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낙새는 딱따구릿과의 일종으로 지구상에서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생존해 있으며 현재는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암수 구분 없이 몸 길이는 46㎝ 정도이며 수컷은 머리 꼭대기에 진홍색 깃털을 가지고 있다. 광릉의 크낙새 서식지는 포천시 소홀면·내촌면, 남양주시 진접읍·별내면·자둔면 등 5개 면에 걸쳐 있다. 광릉(光陵)은 세조와 왕비 윤씨가 묻힌 곳으로 능 주변의 숲은 조선시대 460여년간 엄격히 보호돼 크낙새가 둥지를 틀고 살 수 있는 울창한 숲을 유지할 수 있었다. 크낙새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만 사는 진귀한 새로 학술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대륙으로 연결됐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살아 있는 자료다. 그러므로 크낙새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한탄강변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1978년 처음 발견돼 1979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했다. 그 결과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홍날, 찌르개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를 발굴했다. 그중 유럽과 아프리카 지방의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됐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동북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해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년)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큰 승리를 거뒀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 ‘행주치마’라고 했다고도 한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시대 성천도호부 부사였던 김명리(1368~1438)의 묘지다. 종 모양의 묘지석은 제작 사례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희귀한 경우다. 전체 모양은 상부에서 저부로 내려오면서 직경이 약간 좁아지는 비대칭의 원통형이고 상면 중앙에 높이 4.0㎝의 연봉형 꼭지가 부착됐다. 지문(誌文)은 김명리의 가계, 부모, 이력 등을 적은 행장(行狀)으로 지은이는 유의손(1398~1450)이다. 이 묘지는 비록 개인사를 적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사료를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고 깔끔한 해서체 각서는 조선 초기 서예사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출토지가 분명하고 1439년이라는 명확한 제작 시기, 희소한 종 모양을 취하고 있는 점 등 도자사적, 서예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김포 문수산성(金浦 文殊山城)은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년)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 12년(1812년)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둘렀다. 당시의 성문은 취예류, 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 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 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 역할을 했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됐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 있다.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 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도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 많이 심는다. 남양주 양지리의 향나무는 나이가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2m, 가슴높이 둘레 3.65m다. 나무의 모습은 원줄기가 2m 정도 올라가 7개로 갈라져 사방으로 퍼졌다. 이 향나무는 거창 신씨의 선조를 모신 묘소 옆에 심은 나무가 자란 것이라 하며 신씨의 내력에 관한 비석이 있다. 남양주 양지리의 향나무는 우리 민족이 조상을 섬기는 민속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향나무로서는 오래되고 큰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대통력은 명나라의 역법(曆法)으로 고려 말인 공민왕 19년(1370년) 수입돼 조선 효종 4년(1653년) 시헌력을 채용할 때까지 근 300년간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역법이다. 이 경진년 대통력은 모두 15장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첫 장은 정월에서 12월까지 윤4월을 포함한 13개월의 24절기에 관한 내용과 연신방위지도이고 제2∼14장은 책력의 본체인 1월에서 12월까지의 월력이다. 달력에는 날짜별로 일상생활에서 그날그날 하기에 좋은 일과 하면 좋지 않은 일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제15장은 부록격으로 간지별로 피해야 할 일들을 열거한 부분과 이 책력의 편찬, 인쇄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이다. 경진년 대통력은 관상감에서 활자로 찍은 임진왜란 이전의 역서로는 유일한 것이다. 또 관상감 인력자(印曆字)로 찍어낸 책 중 가장 앞선 것으로 조선시대 활자 및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후기 함경도와 경기도, 강원도를 그린 지도다. 원래 팔도도별도가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들 지도와 경상도 지도만 전해온다. 