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최근(2011년)에 지정(등록)된 유물로서 궁궐도를 그린 기록화(記錄畵)다.8폭 병풍으로서 조선조 제24대 왕인 헌종(재위 1834∼1849)이 효정왕후와 가례(嘉禮)를 치른 후 진하장면을 그린 궁중 기록화이다. 경기도박물관 소장으로 제1첩에는 예문관제학조병구(1801~1845)가 지어올린 ‘가례후진하교시시반교문(嘉禮後陳賀敎是時頒敎文)’이 쓰여 있다. 제2첩에서 7첩까지 6폭에는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을 하여 진하례가 그려져 있다. 효정왕후의 책봉, 가례, 진하는 실제로는 모두 경희궁(慶熙宮)에서 치러졌으나 19세기 진하도병에서는 실제 장소와 상관없이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진하례를 그렸다. 따라서 이 병풍에서도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이 산수, 수목, 인마들과 함께 질서정연하면서도 호화롭게 묘사된 가운데, 문무백관들이 질서정연하게 집결되어 있다. 제8첩에는 25명 관원들의 품계, 관직명, 생년, 과거급제년, 본관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사군천리 망안욕천 이표촌성 행물부정(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1910년 3월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지정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일괄 지정된 이 작품들은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논어(論語)’·‘사기(史記)’ 구절 등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을 나타낸 것, 세상의 변함을 지적한 것, 일본에 경계하는 것, 이밖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특히 유묵의 대부분은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문화재청 제공
평택시 심복사(深福寺) 능인전 안에 모셔진 이 불상은 고려말에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노인(千老人)이 덕목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고 전한다. 불상 모실 곳을 찾아 옮기던 중 광덕산에 있는 지금의 심복사 자리에 이르자 갑자기 무거워졌으므로 여기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낮게 표현되어 있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 귀가 크고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깃과 소매 깃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배 부분에는 안에 입은 옷을 묶은 띠매듭이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옷 주름은 규칙적인 계단식 선들로 나타내어 단조롭고 형식적이다.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는 16개의 연꽃무늬가 겹쳐서 새겨져 있고, 중대는 두 마리의 사자가 앞발을 들어 상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하대는 8개의 겹잎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문종 14년(1060),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일곱 도둑이 혜소국사에 감화됐다는 일화가 숨 쉬는 칠장사(七長寺·안성시 죽산면)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혜소국사(慧炤國師)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 10세에 출가하였으며 17세에 융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현재 비 받침인 귀부(龜趺)와 비 몸돌·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비와 관련한 설화는 이렇다. 임진왜란 당시 왜 장수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거대한 천연 암벽에 두 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다. 머리 위에는 돌 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화강암 천연암벽을 그대로 이용해 불상의 위용을 거친 감성 그대로 드러냈다. 이 불상과 관련된 탄생설화도 흥미롭다. 구전에 따르면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비로 맞았지만 여전히 왕자를 생산하지 못했다. 궁주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궁주의 꿈 이야기를 들은 왕이 장지산 아래 바위에 두 도승을 새겨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자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조각적으로 뛰어난 기술양식을 찾을 순 없지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마음의 때를 씻고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다.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지닌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기구로 향로라고도 한다. 청동 은입사 향완(靑銅銀入絲香)은 높이 28.8㎝, 입지름 29.1㎝로 몸체와 받침대 전체 면에 은실을 이용해 장식(은입사)을 하였다. 몸체 표면은 4곳에 2개의 선으로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를 1자씩 넣었고, 원 주변에 꽃무늬를 새겼다. 몸 아래에는 연꽃을 둘렀고, 받침대 윗부분에 연꽃잎을 둘렀다. 받침대에 용을 새겼고 아래에는 덩굴무늬가 새겨 있다. 입 주변 넓은 테를 가진 전 안쪽 면에는 90여자의 글이 음각되어, 만든 시기와 절에 관한 기록을 알 수 있다.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만들었고, 원래 금강산 용공사에 전해지던 것을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가져온 것이다. 청동 은입사 향완은 은입사 향로 중 가장 아름다우나 몸에 비해 받침대가 약한 감이 있어 불균형을 이루는 묘미도 숨어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정조 18년(1794).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한 효심의 성곽 중 하나다. 정조 20년(1796)에 완성했다. 중국 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된 모습으로 한국 성곽의 미(美)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팔달문(수원시 팔달구 팔달로2가)은 수원 성의 남쪽 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 왔다. 문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다.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조선 후기의 발달된 성문 건축형태를 고루 갖추고 있다. 문화재 지정(등록)일은 1964년이다. 문화재청 제공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안양시 만안구에 소재한 예술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했다. 특히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石手)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는 설이다. 특히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문화재청 제공
