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가 친 공이 외야로 높이 뜬 순간 박명이었다. 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시간 강변북로를 달리다가 창문을 열었다. 우리는 빛과 어둠을 가르는 지퍼처럼 대기를 찢고 달렸다. 당신의 바지지퍼는 아직 열려있지만 말을 하지 않았고, 난 말없이 입술로 그 지퍼를 물고 올렸다. 눈을 맞추고 부리를 비비며 구부러진 목으로 하트를 만드는 홍학처럼 난 나른하여 잠시 당신 어깨에 기댔다. 케냐의 나쿠루 국립공원 호수에는 홍학이 장관이라지. 핑크빛 노을 지는 하늘과 플라밍고, 물 위에 어리는 핑크 그림자. 그 속에선 붉은 피를 흘리고 쓰러져도 아무도 모를 거야. 발을 탕, 굴러 흙탕물이 생기면 물 위에 떠오른 먹이를 잡아먹지. 탕, 탕, 탕, 일제히 발을 구르면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강물 위로 떨어진다. 흘러갈 듯 흘러가지 못하고 흔들리는 저 불빛. 때론 격렬하게 때론 부드럽게 애무해도 소용없는 바람의 한숨 소리. 금세 어두워지고 난 꺼져 버려야겠어. 도움닫기를 내달리다 비상하는 홍학처럼 케냐의 나쿠루 호수로 날아가 피를 흘려야지. 자, 안전띠를 풀어버리고. 아무도 모를 거야, 정말 모를 거야. 외야로 날아간 그 공이 어느 지점에 떨어졌는지.... 박희연 2021년 상상인 신춘문예 등단. <제35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시 부문 장원. <국제융합예술대상> 작가상 부문 수상.
시골모퉁이 컨테이너 농막집 있을 건 다 있다네 씨름판만한 마당 올망졸망 작은 꽃밭 앙증맞은 태양광 전구가 어두운 밤 둘레를 비추고 철따라 빨강 노랑 보라 핑크 형형색깔들로 무더기 무더기 피어 향기의 향연 나플나플 오가는 이 붙잡네 가로세로 300에 230 컨테이너 한면 커다란 해바라기 두송이 살포시 날아 와 앉은 흰 나비 손님도 그려넣은 승화 시골에 예술품 등불이 고명분 충남 보령 출생. 의왕시 여성상수상 한국문인협회의왕지부회원 한국미술협회 의왕지부회원 한국편지가족경인지회회원
어린 시절 원곡역 앞에서 자전거에 치어 사랑니 하나 잇몸 속에 옆으로 누웠다 부모 가슴에 묻을 뻔하던 나는 살아나고 나 대신 죽어간 사랑니 그 자리에 묻혔다 죽어도 태자리 못 놓겠다는 사랑니, 윤연옥 시흥 출생. 인천문학상, 인천문화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시인마을 동인.
눈이 펑펑 내린다 눈을 맞으며 거짓을 버리고 용서를 빌라 하얀 눈앞에서 땅 위의 모든 것이 헛것이다 세상엣 것들은 눈 속에서 지워버려라 언젠가 눈길을 떠난 사람도 하늘빛으로 마음을 씻고 눈 속으로 돌아오리니 사랑 아니면 가진 것 다 묻어 버려라 사랑 때문이라면 언덕 위 나뭇가지에 목 매달아 죽어버려라 그러면 살리라 살아서 맨발로 사랑에게로 가리라 정순영 경남 하동 출생. 풀과 별로 등단. 시집 시는 꽃인가 사랑 외 7권. 부산문학상, 봉생문화상, 한국시학상, 현대문학 100주년기념문학상 등 수상. 부산시인협회 회장, 자유문인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동명대학교 총장 역임. 경기시인협회 부이사장. 4인시동인.
