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사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절터의 크기로 미뤄 아주 큰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 왜적이 물을 따라 올라가 절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곳은 탑비의 비각을 세우는 공사 도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기와 조각이 발견되며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명종 15년(1185년)에 세워진 이 탑비는 현오국사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만들어졌다. 보통 부도와 함께 건립되는데 절터에 부도의 흔적은 없고 비석만 남아 있다. 화강암의 비석 받침 위에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비몸돌이 놓여 있는 단출한 모습이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浮石寺) 주지를 거쳐 명종 8년 53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왕이 크게 슬퍼해 국사(國師)로 삼고 시호를 ‘현오(玄悟)’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했다. 국가유산청 제공
참법이란 경전을 읽으면서 죄를 참회하는 불교의식을 말하며 서방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삼는 것을 미타참법(彌陀懺法)이라 한다. 이 책은 미타참법의 절차를 수록한 것으로 성종 5년(1474년) 세조비인 정희대왕대비가 성종비인 공혜왕후 한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한 것이다. 책 끝에 있는 김수온의 글을 통해 공혜왕후 한씨뿐만 아니라 선대왕과 왕비들의 명복도 함께 빌기 위해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에는 판각에 참여한 당시의 유명한 승려와 왕실종친 등의 직책 및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어 왕실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책을 펴내는 데 동원된 사람이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고 이들의 직책과 이름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목판 인쇄기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국가유산청 제공
고려의 승려 제관이 천태사상을 집약해 정리한 것으로 이론과 실천이 같이 어울려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2권의 책 중 상권 1책이며 크기는 세로 24.5㎝, 가로 16.5㎝다. 책 끝에 있는 목암노인이 쓴 글에 의하면 오래된 판본이 있었는데 글자가 크고 책이 무거워 휴대하기 불편해 굉지대선사(宏之大禪師)가 수여(水如)에게 다시 쓰도록 해 충숙왕 2년(1315년) 기복도감(祈福都監)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기복도감에서 다소 뒤에 찍어 낸 판본이지만 본문이 완전하게 판독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우리나라 고승이 쓴 책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게 평가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고려 후기의 승려인 원증국사 보우의 사리탑으로 3단으로 이뤄진 기단(基壇)위로 탑신(塔身)을 올린 후 독특한 모습의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의 맨 밑단이 되는 사각의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겼으며 그 윗면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무늬를 새겼다. 팔각의 가운데받침돌은 각 모서리에 원기둥을 새긴 후 면마다 큼직한 꽃무늬를 새겨 장식했다. 원형에 가까운 윗받침돌은 굵은 선으로 연꽃을 새겼고 꽃잎 안에 고사리 무늬를 뒀다. 탑신의 몸돌은 원형으로 위쪽이 좁아져 지붕돌 밑면에 들어맞게 돼 있다. 지붕돌은 처마가 거의 수평을 이루며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투박하게 솟아 있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있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의 건립이 고려 우왕 11년(1385)이므로 이 사리탑은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시대에는 70세가 넘은 신하에게 공경의 뜻으로 나라에서 지팡이 ‘장(杖)’과 의자 ‘궤(几)’와 가마 등을 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에 따라 왕이 내린 물품이다. 현종 9년(1668년) 11월 왕이 당시 원로대신인 이경석에게 공경의 뜻으로 내린 궤 1점, 장 4점, 이를 받는 장면을 그린 그림 1점 등 총 6점의 유물이다. 궤장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잔치를 열었는데 의정부의 동서반을 비롯한 대신들을 참석하게 하고 예문관이 작성한 교서를 낭독하게 했다. 이 그림은 바로 이런 장면을 세 부분으로 나눠 그린 것이다. 궤장은 조선 중기 국가에서 운영하던 공전에서 제작된 것으로 그 당시 제작 규정과 양식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공예품이며 ‘연회도첩’은 당시 풍속도로 회화적 가치가 큰 작품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사인비구가 1674년 만든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의 대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법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으로 사인비구가 김룡사 종, 수타사 종(1670년)을 제작한 이후 완숙한 기량을 발휘한 수작인 점에서 조선 후기 장인 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엄경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는 화엄종의 근본 경전이자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 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고려 현종(재위 1011∼1031년) 때 부처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극복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두루마리처럼 말아 보관할 수 있다. 