미 그 꿈을 이루고도 계속 정진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에 인천 ‘짠물 당구’의 위력을 널리 알리고 있는 그녀가 자신을 키운 인천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인천시론] 조세희와 레비나스

새해를 맞았지만 지난해로 돌아가 본다. 갓난 예수가 베들레헴 마구간에 누워 계실 성탄절이었다. 인천 동구 화수동 일꾼교회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소설가 조세희가 사랑했던 난장이(난쟁이) 같은 삶을 기억하자는 이들이었다. 일찌감치 조세희가 소설을 쓰기 위해 둘러봤을 장소, 그가 문장으로 새겨 놓았듯 지옥 같은 세상에서 천국을 꿈꾸던 이들이 몸과 맘을 의탁하던 성소였다. 조세희는 지옥 같은 세상을 뜨면서 직접 가서 묻겠다는 듯 신의 아들과 자리를 바꿨다. 조세희에 앞서 1995년 성탄절에 떠난 이가 또 있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이름마저 신과 함께하려던 이에게도 하늘은 무심하고 가혹했다. 하늘이 낸 백성이라며 적자 계보를 자부했던 유대인이었던 그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학살당했다. 그도 하늘에 묻고 싶었던 게 많았을 철학자였다. 조세희는 인천 만석동과 화수동 일대를 돌아보고 ‘은강’이라는 동네를 지어냈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인간을 떼로 죽이는 지옥을 마주하고 ‘타인의 얼굴’을 개념화했다. 조세희는 한국 사회 지옥도를 은강으로 축소하고 상징화해 우화처럼 펼쳐 보였다. 레비나스는 나와 너를 넘어서 사람이 사람을 환대하는 세계를 사유했다. 조세희는 문학 쪽에서 철학에 접근했고 레비나스는 철학으로 문학 같은 상징을 직조해냈다. 성탄절에 떠난 두 삶이 공히 바란 바가 있다면 국경과 인종, 계급 따위를 초월해 천국 백성을 닮은 인간애였다. 두 사람은 땅에서 이루지 못한 일이라면 하늘에서도 이룰 수 없음을 알면서도 천국에 대한 기대를 접지 못했다. 신이 존재하리라 믿어서라기보다는 신이 있어야 할 사람들 편에 서고 싶어서였다. 조세희는 1970년대 인천이라는 구체적 시공간을 은강에 담았다. 은강은 인천 동구를 비춰 반사해 낸 인천의 옛 얼굴이었다. 조세희는 난장이 연작을 통해 인천을 비롯한 타지 사람들이 은강에 와서 머물기를 바랐다. 타인이 사는 장소에 들어서는 경험은 나를 변화시킨다. 소설 안에서 우리가 이미 경험했듯 그 문장들을 통과한 후 나의 모습은 이전과 다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기 전과 후를 말한다. 타자를 만나면서 나는 나를 넘어서는 초월에 도달한다. 타자를 내 집으로 받아들여 손님으로 환대하면서 나는 나를 벗어나 도덕적 인간으로 변해 나간다. 레비나스는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했다. 타자는 약자의 얼굴로 다가와 나를 윤리적 존재로 바꿔 놓고야 마는 구원자다. 조세희는 인천을 은강이라는 약자의 도시로 그려 놓았다. 인천은 변했고 인천 안에서도 은강은 잊혀진 얼굴이 돼 가고 있다. 성탄절에 은강과 조세희를 기억하기 위해 모인 이들도 극소수였다. 하지만 인천은 천국을 바라는 이들로 넘쳐 난다. 인천을 ‘성시화’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던 목회자와 성도들도 꽤 많았다. 근대 기독교의 발자취를 따르다 보면 천국 아랫동네쯤에 인천이 있어도 부족하지 않은 도시다. 조세희는 다음 성탄절에 또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조세희와 함께 그날에는 레비나스도 올 것이다. 인천을 비춰 빚어낸 은강이라는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 부름에 응답하는 인천이라야 신의 얼굴로 현현한 예수를 볼 수 있다.

