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9월9일 성균관에서의 국제(菊製)에서 정조가 낸 어제(御題)의 뜻을 유생들이 이해하지 못해 백지와 거친 답안이 나오자 정조가 여러 유생에게 내보였던 초고의 별유(別諭)다. 조선시대 임금이 성균관 유생에게 내린 별유로서 보기 드문 예이며 정조 말년의 다른 어필에 비해 필치가 활달하며 서폭도 매우 크다. 또 정조의 모훈(謨訓) 자료로 봉모당에 전래돼 온 점에서 귀중한 필적이자 당시 행사의 면모와 제왕의 신념이 잘 드러나 역사적·학술적인 측면에서도 높은 가치가 인정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1884년 3월 현 올림포스 호텔 터에 개설됐다. 첫 건물은 목조였다가 1897년 단층 벽돌 건물로 신축했다. 영국영사관은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시 폐쇄하면서 광창양행 주인인 베네트가 명예영사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1925년 정식 임명이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고 베네트가 이 건물에서 거주하다 1931년 인천부청에 인계됐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소실됐다. 인천시 제공
숙빈 최씨(1670~1718)의 무덤인 소령원을 그린 묘산도다. 소령원도는 산도의 형식을 취했으며 가운데 묘소와 좌측의 제청, 우측의 비각을 배열하고 아래쪽에는 전답이 그려져 있다. 산수 표현에서 가늘고 기다란 피마준(披麻皴)이 미점(米點)과 더불어 사용됐으며 밝은 담채를 가했다. 의궤와 더불어 왕실 원묘와 관련된 시각자료로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문학산 삼호현에서 산성 방향 등산로를 따라 약 150m 올라가다 보면, 높이 3m 정도 되는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다. 이곳에서 유적이 발견돼 2016년 발굴 조사가 이어졌다. 그 결과 7세기 중반에 건립돼 고려 초기까지 사용됐던 것으로 보이는 ‘문학산 제사 유적’이 나타났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재단은 큰 바위 위쪽에 돌을 쌓아 만들었고 바다가 보이는 서쪽을 향해 있다. 재단 위쪽은 기와지붕을 둬 재단을 보호했고 1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됐는데 주로 7~9세기 기와편과 토기편이었다. 인천시 제공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 항아리로 크기는 높이 54.8㎝, 아가리 지름 19.2㎝, 밑 지름 18㎝다. 형태가 아름답고 푸른색의 청화 안료로 그린 사실적인 문양이 우수하고 다양해 이 무렵 대표적인 백자 항아리로 손꼽힌다. 문화재청 제공
동양의 전통 우주론인 혼천설(渾天說)과 개천설(開天說)을 하나의 원판형 의기(儀器)에 통합해 표현한 천문시계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천문시계 ‘아스트로라브’를 실학자 유금이 조선식으로 해석해 1787년에(정조 11년) 만든 천문 도구다. 모체판의 앞면 중심은 하늘의 북극을 상징하는 구멍에 핀으로 성좌판을 끼워 회전토록 했다. 외곽을 24등분해 맨 위에 시계 방향으로 시각을 새겼다. 유금은 우리나라 실정에 맞도록 독자적인 별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처럼 ‘혼개통헌의’는 서양 천문학과 기하학을 이해하고 소화한 조선 지식인들의 노력을 보여주며 제작 원리와 제작의 정밀도 등에서도 18세기 조선의 수학, 천문학 발전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과학 기기다. 문화재청 제공
1930년대 초반 국민휴양지 역할을 하던 월미도가 요새화되면서 일본인들이 휴양시설로 사용하기 위해 개발이 시작돼 1937년 개장했다. 옛 송도역 남쪽 2㎞ 지점에 위치했으며, 광복 이후에도 많은 인파가 몰리는 휴양지로 유명했다. 1969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1970년에는 상수도 시설과 도로를 정비했다. 송도유원지 내의 해수욕장은 수문개폐 시설을 통해 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인공해수욕장이자 서해안 최대의 종합레저타운이었으나 2011년 9월15일 폐장하고 2012년 4월27일 폐업 신고했다. 인천시 제공
