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책없이 옛 기억들이 매듭 풀리듯 봄비를 타고 쏟아진다 아버지 바지춤 속 눈깔사탕이 엄마의 땅콩 박힌 쌀강정이 그리운 날 속절없이 흩날리는 벚꽃잎엔 떠나간 첫사랑의 냄새가 나고 징검다리 너머 무소식은 희소식이 되어 건너올까 불면의 밤 주저리주저리 빗소리 따라 추억의 소환장은 온몸을 돌아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김형숙 시인 수필가 2019년 ‘현대수필’로 등단 안양문인협회 이사 ‘글길문학’ 동인 시집 ‘사과가 나를 먹었다’
영주로 가는 길 고속도로를 둘러싼 단양, 제천 골짜기마다 연두빛 세상 햇살 따라 여기저기 돋아나는 자유분방한 네가 좋아 철부지처럼 부산스럽게 물오르는 연두빛 새싹 맑고 순수한 네가 좋아 한적한 봄비에 내 가슴 내 눈빛도 마냥 물들어 가는 듯 풋사랑 강물 되어 흐르면 수줍어 강줄기 따라 피어난 분홍빛 복사꽃 좇아 내 마음도 싱싱 달려간다. 정흥애 시인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먼 훗날에도 오늘처럼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고 있겠지 먼 훗날에도 오늘처럼 바람 불고,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있겠지 먼 훗날에도 오늘처럼 달이 뜨고, 별이 빛나고, 우주는 크고 광활하겠지 먼 훗날에도 오늘처럼 먼 훗날에도 오늘처럼 윤수천 시인 아동문학가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수상 1976년 동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남도 청보리밭 살랑이는 바람 따라 연초록 물결이 눕더니 광양 매화밭엔 하얀 봄을 풀어 놓고 들녘은 은은한 향으로 깨어난다 논두렁 밭두렁에도 따사로운 햇살이 고이고 나뭇가지 끝마다 투명한 봄의 숨결이 맺힌다 겨우내 묶인 무겁던 시간들 흙냄새 속에 살며시 묻어 두고 설레는 발걸음 무작정 봄을 따라 나선다 들녘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모든 시린 것들을 하나씩 끌어안는다. 최스텔라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고고한 자태 그리움으로 피어나 물오르는 소리 들으며 장안공원에서 봉긋봉긋 세상을 내다보고 있네 햇살 따사로워 백조가 앉아 있는 듯 벙그러지는 목련이여 은은히 흐르는 향기로 사람들 발길 멈추게 하는 봄의 눈빛이여 아, 목련이여. 신영희 시인 ‘수원문학’ 신인상 당선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수원문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부처도 꽃잎 떨어지는 순간 흙으로 돌아가고 낙화는 무덤 모서리에 떨어진 달빛 조각이다 장미 가시에 찔린 날엔 검은 장갑이 불편하고 달빛이 머리털로부터 새끼손톱까지 통과한다 손가락에 피가 달빛 조각의 낙화처럼 흐르고 낙화 소리는 달빛 비벼 내는 공기의 탄식이다 푸른 하현달에서 연분홍 악사가 풍악 울리고 감성의 현에 올라탄 낙화가 시인 품에 안긴다 김어진 시인 2017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 아라작품상·리토피아문학상 수상. 현대시학회·문학의 창 시동인.
