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9월1일 인천 중구 답동 3번지에 설립된 이 학교는 일찍부터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 아동을 모집해 초급 학력 과정을 교육하는 한편 전도에 힘쓰던 속칭 천주학방이 발전한 것이다. 프랑스 출신 전학준 신부가 설립자 겸 학교장으로 1914년에 이르러 급증하는 아동을 수용하기 위해 인천 사립박문소학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했다. 이어 다음 해 6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다시 신축했다. 이에 1917년 4월2일 2개교를 통합, 인천 박문학교로 개칭했다. 그 후 1925년 11월17일 인천 사립박문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인천시 제공
파주 보광사 동종은 중국 종의 형식을 수용하는 동시에 우리 고유의 미감을 반영하며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 조선 전기(15∼16세기) 범종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이 동종은 조선 전·후기의 접점에 있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틀을 이어 붙여 주조하는 분할주조 방식으로 제작된 단초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동종 제작 기법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1975년 11월17일 인천상공회의소 7층 사옥이 준공돼, 송학동 사물실에서 이전해 왔다. 당시 인천에서 가장 높은 고층 빌딩 중 하나였다. 1994년 남동 신축 회관으로 이전했다. 경기은행은 1967년 인천은행으로 발족했으나, 1972년 6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면서 영업지역을 경기도 전역으로 확대하고, 주식회사 경기은행으로 상호를 바꿨다. 인천시 제공
연천 재인폭포는 신생대 제4기에 만들어진 현무암 주상절리 폭포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지질명소 중 하나로 지질·지형학 등 학술적 가치가 있고 생태적으로 가치가 높은 장소다. 문화재청 제공
축지활판소는 가부키좌 인근에 있었다. 1924년 9월 정부 예산 감축에 따른 경기 불황으로 사장 아키야마가 임금 삭감과 감원을 통보하면서 인쇄 직공 30여명이 파업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 주로 관공서를 상대로 한 인쇄소였던 듯하다. 가부키좌까지 불태운 화재로 1935년 소실됐다. 1949년 발간한 ‘경제연감’에 장만달이 대표로 있는 사동 소재 축지활판소가 보이는데 상호만 같은 신성 업체로 보인다. 1959년 세관 건물이 신축될 때까지 인천세관이 축지활판소 자리에 임시로 들어 있었다. 인천시 제공
월롱산성은 파주 일대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까지 조망되는 북쪽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가는 서쪽변경을 방어하던 성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의미가 있다. 월롱산성은 한성백제의 토목 기술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문화재청 제공
고병령은 인천무도관 관장 유창호와 함께 인천의 유도 6단 고단자로 쌍벽을 이루던 인물이다. 고병령접골의원은 그가 접골사로 있던 의원이다. 접골원은 ‘뼈가 부러지거나 관절이 삐거나 겹질린 환자의 환부를 조정하고 회복시키는 응급처치 등 접골 시술행위’를 하는 곳이다. 일본의 유도정복사와 같은 뼈와 관련한 고단자들이 하는 의료 시술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현재 중구 민방위교육장이다.
수원역 급수탑은 1930년대 국철(國鐵)인 광궤철도의 급수탑과 사철(私鐵)인 협궤철도의 급수탑 2기가 동일한 부지 내 현존하는 희귀한 사례로, 국철과 사철의 급수탑 변화양상과 변천사를 보여주는 철도유산으로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신사 터는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다. 지난 1890년에 세워진 이 인천신사는 일본왕의 조상이라고 하는 천조대신을 모신 사당으로,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억지로 참배를 해야 했던 곳이다. 신사가 있는 이곳에 일본인들이 공원을 만들었는데 이를 동공원 혹은 미야마치공원이라 불렀다. 신사 건물은 광복 후 일부 파손됐다고 하나, 인천여상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인천시 제공
한용운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으로 3·1독립선언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승려로서 ‘불교유신론’을 제창해 불교의 개혁을 주창한 불교계의 지도자, 그리고 ‘님의 침묵’으로 저항 문학을 선도했던 인물이다. 이곳은 한용운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곳이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 최초의 카페인 ‘금파’가 있던 이 건물은 1920년대 궁정(신생동) 초입에 들어선 3층 서양식 술집으로 맥주, 양주, 커피 등과 서양 요리를 팔았다. 여급이라고 부르던 접대부가 있었으며, 1920년대에 호황을 누렸다. 광복 후에는 고려회관으로 사용했다. 이 건물은 6·25전쟁 중에 소실, 신축된 건물에는 우동집 등이 입주해 영업을 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
고안수위관측소는 부자식 자기수위계를 설치해 한강의 수위를 관측하던 시설로 정통(井筒)과 관측소로 이뤄진 타워 및 강안(江岸)에서 관측소를 연결하는 교각 등이 하나의 세트로 구성되지만 현재 교각은 소실돼 남아 있지 않다. 건립 당시의 토목기술 및 수위측정 방식 등을 알 수 있는 시설물로 가치가 있다.
