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제작된 우리나라 지도이다. 크기는 가로 61㎝, 세로 132㎝이다. 3단 형식으로 윗부분에는 ‘조선방역지도’라는 제목이, 중간 부분에는 지도가, 아랫 부분에는 지도 제작에 관련된 사람들의 관직·성명 등이 기록돼 있다. 지도에는 조선 팔도의 주현(州縣)과 수영(水營) 및 병영(兵營)이 표시됐는데 특히 각 군과 현마다 색을 다르게 하여 알아보기 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산과 강의 경계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도의 형태는 지금의 전국지도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북쪽으로는 만주지역을 남쪽으로는 대마도까지 표시해 조선 전기 영토의식을 엿볼 수 있다. 명종 12년(1557)∼명종 13년(1558)경 제작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일본에 유출돼 대마도에 보관됐던 것을 1930년대에 입수했다. 이 시기 우리나라 지도의 제작 수준 및 형식을 알 수 있어 더욱 가치 있고, 만든 이와 연대가 확실한 작품으로 다른 지도의 제작 시기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제공
한미수호조규는 1882년 4월6일 미국의 슈펠트 제독과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 간에 체결되었다. 조약체결 장소는 아펜젤러 목사가 서술한 ‘슈펠트의 회고’라는 글 가운데 해관 관리관 사택 부근에 천막을 치고 체결했다고 언급하면서 미국이 영사관부지로 선정했다가 해관에 양도했던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제물포지도가 2013년 세관에 근무하는 연구자에 의해 발견되면서 해관 관리관의 사택이 자유공원 청일조계경계계단 위쪽, 현재 결혼식장이 들어선 자리로 밝혀지면서 그동안 조약 체결지로 주장되던 화도진설, 올림포스 호텔설 등이 오류임이 확인되었다. 1962년경 선교방송 한국복음주의극동방송국(HLKX)이 학익동에 있던 연주소와 송출소를 분리, 이곳에 연주소를 신축해 이전했다. 1966년 12월23일, 방송국 개국 10주년을 맞아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에 새 청사를 완공해 이전했다.
조선 제24대 왕인 헌종(재위 1834~1849년)이 효정왕후와 가례를 치른 후 진하장면을 그린 궁중기록화다. ‘헌종가례진하도병풍’은 총 8첩으로 구성돼 있다. 극세필에다 진채로 이뤄진 대폭의 가례도는 회화사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167년 전의 궁중혼례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의선당은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되면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우, 즉 사당 같은 곳으로 화교들이 이국땅에서 단합하고 전통 종교와 문화를 지키며 자신들의 안녕과 사업 번창을 기원하기 위한 장소다. 황합경이란 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며 건립 시기는 화교 상인들이 건너오기 시작한 1884년 이후로 추정한다. 본전 중앙에 관우신단과 관음신단 등 5개의 신단이 모셔져 있어 민속과 종교가 혼합된 사당임을 알 수 있다. 인천시화교협회 지정문화재 제1호이다. 최근 의선당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앞면에 ‘인천의선당지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선조가 직접 써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송언신(1542∼1612)에게 남모르게 보낸 서찰 7건이다. 송언신은 선조 10년(1577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치며 호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지냈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면서 왕의 자녀 3인을 찾아 보호해 달라는 내용과 그 공을 높이 사서 물품을 하사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선조가 지방관리들을 통제하는 수완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조선의 국방, 군신간의 사신왕래와 선물교환, 가족제도 및 송언신의 가계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항 갑문은 근대시대 북성동 1가 102의 4에 만들어졌다. 애초의 갑문은 1918년 일제가 완공한 제1독에 있었으나 1974년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갑거를 축조하고 구항로를 없애 기존 제1독을 포함한 인천내항 전체를 선거화하면서 이곳에 갑문을 설치했다. 축조된 갑문은 2기이다. 1기는 폭 36m, 길이 363m이며, 다른 1기는 폭 22.5m, 길이 202m이다. 전자는 5만DWT급, 후자는 1만DWT급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다. 갑문의 1일 최대 처리 능력은 입항 20척, 출항 20척이다. 인천항 갑문은 세계 5대 갑문이자 동양 최대의 갑문이다. 인천시 제공