목련꽃이 피면 ‘하얀 목련’ 노래가 떠오르며 괜시리 슬퍼진다 그해 봄 꽃구경 한번 못해 서운해 하시며 갑자기 떠나신 아버지 그리워 고개 들고 바라볼 수가 없다 비 오는 봄날 꽃잎 내려 앉으면 이른 이별, 못내 아쉽다 시린 겨울 견디어 내고 순백의 꽃봉오리 피어내는 생명의 숨소리 가만히 귀 열고 듣는다, 다시 봄이 태어난다. 이성란 시인 ‘수원문학’ 신인상 詩 당선 한국경기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학익천 물가 봄 들녘 사각사각 새싹 돋는 소리 세상 빛이 좋아 서로가 날 보라는 듯 눈웃음치는 얼굴들 얕아진 흙에서 울리는 수줍은 초록의 작은 노랫소리, 이 노래 따라 걷다가 그만 밟은 새싹 하나 아, 하고 아파했을 새싹의 여물지 않은 가녀린 발가락, 나도 이렇게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아프게 할 때가 있었겠다. 허만덕 시인 ‘문파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자목련, 백목련 두 그루 내 마음 밭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다 눈 쌓인 겨울밤에도 다가올 봄을 품은 채 둥근 꽃망울로 숨을 고르고 찬란한 사월이면 하얀빛, 자줏빛 숨결로 조용히 피어나는 목련이여 아주 오래된 우리 집 작은 정원 한쪽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봄을 맞는다. 이경자 시인·수필가 2004년 ‘문예비전’ 수필 등단 ‘한국시학’ 신인상 동시 당선 한국경기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봉녕사에서 탄을 땐다 절에서 주문이 오는 날짜를 미리 가늠한다 기다리는 설렘을 느낀 날 오늘도 트럭 기사를 따라 면장갑을 끼고 조수석에 오른다 발끝에 삐죽거리며 굴러다니는 갈탄 시꺼먼 석탄 줄이 볼 가운데 연필 줄을 긋고 있다 트럭에 갈탄 조개탄도 거들어 올리고 내리고를 수없이 반복했던 시간들 봉녕사 입구에 들어서니 극락에 왔나 보다 싶다 젤 급한 화장실로 종종걸음 친다 해우소에서는 고요히 은밀히 웃을 수 있다 절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법당을 기웃거리며 두 손을 모아 본다 따뜻한 차 한 잔 건네주신 스님 석탄 값은 절대 외상이 없다 항상 천 원짜리 한 뭉치다 따뜻한 종무소 창문으로 바라본 봉녕사 풍경 난로 속으로 풍덩 들어간 까만 갈탄은 너와 나의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김연화안젤라 시인 2018년 ‘시와 표현’ 등단 시집 ‘개박골 포도꽃들이 앙등할 낀데’
오래된 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열반경을 듣는다 촘촘하게 둘러앉은 민들레와 꽃잔디 서성거리는 오색 연등 무언가 기도해야 할 것만 같은 대웅전 앞 연등의 그림자까지도 살아있게 하시는 그 분 절마당 한 귀퉁이에 나의 바람들을 내려놓았다 문연자 시인 2012년 월간문학세계 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학사편찬 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잘생긴 도자기들은 행인들에게 만남의 징표로 나누어주고 날 닮은 흠欠의 막사발은 들여다볼수록 정이 바알갛게 우러나 마음을 뗄 수가 없어 환갑 고희 희수 언덕을 넘어 설 때마다 소중하게 닦고 또 닦아 간직하네 정순영 시인 1974년 ‘풀과 별’로 등단. 부산시인협회장, 동명대 총장 역임. 시집 ‘사랑’ 외 13권. ‘한국시학상’ 등 다수 수상. ‘4인시’ 동인.
