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묘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파주 덕은리에서는 20여기의 탁자식 고인돌과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터가 함께 발견됐다. 가장 큰 고인돌의 덮개돌 길이는 3.3m, 너비 1.9m로 조개날돌도끼(양인석부)와 숫돌 등이 나왔다. 그 아래에서는 선사시대 긴 네모꼴의 움집터가 나왔는데 깊이 40∼90㎝, 길이 1.57m, 너비 3.7m에 이른다. 벽을 따라 작은 기둥 구멍이 있고 화덕 자리가 2개 있다. 집 안에서는 구멍무늬토기(공열토기), 간돌칼(마제석검), 돌도끼(석부), 가락바퀴를 비롯한 여러 유물이 출토됐다. 집터의 연대는 기원전 7세기경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고인돌이 기원전 7세기 이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지정(1588~1650)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문인 명필로 본관은 여흥, 자는 정오(靜吾), 호는 청선(聽蟬)이다. 소릉공 이상의의 아들로 1616년 문과 급제해 목사 등을 지냈다. 17세기의 초서 명필인 청선 이지정의 서풍을 잘 대변해주는 서첩이다. 말미의 낙관에 “丁亥夏九月十七日東州爲喚魚亭主人翁醉詠九絶聽蟬書”라고 쓰여 있어 동주 이민구가 환어정주인(喚魚亭主人)을 위해 지은 ‘취하여 읊은 아홉 수 절구(醉詠九絶)’를 이지정이 썼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첩에는 일곱 수만 실려 있지만 뒤쪽에 오언절구 4수가 더 실려 있다. 소품이긴 하나 대폭으로 키워도 필세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활달한 필치로 고산 황기로의 서풍을 계승하면서도 활달하고 거친 필법을 구사한 이지정의 독특한 개성이 돋보이는 서첩으로 서예사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후기 함경도와 경기도, 강원도를 그린 지도다. 원래 팔도도별도가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들 지도와 경상도 지도만 전해 온다. 이 지도의 내용과 시기적 지명 변화는 1770년 신경준의 주도로 만든 20리 방안의 군현 지도와 거의 동일하며 색감이 아주 화려하다. 영조의 명을 받은 신경준은 1770년 군현도(열읍도·列邑圖), 도별도(팔도도·八道圖), 전도를 모두 만들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열읍도 계통은 많이 발견됐지만 팔도도와 전도는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1770년 신경준의 주도로 만든 팔도도 계통의 원본이거나 최소한 원본에 아주 가깝게 필사한 지도라고 판단된다. 정확성 위주의 조선지도 변천사를 이해하는데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데 정상기에서 촉발된 정확한 지도 제작의 흐름이 정철조로 이어진다. 신경준의 지도는 앞의 2개 지도 계통보다 훨씬 큰 초대형 지도이며 김정호의 청구도가 나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지도학적 의의와 화려하고 선명한 색상, 양호한 보관 상태, 현재까지 동일 계통의 지도가 발견되지 않고 있는 희소성 등을 고려할 때 매우 가치가 높은 지도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 책은 명나라 임강(臨江) 통수 섭윤현이 증험해 편집한 의가비전의 질병 처방인 ‘의가비전수신비용가감십삼방’과 ‘경험급구방’을 한데 모아 조선 전기에 간행한 의서다. 감기, 독감, 복통 등 13방에 대한 처방, 쓰이는 약재 등과 건강 장수베개를 만드는 부록이 있으며 권하(卷下)에는 치곽난토사부터 구사부지에 이르는 37방에 대한 구급의 의방과 약방문을 집성한 내용이 있다. 간행 기록이 없어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판각 상태, 판의 형식, 서체, 지질 등으로 미뤄 15세기 간행된 판본으로 한국 의학사와 출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은 희소 가치가 있는 의서다. 국가유산청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인 ‘조씨삼형제상’은 조계(趙啓·1740~1813), 조두(趙蚪·1753~1810), 조강(趙岡·1755~1811) 삼형제를 하나의 화폭 안에 그린 작품이다. 좌안 8분면의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맏형을 중심으로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어 조선조 초상화 대부분이 화폭 안에 대상 인물 1인만을 그려 넣는 데 반해 특이한 화면 구성을 보인다. 세 형제 모두 오사모에 담홍색 시복을 입고 있는데 맏형은 학정금대를, 두 아우는 각대를 두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형식의 집단화상으로서 의의를 지닌다. 국가유산청 제공
질병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했으며 바위 남쪽 면에 전체 높이 93㎝로 새겨져 있다. ‘태평 2년 정축 7월29일’이라는 글을 통해 만든 시기가 고려 경종 2년(977년)임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얼굴에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다. 옷주름 표현에서는 가지런함이 엿보인다. 손바닥을 위로 한 왼손에는 약그릇이, 오른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가락을 위로 하고 있다. 몸 뒤편에 있는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계단식으로 새기고 있으며 주위에는 불꽃무늬가 둘러져 있다. 대좌(臺座)는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모양의 하대석 위에 4개의 짧은 기둥으로 이뤄진 중대석이 있고 그 위에 다섯 잎의 활짝 핀 연꽃이 불신을 떠받치고 있다.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이 불상은 만들어진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어 고려 초기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안성 객사는 공민왕 12년(1363년) 이전에 건립된 이후 조선 후기에 지붕 기와를 바꿨고 1931, 1995년 2차에 걸쳐 이건했음에도 항아리형 보와 포작의 구성법, 첨차의 형태 등이 고려 말 건축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건립된 객사로 현존하는 객사 건축 중 가장 오래됐다. 일반적인 지방의 객사들과 마찬가지로 1908년 안성 객사를 수리해 교사로 사용하게 됐다. 