초조대장경은 이후 만들어진 해인사대장경(재조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과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목판의 새김이 정교한 반면에 해인사대장경과 글자 수가 다르고 간행 연도를 적은 기록은 없으며 군데군데 피휘(문장에 선왕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글자의 한 획을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것)와 약자(略字)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중 유일한 권 제1로 11세기경에 찍어낸 초조대장경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오명항(1673∼1728)을 그린 초상화 1점과 1등공신으로 책록하는 교서 1부 및 그것을 담았던 나무상자 1점 등 3점의 유물이다. 오명항은 숙종 31년(170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좌랑, 병조판서, 우의정까지 올랐던 인물로 영조 3년(1727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봉해졌다. 초상화는 가로 1.03m, 세로 1.74m로 비단 채색의 전신상이다. 가슴에 수놓은 두 마리 학의 모습에서 공신책록 후에 그린 전형적인 공신도다. 높이가 높은 사모와 호피가 깔린 의자, 팔(八)자로 벌린 발 모습에서 당시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교서는 가로 289.5㎝, 세로 42.9㎝로 닥나무로 만든 바탕에 비단을 배접해 만들었다. 반란을 진정시킨 공로를 인정해 1등공신 1명, 2등공신 7명, 3등공신 7명을 공훈한다는 글과 이름이 들어 있다. 교서의 좌우에는 나무로 축을 부착해 말아 두게 했고 뒷면에는 신치근이 만들고 조명교가 글을 썼다는 명문이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한반도에서는 처음 발견된 각룡류 공룡(일명 ‘뿔공룡’) 화석으로 중생대 전기 백악기(약 1억2천만년 전)에 각룡류 공룡이 한반도에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2022년 10월7일 공룡 골격 화석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살아있을 때의 전체 길이는 약 2.3m로 추정되며 계통발생학적 연구 결과 이족보행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각룡류의 걸음걸이 진화(이족보행에서 사족보행으로 진화) 과정을 규명하는 데 있어 초기(원시적인) 각룡류의 보행 특성을 이해하는 중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최초 발견된 각룡류 화석으로 국제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Koreaceratops hwaseongensis)’, 즉 ‘화성에서 발견된 한국 각룡류 공룡’이란 뜻으로 명명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삼각산(三角山)은 북한산의 중심으로 백운대(835.6m), 인수봉(811.1m), 만경대(800.6m)로 구성된다. 이들은 쥐라기에 생겨났으며 여러 모양의 화강암 돔들이 수려하다. 산 사면의 경사는 70도에 달하고 백운대 정상에는 약 500㎡의 평평한 곳이 있어 등반객과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만경대의 옛 이름은 국망봉이며 정상부의 산세가 불규칙하다. 고구려의 왕자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펴본 곳이 삼각산이며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 후보지를 찾아다닐 때 백운대와 만경대에 이르러 비봉에 오르니 비석에 ‘무학이 길을 잘못 들어 여기에 이른다’라고 씌어 있어 길을 바꿔 내려가 궁성터(오늘의 경복궁)를 정했던 곳이 바로 이 산이다. 조선시대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가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를 읊은 곳이기도 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회양목이 위치한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쌍릉으로 원래 양주의 건원릉 서쪽에 있었으나 1673년(현종 14년) 현재의 위치로 천장했다. 이 같은 재실 공간 내에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준다. 이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노거수이다. 1673년 조성한 효종 영릉 재실에서 300여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 및 역사성이 매우 깊다. 국가유산청 제공
‘협주명현십초시(夾注名賢十抄詩)’는 과거시험 준비생들의 수요를 염두에 두고 권람의 교정을 거쳐 간행한 중국과 한국(신라)의 시인 30명의 시선집이다. 내용은 각 시인의 작품 중에서 칠언율시(七言律詩) 10편씩 총 300편을 뽑아 주해를 붙인 것이다. 이 책은 경상도 밀양부에서 간행한 지방관판본으로 한국인이 그 대상을 선정하고 직접 주해한 최초의 한중시선집으로 매우 귀한 사례에 속하는 책이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고려 말 조선 초 서적의 유통과 문화 수용의 양상, 한시의 학습과 활용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광주(현재 하남시) 미사리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미사리는 원래 한강에 있는 섬이었으나 조정경기장이 만들어지면서 육지쪽과 연결됐다. 1962년 발견됐고 1980년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서울시내 4개 대학이 합동 발굴했다. 현재 지표로부터 7개의 자연층위로 이뤄졌는데 삼국시대 전기층, 청동기시대층, 신석기시대층으로 구분된다. 청동기시대층에서는 여러 점의 무문토기와 돌도끼, 돌끌, 돌그물추, 그리고 당시의 집터가 확인됐다. 신석기시대층은 주거지와 빗살무늬토기, 그물추, 화살촉, 돌도끼를 비롯한 생활도구와 불에 탄 도토리가 채집됐다. 