나는 작고 약한 사람. 그래서 가벼운 사람. 그러니 나더러 가볍다고 나무라지 마셔요. 어려서부터 나는 늘 바람을 닮고 싶어 했기 때문이에요. 바람이 무거우면 바람일 수가 있나요? 오, 바람의 가벼움이여. 도저히 닮을 수가 없는 나 어릴 적 꿈이여. 주광일 법학박사, 변호사(한국, 미국 워싱턴 DC), 국민고충처리위원장,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세종대석좌교수 역임, 시집 저녁노을 속의 종소리 유형지로부터의 엽서. 가장 문학적인 검사상(한국 문협) 수상.
루돌프처럼 콧등에 불 켠 핑크빛 코가 유난히 빨갛게 보이는 흰 눈 내린 산타의 겨울 온 동네에 앙증맞은 발자국만 남기고 사라진 빨갛게 물든 코 루돌프 고양이 흰 눈 내린 언덕 너머 아이들에게 코ㅅ 등불을 켜고 나도 몰래 크리스마스 선물 주러 갔나? 최단아 아동문학가. 번역가. 미국 뉴욕주립대 커뮤니케이션 학사. 아동문학평론 동시 당선. 도서출판 서정시학 대표.
욕실 벽에 매달린 해바라기 샤워기가 구멍 촘촘 물방울 머금고 있다 햇빛과 바람만이 끼니의 전부이던 때 온통 그을려야 생이 여문다 믿었던 적 있다 품었던 씨앗들을 모두 탈골해 버리고 꺾어진 목으로 바닥을 향한 해바라기 반 평짜리 부스에서 고개 떨군 채 욕실 벽 파고든 제 밑동을 쳐다본다 벽 속 숨겨진 저 물관 따라가면 눈물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을까 땡볕 속 그늘나무 곁을 에돌던 그 사람은 어디에 도착해 있을까 빈집에 남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불혹을 넘어서도 가진 것은 눈물뿐 몸속의 누수를 감추고 또 감춰야 했던 쭉정이의 시간이 거울에 남는다 햇볕과 바람만이 끼니의 전부이던 시절에는 결코 울지 않겠다고 버티던 그녀의 눈물샘에 그렁그렁 물방울이 맺혀 있다 정윤서 1973년 여주 출생 방송통신대 법학과 졸업 2020년 미네르바 등단
바람 불 때 홀로 길을 나설 일이 아니다. 어느 쪽으로 갈까 하다 문득 그리워지면 몸 밖에서 안쪽으로 타오르는 작은 불씨 마음에 안 가본 길 내며 살아 볼 일이다. 길 잃고 내려온 그대 쉴 자리 안내해 주고 물 냄새 실어와 포근한 저녁 베풀 일이다. 꽃 필 때 길 잃은 그대와 함께 울 일이다. 심금을 울리는 연극 대사에 감동할 일이다. 온 세상이 바람에 휩싸인다 하여도. 십자가 산딸나무 꽃이 피면 그대 생각한다. 언젠가 때 되면 바람의 옷고름 붙들고 피아노 소리에 꽃대 젓는 산딸나무 아래서 그대가 길을 잃지 않도록 사랑할 일이다. 김영진 2017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달보드레 나르샤, 옳지, 봄, 항아리 속의 불씨. 아라작품상,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막비시동인.
서릿바람 눈 흘기며 옆구리를 스친다 화들짝 놀라 붉히는 얼굴 발목 시린 배추벌레 꼬물꼬물 등 돌리며 파고든다 겉잎과 속잎 사이 눈길 주며 산발한 무청 만삭의 여인처럼 잉태한 가을 논밭을 건너온 입동 추위는 생의 여정을 소금물에 절여간다 다닥다닥 온 집안 도마소리 들어차고 손끝 맛이 스며드는 순간 붉게 숙성되어 내 안에 피는 김치꽃 혀끝 감각이 화끈거리고 한데서 얼어붙은 종아리 겨울 털옷 기다린다 조병하 국보문학으로 등단 시인마을 동인.
