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했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돼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했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해 영조 40년(1764)에 공인됐다. 윤관 장군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용주사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은 목판 42판, 동철판 7판, 석판 24판 등 세 종류가 있다. 모두 73판으로 1796~1799년 조성됐다. 이 경판들은 정조의 명으로 조성돼 주자소에 내입(內入)됐다가 화성 용주사에 보내진 기록이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수록돼 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은 매우 정교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변상도에는 단원 김홍도의 화풍이 고스란히 살아 남아 있으며 본문은 당대의 명필인 오수 황운조 서풍의 명품 경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는 정조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혼심을 쏟아 조성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종류의 경판은 당대 최고 장인의 예술성까지 곁들여져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보존 상태가 온전하다는 점, 18세기 말의 국어사 자료가 된다는 점 등에서 가치가 충분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 말의 승려인 나옹 화상(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나옹은 1344년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했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지에서 은거하다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뒀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 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다. 국가유산청 제공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년) 안성에서 출생해 10세에 출가했으며 17세에 융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비는 비받침인 귀부(龜趺)와 비몸돌, 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문종 14년(1060년) 세워진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 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하진은 조선 중기의 문인·명필로 본관은 여주, 자는 하경, 호는 매산·육우당이다. 소릉 이상의의 손자이며 이지안의 아들이다. 1666년 문과에 급제해 대사간, 대사성,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하진 후손 댁에 전래하는 것으로 표지에 ‘천금물전’이라 쓰고 오른쪽에 ‘공십(共十)’이라 쓰여 있어 전체 10첩임을 알 수 있다. 글씨는 여러 크기의 해서, 행서, 초서로 쓰여 있다. 해서는 왕희지의 소해(小楷)를 기본으로 했으나 획이 좀 무르고 짜임이 늘어진다. 행서는 해서를 흘려 쓴 정도인데 좀 거친 편이다. 이에 비해 초서는 매우 가는 획으로 원필(圓筆)의 분방한 필치를 보여주는데 서풍은 황기로의 필법을 배운 숙부 청선 이지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 교서는 선조 37년(1604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왜군과 대적해 크게 이기고 정유재란 때 통제사가 돼 적선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전사한 원균(1540∼1597)에게 공신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신교서다. 내용은 왜군을 물리치고 장렬하게 전사한 원균에게 사후에도 그 후손들을 계속해서 보살필 것임을 밝히고 노비 13명, 전 150결, 은 10냥, 옷감 1단, 말 1필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교서와 함께 있는 치제문은 선조 38년(1605년) 정월 18일 임금이 의정부좌찬성으로 증직된 원균의 영전에 그의 죽음을 기려 제사를 지내게 한 글을 담은 문서다. 이 교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운 원균 장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미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 도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기와 조각이 발견되며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년)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석 받침 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 있는 단출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浮石寺) 주지를 거쳐 명종 8년 53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왕이 크게 슬퍼해 국사(國師)로 삼고 시호를 ‘현오(玄悟)’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했다. 국가유산청 제공
참법이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을 말하며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삼는 것을 미타참법(彌陀懺法)이라 한다. 이 책은 미타참법의 절차를 수록한 것으로 성종 5년(1474년)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이다.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공혜왕후 한씨뿐만 아니라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종친 등의 직책 및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어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펴내는 데 동원된 사람이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고 이들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목판 인쇄기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국가유산청 제공
고려의 승려 제관이 천태사상을 집약해 정리한 것으로 이론과 실천이 같이 어울려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2권의 책 중 상권 1책이며 크기는 세로 24.5㎝, 가로 16.5㎝다. 책 끝에 있는 목암노인이 쓴 글에 의하면 오래된 판본이 있었는데 글자가 크고 책이 무거워 휴대하기 불편해 굉지대선사(宏之大禪師)가 수여(水如)에게 다시 쓰도록 해 충숙왕 2년(1315년) 기복도감(祈福都監)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기복도감에서 다소 뒤에 찍어 낸 판본이지만 본문이 완전하게 판독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우리나라 고승이 쓴 책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게 평가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고려 후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의 사리탑으로 3단으로 이뤄진 기단(基壇)위로 탑신(塔身)을 올린 후 독특한 모습의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의 맨 밑단이 되는 사각의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겼으며 그 윗면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무늬를 새겼다. 팔각의 가운데받침돌은 각 모서리에 원기둥을 새긴 후 면마다 큼직한 꽃무늬를 새겨 장식했다. 원형에 가까운 윗받침돌은 굵은 선으로 연꽃을 새겼고 꽃잎 안에 고사리 무늬를 뒀다. 탑신의 몸돌은 원형으로 위쪽이 좁아져 지붕돌 밑면에 들어맞게 돼 있다. 지붕돌은 처마가 거의 수평을 이루며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투박하게 솟아 있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있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의 건립이 고려 우왕 11년(1385)이므로 이 사리탑은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시대에는 70세가 넘은 신하에게 공경의 뜻으로 나라에서 지팡이 ‘장(杖)’과 의자 ‘궤(几)’와 가마 등을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에 따라 왕이 내린 물품이다. 