[인천시론] 경계해야 할 중국

중국인들의 금기(禁忌) 중에 ‘피휘(避諱)’라는 것이 있다. ‘휘(諱)’란 천자(天子)나 왕(王), 성인(聖人) 또는 윗사람의 이름을 말한다. 따라서 ‘피휘’란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글로 적지 않는(피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그 대상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다. 고귀한 분이나 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야 어찌 권위가 서겠는가. 옛날 동양적 사고로는 생기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서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한 중국 역사서들을 보면 어떤 이름을 써야 하는데 그 속에 이런 이들의 이름에 쓴 글자가 들어간 경우 그 대신 다른 글자를 쓴 사례가 줄곧 나온다. 중국이 야심차게 진행 중인 달 탐사 사업 ‘창어(嫦娥) 계획’도 이와 관련돼 있다. 이 이름은 중국의 ‘항아분월(姮娥奔月•항아가 달로 달아났다)’ 전설에서 가져왔다. 이 이야기에서 여신(女神) 항아(姮娥•恒娥)는 남편인 천신(天神) 예(羿)가 천제(天帝)의 아들들인 아홉 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 없앤 탓에 하늘로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된다. 그러던 중 예가 둘이 먹으면 함께 불로장생(不老長生) 할 수 있고, 혼자 먹으면 신(神)이 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약을 구해 온다. 항아는 하늘로 돌아가고 싶어 이 약을 남편 몰래 혼자 먹는다. 하지만 바로 가면 다른 신들이 남편을 배신한 여자라고 흉볼 것 같아 잠시 달에 가서 살기로 하는데 달에 도착하자 몸이 변하면서 두꺼비가 된다. 대략 이런 내용인데 항아의 ‘항(姮•恒)’이 서한(西漢) 시대 황제였던 유항(劉恒)의 이름 ‘恒’과 겹치니까 ‘恒’을 ‘嫦’으로 피휘함으로써 ‘창어(嫦娥)’가 생겼다. 이름의 유래는 이렇듯 재밋거리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은 무서울 지경이다. 이 계획에 따라 탐사선 ‘창어 6호’는 지난 5월 달 뒷면에 착륙해 흙을 캐서 지구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달 표면 탐사에 성공한 나라는 옛 소련과 미국, 중국, 인도, 일본 등 다섯뿐인데 이 중에서도 무척 어렵다는 달 뒷면 착륙에 성공한 나라는 중국뿐이다. 또 한국과 중국 8대 주력 산업의 최근 10년간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에서 석유화학을 뺀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무선통신기기, 선박, 자동차, 철강은 중국이 우리를 앞질렀다. 중국 첨단 기업들의 연간 연구개발 투자비는 한국의 4배(2023년 기준)이며 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의 박사급 인력이 매년 8만명 넘게 나온다. 이들 분야의 논문 인용 빈도도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됐다. 14억 인구 중 가장 우수한 두뇌들이 ‘주 52시간 근로’ 같은 제약도 없이 최첨단 기술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요즘 많은 한국인이 ‘중국’이라고 하면 흔히 온갖 곳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무개념의 중국인들이나 그 대표격인 아줌마부대 ‘따마’를 떠올리며 “중국스럽다”며 그저 비웃고 깔본다. 하지만 중국에, 그리고 중국의 엄청난 지원 세력인 전 세계의 화교들 속에 어찌 그런 사람들만 있겠는가. 우리가 진정 눈여겨봐야 할 상대는 중국의 힘을 엄청나게 끌어올리며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그들의 과학기술 인력이다. 대적해야 할 상대를 잘못 판단하고는 이길 수 없다.

