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요 사상으로 하고 있다.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큰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이 책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법화경 7권 가운데 제1권으로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이다. 문화재청 제공
운남동 선정비군은 한국전력공사 영종지점 건물 뒤편의 영종경로당·동민회관 옆에 모두 14기의 선정비가 한 군데 모여 있는데 이는 원래 구읍 나루터 등에 산재돼 있던 선정비들을 한곳으로 모아 놓은 곳이다. 인천시 기념물 13호로 지정된 양주성의 만세불망비는 마을 주민들이 놋그릇을 모아 세운 금속비로 시지정 기념물로 지정돼 유리로 된 보호각 안에 있다. 이 선정비군은 거대사, 만세불망비, 애민선정비, 청덕애민영세불망비, 청근애민비 등의 이름으로 표기돼 있다. 인천시 제공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은 역대 여러 부처와 고승들의 법어, 대화, 편지 등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편찬한 불경이다.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백운화상이 고려 공민왕 21년(1372년)에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하 2권으로 엮었다. 문화재청 제공
용궁사는 인천 중구 영종도 백운산 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사찰이다. 원효대사가 670년 창건해 이름을 백운사(白雲寺)로 정했다고 알려진다. 용궁사 안에 있는 1천300여년이 지난 느티나무는 높이 20m, 둘레가 5.63m에 이른다. 이 나무는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로 불리는 한 쌍으로 돼 있다. 그중 할아버지 나무는 울창하게 자라있고, 할머니 나무는 할아버지 나무보다 작다. 과거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할아버지 나무에 기원하면 아기를 낳았다는 전설도 있다. 인천시 제공
조선 태조 7년(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조온(1347∼1417)에게 공전(功田)을 내린 문서다. 조온은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임명됐고, 제2차 왕자의 난에는 이방간의 군사를 몰아낸 공을 인정받아 좌명공신 4등에 올랐다. 내용을 보면 조온에게 150결의 공전이 내려졌는데 그 위치와 면적이 기록돼 있다. 이 문서는 조선 태종의 권력 강화에 활약한 인물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청국영사관 건물은 1884년 4월 선린동 8에 지어졌다. 청국이사부, 청국이사서로 불리기도 했다. 청국영사관 안에는 466㎡(141평)의 본청 외에 전보국과 청국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순포청(경찰서) 등이 있었으며, 신포동에 분청을 뒀다. 청일전쟁 이후 잠시 폐쇄됐다가 1898년 다시 개청한 후 일제 말에 완전히 폐쇄됐다. 영사관 자리는 교무실로 쓰이고 있고, 경내에는 1934년 건축된 화교 중산학교 교사(校舍)가 차지하고 있다. 인천시 제공
조선 전기에 제작된 우리나라 지도이다. 크기는 가로 61㎝, 세로 132㎝이다. 3단 형식으로 윗부분에는 ‘조선방역지도’라는 제목이, 중간 부분에는 지도가, 아랫 부분에는 지도 제작에 관련된 사람들의 관직·성명 등이 기록돼 있다. 지도에는 조선 팔도의 주현(州縣)과 수영(水營) 및 병영(兵營)이 표시됐는데 특히 각 군과 현마다 색을 다르게 하여 알아보기 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산과 강의 경계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도의 형태는 지금의 전국지도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북쪽으로는 만주지역을 남쪽으로는 대마도까지 표시해 조선 전기 영토의식을 엿볼 수 있다. 명종 12년(1557)∼명종 13년(1558)경 제작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일본에 유출돼 대마도에 보관됐던 것을 1930년대에 입수했다. 이 시기 우리나라 지도의 제작 수준 및 형식을 알 수 있어 더욱 가치 있고, 만든 이와 연대가 확실한 작품으로 다른 지도의 제작 시기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 제공
한미수호조규는 1882년 4월6일 미국의 슈펠트 제독과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 간에 체결되었다. 조약체결 장소는 아펜젤러 목사가 서술한 ‘슈펠트의 회고’라는 글 가운데 해관 관리관 사택 부근에 천막을 치고 체결했다고 언급하면서 미국이 영사관부지로 선정했다가 해관에 양도했던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제물포지도가 2013년 세관에 근무하는 연구자에 의해 발견되면서 해관 관리관의 사택이 자유공원 청일조계경계계단 위쪽, 현재 결혼식장이 들어선 자리로 밝혀지면서 그동안 조약 체결지로 주장되던 화도진설, 올림포스 호텔설 등이 오류임이 확인되었다. 1962년경 선교방송 한국복음주의극동방송국(HLKX)이 학익동에 있던 연주소와 송출소를 분리, 이곳에 연주소를 신축해 이전했다. 1966년 12월23일, 방송국 개국 10주년을 맞아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에 새 청사를 완공해 이전했다.