현종 9년(1668년) 11월 왕이 당시 원로대신인 이경석에게 공경의 뜻으로 내린 궤 1점, 장 4점, 이를 받는 장면을 그린 그림 1점 등 총 6점의 유물이다. 궤장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잔치를 열었는데 의정부의 동서반을 비롯한 대신들을 참석하게 하고 예문관이 작성한 교서를 낭독하게 했다. 이 그림은 바로 이런 장면을 세 부분으로 나눠 그린 것이다. 궤장은 조선 중기 국가에서 운영하던 공전에서 제작된 것으로 그 당시 제작 규정과 양식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공예품이며 ‘연회도첩’은 당시 풍속도로 회화적 가치가 큰 작품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사인비구가 1674년 만든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법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으로 사인비구가 김룡사 종, 수타사 종(1670년)을 제작한 이후 완숙한 기량을 발휘한 수작인 점에서 조선 후기 장인 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엄경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는 화엄종의 근본 경전이자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 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고려 현종(재위 1011∼1031년) 때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두루마리처럼 말아 보관할 수 있다. 초조대장경은 이후 만들어진 해인사대장경(재조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목판의 새김이 정교한 반면에 해인사대장경과 글자 수가 다르고 간행 연도를 적은 기록은 없으며 군데군데 피휘(문장에 선왕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글자의 한 획을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것)와 약자(略字)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중 유일한 권 제1로 11세기경에 찍어낸 초조대장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오명항(1673∼1728)을 그린 초상화 1점과 1등공신으로 책록하는 교서 1부 및 그것을 담았던 나무상자 1점 등 3점의 유물이다. 오명항은 숙종 31년(170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좌랑, 병조판서, 우의정까지 올랐던 인물로 영조 3년(1727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봉해졌다. 초상화는 가로 1.03m, 세로 1.74m로 비단 채색의 전신상이다. 가슴에 수놓은 두 마리 학의 모습에서 공신책록 후에 그린 전형적인 공신도다. 높이가 높은 사모와 호피가 깔린 의자, 팔(八)자로 벌린 발 모습에서 당시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교서는 가로 289.5㎝, 세로 42.9㎝로 닥나무로 만든 바탕에 비단을 배접해 만들었다. 반란을 진정시킨 공로를 인정해 1등공신 1명, 2등공신 7명, 3등공신 7명을 공훈한다는 글과 이름이 들어 있다. 교서의 좌우에는 나무로 축을 부착해 말아 두게 했고 뒷면에는 신치근이 만들고 조명교가 글을 썼다는 명문이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한반도에서는 처음 발견된 각룡류 공룡(일명 ‘뿔공룡’) 화석으로 중생대 전기 백악기(약 1억2천만년 전)에 각룡류 공룡이 한반도에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2022년 10월7일 공룡 골격 화석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살아있을 때의 전체 길이는 약 2.3m로 추정되며 계통발생학적 연구 결과 이족보행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각룡류의 걸음걸이 진화(이족보행에서 사족보행으로 진화) 과정을 규명하는 데 있어 초기(원시적인) 각룡류의 보행 특성을 이해하는 중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최초 발견된 각룡류 화석으로 국제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Koreaceratops hwaseongensis)’, 즉 ‘화성에서 발견된 한국 각룡류 공룡’이란 뜻으로 명명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삼각산(三角山)은 북한산의 중심으로 백운대(835.6m), 인수봉(811.1m), 만경대(800.6m)로 구성된다. 이들은 쥐라기에 생겨났으며 여러 모양의 화강암 돔들이 수려하다. 산 사면의 경사는 70도에 달하고 백운대 정상에는 약 500㎡의 평평한 곳이 있어 등반객과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만경대의 옛 이름은 국망봉이며 정상부의 산세가 불규칙하다. 고구려의 왕자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본 곳이 삼각산이며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 후보지를 찾아다닐 때 백운대와 만경대에 이르러 비봉에 오르니 비석에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에 이른다’라고 씌어 있어 길을 바꿔 내려가 궁성터(오늘의 경복궁)를 정했던 곳이 바로 이 산이다. 조선시대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가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를 읊은 곳이기도 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회양목이 위치한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쌍릉으로 원래 양주의 건원릉 서쪽에 있었으나 1673년(현종 14년) 현재의 위치로 천장했다. 이 같은 재실 공간 내에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준다. 이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노거수이다. 1673년 조성한 효종 영릉 재실에서 300여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 및 역사성이 매우 깊다. 국가유산청 제공
‘협주명현십초시(夾注名賢十抄詩)’는 과거시험 준비생들의 수요를 염두에 두고 권람의 교정을 거쳐 간행한 중국과 한국(신라)의 시인 30명의 시선집이다. 내용은 각 시인의 작품 중에서 칠언율시(七言律詩) 10편씩 총 300편을 뽑아 주해를 붙인 것이다. 이 책은 경상도 밀양부에서 간행한 지방관판본으로 한국인이 그 대상을 선정하고 직접 주해한 최초의 한중시선집으로 매우 귀한 사례에 속하는 책이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고려 말 조선 초 서적의 유통과 문화 수용의 양상, 한시의 학습과 활용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광주(현재 하남시) 미사리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미사리는 원래 한강에 있는 섬이었으나 조정경기장이 만들어지면서 육지쪽과 연결됐다. 1962년 발견됐고 1980년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서울시내 4개 대학이 합동 발굴했다. 현재 지표로부터 7개의 자연층위로 이뤄졌는데 삼국시대 전기층, 청동기시대층, 신석기시대층으로 구분된다. 청동기시대층에서는 여러 점의 무문토기와 돌도끼, 돌끌, 돌그물추, 그리고 당시의 집터가 확인됐다. 신석기시대층은 주거지와 빗살무늬토기, 그물추, 화살촉, 돌도끼를 비롯한 생활도구와 불에 탄 도토리가 채집됐다. 신석기시대층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측정 결과 5천253±140년 전으로 나타났다. 미사리 선사유적은 각 시대의 생활도구 및 집터가 발견돼 중부지역 선사문화 연구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 선사문화 연구에도 중요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1458년 세조가 금강산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와 같아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했다고 전해온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했다. 사계절 연중 내내 일출, 일몰, 운해 등 어느 시간이라도 아름다운 전망을 지녔다. 정약용은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던 곳이며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중 독백탄은 현재의 양수리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 그 시대의 명승지와 현재의 경관을 비교할 수 있어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