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잎새 위로 물들어 오는 유월 바람은 연초록 옷을 입고 빛바래 가는 장미 곁을 지난다 라일락 향이 머무는 골목 끝에 여름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아파트 벽들이 뜨거운 숨을 내쉬고 아스팔트 위로 열기가 두껍게 내려앉는다 그림자처럼 몸을 눕히는 유월의 끝, 세월은 또 한걸음 여름으로 간다 김도희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2023년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시집 ‘나의 현주소’
이슬, 살포시 다녀간 부추밭 봄볕 햇살이 따듯해지면 밭두둑 가슴 열고 살짝 내민 초록 눈 통통한 쪽수는 속내를 들킬까 네 뿌리는 꿈틀거리고 키재기를 하는 것처럼 쏙쏙 부푼다 파릇파릇 올라오는 저 힘 바람이 흔들고 지나가면 봄을 베러 나온 칼날 앞에 움칫거리는 꽃술 싹둑, 잘려갈 때마다 폴딱폴딱 넘나드는 청개구리 무슨 궁리를 하는 걸까? 숨죽여 피는 이치는 알 수 없지만 아픈 숨결로 단단히 여문 꽃대 세상 모르는 저 작은 씨방 속으로 얼마나 많은 비밀이 있었을까? 내 안에 펴놓은 푸른 결들 사이로 하늘이 풀어놓은 봄 들판 초록 물 번진다 조병하 시인 ‘국보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샛별이 반짝입니다 저 별 뒤에 여명이 밝아오면 밤새 수런대던 말들을 까맣게 잊고 새벽을 맞이합니다 흩어졌던 조각난 시어들을 박음질해 봅니다 심연의 상념이 끊어진 필름처럼 무기력한 그림자만 가슴을 적시고 있습니다 창작시 다듬으러 가는 날 한 것 치장을 하고 詩밭의 희로애락을 만나러 갑니다 거기에는 다정한 얼굴들이 다양한 글감을 나누며 영감의 피드백을 주고받습니다. 웃음 사랑 슬픔의 언어들이 삶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글들이 그믐밤 샛별처럼 빛납니다. 허정예 시인 2009년 ‘문파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시창작회 ‘시인마을’ 회장 동남문학상·경기시인상·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시집 ‘詩의 온도’
대롱대롱 매달려 핀 때죽나무 흰 꽃을 보며 겨울날 나뭇가지를 따듯하게 덮은 흰 눈을 생각하지 때죽나무꽃은 근원을 향해 아래로 핀 눈의 꽃 하얀 눈은 하늘을 바라 피어난 봄날의 꽃이지 제철에만 피는 꽃들이 철을 바꾸어 피어나는 까닭은 잊지 않고 있다는 마음일까 꽃향기 일렁이는 열여섯 살 오월의 바람을 낙엽을 보내며 붉게 붉게 간직한 여름날의 질풍노도를 그 마음이 붉은 잎 12월 포인세티아로 피어나는 걸까 이춘전 시인 연천 출생 홍익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수원공업고등학교 교사 지냄 제46회 ‘한국시학’ 신인상 당선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 청송 김송배 시인을 보내고 - 고향 합천이 그리우면 하동 참게가리장 먹으로 가자던 걸음으로 산천이 초록으로 물들고 동네의 고샅길에는 눈물 젖은 붉은 장미꽃이 輓章 같이 주렁주렁 오월 초 엿새 흙에서 온 육신은 흙으로 영혼은 본향으로 온돌 아랫목 같은 깊은 마음 따뜻한 손을 어찌 단번에 놓고 가시고는 이제는 내 안에 오시어 여생을 함께 한 사흘 흘린 눈물이 화개천으로 청량하게 흐르는 지리산자락 하동 진목 *미강재 건넛산에 사철 짙푸른 한그루 *聽松으로 보고프면 서재에 가서 靑松을 마주 담소하리이다. 정순영 시인 경남 하동 출생. 시집 ‘침묵보다 더 낮은 목소리’, ‘조선 징소리’, ‘사랑’ 외 7권. 부산시인협회장, 한국자유문인협회장, 동명대 총장, 세종대 석좌교수 등 역임. 부산문학상, 한국시학상, 세종문화예술대상, 한국문예대상 외 다수 수상 *聽松 : 김송배 시인(1943~2025) 아호. *未江齋 : 정순영 시인 서재 이름.