[인천시론] 인천에서 ‘제물포’는 어디인가요?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건넨 대사다. 늘 쫓기는 신세였던 열혈 투사가 밀양이라는 고향 이름을 입에 올리자 사람 냄새가 풍긴다. 김원봉의 삶을 구성해 온 정체성은 의열단 단장이다. 그런 그에게 밀양이라는 장소성이 붙으면서 정감이 생긴다. 철인의 풍모에 따뜻한 피가 돌고 웃음기마저 번진다. 노마드처럼 유랑해 온 그에게 밀양은 닻이자 품이었다. “우리 부모 형제가 있는 조국 땅으로 진격”하자고 무관학교 생도들에게 훈시할 때, 그에게 조국 땅을 대체할 수 있는 구체물은 밀양이다. “나 인천 사람, 누구누구요”는 근대 이후 사라진 인사법이다. ‘인천댁’ 이라고 불리던 호칭도 이제는 듣기 힘들다. 정주 의식이 약해진 탓도 있고 동네마다 지닌 특성을 몰각한 도시 개발이 만들어 낸 풍속도다. 그럼에도 거주지 이름이 삶의 전모를 보여준다고 여기는 세태다. 강남에 살고 분당이나 일산에 살면 어깨를 펴며 동네를 밝힌다. 인천에서도 송도에 산다고 하면 좋은 데 사신다는 반응이 온다. 그렇다고 나 송도 사람이오라는 표현은 없다. 거주는 하지만 인간을 빚어내는 장소성은 미미하다. 때론 아파트 이름으로 사람의 격을 잰다. 주택 상품명이 품위에 등급을 매기면서 장소와 나눌 수 있는 교감이 사라졌다. 사람과 장소 사이 유대감이 없으면 장소성이 안겨주는 고향의 맛도 없다. ‘제물포 르네상스’라는 시장 공약을 들을 때 번뜩 장소성 복원 여부를 묻고 싶었다. 제물포라는 공간에서 문예 부흥을 이루려면 고향 같은 정서를 일궈내야 한다. 사는 동네에 대한 자부심을 살려야 건물만 남기는 개발이나 재생 사업을 탈각할 수 있다. 제물포 르네상스는 먼저 장소와 사람 사이 유대를 숙고해야 한다. 환경미학자 이푸 투안은 장소와 맺는 유대감을 토포필리아(Topophilia)라고 이름 지었다. 신체로 장소를 감각해서 얻게 되는 정서적 안정감은 고향 땅에 대한 사랑을 구체화한다. 동구 배다리에서 진행했던 ‘골목출동수리팀’ 활동과 성과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토포필리아를 구현한 제물포 르네상스다. 제물포는 ‘오래된 인천’에 대한 그리움이 밴 지명이다. 하지만 인천시민들에게 제물포라는 구체적인 장소는 막연하다. 인천에 제물포가 있다는 사실을 전국에 알린 공은 제물포고등학교라는 교명에 있다. 제물포고로 가려면 당연히 제물포역에서 내리면 된다고 믿었던 외지인들이 많았나 보다. 전국에서 인재가 몰려들던 입시명문 제고 시절 일화가 있다. 시험 치러 낯선 인천으로 몰려들던 입시생 중에는 더러 제물포역에 내려 제고 가는 길을 물었단다. 요즘도 수능날 아침이면 싸이카 뒤에 탄 채 간신히 시험장에 입장하는 학생이 있다. 제물포역에서 제물포고는 한참이고 마음이 타들어 갔을 그 학생은 애꿎은 제물포역만 원망했겠다. 인천대가 제물포역 부근에 있던 시절에는 인천역은 인천대에서 멀고 제물포역 주변이 인천대 학생들 거점이었다. 역명을 병기하지 않았다면 인천대로 가려는 학생은 동인천역을 지나 인천역까지 내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물포구가 출범하면 제물포를 묻는 일이 더 늘겠다. 제물포역은 제물포구 바깥 미추홀구에 있다. 일찍이 윤현위 교수는 중구 제물포고, 미추홀구 제물포여중, 서구 제물포중 등 산재해 있는 제물포 지명 문제를 제기했다. 제물포에서 르네상스를 이루려면 우선 인천에서 제물포는 어디인가부터 정리해 둬야겠다. 지명은 추상이지만 장소는 구상물 일수록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제물포구 바깥 인천 사람들이 제물포를 인천이 지닌 정체성에 포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자기 정체가 분명한 도시 인천을 바라며 제물포는 어디인지 지명부터 고민해 본다.

[인천시론] ‘인천문화예술40년사’ 출판기념식에서

계엄령을 선포했고 포고령에 담긴 문구는 살벌했다. 집회를 열 수 없다는데 출판기념식은 가능할까 싶었다. 공들여 편찬한 책자 탄생을 자축하는 자리조차 뜻한 바대로 가질 수 없다니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계엄 진행 과정을 시민들과 국회가 제압했고 출판기념식은 열렸다. 40년이라는 시간이 힘을 불어넣기라도 한듯 한자리에 모인 인천문화예술가들은 담담하고 의연했다. 인천문화예술 40년을 정리하겠다는 기획은 대담했다. 40년 역사를 기록하려고 맘먹은 지 3년이 지나 책자가 나왔다. 100명 남짓 모였지만 규모 이상으로 영예로운 기념식이었다. 인천직할시 출범 이후부터 40년, 반세기 가까운 기간과 방대한 영역을 망라하려니 우여곡절이 많았다. 기록에 참여한 필진만 56명이고 인천사 전문가 10명이 감수했다. 편찬 기준을 논의하는 데만도 10여명 위원이 힘을 모았다. 자문에 참여한 문화예술가까지 포함하면 100명이 훌쩍 넘을 것이다. 전국적으로도 유례없는 인천 역사에 남을 큰 사업이었다. 나는 인천 청소년 문화예술활동 40년 역사를 썼다. 관련 기록이 충분하지 않았고 증언해 줄 인사도 많지 않았다. 자료를 뒤지고 옛 활동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배운 게 많았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온 이들의 족적이 다시 보였다. 80년대 청소년들은 군사문화 틈새에서 진통을 겪으며 성장했다. 글을 쓰면서 참고 삼아 뒤적였던 계엄이라는 단어를 40년이 지나 접하게 된 상황을 훗날 어떻게 기록할까 상상했다. 초현실, 비현실, 어떤 표현으로도 기록하기 어려운 타임슬립 같았다. 다만, 청소년들이 펼치는 문화예술 활동에 계엄은 풍자 대상이 되리라 확신했다. 청소년들 시민의식은 급속하게 진화했다. 국회 앞에 모여든 학생들은 콘서트 야광 응원봉을 흔들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이룬 민주주의를 즐기고 있다는 상징이다. 출판기념식에서 인천문화예술에 대한 희망을 글로 남기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벤트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무거운 시기였고 엄숙하게 쓰려니 잔치 분위기가 신경 쓰였다. 문화예술은 시대와 불화하는 게 숙명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비장한 시국이므로 이후 40년 인천예술이 가야 할 방향을 결의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바깥은 여전히 혼란한 정국이고 요동치는 세상에 문화예술이 서야 할 자리는 다시금 선명해야 했다. 축하 잔치는 어엿한 호텔연회장이었지만 나는 폐허 위를 살고 있었다. ‘나는’이라는 주어로 시작하는 시국선언문이 드러낸 삶에서 비켜 서 있을 수 없었다. 폐허라는 은유가 국회에 진입한 군홧발을 지켜봐야 하는 직설이 돼버린 역사가 몸을 관통한 통증은 극심하다. 기나긴 40년, 지난 세월 중에 이토록 참담한 장면이 몇이나 있었을까. 청소년들이 외치는 탄핵 요구 함성을 들으며 성직자들이 질타한 “어찌 사람이 이 모양인가”를 넘어설 문화예술을 생각했다. 나는 잔치 자리에 앉아 판을 갈아엎을 고민에 몰두하고 있는 이몽룡을 떠올린다. 계엄 난리 중일지라도 잔치는 흥겨워야 하고 축제는 열려야 한다. 경종을 울리는 건 언제나 예술의 몫이다. 거나한 자리 한편에 앉아 ‘금준미주 천인혈’을 쓰는 시인이 있어 좌중은 술렁대며 변혁 예고음을 감지한다. 문화예술 40년을 기념하는 자리가 하필 시대착오 사또 패악질 와중이었다. 이 모양인 사람과 시대에 일침을 가한 시인처럼 나도 쓰련다. 거리는 민주주의 축제로 들끓고 시대는 오늘을 빛나는 역사로 기억하리라. 지난 40년 인천에서 꿈틀대던 문화예술 활동이 오늘을 만들었다. 미래 역시 청소년 문화예술활동으로 찬란할 것이다. 40년은 그들 것이므로.

