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는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구연부 지름 8.0㎝, 밑지름 8.5㎝다. 현재는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다. 이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 입은 피해로 추정된다. 구연부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 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눠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했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년)을 위해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 민애왕의 행적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원익 초상은 오리 이원익(1547~1634)이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된 것을 기념해 제작된 것으로 같은 해 조성된 청난공신과 선무공신의 도상에 비해 사모의 모양이 다소 변한 것으로 미뤄 책록된 시기보다 몇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초상의 주인공인 오리 이원익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 본관은 전주이며 태종의 아들 익녕군 치의 현손이며 이억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9년(선조 2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유명하다. 초상의 형태는 축으로 장정돼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으로 오사모에 흑단령을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사모의 양쪽에는 운문이 들어가 있다. 얼굴에는 음영 효과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이목구비의 형용은 선묘 위주로 돼 있으며 족좌대 위에 흑피혜와 채전이 깔려 있어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심복사 능인전 안에 모셔진 이 불상은 고려 말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노인(千老人)이 덕목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 전해진다. 불상 모실 곳을 찾아 옮기던 중 광덕산에 있는 지금의 심복사 자리에 이르자 갑자기 무거워져 여기에 모시게 됐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낮게 표현돼 있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 귀가 크고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깃과 소매깃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배 부분에는 안에 입은 옷을 묶은 띠매듭이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됐으며 옷주름은 규칙적인 계단식 선으로 나타내 단조롭고 형식적이다. 다소 둔중한 느낌도 있지만 안정되고 단정한 모습의 이 불상은 전체적인 조형이 도식화된 것으로 미뤄 10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사화가 일어난 기묘년을 전후해 친구, 동료들이 안처순(1492~1534)에게 보낸 편지글을 묶어 만든 것으로 거의가 기묘사화에 연루된 인물의 글이다. 안처순은 고려시대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안향의 9대손으로 예문관검열, 홍문관박사와 구례현감 등을 거쳤다. 편지글을 모아 놓은 이 글씨첩은 안처순이 살아있을 당시 중종 12년(1517년)에서 중종 26년(1531년)에 이르는 15년간 그의 동료 12명으로부터 받은 편지 39통을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으로 3면부터 72면에 걸쳐 수록돼 있다. 수첩의 첫 머리에는 한준겸의 식문이 실려 있고 첩 끝에는 조광조의 후손인 조성교가 이 첩에 대한 감회 및 경위 등을 서술한 발문이 있다. 이는 기묘사화에 관련된 명현의 글과 필적이 집결돼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서화(書畵)는 물론이고 기묘사화 연구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중국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두보의 시를 성종 때 홍문관의 유윤겸 등이 왕의 명을 받들어 한글로 번역해 편찬한 책이다. ‘두공부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두보가 공부원외랑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며 ‘분류’는 중국 송나라의 분문집주두공보시(分門集注杜工甫詩)를 참고해 따온 것이다. 초인본의 조위가 쓴 서문에 의하면 성종 12년(1481년) 가을 왕의 명을 받아 한글 번역에 착수해 그해 12월 완성했고 본권 13의 인본을 보면 을해자, 중자 및 소자 그리고 한글 활자로 찍었는데 인쇄가 깨끗하지 못한 편이다. 한글로 표현된 유창한 문체와 풍부한 어휘 등으로 볼 때 국문학과 국어학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북 안동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뒀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년)을 뜻하지만 이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봐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일대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백자지석 6장이 석함에 담긴 채 2001년 5월18일 묘역을 사초하던 중 윤번의 부인인 인천 이씨의 묘 앞에서 발견됐다. 인천 이씨는 세조의 장모이자 정희왕후의 어머니인 흥녕부대부인이며 묘지에는 경태 7년 병자년인 1456년 7월14일 대부인이 졸하여 10월8일 예를 갖춰 매장했다는 장례 경위와 생전의 덕행, 가계 및 후손들의 현황 등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청화백자의 제작 시기 중 가장 이른 시기로 청화백자의 개시 시기와 청화백자 편년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다.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는 후대에 제작된 백자지석들에 비해 크기가 크고 뉘어 번조하던 양식과는 달리 세워 번조한 것으로 여겨져 제작 기술면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이다. 종이바탕에 4행으로 썼으며 근대에 족자로 장황됐다.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의 1966년 발문이 있다. 한편 어필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이란 스님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 있다. 유산이 소재한 칠장사는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한 1623년에 인목왕후가 친정아버지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당으로 삼아 중창한 사찰이다. 이처럼 모각된 어필의 원적(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특히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권근이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저술한 성리학 입문서로 전집 단간본과 전·후집 합간본 두 가지가 있다. 권근은 공민왕 17년(1368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조선을 개국하는 데 공이 커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이 책은 전집에 ‘천인심성합일지도’ 등 26종, 후집에 ‘십이월괘지도’ 등 14종의 도설이 실려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도설로 평가받고 있는 천인심성합일지도는 성리학의 중심 개념인 태극, 천명, 이기, 음양, 오행, 사단, 칠정 등의 문제를 하나의 도표 속에 요약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와 각각의 특성을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도설은 후대에 이황과 정지운의 ‘천명도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국가유산청 제공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 승려 지공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됐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 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둬 신라 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기본형이 사각인 형태로 삼국시대 이래 고유의 팔각 석등 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미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벽암록은 중국의 5대 종파 중 하나인 임제종에서 최고의 지침서로 꼽는 책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수행에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닥나무에 볏짚을 섞어 만든 누런 종이에 을유자(乙酉字) 가운데 중간 크기의 글자로 찍은 것이며 크기는 가로 19㎝, 세로 28.3㎝다. 