조선 세종에서 중종조에 이르는 동안 대마도, 파저강, 건주위, 이마차, 서북로구, 삼포왜란 등을 정벌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6년 7월29일 기묘조(己卯條)에 당시까지 사본의 형태로 유포되고 있었던 ‘국조정토록’은 광해군 6년 이후에 활자로 인출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익의 ‘성호사설’ 경사문(經史門)의 기록에서도 활자로 인출된 후에도 구해 보기 쉽지 않은 책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과거 송학장에 있었기에 ‘송학장석탑’으로 불리던 것으로 현재 인천시립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전시돼 있다. 1916년 인천부 의원이었던 일본인 고노가 충남 보령에서 반입해 정원석으로 사용했다는 설도 전하지만 확실한 근거자료가 없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현재 2층의 기단부와 1층의 탑신 및 1·2·3층의 옥개석 그리고 복발이 남아 있다. 탑신의 전체적인 비례로 미뤄 원래는 2층 기단의 3층석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의 조성연대는 전체적인 양식으로 봐 고려 중엽의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 제공
공자가 여러 서적을 모아 기록한 것에 원나라 왕광모가 장별로 제목을 달고 자세하게 풀이한 것을 붙인 것으로 박은이 강릉감영에서 간행했다. 박은(1370∼1422)은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7년(1398년)의 제1차 왕자의 난과 정종 2년(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 책은 박은이 강원도도관찰출척사로 임명받고 부임했을 때 이 책이 우리나라에 간행돼 있지 않음을 알고, 그곳에서 ‘번각’한 것이다. 이 책판은 조선 전기의 지방관이 주도해 만든 판본으로서는 비교적 정교해 조선 전기 출판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대동양조조합은 1928년 최승우가 외리에 설립했다가 송림리로 공장을 옮긴 양조회사다. 개항 이후 일본인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인천에는 여러 양조회사 및 공장이 설립됐다. 1919년 10월에 설립된 ‘조일(아사히)양조주식회사’가 조선인이 좋아하는 소주를 처음 생산했고 기계 설비를 갖춰 대량으로 소주를 생산한 조선 최초의 양조공장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 재래방식의 소주인 ‘대동’을 생산한 것이 ‘대동양조조합’이다. 이 양조장은 일본인 양조회사 세 곳, 그리고 외리의 김휘관양조장과 함께 인천 5대 재래식 소주 공장으로 ‘인천부사’에 기록될 정도의 규모였다. 광복 후에도 소주 생산을 계속하다가 폐업했고 동부경찰서 부속 건물로 사용되다가 현재 그 자리에는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인천시 제공
1904년 9월30일 발기돼 인천시 송월동에 있는 일본거류민역소에 임시 사무실을 설치해 설립했다. 처음 발기인은 일본인 3명, 독일인 1명 등 4명이었으나 1906년 인천 이사청으로부터 전등영업의 전업특허를 받을 당시의 주주는 일본인 88명, 구미인 13명, 청국인 8명으로 구성됐다. 1906년 4월5일 독일로부터 100㎾ 직류식 발전기를 도입해 영업을 개시했다. 이후 인천의 경기 침체로 전등요금의 체납 및 미납이 증가, 경영이 곤란한 상태에 이른다. 1908년 1월20일 주주총회를 열고 자본금을 총 15만원으로 결정했다. 이후 인천 축항이 기공돼 경제가 다시 회생하면서 전력수요가 증가했으나 새로운 발전기 구입에 여력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1911년 6월11일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에 22만5천원에 회사를 매각하면서 인천지점이 됐다. 인천시 제공
조선 후기 문신으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 인물 채제공의 초상화다.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작)은 채제공 73세 상으로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이다. 수원시에 함께 소장돼 있는 유지 초본 3점 또한 중요한 자료이며 향낭도 함께 남아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양조장은 행정구역상 인천 동구에 속하지만 경인전철을 사이에 두고 중구에 바로 면해 있는 지역에 있다. 개항 당시부터 1980년대까지 인천의 중심지였던 중구의 중심상권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인천항과도 가까운 거리였다. 현재는 통칭 배다리로 불리는 구 도심지역에 있다. 인천양조주식회사는 1926년 최병두가 설립한 회사로 창업 당시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현재는 스페이스 빔의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의 가장 크고 역사가 깊은 양조회사의 양조장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1973년 확장공사로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고 외관, 구조체도 일부 철근콘크리트로 개수돼 건축적 의미를 찾기 어렵다. 인천시 제공