[인천시론] 사라져 가는 김장

김장철이 거의 끝났다. 김장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왕조실록 중 태종실록에 ‘침장고(沈藏庫)’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는 궁궐에서 야채를 공급하고 김장을 담가 관리하던 기관이면서 그 야채와 김치를 보관하던 창고의 이름이기도 했다. ‘김장’은 바로 이 ‘침장’이 바뀌어 생긴 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沈’은 ‘침채(沈菜)’의 ‘沈’과 같아 김치를 나타낸다. 또 ‘藏’은 어떤 물건을 갈무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침장’은 ‘담근 김치를 잘 갈무리한다’는 뜻으로 김장과 같은 말이 된다. 이로써 김장이 늦어도 조선 초기에 시작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김장은 사실 이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됐을 것이다. 지금처럼 배추김치를 담가 저장하는 것이 아닐 뿐이지 짠지나 동치미 같은 저장음식들을 겨우내 먹으려면 저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장은 많은 배추를 절이고, 여러 양념을 섞어 버무려 소를 만들고, 소를 넣은 배추들을 독에 담아야 하는 힘들고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너무 추워지기 전, 하루 이틀 정도의 짧은 기간에 끝마쳐야 했기에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이를 해결한 방법이 ‘김장 품앗이’였다. 친척이나 이웃들이 모두 나서 넓은 장소에서 한꺼번에 김장을 한 뒤에 나눠 가져가는 방식이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이 품앗이는 김장이라는 큰일을 수월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이웃 사이에 정(情)을 나누고 일체감을 갖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김장의 가치는 지난 2013년 유네스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게 됐다. 당시 유네스코는 “한국인의 일상에서 세대를 거쳐 내려온 김장은 이웃 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고, 연대감과 정체성·소속감을 증대시킨 매개체”라고 평가했다. 한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나 경도잡지(京都雜志) 같은 옛 자료를 보면 김장에 많은 재료들이 들어갔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김장김치에 소로 들어가는 재료는 지역에 따라 많이 달랐다. 이를테면 경기도에서는 새우젓을 많이 쓰고 강원도는 오징어나 생태 등을 많이 쓰며 전라도에서는 멸치젓을 많이 쓰는 식이다. 이 때문에 지역에 따라 김장김치의 맛이 상당히 달랐다. 하지만 이제는 핵가족화로 한 집에 식구들이 많지 않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져 이웃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줄어들면서 김장을 하는 가정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 대신 공장에서 똑같이 만든 김치가 일회용 포장 형식으로 전국 어디서든 팔린다. 이대로라면 김치 맛의 지역별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연대감과 정체성·소속감을 증대시킨 매개체’로서의 김장 자체가 옛이야기가 될 날도 머지않을 것 같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사회가 절대 잃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을 넋 놓고 잃어 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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