을유자는 세조 11년(1465년) 구리로 만든 활자인데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유자라 부른다. 이 책은 설두 스님이 도를 깨치는데 있어 참고가 될 만한 좋은 글 100여편을 뽑아 시구로 엮은 것을 환오 스님이 시문에 대해 평가해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이다. 처음 책이 만들어지고 나서 선(禪)을 흉내만 내고 그저 외우기만 하는 것을 우려해 불태웠는데 장명원이란 사람이 다시 간행해 유통됐다. 벽암록 판본은 우리나라 선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줬고 이 책은 현재 전하는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전권이 빠짐없이 남아 있는 완전본이란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국가유산청 제공
감지은니 보살선계경 권8은 보살 수행의 방법을 폭넓게 설명한 경전이다. 이 책은 유송(劉宋)의 구나발마(求那跋摩)가 번역한 ‘보살선계경’ 9권 가운데 제8권이다. 종이를 길게 이어 붙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었으며 펼쳤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 가로 1.3m다. 책 끝에 있는 간행기록을 통해 고려 충렬왕 6년(1280년)에 왕이 발원해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간행한 대장경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안성시 소재 청원사의 삼존불을 금칠할 때 불상 속에서 나온 것으로 그 출처가 확실하며 보존 상태도 양호한 귀중한 책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삼존불비상(三尊佛碑像)은 현재 동국대에 있는 것으로 충남 공주시 정안면에서 전래돼 오던 연기 일대의 불상 양식 계열에 속하는 삼존불(三尊佛)이다. 본존의 얼굴이 약간 손상됐지만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둥근 얼굴에 당당한 체구를 가져 중후한 인상을 준다. 옷은 양 어깨에 두르고 있으며 가슴 앞에 띠매듭이 보인다. 왼손은 아래를 향해 내리고 오른손은 위를 향하고 있는데 손가락을 모두 구부리고 있다. 본존불 양 옆에 서 있는 보살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몸에는 구슬 장식을 하고 있으며 양손을 모두 들고 있는데 본존불 쪽의 손에는 화반을 들고 있다. 연기지방의 불비상(佛碑像: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을 조각하거나 글을 적은 것)과 같은 양식이지만 본존의 양감 있는 표현과 보살상의 자세를 볼 때 조금 진전된 7세기 말의 작품으로 보인다. 국가유산청 제공
정조필(正祖筆) ‘파초도(芭蕉圖)’는 조선시대 정조(재위 1776∼1800년)의 그림으로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파초를 그렸다. 정조는 시와 글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 그림은 가로 51.3㎝, 세로 84.2㎝로 단순하면서도 균형적인 배치를 보여준다. 먹색의 짙고 옅은 정도 및 흑백의 대조는 바위의 질감과 파초 잎의 변화를 잘 표현했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 정조의 호인 ‘弘齋(홍재)’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다. 형식에 치우치지 않은 독창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이 그림은 글씨와 그림 및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모습과 남종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정조필 국화도(보물)와 함께 조선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 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였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년) 8월6일 돌을 골라 827년 2월30일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성종 20년(1489년)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항아리로 소나무와 대나무를 그렸다. 크기는 높이 48.7㎝, 입지름 13.1㎝, 밑지름 17.8㎝다. 아가리가 작고 풍만한 어깨의 선은 고려시대 매병(梅甁)을 연상케 한다. 어깨로부터 점차 좁아져 잘록해진 허리는 굽부분에서 급히 벌어져 내려오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같은 형태로는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와 순백자 항아리를 비롯한 몇 예가 있다. 조선시대 궁중의 연례를 비롯한 여러 의식에서 꽃을 꽂아둔 항아리로 사용된 듯하다. 문양은 아가리 부분에 연꽃 덩굴무늬를 두르고 몸통 전체에 걸쳐 소나무와 대나무를 대담하게 구성했다.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청색의 농담으로 회화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이 항아리는 오랫동안 지리산 화엄사에 전해져 왔던 유물인데 두 번이나 도난당했던 것을 찾아 동국대 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주둥이 안쪽에 ‘홍치’라는 명문이 있어 만든 시기가 분명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안중근의사 유—운재’는 안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뤼순감옥에서 1910년 3월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지정한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 일본에 경계, 어떤 사람의 당호를 써준 것 등이다. 그중 ‘안중근의사 유묵—욕보동양선개정계시과실기추회하’는 뤼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오리타타다스가 받은 것으로 그의 가족이 조카에게 넘겨줬고 그것이 1989년 2월20일 단국대에 기증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보협인탑이란 ‘보협인다라니경’을 그 안에 안치해 붙여진 이름이다. 종래에 볼 수 없던 특이한 모습인데 중국 오월(吳越)이라는 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오월국의 마지막 왕인 충의왕 전홍숙(錢弘淑)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8만4천기의 탑에 나눠 봉안했다는 고사를 본떠 금, 동, 철 등의 재료로 소탑 8만4천기를 만들고 그 속에 일일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탑을 보협인탑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이 석조 보협인탑이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전면에 조각이 가득한 이 탑은 중국 보협인탑의 영향을 받은 듯하고 외형도 거의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보협인석탑으로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년)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등과 비교할 만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 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했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국가유산청 제공
원래 창리지역 과수원 안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이나 그 느낌이 독특하다. 아래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새겨져 있는데 움푹한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당시의 조각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각 부분의 재료가 두툼해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며 아래 기단의 안상이나 3단의 지붕돌 밑면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