이때 부속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객사 본건물만 남았으며 1931년에는 군 도서관과 교사로 사용하다 1995년 철거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게 됐다. 정청의 공포 형태는 국보인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조사당, 임영관 삼문, 거조사 영산전의 공포와 비교해 손색이 없다. 항아리형 보는 고려 후기 건축물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에 국가지정유산(보물)으로 지정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조영복(1672∼1728)의 초상화 2점으로 하나는 흰색의 도포를 입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공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조영복은 조선 숙종 31년(1705년) 과거에 합격해 여러 벼슬을 지냈다. 도포를 입은 모습의 초상화는 동생인 조영석(1686∼1761)이 그린 것으로 세로 125㎝, 가로 76㎝ 크기이며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조선 초상화에서는 드물게 양손이 나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학자의 기품이 잘 드러난 사대부의 모습을 생생하고 실감 나게 담아낸 매우 가치 있는 그림이다. 다른 하나의 초상화는 공복을 입은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세로 154㎝, 가로 79㎝ 크기의 이 그림은 당대 유명한 화가 진재해가 그린 것인데 세밀하고 정교한 묘사가 돋보이며 17세기 말~18세기 초 공신상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동일한 인물을 그린 두 영정은 그림의 성격과 특성을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8폭으로 구성된 ‘화성행행도병’ 중 한 폭이다. ‘봉수당진찬’이란 1795년 현륭원 원행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인 혜경궁 홍씨의 탄신 일주갑을 기념해 베풀어진 진찬 장면을 그렸다. 여러 어려움에도 혜경궁이 이 진찬에 참여했던 것은 실로 뜻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화성행행도병은 정조가 1795년(정조 19년) 윤2월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화성에 있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행(行幸)했을 때의 주요 행사를 그린 8폭 병풍이다. 동국대 박물관 소장 봉수당진찬도는 1970년대 한 재일교포가 기증했다. 비록 단폭이지만 작품성만을 두고 판단할 때에는 어떤 8폭 병풍이나 다른 낱폭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국가유산청 제공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는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구연부 지름 8.0㎝, 밑지름 8.5㎝다. 현재는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다. 이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 입은 피해로 추정된다. 구연부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 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눠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했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년)을 위해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 민애왕의 행적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원익 초상은 오리 이원익(1547~1634)이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된 것을 기념해 제작된 것으로 같은 해 조성된 청난공신과 선무공신의 도상에 비해 사모의 모양이 다소 변한 것으로 미뤄 책록된 시기보다 몇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초상의 주인공인 오리 이원익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 본관은 전주이며 태종의 아들 익녕군 치의 현손이며 이억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9년(선조 2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유명하다. 초상의 형태는 축으로 장정돼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으로 오사모에 흑단령을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사모의 양쪽에는 운문이 들어가 있다. 얼굴에는 음영 효과가 거의 들어가 있지 않고 이목구비의 형용은 선묘 위주로 돼 있으며 족좌대 위에 흑피혜와 채전이 깔려 있어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심복사 능인전 안에 모셔진 이 불상은 고려 말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노인(千老人)이 덕목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 전해진다. 불상 모실 곳을 찾아 옮기던 중 광덕산에 있는 지금의 심복사 자리에 이르자 갑자기 무거워져 여기에 모시게 됐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낮게 표현돼 있다.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 귀가 크고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깃과 소매깃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배 부분에는 안에 입은 옷을 묶은 띠매듭이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됐으며 옷주름은 규칙적인 계단식 선으로 나타내 단조롭고 형식적이다. 다소 둔중한 느낌도 있지만 안정되고 단정한 모습의 이 불상은 전체적인 조형이 도식화된 것으로 미뤄 10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사화가 일어난 기묘년을 전후해 친구, 동료들이 안처순(1492~1534)에게 보낸 편지글을 묶어 만든 것으로 거의가 기묘사화에 연루된 인물의 글이다. 안처순은 고려시대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안향의 9대손으로 예문관검열, 홍문관박사와 구례현감 등을 거쳤다. 편지글을 모아 놓은 이 글씨첩은 안처순이 살아있을 당시 중종 12년(1517년)에서 중종 26년(1531년)에 이르는 15년간 그의 동료 12명으로부터 받은 편지 39통을 모아 하나의 첩으로 만든 것으로 3면부터 72면에 걸쳐 수록돼 있다. 