조선 제24대 왕인 헌종(재위 1834~1849년)이 효정왕후와 가례를 치른 후 진하장면을 그린 궁중기록화다. ‘헌종가례진하도병풍’은 총 8첩으로 구성돼 있다. 극세필에다 진채로 이뤄진 대폭의 가례도는 회화사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167년 전의 궁중혼례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의선당은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되면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우, 즉 사당 같은 곳으로 화교들이 이국땅에서 단합하고 전통 종교와 문화를 지키며 자신들의 안녕과 사업 번창을 기원하기 위한 장소다. 황합경이란 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며 건립 시기는 화교 상인들이 건너오기 시작한 1884년 이후로 추정한다. 본전 중앙에 관우신단과 관음신단 등 5개의 신단이 모셔져 있어 민속과 종교가 혼합된 사당임을 알 수 있다. 인천시화교협회 지정문화재 제1호이다. 최근 의선당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앞면에 ‘인천의선당지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선조가 직접 써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송언신(1542∼1612)에게 남모르게 보낸 서찰 7건이다. 송언신은 선조 10년(1577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치며 호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지냈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면서 왕의 자녀 3인을 찾아 보호해 달라는 내용과 그 공을 높이 사서 물품을 하사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을 통해 선조가 지방관리들을 통제하는 수완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조선의 국방, 군신간의 사신왕래와 선물교환, 가족제도 및 송언신의 가계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항 갑문은 근대시대 북성동 1가 102의 4에 만들어졌다. 애초의 갑문은 1918년 일제가 완공한 제1독에 있었으나 1974년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갑거를 축조하고 구항로를 없애 기존 제1독을 포함한 인천내항 전체를 선거화하면서 이곳에 갑문을 설치했다. 축조된 갑문은 2기이다. 1기는 폭 36m, 길이 363m이며, 다른 1기는 폭 22.5m, 길이 202m이다. 전자는 5만DWT급, 후자는 1만DWT급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다. 갑문의 1일 최대 처리 능력은 입항 20척, 출항 20척이다. 인천항 갑문은 세계 5대 갑문이자 동양 최대의 갑문이다. 인천시 제공
‘안중근의사유묵-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은 러일전쟁 당시 전의(대한제국 때 태의원에 딸린 주임의 벼슬)로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만주 뤼순 감옥으로 전근해 근무하던 오리타다다스가 들고 있었다.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의 친필을 옥중에서 받아 간직해오던 것을 광복 후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인 오리타 간지에게 넘겨줬으며 이것이 1989년 단국대에 기증됐다. 이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고쳐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소용없다”라는 내용을 담아 일본 정책의 잘못을 고칠 것을 촉구했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안중근 개인사 및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월미도 인근의 작은 섬인 소월미도는 1903년 팔미도 등대와 함께 이 섬 동쪽 끝에도 등대가 세워진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등대는 1963년 철거됐다. 