영조의 명을 받은 신경준은 1770년 군현도, 도별도, 전도를 모두 만들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열읍도 계통은 많이 발견됐지만 팔도도와 전도는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1770년 신경준의 주도로 만든 팔도도 계통의 원본이거나 최소한 원본에 아주 가깝게 필사한 지도라고 판단된다. 신경준의 지도는 정확성 위주의 조선 지도 변천사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정상기로부터 촉발된 정확한 지도 제작의 흐름이 정철조로 이어지고, 이들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 신경준의 지도다. 하지만 신경준의 지도는 앞의 2개 지도 계통보다 훨씬 큰 초대형 지도이며 김정호의 청구도가 나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러한 지도학적 의의와 화려하고 선명한 색상, 양호한 보관 상태, 현재까지 동일 계통의 지도가 발견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매우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이하 사리탑)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발원해 건립한 진신사리탑으로 규모가 장대할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양호하며 사리탑의 형식과 불교미술의 도상 및 장식문양 등 왕실 불교미술의 여러 요소를 알 수 있는 귀중한 탑이다. 사적 ‘양주 회암사지’ 내에 위치한 사리탑은 발굴조사와 탑의 입지, 기록 등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됐던 불탑(佛塔)임을 알 수 있다. 또 탑에 새겨진 다양한 조각은 조선시대 왕실 발원 석조물과 양식적인 부분이 비슷하며 회암사 구역에 위치한 삼화상탑과의 영향 관계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체적인 양식과 조영기법, 세부 문양들이 조선 전기의 왕릉을 비롯한 왕실 관련 석조물과 비슷하며 사리탑의 규모, 치석 상태, 결구 수법 등을 고려할 때 당대 최고의 석공이 설계, 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당 문화유산은 조선 전기 석조미술의 정수이자 대표작으로 역사·학술·조형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천100살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 부분 둘레 15.2m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년)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년)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무예제보(武藝諸譜)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무예서 중 가장 먼저 편찬돼 후대의 무예서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한교(1556∼1627)가 왕명을 받고 중국 명나라 장군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참고해 조선의 무인이나 대중들의 이해를 돕고자 ‘대봉(大棒·곤봉)’, ‘등패(藤牌·방패)’ 등 무기 6종의 제작법과 도해(圖解)를 수록해 편찬하고 그 내용을 한글로 언해(諺解)해 1598년(선조 31년) 10월 목판으로 간행한 무예서다. 지금까지 국내에 알려진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학술·문화유산적 가치가 높다. 이와 관련해 1610년(광해군 2년) 간행된 무예제보번역속집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무예제보는 기 지정본보다 앞서 간행된 책으로 조선의 국가 방위를 위한 노력의 과정 속에서 증보 간행된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이러한 사유로 무예제보는 우리나라 무예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병자호란을 당해 임금이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백제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에게 제사를 지낸 일을 계기로 1638년 사묘가 세워졌다. 1661년 현 위치로 옮겨진 이후 정조 때 ‘숭렬전’이란 전호(殿號)가 내려졌으며 다른 역대 시조묘에 올리는 격식을 따라 제사를 거행하며 현재까지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역대 시조묘 가운데 숭의전(崇義殿·고려 태조)은 6·25 전쟁 후 1970년대에 복구됐고 숭덕전(崇德殿·신라 박혁거세)과 숭선전(崇善殿·가락국 수로왕)은 19세기 고종 연간에 고쳐졌거나 신축됐다. 반면 남한산성 숭렬전은 17세기 이건한 뒤 지은 건물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창건 사실이 역사 문헌을 통해 증빙되며 현재까지 원위치를 지키고 제향이 계승되고 있어 역사적·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간결하고 절제된 건축 형식과 구조는 17세기에 건립된 조선시대 사묘의 전형을 따르고 있어 국가지정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헌종이 1827년 태어난 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태실을 만들어 태를 안치한 태실과 주변 경관을 그린 작품이다. 헌종이 1834년 즉위한 후 13년이 지난 1847년에야 태실가봉(胎室加封)이 이뤄졌으며 이 그림은 당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태봉도와 달리 지도식 표현이 거의 없고 산수화풍이 많이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능숙한 필치로 괴량감 넘치는 산봉우리를 표현했고 부드러운 색채로 입체감을 나타냈다. 옅은 청색과 연두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지던 장태(藏胎) 문화를 의례화해 새로 태어나는 왕자녀의 태를 길지(吉地)에 묻는 독특한 안태의례(安胎儀禮)를 정착시킨 조선 왕실의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장조의 태실을 그린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사성·희소성이 돋보인다. 