안양천 숨결이 어제보다 보드라워졌다 속살거리는 냇물 따라 눈웃음 짓는 버들강아지들 아, 겨울 땅 가슴 열어준 햇살 물 오른 나뭇가지 사이로 풀빛 바람이 불어온다. 이숙아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원 국제PEN 한국경기지역위원회 운영위원 시집 ‘그리운 이름’ 2025년 ‘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크렁크렁 얼음이 운다 물 위에 귀를 대고 숨을 고른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아직도 머물고 있는 이곳 정조대왕이 서릿발 위로 서걱 서걱 걸어오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서러운 넋이 되어 푸른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지금 아버지의 그리움 따라 길게 늘어진 행렬 화성 화산으로 이어진 그날에도 이 물은 그렇게 울었으리라 孝의 눈물은 호수를 이루고 울음은 오래된 책갈피 속에서 아직도 잠을 자고 있다 크렁크렁 만석거에서 얼음이 운다. *萬石渠 : 옛 수원사람들이 쌀 만 석을 생산하기를 바라며 조선 22대 정조 임금이 수원 송죽동 일원에 만든 저수지. 정겸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시집 ‘궁평항’ 등 4권 2017년 경기시인상 수상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더듬더듬 빈약한 나뭇가지 타고 올라가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린 호박처럼 언제나 아찔한 하늘이 내 앉을 자리 공중그네를 타고 높은 아파트 벽에 밥도 그리고 옷도 그리고 아이의 학원비도 그렸습니다 엄마 배속에서 6.25라는 전쟁으로 빼앗긴 안개 속 같은 아버지 얼굴 만나게 되면 나를 알아보실까 넙적한 등으로 덥석 업어주실까 앉을 자리 기웃대며 바람 따라 70여년 봄 햇살처럼 안겨온 아버지라는 이름 주렁주렁 링거 매단 채 가냘픈 모르핀 줄로 이어가며 입원실 창 밖 너머 아무렇게나 붉은 물감 붓질한 석양 속에 남겨질 내 아들의 얼굴을 자꾸 그려보고 있습니다 황영이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제5회 ‘시인마을문학상’ 수상
쉼 없이 흐르던 길 잠시 멈추고 한겨울 맑은 결정체 되어 내 안을 들여다본다 70여 년 흘러온 길 순리대로 거스르지 않고 왔는가 얼마나 맑고 고운 빛깔로 지나왔는가 물길 터주는 모든 주위에 감사했는가 이미 흘러간 시간에 미련과 아쉬움, 남기고 직립의 결정체로 머물며 이 겨울 더욱더 마음 다진다 아, 따뜻한 봄이 되면 더 맑은 소리 더 고운 빛깔로 바다를 향하리라. 심평자 시인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시인마을’ 동인
첫눈처럼 포근한 위로가 지친 마음을 감싸 안고 지난날의 무게도 잠시 내려놓는다 흘러간 계절은 후회가 아닌 배움의 진리, 그 길 위에 선 나를 새로운 빛으로 초대한다 저문 해를 뒤로 하고 한해의 끝자락을 접어 책갈피에 꽂아 놓는다 다시 시작을 위한 숨결 어둑새벽 지나 여명의 문 힘차게 열며 더 크게 웃고 더 멀리 날기 위해 해돋이 앞에 선다. 김옥희 시인 ‘문예비전’으로 등단 수원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말발굽 소리 새벽 가르며 보신각 첫 종 울리면 어둠은 물러가고 소망의 빛으로 역사의 첫 장을 여는 새해 시계추는 여전히 돌아가는데 온 세상은 새하얀 눈꽃으로 지난 과오를 덮어준다 서서히 밝아오는 태양 온 세상 희망의 메시지로 붉은 깃털 세우고 푸른 기운 천지 휘돌아 평화의 횃불이 새로운 역사를 엮어가는 번영의 닻 올린다. 붉은 말의 해 한 해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승리의 깃발로 걸어온다. 허정예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국제PEN한국본부 회원 시집 ‘詩의 온도’ 경기시인상·‘시인마을 문학상’ 수상'
엎드려 숨고른다 나날이 벅차던 꿈 적멸을 견뎌내는 발밑은 수묵화빛 능선은 칼바람에 느낌표로 일어서다. 이춘전 시인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회원
세상에 올 때 우리가 가지고 나온 작은 손 우리는 이 작은 손으로 한 세상을 삽니다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꽃과 나무를 가꾸고, 꿈을 꿉니다 또 우리는 이 작은 손으로 정을 나누고 사랑을 합니다 세상에 올 때 우리가 가지고 나온 이 작은 손 오늘도 우리는 이 작은 손으로 열심히 한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웃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빛나는 것임을 보여준 이 작은 손 우리는 알았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이렇게 작은 손들이 몰래몰래 만든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는 작지만 아름다운 손을 가졌습니다 맑고 빛나는 종교를 가졌습니다. 윤수천 시인 아동문학가 한국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수상 1976년 동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