수첩의 첫 머리에는 한준겸의 식문이 실려 있고 첩 끝에는 조광조의 후손인 조성교가 이 첩에 대한 감회 및 경위 등을 서술한 발문이 있다. 이는 기묘사화에 관련된 명현의 글과 필적이 집결돼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서화(書畵)는 물론이고 기묘사화 연구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중국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두보의 시를 성종 때 홍문관의 유윤겸 등이 왕의 명을 받들어 한글로 번역해 편찬한 책이다. ‘두공부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두보가 공부원외랑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며 ‘분류’는 중국 송나라의 분문집주두공보시(分門集注杜工甫詩)를 참고해 따온 것이다. 초인본의 조위가 쓴 서문에 의하면 성종 12년(1481년) 가을 왕의 명을 받아 한글 번역에 착수해 그해 12월 완성했고 본권 13의 인본을 보면 을해자, 중자 및 소자 그리고 한글 활자로 찍었는데 인쇄가 깨끗하지 못한 편이다. 한글로 표현된 유창한 문체와 풍부한 어휘 등으로 볼 때 국문학과 국어학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북 안동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뒀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년)을 뜻하지만 이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봐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 일대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백자지석 6장이 석함에 담긴 채 2001년 5월18일 묘역을 사초하던 중 윤번의 부인인 인천 이씨의 묘 앞에서 발견됐다. 인천 이씨는 세조의 장모이자 정희왕후의 어머니인 흥녕부대부인이며 묘지에는 경태 7년 병자년인 1456년 7월14일 대부인이 졸하여 10월8일 예를 갖춰 매장했다는 장례 경위와 생전의 덕행, 가계 및 후손들의 현황 등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청화백자의 제작 시기 중 가장 이른 시기로 청화백자의 개시 시기와 청화백자 편년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다.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는 후대에 제작된 백자지석들에 비해 크기가 크고 뉘어 번조하던 양식과는 달리 세워 번조한 것으로 여겨져 제작 기술면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이다. 종이바탕에 4행으로 썼으며 근대에 족자로 장황됐다.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의 1966년 발문이 있다. 한편 어필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이란 스님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 있다. 유산이 소재한 칠장사는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한 1623년에 인목왕후가 친정아버지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당으로 삼아 중창한 사찰이다. 이처럼 모각된 어필의 원적(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특히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권근이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저술한 성리학 입문서로 전집 단간본과 전·후집 합간본 두 가지가 있다. 권근은 공민왕 17년(1368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조선을 개국하는 데 공이 커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이 책은 전집에 ‘천인심성합일지도’ 등 26종, 후집에 ‘십이월괘지도’ 등 14종의 도설이 실려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도설로 평가받고 있는 천인심성합일지도는 성리학의 중심 개념인 태극, 천명, 이기, 음양, 오행, 사단, 칠정 등의 문제를 하나의 도표 속에 요약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와 각각의 특성을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도설은 후대에 이황과 정지운의 ‘천명도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국가유산청 제공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 승려 지공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됐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 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둬 신라 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기본형이 사각인 형태로 삼국시대 이래 고유의 팔각 석등 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미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벽암록은 중국의 5대 종파 중 하나인 임제종에서 최고의 지침서로 꼽는 책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수행에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닥나무에 볏짚을 섞어 만든 누런 종이에 을유자(乙酉字) 가운데 중간 크기의 글자로 찍은 것이며 크기는 가로 19㎝, 세로 28.3㎝다. 을유자는 세조 11년(1465년) 구리로 만든 활자인데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유자라 부른다. 이 책은 설두 스님이 도를 깨치는데 있어 참고가 될 만한 좋은 글 100여편을 뽑아 시구로 엮은 것을 환오 스님이 시문에 대해 평가해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이다. 처음 책이 만들어지고 나서 선(禪)을 흉내만 내고 그저 외우기만 하는 것을 우려해 불태웠는데 장명원이란 사람이 다시 간행해 유통됐다. 벽암록 판본은 우리나라 선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줬고 이 책은 현재 전하는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전권이 빠짐없이 남아 있는 완전본이란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