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 국방부 장관, 아직은 낯설다. 그러나 낯설다고 해서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다. 역사는 늘 익숙함보다 불편함에서 시작했다. 그 불편함은 변화의 신호이자 변혁의 씨앗이기도 하다. 새 정부의 문민 국방장관 예고는 군 안팎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파격’이라 불리는 인사는 늘 양면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신선한 개혁의 신호로, 누군가에게는 불안과 반발의 대상이 된다. 낙하산 논란과 경험 부족 우려가 뒤따른다. 하지만 이 인사가 단순한 자리 배분인지, 국방개혁의 물꼬를 트는 출발점인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 있다. 군은 스스로를 ‘방패’라 자처한다. 그러나 그 방패가 진정 국민을 향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병영 내 폭력, 은폐된 사고, 반복되는 성범죄와 늦장 대응. 전시에는 철통 보안을 내세우면서도 평시에는 군 기강을 이유로 침묵했다. 헌법이 보장한 문민 통제는 명문화돼 있으나 국방부 수장은 여전히 예비역 대장의 관행에 묶여 있다. 군이 국민의 조직이라면 그 작동 원리는 국민의 민주적 감시와 견제에 기반해야 한다. 이는 불신이 아니라 헌법적 책임의 구현이다. 문민 장관은 그 책임을 국민 앞에 투명하게 비추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군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통제는 불신이 아닌 공공성과 투명성에 대한 헌신이다. 시민의 눈높이에서 운영되는 군은 더 강하고 유연하다. 단지 지휘와 통제만이 아니라 소통과 참여가 함께 작동할 때 안보도 살아 숨 쉴 수 있다. 반론도 있다. “전쟁이 나면 누가 결정을 하나.”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선진국은 모두 문민 장관 체제 아래 정교한 군사보좌 시스템을 갖췄다. 군은 장관을 ‘명령자’가 아니라 전략을 조율하고 문화를 혁신하는 ‘지도자’로 인식한다. 총을 들지 않아도 강한 리더십은 존재할 수 있다. 현대전은 단순히 무기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보전, 사이버전, 인공지능(AI)전, 우주전까지, 그 복합성과 첨단 기술성은 특정 군 경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 군의 미래는 더 이상 병영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 군을 사회와 단절시키는 구조로는 시대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 오히려 민간은 군이 놓치기 쉬운 감각을 지닌다. 인권, 성평등, 예산 투명성, 윤리. 이것들이 오늘날 국방의 진짜 연료다. 문민 장관은 단순한 관리자나 대체자가 아니라 이 연료에 불을 붙이는 ‘점화자’여야 한다. 그러나 국방개혁은 특정 개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문민 장관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제도와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 첫째, 군사보좌기구는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춰야 하며 민간 전문가의 실질적 참여가 제도화돼야 한다. 둘째, 장병 가족·예비역·시민사회가 함께하는 ‘민군 협치 플랫폼’이 필요하다. 셋째, 인권 전담기구는 실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 세 가지는 군을 ‘닫힌 벽’에서 ‘열린 문’으로 바꾸는 장치이며 국민이 군의 진정한 주인임을 회복하는 통로다. 지금까지 군은 권위의 벽이었지만 앞으로는 책임의 문이 돼야 한다. 정치권은 문민 국방장관 임명을 진영의 이념 언어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보수는 안보를, 진보는 개혁을 말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념이 아닌 ‘신뢰’다. 실력과 책임 있는 리더십이 국방개혁의 진정한 동력이다. 군은 계급으로 움직이지만 국민은 신뢰로 판단한다. 신뢰를 잃은 군은 전쟁이 아니라 일상에서 먼저 패배한다. 아무리 전력이 강해도 국민이 외면하면 군의 존재 이유는 흔들린다. 국방개혁은 단순한 군 효율성 개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심장부를 다듬는 일이다. 지금은 누가 총을 드느냐보다 누가 책임지는지를 묻는 시대다. 문민 장관 임명은 군 통치가 아닌 국민과 함께 걷는 ‘동반자 선언’이어야 한다. 국방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다. 출신보다 방향이 중요하며 문민 장관은 군 통치에서 군 통합으로, 위계에서 협치로 나아가는 상징적 출발점이다. 국민은 ‘책임지는 군’, ‘국민 곁에 서는 군’을 원한다. 군이 먼저 국민을 믿을 때 국민도 그 믿음을 돌려준다. 보이지 않는 헌신, 그것이 국방의 진정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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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25-06-11 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