봄비 내리던 날 먼 길 떠나셨습니다 가족의 인연 맺은 지 42년 마지막 모습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회한의 눈물 흐릅니다 6·25전쟁으로 남보다 강인해야만 살 수 있었던 실향민의 삶 인고의 세월 속에서 무에서 유를 일궈 내시며 꿋꿋하게 한 세기를 견디어 내셨습니다 송구한 마음 씻을 길 없어 ‘영가전’에 모시어 날마다 경 읽어 드리고 절 올리며 기도합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꿈 속에서도 비옵나니 극락왕생 하시옵소서. 이성란 시인 ‘수원문학’ 신인상 당선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그대의 목소리처럼 기분 좋은 파란 하늘입니다 지나가는 행인으로 나타난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기러기 한 마리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날아갑니다 숨김없이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파란 하늘입니다 최대희 시인 1999년 ‘홍시’로 작품활동 시작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집 ‘넌 별이야’ 등 4권 문화예술인상, 경기시인상, 경기문학인 대상, 농촌문학상 수상
4월이 떠나가는 끝자락에서 문득 나는 4월의 대지가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모습에서 내가 심었던 많은 구근에 대해 생각한다 잔설 헤치고 피어오르는 얼음새꽃도 담장 아래 무리 지어 피는 보랏빛 제비꽃도 돌 틈에 겨우 잎 내밀어 피는 노오란 민들레꽃도 겨울을 넘어온 나비와 꿀벌들의 향연을 위한 것 어느 것 하나 내가 심었던 구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대지에 묻었던 하 많은 허물 눈 덮여 보이지 않았을 뿐 저렇게 고개 들어 피고 있었다 비가 내린다 숲길을 헤치며 젖은 땅 위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4월이 가고 있다 이복순 시인 ‘수원문학’으로 등단 KBS·수원시 주최 ‘시와 음악이 있는 밤’ 우수상 수원문인협회 이사 시집 ‘서쪽으로 뜨는 해도 아름답다’
그저 바라보다 넋을 놓은 하얀 포말들 어쩌면 여름은 내 옆에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살갗에 와 닿는 전율은 물꽃처럼 퍼져나가고 밀려오는 물비린내 씻겨나가면 미련을 담아둔 비밀의 속내 문득 되돌아보며 나를 떠난 너의 발길 찾아 걷고 있는 나 파도에 정화되어 가는 물밑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는 심장 소리 눈빛 맞추며 가슴 물들이던 멀리 있는 그리움이여 조병하 시인 ‘국보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 봄은 나의 첫사랑 솟아오르는 따스한 마음 봄을 맞이하는 기쁨이 샘솟고 사계절의 첫 소식 전하는 봄이여 겨우내 잠자고 있던 우주를 두드리는 소리여 앞뜰의 산수유 여릿여릿 살포시 내민 꽃망울 내일이면 노란 꽃물 들겠다 사랑도 희망도 마음도 봄꽃처럼 피어난다 인생 희망을 일깨우는 아, 봄은 나의 첫사랑 김경숙 시인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꽃을 볼 때 영혼이 차오르는 느낌 꽃과 꽃사이로 시간이 흘러가고 소의 뿔처럼 초승달이 차오르고 작은 추억이 지그재그 팽창할 때 초식동물 닮은 턱이 넓적한 남자가 육식동물 닮은 날씬한 여자를 본다. 넷째 손가락의 낀 꽃반지는 사랑의 붉은 피가 약지를 통해 심장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네만 무의식의 뿌리는 유혹이라 두렵다. 네가 나를 믿고 의지하는 존재라면 이야기는 더욱 슬퍼져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질곡을 비판한 빚을 탕감하기 위하여 이성을 원해 고양이를 키우고 감성을 원해 키 작은 개를 키운다. 김어진 시인 2017년 계간 ‘리토피아’ 등단 시집 ‘달보드레 나르샤’, ‘옳지, 봄’, ‘항아리 속의 불씨’, ‘붉은 수염의 침대에서 자다’, ‘그러니까 너야’ 아라작품상,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언니가 매생이를 보냈다 매생이 뭉치는 삶 만큼이나 거친 파도를 겪어낸 것이다 술에 취해 속이 쓰리다는 남편을 위해 매생이 국을 끓인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끓어 오르는 물에 매생이를 넣으면 둥글게 말고있는 다리를 쭉 펴고 한 올씩 풀려 나온다 어느새 솥안은 바다가 되고 갯내음 갈매기 울음소리 들린다 작은 욕심도 부릴줄 모르는 언니의 한 맺힌 남도의 창이 흘러 나온다 언니는 초록의 매생이다 마음이 들꽃보다 향기로운 것은 거친 비바람을 겪었기 때문이다 매생이 국을 먹을 때마다 언니의 푸른 갯벌이 걸어온다 장경옥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2021년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시집 ‘파꽃’ ‘구름 같은 세월’