서울 성북2동 언덕배기 숲속에 자리한 길상사 대연각 요정 안주인의 화려한 웃음 뒤에 깊게 간직된 내 재산 천억이 백석의 시 한줄 보다 못하다는 백석을 향한 사랑 몽땅 불심에 바친 자야 김영한 법정 스님은 83세 그녀의 생을 길상사 뜨락에 상사화 붉은 그리움으로 피어 백석을 기리게 했다 염주 한 알 한 알에 그리움 쌓고 향불 피어오르는 연기에 외로움 사르며 목탁 소리로 마음 추슬렀을 그녀 무소유의 뜻 기린 공덕비 앞에 국화꽃 한 다발 노랗게 그리움 피워내며 그녀의 미소가 맑고 향기롭게 길상사 가득 퍼지고 있다 심평자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 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 인마을 동인.
오늘도 저 나무는 강가를 떠나지 못한다 뽑힐 수 없는 숙명의 뿌리 줄기에 가지 뻗고 잎 내지만 강물에 뜬 달 바라만 볼뿐 그 자리 장승처럼 서서 불면의 밤 수없이 너를 보냈는데 여전히 네가 그 자리에 서 있다 버틸 의지도 감당키 어려워 대양을 건너 국경 너머까지 치닫는 달빛의 고민 바로 그곳엔 세상 만상을 지은 스스로 존재하는 이가 계시어 그곳으로 너를 보낸다. 하옥이 시집 숨겨진 밤 외 다수. 소설 찢어진 그물 외 다수. 월간 신문예 주간. 도서출판 책나라 대표.
외투 누구나 살면서 가슴에 대못 하나쯤 박고 살게 마련이다. 그걸 숨기기 위해 사람들은 녹이 슨 못 위에 자신의 화려한 외투 한 벌을 걸어둔다. 하재일 1961년 충남 보령 출생. 공주사대 국어과 졸업. 1984년 불교사상으로 등단. 만해불교문학상, 시흥문학상 수상. 시집으로동네 한 바퀴, 달마의 눈꺼풀등 다수.
하늘거리며 색색으로 핀 꽃잎들 가느다란 허리에 하늘로 고개를 들어 실바람에 푸른 향기를 싣고 노란 단풍잎을 따라 언덕가에 나부끼는 사랑의 빛깔 해마다 새롭게 핀 꽃잎 푸르게 눈부신 날에 소녀의 순정이란 꽃말처럼 실바람에 푸른 향기를 싣고 그대를 기다리는 듯 길너머로 나부끼는 사랑의 빛깔 이철수 시집 섬 하나 걸어두자, 자전거를 타고 온 봄. 경기도문학상 우수상2022수원문학인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경기도문인협회 회원. 수원문인협회 이사.
6월의 담벼락은 샤넬 No. 5 거리의 장미들은 몸 전체로 향을 피워내는 법을 안다 불가리아 벌판에서 자라 손가락 긴 파리지엥의 귓불에서 증폭될 흑장미들은 모른다 마을버스의 승객들과 인사하는 법 가슴 속에 피어 종점까지 길게 향을 간직하는 법 장미의 마을에서는 소음도 향이 된다 코로나로 닫혀있던 학교 문이 장미의 계절에 열리고 꽃보다 향이 깊은 아이들은 아름다운 소음을 뱉어낸다 이야기를 먹고 자란 장미들은 사춘기의 하굣길을 훌쩍 키 크게 한다 그래서 길에서 자란 장미들은 뜨거운 햇살에도 시들지 않는다 울타리를 넘어온 장미에 취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소녀가 스틸 컷이 되어버린 모퉁이 노선버스들은 장미 향을 담기 위해 빈 차로 왔다 최병호 1966년 전남 해남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열린시학 2021년 신인작품상 등단.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주문을 읊조리며 붉고 둥근 무늬를 만든다 매만져 뭉친 메주가루가 스르르 풀릴 때쯤 한 줌의 소금으로 촘촘히 마음을 다잡는다 알싸한 소주도 화룡점정, 사과청도 고춧가루와 하나로 섞여 버무려질 때 주걱이 만든 둥근 무늬에서 나를 보았다 풋내나는 매움은 소금으로 다스리고 휘청이던 부패된 기억은 휘발되어 제법 깊었다 단지에 정성껏 이름을 붙여본다 2021년 10월 첫 장을 담그며 삶을 보았네 전혜진 한국시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수원문학아카데미 시인마을 동인. 시니어 글그림책 쑥부쟁이 발간.