‘안중근의사유묵-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은 러일전쟁 당시 전의(대한제국 때 태의원에 딸린 주임의 벼슬)로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만주 뤼순 감옥으로 전근해 근무하던 오리타다다스가 들고 있었다.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의 친필을 옥중에서 받아 간직해오던 것을 광복 후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인 오리타 간지에게 넘겨줬으며 이것이 1989년 단국대에 기증됐다. 이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고쳐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소용없다”라는 내용을 담아 일본 정책의 잘못을 고칠 것을 촉구했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안중근 개인사 및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월미도 인근의 작은 섬인 소월미도는 1903년 팔미도 등대와 함께 이 섬 동쪽 끝에도 등대가 세워진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등대는 1963년 철거됐다. 소월미도는 월미도와 마찬가지로 군사 요충이어서 1904년 일본군 임시 군용철도감부는 인천역과 월미도 사이에 다리를 놓고 철도를 부설해 소월미도에 양륙한 군용화물을 수송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1904년 2월9일 인천 앞바다 러일해전 당시 소월미도 부근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 바랴크, 코리에츠 두 함정이 팔미도 부근에서 일본 군함과 교전하다가 큰 손상을 입고 다시 소월미도 부근으로 들어와 정박 중 자폭했다. 1974년 기존 제1독을 포함한 인천내항 전체를 선거화한 공사가 완공돼 월미도와의 사이에 선박이 출입하는 갑문이 구축되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인천시 제공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해 정조 20년(1796년)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 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수원 화성의 서쪽 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돼 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돼 있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역 맞은편 북성동 언덕 일대와 괭이부리 등지에 있었다. 두번의 양요와 운요호사건 등을 겪은 조선은 인천 연안에 방어시설의 구축을 위한 논의 끝에 1878년 8월27일 무위소 소속 신정희를 진사와 포대의 공역감동당상에 임명하고 10월15일 제물포 주변부터 축조해 이듬해인 1879년 7월1일 완료했다. 묘도북변포대(5혈), 묘도남변포대(5혈), 북성곶(북성포)북변포대(3혈), 북성곶남변포대(5혈), 제물포 북변포대(8혈), 제물포 남변포대(5혈), 호구(논현)포대(2혈) 등 화도진에서 관할하는 포대들로서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에 이처럼 토둔이라고 불리는 토루를 구축했다.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철폐됐다. 인천시 제공
보물 ‘김중만 초상’은 조선 중기의 무신 김중만의 초상화 3점이다. 김중만은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무과에 합격한 후 이인좌의 난(1728)을 평정했으며, 후에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낸 인물이다. 초상화는 비교적 크기가 큰 것 1폭과 작은 2폭이 있다. 보통 직무를 볼 때 쓰는 관모와 짙은 초록색의 관복을 입고 있고, 얼굴은 갈색기가 돌며 이목구비와 음영 표현이 확실하다. 가슴 부위에는 두 마리의 학이 새겨진 흉배와 금장식의 각대가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선생이 문관 종2품 때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이 초상화들은 높은 관모, 짙은 초록색의 관복, 과장된 관복의 옷주름,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 발을 올려 놓는 단의 형태 등으로 보아 당시 공신상의 기본적인 형식을 따른 그림으로 초상화 연구에 있어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서울로 첫 운행을 시작한 기념비적인 역이다. 우각리가 한국 철도 사상 최초 시공지였다면 인천역은 한국 최초로 기차가 출발한 시발역인 셈이다. 1926년 축현역을 상인천역으로 개칭할 때 인천역을 하인천역으로 부르기도 했다. 1943년 총독부 고시로 인천역을 폐지하고 인천부두역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부두역명은 1948년 다시 인천역으로 환원됐다. 인천시 제공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해 이 탑을 세웠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말기 인천 전환국 방판을 지낸 안경수의 거처였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가 이 집의 1980년대 풍경과 함께 그 내력을 전한다. “행랑채와 사랑채, 그리고 명물이던 목련 고목도 없어졌으나 대문 안 연못을 둔 아담한 정원과 화사한 나이든 주목이 옛 모습대로 안채를 지키고 있다. 이 한옥은 1892년일본의 기재와 기술로 인천여고 자리에 전환국을 건립할 때 전환국 방판으로 일본을 왕래하며 실무를 담당하던 안경수 자신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후 ‘인천부사’를 간행하고 인천중학교 개교를 위해 사재를 기부한 인물로 알려진 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가 이 집을 인계받아 거주했다. 6·25전쟁 후 여의사 박순정이 전동의원 건물로 사용했다. 현재 집의 원형은 사라지고 빌라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인천시 제공