8폭의 천문도 병풍을 해체한 것으로 조선 전기의 전통적인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와 17세기 이후 서양식 천문도인 신법천문도가 함께 구성돼 있다. 마지막 1폭에는 ‘일월오성도’를 그렸는데, 그 오행성의 명칭이 전통적 이름인 진성, 세성, 형혹, 태백, 전성으로 표시돼 있다. 18세기 초 조선 지식인층의 우주관을 잘 나타내는 한국 과학사의 대표 문화유산이다. 문화재청 제공
2층 벽돌 건물로 현재는 인천 중구 선린동 56 인천역 남쪽에 공터로 남아 있다. 건축 연도는 1903년으로 추정된다. 1902년 송학동 소재 공가 상태였던 성누가병원에서 영사업무를 개시하다가 이 건물을 짓고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영사관 안에는 러시아 동청철도 대리점과 블라디보스토크 목재회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러일전쟁 이후 폐쇄됐다. 1912년 4월1일 체신국인천출장소가 설치됐다. 1915년 인천해사출장소로 개칭됐다. 광복 후에는 미군 철도수송대 사무소로 후에 우리 해군경비부가 사용했다. 이 건물은 헐려 현재는 공터로 남아 있다. 인천시 제공
손소 선생(1433∼1484)을 그린 초상화다. 손소 선생은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에 오르고 후에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거쳤다. 적개공신 때의 모습을 10년 후인 성종 7년(1476년)에 그린 것으로 조선 초기 공신도상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며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어 그 의의가 더욱 크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 중구 용유로 38번길 21에는 한양조씨 묘역이 있다. 이 묘역에는 하나의 곡장 안에 3개의 봉분이 자리한다. 위쪽 1단의 묘는 쌍분 형식으로 형성됐고 상석이 있다. 봉분 좌측에는 묘표가 있다. 묘표는 너비 41㎝, 높이 114㎝, 두께 24.5㎝다. 좌측의 봉분은 돈녕부 도정을 지낸 조형규, 우측의 봉분은 그의 후처인 숙부인 전주이씨의 것이다. 아래쪽에는 봉분 1기와 상석 1기 묘표 1기가 있다. 이 봉분은 참봉을 지낸 조영교와 그의 부인인 순흥안씨의 합장묘다. 봉분의 조성 시기는 1923년이며 묘표는 1990년 세워진 것이다. 이 상석 아래 단에는 망주석이 서 있으며 봉분의 조성 좌향은 해사 방향이다. 묘역은 가로 20m, 세로 26m다. 인천시 제공
사재 안처순(1492∼1534)이 중종 13년(1518년) 구례현감에 제수돼 떠날 때 동료나 친구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써준 송별 시문을 모아 엮은 첩이다. 이 수필첩은 안처순이 세상을 떠난 후인 선조 36년(1603년) 김인후의 발문과 함께 첩으로 만들어졌고, 순조 29년(1829년) 조인영에 의해 전라감영에서 다시 제본한 것이다. 총 3면에서 50면에 이르는데, 수필첩 끝에는 총 24명의 명현들의 성명, 호, 관직 등이 간략하게 수록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을왕동 해변의 절경을 이루는 기암절벽 중 옛날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춤을 추며 놀았다는 바위다. 또 다른 전설로는 영종도의 호군에게 어여쁜 소실(첩)이 있었는데 그는 차차 소실에게 정이 멀어져 그 소실은 슬퍼하며 자기 남자가 근무하는 영종 진영을 찾아가 진영 앞의 태평암이란 바위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시신을 찾는 사람이 없어 조수에 밀려 용유도 포구에 떠다니는 것을 사람들이 그 시신이 호군의 소실임을 알고 건져다 묻어 줬다. 그 후로 태평암을 선녀암이라 불렀고, 용유도 포구의 고개를 호군의 소실을 묻었다고 호군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천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