국내 의학 드라마의 단골소재이기도 한 동의보감은 목활자본의 국보 제319-2호의 기록유산이다. 명성에 비해 지정일은 2015년 6월로 짧다. 성남시에 소재한 한국학중앙연구원서 보관하고 있는 동의보감은 허준(許浚,1539∼1615)이 1610년(광해군 2)에 조선과 중국에 유통되던 의서와 임상의학적 체험을 통한 치료법을 엮어놓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의서다. 초간본은 편찬된 지 3년 후인 1613년(광해군 5) 11월에 내의원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으며, 총 25권 25책이다. 내용은 목록 2권, 내경편(內景篇) 4권 26조, 외형편(外形篇)4권 26조,잡병편(雜病篇) 11권 38조, 탕액편(湯液篇 3권 17조, 침구편(鍼灸篇) 1권 1조 등 총 25권 108조목으로 구성되었다. 전개방식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의 5대강(大綱)을 기준으로 각기 세부 분류한 다음 해당되는 병의 이론·처방·출전을 밝혀놓았다. 한편, 동의보감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에도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곧 명말청초(明末初)에 중국으로 유출되어 중국에서는 1763년(乾隆 28)이후 수차례 간행되는 등 동양의학의 필독서가 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17세기 불화회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칠장사오불회괘불탱. 안성시 죽산면에 소재한 칠장사에 모셔져 있는 괘불이다. 괘불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칠장사 괘불은 길이 6.56m, 폭 4.04m의 크기로, 구름을 이용해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된다. 맨 윗부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좌우에 모셔진 삼신불을 묘사하고 있고,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이 있어 삼세불을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져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3단 배치는 예배자들에게 삼신불과 삼세불의 세계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게 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구원으로 도솔천궁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괘불의 큰 특징이다. 녹색을 주(主)색으로 하고 황색과 황토색을 대비시켜 다소 어두워 보이나, 옷 처리를 붉은색으로 입혀 경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괘불은 조선 인조 6년(1628)에 법형(法)이 그린 것으로 짜임새 있는 구도와 섬세한 필치 등은 당대를 대표한다. 문화재청 제공
1990년 9월20일 지정(등록)된 기록유산이다. 1권 1축으로 구성된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 ‘화엄경’으로 더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중 유일한 권 제1로, 11세기 경에 찍어낸 초조대장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이 책은 고려 현종 때(재위 1011∼1031) 부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로, 당나라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화엄경 주본 80권 중 권 제1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전체 크기는 세로 28.5㎝, 가로 1223.5㎝다. 초조대장경의 고려대장경(해인사대장경)과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이 책은 ‘경(敬)’자의 한 획이 빠져있는 점, 각 장의 글자수가 23행 14자로 해인사대장경의 24행 17자와 다른 점, 책의 장수 표시로 ‘장(丈)’자를 쓰고 있는 점, 간행기록이 없는 점 등의 특징이 확연하다.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1989년 8월 국보로 지정(등록)된 조선방역지도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우리나라 지도이다.크기는 가로 61㎝, 세로 132㎝다. 3단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맨 윗부분에는 ‘조선방역지도’라는 제목이 적혀있고 중간 부분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으며 맨 아래부분에는 지도 제작에 관련된 사람들의 관직·성명 등이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는 조선 팔도의 주현(州縣)과 수영(水營) 및 병영(兵營)이 표시되었는데 특히 각 군과 현마다 색을 다르게 하여 알아보기 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과 강의 경계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도의 형태는 지금의 전국지도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북쪽으로는 만주지역과 남쪽으로는 제주도, 대마도까지 표시하여, 조선 전기 영토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 지도는 명종 12년(1557)∼명종 13년(1558)경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일본에 유출되어 대마도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1930년대에 입수한 것이다. 이 시기 우리나라 지도의 제작 수준 및 형식을 알 수 있어 더욱 가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다.
명지대학교박물관(용인시 처인구)에 소장돼 있는 기록유산이다. 지정(등록)일은 1988년 12월 28일로서 ‘유가사지론’은 미륵보살이 지은 글을 당나라의 현장(602∼664)이 번역한 1권, 1축의 책이다. 천자문의 순서대로 100권을 수록한 것으로, 11세기에 간행한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 이 가운데 권17은 습(習)자의 함에 들어있는 것으로, 닥나무에 기록했다. 가로 45㎝, 세로 28.5㎝로서 ‘현양성교론’ 권11(국보 제243호)과 같이 11세기에 새겨 인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조대장경’은 대체로 해인사의 대장도감본과 판식이 비슷하다. 이 판본을 해인사본과 비교해 보면 초조본에는 판머리에 경명(經名)·권(卷)·장(張)·함차(函次)의 표시가 되어 있는데, 해인사본은 판의 끝부분에 새겨져 있다.또한, 장차(張次)의 표시가 초조본은 ‘장(丈)’으로 되어 있는데 해인사본에는 ‘장(張)’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현존하는 초조대장경 가운데 보존상태가 좋은 축에 속하며 활자를 통해 부활한 미륵의 가르침을 현대에 아로새길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문화재청 제공
효산의 본찰, 용주사의 기운을 품은 동종(화성시 용주로 136)이다. 신라시대 종 양식을 보이는 거대한 종으로 높이 1.44m, 입지름 0.87m, 무게 1.5t이다. 종의 상단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위가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뒀다.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용통에 약간의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고려시대 승탑이다. 고달사(高達寺·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소재 추정)는 통일신라시대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한 바도 있으나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체적으로 신라시대의 사찰골조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조각마다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긴다. 승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보존이 잘 된 편. 또 사리를 모신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새겨 천계와 지상을 잇는 고리로서 문화적 의미를 엿볼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