소월미도는 월미도와 마찬가지로 군사 요충이어서 1904년 일본군 임시 군용철도감부는 인천역과 월미도 사이에 다리를 놓고 철도를 부설해 소월미도에 양륙한 군용화물을 수송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1904년 2월9일 인천 앞바다 러일해전 당시 소월미도 부근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 바랴크, 코리에츠 두 함정이 팔미도 부근에서 일본 군함과 교전하다가 큰 손상을 입고 다시 소월미도 부근으로 들어와 정박 중 자폭했다. 1974년 기존 제1독을 포함한 인천내항 전체를 선거화한 공사가 완공돼 월미도와의 사이에 선박이 출입하는 갑문이 구축되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인천시 제공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해 정조 20년(1796년)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 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아 훨씬 발달한 모습을 하며 한국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수원 화성의 서쪽 문으로 문의 모든 시설과 크기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로 돼 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돼 있다. 한국의 다른 성곽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로서, 구조도 특이하며 화서문을 중심으로 일대의 경치에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역 맞은편 북성동 언덕 일대와 괭이부리 등지에 있었다. 두번의 양요와 운요호사건 등을 겪은 조선은 인천 연안에 방어시설의 구축을 위한 논의 끝에 1878년 8월27일 무위소 소속 신정희를 진사와 포대의 공역감동당상에 임명하고 10월15일 제물포 주변부터 축조해 이듬해인 1879년 7월1일 완료했다. 묘도북변포대(5혈), 묘도남변포대(5혈), 북성곶(북성포)북변포대(3혈), 북성곶남변포대(5혈), 제물포 북변포대(8혈), 제물포 남변포대(5혈), 호구(논현)포대(2혈) 등 화도진에서 관할하는 포대들로서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에 이처럼 토둔이라고 불리는 토루를 구축했다.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철폐됐다. 인천시 제공
보물 ‘김중만 초상’은 조선 중기의 무신 김중만의 초상화 3점이다. 김중만은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무과에 합격한 후 이인좌의 난(1728)을 평정했으며, 후에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낸 인물이다. 초상화는 비교적 크기가 큰 것 1폭과 작은 2폭이 있다. 보통 직무를 볼 때 쓰는 관모와 짙은 초록색의 관복을 입고 있고, 얼굴은 갈색기가 돌며 이목구비와 음영 표현이 확실하다. 가슴 부위에는 두 마리의 학이 새겨진 흉배와 금장식의 각대가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선생이 문관 종2품 때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이 초상화들은 높은 관모, 짙은 초록색의 관복, 과장된 관복의 옷주름,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 발을 올려 놓는 단의 형태 등으로 보아 당시 공신상의 기본적인 형식을 따른 그림으로 초상화 연구에 있어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서울로 첫 운행을 시작한 기념비적인 역이다. 우각리가 한국 철도 사상 최초 시공지였다면 인천역은 한국 최초로 기차가 출발한 시발역인 셈이다. 1926년 축현역을 상인천역으로 개칭할 때 인천역을 하인천역으로 부르기도 했다. 1943년 총독부 고시로 인천역을 폐지하고 인천부두역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부두역명은 1948년 다시 인천역으로 환원됐다. 인천시 제공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해 이 탑을 세웠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말기 인천 전환국 방판을 지낸 안경수의 거처였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가 이 집의 1980년대 풍경과 함께 그 내력을 전한다. “행랑채와 사랑채, 그리고 명물이던 목련 고목도 없어졌으나 대문 안 연못을 둔 아담한 정원과 화사한 나이든 주목이 옛 모습대로 안채를 지키고 있다. 이 한옥은 1892년일본의 기재와 기술로 인천여고 자리에 전환국을 건립할 때 전환국 방판으로 일본을 왕래하며 실무를 담당하던 안경수 자신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후 ‘인천부사’를 간행하고 인천중학교 개교를 위해 사재를 기부한 인물로 알려진 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가 이 집을 인계받아 거주했다. 6·25전쟁 후 여의사 박순정이 전동의원 건물로 사용했다. 현재 집의 원형은 사라지고 빌라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인천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