원종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해 여러 국왕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불교 발전에 공로가 높았다. 광종은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신하를 보내 조문하고, 시호를 ‘원종(元宗)’, 탑호를 ‘혜진(惠眞)’이라 내렸다. 이 탑비는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그를 기리고, 살아생전의 행적을 비문으로 새겨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이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은 규모가 크고, 생동감 넘치는 조각 기법을 보여 고려 건국 초기의 역동적이고 웅장한 풍조를 반영한다. 탑비는 광종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으며, 최고의 장인 국공(國工)을 파견해 진영을 조성하고 승탑과 한 쌍으로 건립하도록 했다. 문화재청 제공
1892년 이곳에는 현대식 화폐를 만드는 기관인 전환국이 설치돼 1900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갈 때까지 운영했다. 현재 공영주차장이 들어서 있는 옛 인천여고의 운동장 자리가 바로 전환국이 있던 곳이다. 전환국은 1885년 서울 소공동에 처음 설치됐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서 동을 수입해 동전을 만들었는데, 그 동을 인천항을 통해 수입했기 때문에 동을 서울로 운반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전환국을 옮겨왔다. 그러나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하자 1900년 다시 서울 용산으로 옮겨갔다. 표면적으로는 동의 운반 편리성 때문이라고는 하나 당시 인천의 일본 영향력이 커 이를 저지하기 위한 내면적 이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 제공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활자본 ‘월인천강지곡 권상(月印千江之曲 卷上)’은 1963년 보물 398호로 지정됐다가 지난 2017년 국보 제320호로 지정됐다. 월인천강지곡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그의 아내인 소헌왕후의 공덕을 빌기 위해 직접 지은 찬불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빠른 시기에 짓고 활자로 간행한 점에서 한글 창제 후 초기의 국어학 연구와 출판인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문화재청 제공
동인천역 앞에서 배다리에 이르는 경인철도 남쪽 대로를 일컫던 명칭이다. 1908년 경인철도 선로와 축현역사가 현재의 동인천역 위치로 옮겨지며 생긴 공터가 그대로 대로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경인선 개통 당시 인천역이 주로 항만에서 하역되는 화물을 운송하는 역할을 했다면 축현역은 승객 위주였다. ‘이 거리는 동인천역 배다리 철로문을 통해 금곡동, 창영동, 송림동으로, 청과회사 쪽으로 뚫린 샛길을 통해 용동, 경동, 욜목동, 유동, 그리고 배다리를 지나 도원동, 숭의동에 이르는 중요한 간선도로다’라는 신태범 박사의 기록을 통해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일대는 사람의 왕래가 많은 지역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93년 인천부 공설시장사용조례에 의해 이곳에 새로운 시장 건물을 짓고 경영에 들어가면서 참외를 비롯한 과일 시장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6·25전쟁 이후 채미전거리 철로변은 과일도매상 등이 모여 있었고 청과시장 쪽은 야채시장과 과일가게, 고추나 마늘을 판매하는 도매상이 모여있었다. 백화점 같은 대형 매장에서의 과일 판매가 늘어나고 철도 복복선 건설과 대로 정비 등으로 철로변 상가는 대부분 문을 닫고 청과시장 쪽에 몇 군데 모전이 남아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과일 상가의 쇠퇴와 더불어 참외전거리는 시민 기억에 사라지고 이제는 거리 이름으로만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년)의 역사를 편년(編年)으로 정리한 책이다. 완성된 실록은 재난에 대비하고자 춘추관사고(서울), 정족산사고(강화), 태백산사고(봉화), 오대산사고(평창), 적상산사고(무주)의 전국 5대 사고(史庫)에 보관했다. 조선 후기에 어람용(御覽用) 실록을 특별히 제작해 창덕궁 후원 봉모당에 보관·관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조선왕조실록 제작 전통의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우현 고유섭은 경성제대 철학과에 입학해 미학 및 미술사를 전공했다. 1930년 졸업과 함께 모교 미학연구소 조수로 발탁됐고, 1933년 28세에 개성부립박물관장에 취임해 1944년 향년 40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 미술사와 고고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짧은 생애 동안 남다른 학구열과 초인적인 정력으로 황무지와 다름없는 한국미술사를 개척하고,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 후 황수영을 비롯한 제자들에 의해 여러 권의 저서로 간행됐다. 그의 30주기를 기념해 1974년 문무대왕의 해중릉이 바라다보이는 경북 감포와 선생의 고향인 인천의 시립박물관 앞에 기념비와 추모비가 세워졌다. 인천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