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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론] 진흥왕의 꾸짖음

최재용 인천연수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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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우리 선조들은 줄을 튕겨 소리를 내는 현악기들을 ‘고’라고 불렀다. 거문고의 ‘고’가 바로 이 말이다. 검은 색깔의 나무로 만들어진 현악기라는 뜻이다. 가야금도 원래 이름은 ‘가얏고’였다. ‘가야+ㅅ+고’ 형태이니 가야국의 현악기라는 뜻이다.

 

이 가야금의 대가로 유명한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의 악사였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들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귀순했다. 진흥왕은 그의 뛰어난 음악 실력을 높이 사 후하게 대우했다. 그러자 왕의 주변에서 권세를 누리고 있던 신라의 귀족들이 우륵을 시샘하고 경계했다.

 

진흥왕은 만덕 대사 등 세 사람에게 우륵의 음악을 전수받게 했고, 이들은 우륵에게서 배운 곡들을 정리해 진흥왕 앞에서 연주했다. 왕이 이를 듣고 무척 좋아하자 신하들은 “멸망한 가야국의 음악이니 취할 것이 못 됩니다”라며 막고 나섰다. 물론 우륵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진흥왕은 “가야국의 왕이 음란하여 자멸(自滅)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음악과 아무 상관이 없다”며 이 곡들을 궁궐에서 쓰는 음악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이 내용을 보면 진흥왕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가야금이 살아남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왕이 문제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느냐”라는 그의 말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사람의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문제’임을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법규 및 제도 등을 놓고 어느 것이 더 낫네 못하네 하는 말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개헌 논의 등으로 시끄러운 요즘 우리나라 역시 딱 이런 상황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에 ‘의원내각제’, ‘상·하원 양원제 국회’ 등 여러 의견이 날마다 신문과 방송을 가득 메운다.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으니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 바꾼들, 지금처럼 국민과 국가는 내팽개치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자기 당의 이익을 지키는 데만 열심인 정치인들이 그 운용을 맡는다면 과연 뭐가 얼마나 달라질지 의심스럽다.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보호한다는 비난을 받고, 걸핏하면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을 일삼아 인공지능(AI) 판사로 바꾸는 게 더 낫겠다는 조롱을 받곤 하는 우리의 사법부는 또 어떤가. 이게 과연 법관들과는 상관없이 우리나라의 사법 제도가 엉망이어서 생기는 일일까.

 

최근 감사원이 밝힌 선거관리위원회의 황당한 부정 채용 실태 역시 그 채용 제도가 잘못돼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법규라 해도 제대로 활용되거나 지켜지지 않으면 사회를 어지럽히는 흉기가 될 뿐이다. 또 문제가 있는 규정일지라도 그를 대신할 새로운 규정이 생기기 전까지는 일단 지켜야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제 잇속에 따라 스스럼없이 실정법을 어기거나 악용하는 사례들을 끝없이 보게 된다. 이런 일이 거듭되는 한 개헌이든, 새로운 법규든 다 공염불일 뿐이다. 제도가 무슨 죄가 있는가. 1천500여년 전 진흥왕의 일갈이 계속 떠오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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