신석기시대층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측정 결과 5천253±140년 전으로 나타났다. 미사리 선사유적은 각 시대의 생활도구 및 집터가 발견돼 중부지역 선사문화 연구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 선사문화 연구에도 중요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1458년 세조가 금강산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와 같아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했다고 전해온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어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했다. 사계절 연중 내내 일출, 일몰, 운해 등 어느 시간이라도 아름다운 전망을 지녔다. 정약용은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던 곳이며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중 독백탄은 현재의 양수리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 그 시대의 명승지와 현재의 경관을 비교할 수 있어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
한탄강의 강물이 휘도는 아름다운 지형에 있는 바위로 강물과 자연 식생이 함께 어우러져 비경을 이루고 있다. 하천이 휘돌아 가며 생겨난 깊은 연못과 수면 위로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13m나 솟아올라 있으며 짙은 색의 현무암 절벽과 밝은 색의 기둥바위, 짙푸른 물빛이 어우러져 있다. 화적연은 지형적 가치도 높은데 대보화강암(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을 뒤덮은 현무암층, 현무암 주상절리, 화강암 암반, 상류에서 공급된 풍부한 모래와 자갈 등 다양한 지형 요소를 관찰할 수 있다. 이들 지형 요소는 서로 어우러져 하천을 굽히고 있으며 여름철 많은 물이 흐르며 거대한 바위를 갈아 아름다운 화적연을 만들어 온 것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독산성(독성산성)’은 선조 25년(1592년)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에서 병사 2만여명을 이끌고 와 주둔하며 왜병 수만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 선조 27년(1594년) 백성들이 산성을 쌓았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년)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고 그후 정조 16년(1792년)과 20년(1796년)에도 다시 공사했다. 성 둘레는 1천100m이고 문도 4개이지만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으로 이곳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전해진다. 권율 장군이 산 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물거미는 전 세계에 오직 1종만이 존재하며 한국, 일본, 중국, 유럽의 온대지방과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등지에 분포한다. 몸의 크기는 일반적인 거미류가 암컷이 수컷에 비해 월등히 큰 데 반해 물거미는 수컷이 암컷보다 더 크다. 몸에 많은 털이 있는데 이 털은 은백색 공기방울을 만들어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하며 방수 역할도 한다. 물거미는 독특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며 연천 은대리의 물거미 서식지는 세계적 희귀종인 물거미의 국내 서식지로는 현재까지 유일한 곳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한탄강 연안에는 현무암 평원이 발달해 있으며 현무암 평원을 관류하는 한탄강 유로에는 경관이 특이한 현무암 협곡이 형성돼 있다. 철원 대교천 현무암 협곡은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신생대 제4기의 지질과 지형 발달을 이해하는 데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협곡은 하천 바닥의 경사가 급해 직류 하천에 형성되고 좌우 방향의 침식보다는 아래쪽 방향의 침식이 더 활발하다. 협곡 곡벽 곳곳에 현무암의 주상절리가 아름답게 분포한다. 주상절리는 지표로 분출한 용암이 냉각 응고함에 따라 수축되면서 형성된 육각기둥이다. 이 현무암 협곡의 총 길이는 약 1.5㎞이고 깊이는 20∼30m로 경관이 빼어나며 주변에는 고석정, 순담계곡 등의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 쉼터 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거나 마을을 지켜 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받아 왔다. 마을 입구의 시냇가 공터에서 자라고 있는 양주 남면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8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4.5m, 가슴높이 둘레 7.75m다. 태풍 피해로 한쪽 큰 가지가 쪼개져 잘라냈으며 나무의 밑부분 중심은 썩어 3m 정도까지 속이 텅 비어 있었는데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시멘트로 채웠다. 하지만 겉모습은 튼튼하고 온전해 보인다. 이 마을에서 살던 밀양 박씨의 조상이 심은 나무로 전해진다. 오랜 세월 조상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문화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8천300만~8천500만년 전)으로 시화호 간석지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6∼7개 지점에서 공룡알 화석 및 알 둥지가 발견됐다.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부분 중국과 몽골 지역이었으나 시화호처럼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물다. 공룡의 서식 근거지라는 것뿐 아니라 환경 및 생태계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