도토리 구르는 갈참나무 숲에 충주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위에 외딴집 맨드라미 백일홍 과꽃 가을꽃이 한창이다. 빛깔로 녹아내린 고운 그리움 비켜가는 바람 겨우 붙잡고 등이 활처럼 굽은 은빛머리 할머니 따사로운 햇볕에 가을을 줍는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 할머니 손맛담긴 된장 익어가는 냄새 마당가득 널려있는 새빨간 고추 노을빛에 걸려있는 능선 오르며 어머니 생각나 겹겹이 파고드는 외딴집 할머니 양길순 2015년 새 한국 문학회 등단. 경기시학 회원, 경기여류 문학 회원. 수원 아카데미 회원
가을의 노래 가을은 한 잔의 붉은 와인이다 동동거리던 가을 햇살을 붙들어 앉히고 느긋하게 식탁에 함께 앉는다 투명한 크리스탈 잔에 가을을 가득 따른다 하나의 조그만 점으로 세상에 던저져 홀로 잿빛 눈속을 뚫고 가장 연약한 연둣잎으로 태어났다 올망올망 형제 매단 채 붉게 이글거리던 염천의 여름날 믿었던 가지들도 떨어져 나가고 땅을 버티고 서 있기조차 버거웠던 태풍의 눈을 견디어 낸 나날 한 방울의 와인은 붉은 보석이다 사는 일도 참아내어야만 숙성된 와인처럼 달콤 쌉싸름하다 가을은 뜸을 푹 들여 윤기 찰기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처럼 익히는 계절 잔을 높이 들어 잔 속의 와인을 흔들어본다 붉은 보석이 반짝인다 황영이 국보문학으로 등단. 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나의 아버지 붙잡아도 가는 세월 작은 돌멩이에 부딪쳐도 지팡이 하나면 만족한 듯 하루를 살고 계시다 하늘의 빛은 오늘도 빈틈없이 대지 위에 스며든다 근심이란 단어 따듯한 심장을 아프게 하고 손등은 갈퀴 만들고 어깨엔 땀방울이 모여 흙냄새가 배여 있고 달빛에 친구되어 빛바랜 일기장된다 막걸리 마시며 비틀거리는 한잔 술에 취한 나그네 같아라 아버지의 삶은 힘들고 먼 길 뿐 고독한 아버지의 인생 돌아서서 흘린 눈물의 가치 사랑의 고귀한 나의 눈물이었다 장경옥 수원 출생. 국보문학으로 등단. 시집 파꽃 한국문인협회ㆍ국제 PEN한국본부ㆍ한국경기시인협회 회원. 시인마을 동인.
장미에게 심현식 너는 당연해 가시를 품고 있어야해 은장도를 품듯이 은장도 품고서 쓰러지듯이 너는 외로워야해 이 세상 혼자인 듯이 아무것도 의지 없는 세상인 듯이 우뚝 솟아 있는 장미 그 모습 그 향기는 교만이 아니야 네가 너를 지키는 눈물인 거야 죽을 때나 홀로 부를 네 이름이야 심현식 시인 심현식 시인 / 한양대학교 음악대학(기악 Flute 전공)졸업, (사)한국서도협회 초대작가, 수요 시학당 회원, 연지당 문학회 회원,인간과 문학과 회원 작품집 강물처럼 흐르다, 2020년 봄이 없다, 호머 스크립툼 공저, 시집시간이 나를 데리고 가듯이, 그 찻집 로젠켈러
우아한 몸짓으로 일천 갈래 햇살 무희 걷잡을 수도 없는 물비린내 같은 사랑 설레는 구름을 감고 그리움이 솟는다 한국문학협회국제 PEN한국본부 이사. 화백문학경기지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시집 시 짓는 여자 외 5권. 시조집 여백에 담다, 계단오르기, 수연꽃꽂이 작품집 2권. 한국전통꽃꽂이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