신포시장은 인천 최초의 종합 상설시장이다. 이 시장이 개설된 시기는 대략 19세기 말로, 1890년대 말 서울 청파동 사람 정홍택 형제가 터진개에 개설한 생선전과 신포시장 동편에 자리잡았던 청국인의 푸성귀전이 시발이었다. 후일 터진개에는 배로 강화를 비롯한 연안의 섬 지역과 충청도 등지에서 실어오는 닭과 계란을 집하해 판매하는 닭전이 생기기도 했다. 이후 규모가 커지면서 내동의 패션거리, 그리고 아래위 두 개의 긴 골목으로 이뤄진 오늘날의 거대한 신포시장이 탄생했다. 현재 명칭은 신포국제시장이다. 인천시 제공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경세가인 이이는 퇴계 이황의 학문을 더욱 발전시켜 중국의 성리학과 차별되는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율곡 이이를 배향한 자운서원,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묘소를 포함한 가족묘역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파주 이이 유적’은 율곡 이이 관련 유적을 대표하는 곳으로, 한 인물에서 근원한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장소성의 가치가 큰 곳이다. 문화재청 제공
생선전은 어물을 주로 판매하던 도소매 시장이었다. 서울 용산 청파동 출신 정홍택 형제 3인이 1890년대 초반 무렵, 인천으로 이주해 와 신포동에 생선전을 개설함으로써 창설됐다. 특히 이 생선전은 인천의 근대 상설시장 형태로서 최초를 기록한다. 당초 한옥 건물이었으나 1930년대 벽돌 건물로 개축하는 등 발전을 거듭해 당시 인천제1공설시장이 됐다. 6·25전쟁 때까지 생선전으로 구실을 했으나 이후 제빙공장을 거쳐 슈퍼마켓으로, 그리고 다시 개축돼 기성복 판매점이 됐다가 또다시 커피전문점으로 변했다. 인천시 제공
시흥시 군자동과 안산시 선부동의 경계에 위치한 군자봉 성황단에서 김부대왕을 주신으로 모시고 행하는 굿이다. 음력 10월3일에 본격적인 의례를 거행하며, 안산 잿머리 성황제와 성격이 유사하다. 군자봉에는 군자산성 터와 함께 성황단이 남아 있다. 성황단은 고을이나 성 안의 안녕을 빌기 위해 수령이 백성들과 더불어 위무했던 곳이다. 마을 농악대와 무당 일행이 마을굿에 동참한다는 점에서 공동제의적 성격을 지니며, 안산, 수원, 평택 등의 지역까지 걸립을 다니는 판도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이 지역의 성황제의 위신을 말해주는 것이고, 널리까지 활약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문화재청 제공
사전에는 푸성귀를 사람이 가꿔 기르거나 또는 저절로 난 온갖 나물들을 일컫는다고 풀이하고 있으나, 각종 채소도 아울러 의미한다. 신포시장 자리에 청국인의 손에 의해 푸성귀전이 정착한 것은 개항 후 10여년이 지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쯤으로 추정된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 의하면 19세기 말 인천에 와 있던 일인이 1만명 이상, 청국인이 2천명 정도였던 데다 양식호텔, 청요릿집, 일본 요정 등의 영업집이 들어섬으로써 각종 채소의 수요가 생겨났기 때문에 푸성귀전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조선인에게는 흔치 않던 양파, 양배추, 피망, 홍당무 같은 채소들을 공급했다. 이 푸성귀전은 1933년 일제에 의해 인천부제2공설시장이 돼 일제가 그 운영권을 차지했다. 인천시 제공
화룡산 서쪽 능선 일대에 화령마을에 있다. 이곳은 경기만을 지나는 조운선의 대표적인 항로인 마산수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화량진성은 원래 고려 말에 왜구 방어를 위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은 서쪽으로 돌출한 와룡산 남쪽 7분 능선에서 남쪽으로 화양만 입구의 해변을 감싸 안도록 축조됐다. 평지성과 산성의 형태를 결합한 평산성이다. 성 밖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해자(垓字)인 황(隍)이 설치돼 있다. 화량진성은 경기 좌도 수군을 관할했던 진성으로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고려 말~조선 초기의 축성법과 수군진성의 구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문화재청 제공
이곳은 키네마극장 서북쪽 30m 지점에 있던 인천의 대표적인 개봉관이었다. 1930년대 초 낙우관이라는 무대 공연장으로 출발, 1938년 12월31일 인천동보영화극장으로 개칭과 함께 극장 내부의 다다미를 의자로 바꾸고 영화 상영을 겸하는 개봉관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당국은 15일간은 영화 상영, 15일간은 종전과 같이 극단 공연 극장으로 허가했다. 당시 애관, 표관과 함께 3대 영화관으로 경쟁했다고 한다. 1981년 폐관할 때까지 인천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맥줏집 등이 들어섰다가 다시 폐업한 후 잡화상 등이 있었다. 그러나 2015년 헐려 현재는 주차장 부지다. 인천시 제공
초과리 오리나무는 수고, 근원둘레, 수관 폭, 수령 등 규격적인 측면에서 희귀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고유의 수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마을주민들의 쉼터로서 정자목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등 자연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높다. 오리나무는 전통 혼례식 때 전안례(奠雁禮)를 위해 신랑이 가지고 가는 나무기러기, 하회탈, 나막신, 칠기의 목심(木心) 등 우리의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