국가유산청 제공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을 1799, 1801년에 그린 계화(건축화)로, 채색화 1점과 일종의 평면도안인 간가도 2점으로 구성됐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및 고려대 박물관에 각각 소장돼 있다. 장용영은 1793년(정조 17년)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호위부대로 도성 안에 본영(本營), 수원화성에 외영(外營)을 두고 운영됐다. 따라서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은 도성 안(지금의 서울 종로4가 이현궁 터 추정)에 설치된 장용영 본영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과 관청의 변화를 기록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료다. 정확한 축척에 기초한 평면도를 통해 상세한 건물의 배치를 그렸고 정교한 필치로 건축물을 묘사해 당시 장용영을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로써 지금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장용영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 세부 건물의 배치와 기능을 알 수 있게 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화수동에 위치한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사택은 공장의 길 건너편에 있으며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한 동은 8호 연립으로 지금까지 주택으로 사용 중이다. 한 동은 10호 연립이었으나 일부가 철거되고 나머지는 어린이집으로 이용 중이다. 건축물대장의 건축 연도는 1943년이고 광복 후인 1956년 이천전기회사에 불하돼 사택으로 이용됐다. 현재 건물의 용도는 사택이다. 인천시 제공
조선을 건국한 태조고황제의 능으로 구리 동구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됐다. 정자각은 제향(祭享•제사)을 지내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정전에 2칸의 배위청이 결합한 ‘丁’자형 평면의 건물로 태조가 세상을 떠난 1408년(태종 8년)에 건립됐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정자각의 전형적인 형태를 잘 따르고 있으며 기둥 상부의 익공(翼工) 형식은 18세기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1764년(영조 40년) 중수 당시의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조선의 능침제도 중 정자각의 표준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만석동 도쿄시바우라제작소 사택은 도쿄시바우라제작소 공장보다 동양방적 공장에 더 가까이 있다. 1947년 항공사진을 통해 사택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단독 사택 4동, 2호 연립 3동, 4호 연립 3동이 확인된다. 2층으로 추정되는 합숙소도 보인다. 합숙소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일부 사택의 내부에는 화장실을 두지 않아 공동화장실을 이용 중이며 마당까지 건물을 확장하고 확장된 건물의 지붕은 슬래브 형태로 옥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
조선 정조 18년(1794년) 건립됐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전시용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해 조성된 건물이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해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으며 조선 헌종 14년(1848년)에 중수,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 수리했다.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정약용 필적 하피첩(丁若鏞 筆蹟 霞帔帖)’은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고 얼마 후 아내 홍씨부인이 바래고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부쳐온 것을 잘라서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직접 짓고 써준 것이다. 제작연대는 경오년, 즉 1810년(순조 10) 7, 9월로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이 서첩의 수량은 원래 네 첩이었으나 현재 세 첩만 알려져 있다. 현재의 ‘하피첩’ 3첩은 하나가 결락된 셈인데, 각첩 표지에 ‘하피첩’이란 제목은 일부 남아 있으나 그 아래의 ‘첩 순서’는 탈락돼 몇 번째 첩이 없는지를 알 수 있다. ‘하피첩’ 3첩은 그 중 두 첩에 각각 1810년 7월과 1810년 9월의 서문이 있어 강진 유배시절인 1810년 기년작이란 점에 의미가 있다. 현재의 세 첩 중에는 “두 아들에게 경계하는 구절을 지어 써주다(作戒語以遺二子·寫戒子句)”라는 서문이 있어 정약용이 직접 짓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진 유배 이후 정약용의 전형적인 행초서풍을 보여주며, 특히 세번째 첩에 실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는 다른 서첩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국가유산청 제공
용유도에는 근대에 조성된 늘목염전과 간척마을염전 등 천일염전이 두 군데 남아 있으나 지금은 늘목염전 일부에서만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천일염전이 조성되기 전에는 용유도와 무의도의 10여곳의 염전에서 염도가 높은 양질의 소금이 생산돼 배에 실려 각처로 팔려 나갔다. 농축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는 재래식 소금 제조법에 비해 근대에 도입된 천일염전은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 소금을 만드는 방식보다 생산원가가 적게 들어 근대에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인천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