시간의 바람벽에서 노란 기침하는 복수초 꽃눈은 봄앓이 한창이다 수 많은 발길질에 생채기 나는 살 닿는 것 밀어내는 시름 속에 넓고 가까웠던 자리 흙먼지 날리는 황무지다 심호흡 다시 한번 해법 찾는 몸부림 삿갓구름 미소 지으며 바람 타고 흐르는 은행나무 우듬지 둘은 이어진다 빗나간 잔설 아래 움이 돋고 노란 하품하는 생강꽃 홍태환 시인 월간 ‘시’로 등단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잠자던 자연 기지개 켜고 얼었던 흙 포슬해지면 두터운 옷 벗는다 소소한 바람 따라 온 아른아른 아지랑이로 다시, 봄이 열린다 내려다보며 피는 꽃처럼 겸손함으로 따스한 봄바람 포근한 사랑으로 흙에서 태어난 피조물 흙이 될 것을 기억하며 새로이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성찰의 시간 안에서 다시, 봄을 품는다 강부신 시인 ‘문예비전’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종로교회 맞은편 수원시립 미술관에서 우연히 음악회를 만났다 미술관 2층 계단에 가득 앉은 시민들 카페 앞에서 열린 겨울방학 음악회 ‘G 선상의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첼로 4중주 깊은 소리로 속삭이는 영혼의 흐느낌이여 방학이 끝날 학생들과 부모를 신나게 하는 금관 5중주의 힘찬 고함과 발짓이여 건너편 유리창 밖에서 따스한 봄기운이 기웃대고 수원시향의 섬세한 예혼이 넘실거렸다 송대용 시인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겨우내 인고의 응어리가 풀리면서 얼음장 밑 흰추위 지나가는 소리 병아리 걸음 떼듯 바장대며 흐른다 강 건너 산기슭 아지랑이 나래 펴고 들녘 초목들이 안개비에 젖으면 실가지 생기 돌아 연녹색 물 돋는다 얼었던 나대지 물결처럼 꿈틀대며 숲에선 새싹 속삭임 바람결에 날아오고 호숫가 얼음 위 봄 햇살 아장댄다 김옥희 시인 ‘문예비전’ 신인상 시 당선 ‘수원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라오스 동네 한 바퀴 돌아본다 어느 집 앞에 발이 멈추었다 옹기종기 모여 더위를 식히고 있는 가족들과 눈이 마주치자 그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내어주며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펴서 가족 소개를 한다 새끼손가락은 손녀라는 걸 눈치로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 웃음으로 통했다 낯선 이방인에게 대하는 친절함 국가와 문화는 달라도 그들을 통해 훈훈한 정을 느끼며 달달한 사탕을 전해주고 돌아오는 길 기분이 좋아 행복한 하루였다 양길순 시인·화가 ‘한국문인’ 등단 2022년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시집 ‘자운영꽃 그리움’
커다란 창 너머 잔설 쌓인 잔디 밭에서 붓 하나 치켜 들고 성급하게 봄을 그린다 살갑게 다가온 봄 햇살에 얼었던 굳은 몸 두런두런 풀어내는 냇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먼 산 바라본다 여기저기 진달래꽃 무더기는 산골 아가씨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이다 어느 해 봄방학 서울에서 내려 온 이웃집 친척 오빠, 큰 키에 목련꽃처럼 하얀 얼굴 휘파람으로 ‘봄 처녀’를 멋들어지게 불면 가슴 콩닥거리던 이유를 모르던 볼 빨간 어린 소녀도 그려 넣고 새 눈 가느스름하게 뜬 채 꽃봉오리 벙싯 벌어지는 날 기다리며 먼 데서 아득하게 오고 있는 연두색 봄을 그린다 황영이 시인 ‘국보문학’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2024년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예배당 구석구석 어둠이 걷히고 바람 잔잔한 새벽에 눈이 함박으로 내립니다 오오, 내 사랑 목련화가 그리운 새봄의 눈이 쌓입니다 둘이서 걸어가는 고요한 숲길은 사랑의 눈짓으로 순백입니다 어쩌다 이 나라가, 온 백성이 가슴 아픈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그러나 새봄은 옵니다 기도하는 손과 마음을 하아얀 숨결이 하늘의 말씀처럼 따뜻하게 보듬어 줍니다 이숙아 시인 경기대 교육대학원 졸업 2018년 ‘문예비전’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시집 ‘그리운 이름’
겨울 아침 햇살이 거실 한 켠 길게 비추고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발견한다 햇살에 떠오르는 아지랑이 밟으며 앞으로 걷고 뒤로는 생각에 잠긴다 옛날 뒤뜰에 떠오르던 무지개빛 아지랑이 속살거리며 유년 시절을 불러온다 시골 철길 따라 학교 가던 길 온통 덩굴장미 담장 예뻤던 길목 집 야산 산딸기 따 먹던 길 외딴 곳, 흙 덮인 지붕 긴 터널 속의 항아리 굽던 터 겨울 아지랑이 꽃으로 피어 오르면 마음의 문으로 추억이 열린다 김경숙 시인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