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종의 클로즈업] 방첩은 권력이 아니라 기능이다

방첩은 늘 불편한 존재였다. 그래서 개혁의 단골 메뉴가 됐다. 그러나 불편함을 없앤다고 위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편함이 사라진 자리에 위험이 들어앉는 경우가 더 많다. 최근 논의되는 국군 방첩 체계 개편은 단순한 조직 개편이 아니다. 한국 군사안보를 어떤 방식으로 작동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방첩을 ‘통제해야 할 권력’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안보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으로 볼 것인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선택이지만 결과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방첩은 적의 침투와 내부 정보 유출을 사전에 차단하는 정보·보안·수사 기능의 결합체다. 이런 본질 때문에 기능이 한 기관에 집중되면서 권력기관화 우려가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의심이 쌓여온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권력이 통제 없이 축적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역사 교과서가 아니라 현실 정치가 증명해 왔다. 과거의 일탈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차단하자는 문제 제기 자체는 정당하다. 하지만 문제는 방향이다. 권한 남용을 막기 위해 기능을 쪼개고 약화시키는 방식이 과연 해법일까. 통제를 강화하는 것과 기능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선택이다. 이 기능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는다. 보안 단계에서 이상 징후를 포착하고, 분석하고, 필요하면 즉시 내사나 수사로 넘어가는 흐름은 단순한 분업이 아니다. 하나의 작동 체계다. 여기서 시간은 곧 생명이다. 기능을 여러 조직으로 나누고 그 사이를 협의체와 조정 구조로 잇겠다는 발상은 현장의 속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집을 허물어 놓고 가설 구조물로 버티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안보는 설계도로 지켜지지 않는다. 현장에서 증명된다. 방첩은 사후 대응이 아니라 사전 차단의 영역이다. 평시의 정책 조율과 권한 관리는 회의체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판단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방첩과 보안을 인위적으로 분절한 나라는 많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정보·보안·수사 기능이 맞물릴 때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면 대응력이 약해지고 대응력을 살리면 통제가 느슨해진다는 딜레마 앞에서 주요 국가들이 택한 길은 해체가 아니라 ‘정밀 통제’였다. 미 국방부는 방첩 기능을 세분화했지만 지휘 체계는 하나로 유지한다. 그 대신 법과 의회의 통제를 강화했다. 이스라엘과 주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도 마찬가지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통제는 강화하되 정보 흐름과 현장 대응을 끊어 놓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 기능을 흩어 놓으면 권한은 약해질 수 있다. 책임도 함께 흐려진다. 통제는 분산이 아니라 가시성과 책임의 명확성에서 작동한다. 체계 논의가 정치 논쟁의 연장선에서 소비되면 제도 개편의 목적은 흐려진다. 특정 사안에 대한 책임 추궁과 장기적 제도 설계는 분리해야 한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지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구조로 판단해야 한다. 안보 개혁이 감정의 언어로 추진될 때 그 대가는 사회 전체가 치른다. 민주적 통제는 필요하다. 민간 수장 임명, 준법 감찰, 국회 보고 확대는 제도의 신뢰를 높이는 장치다. 그러나 통제가 기능을 마비시키는 수준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통제가 목적이 되는 순간 기능은 부차화된다. 안보 조직이 스스로 손발을 묶는 꼴이다. 개혁의 방향은 분산이 아니라 통합된 기능 위에 강화된 통제다. 한반도의 안보 환경은 단순하지 않다. 핵과 미사일, 사이버 침투, 방산 기술을 노린 산업스파이, 내부 정보 유출이 동시에 움직인다. 이런 환경에서 방첩 기능을 분산과 격하의 논리로 설계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인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방향이 반드시 해체일 필요는 없다. 권한 남용의 여지는 줄이되 정보 통합력과 현장 대응력은 지켜야 한다. 방첩은 불편한 기능이다. 그러나 불편하다고 없앨 수 있는 기능은 아니다. 안보의 위험은 과잉이 아니라 기능이 사라진 공백에서 시작된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軍 정당한 명령과 위법한 명령

군은 명령과 복종을 통해 움직인다. 이는 권위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과 국가 안보가 걸린 조직이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논의되는 군인복무기본법 개정안, 특히 ‘정당한 명령’의 판단을 장병 개인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는 군 지휘체계 전반에 근본적인 법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번 논쟁의 본질은 ‘명령 거부권을 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정당한 명령과 위법한 명령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그 판단과 책임은 누구에게 귀속되는가라는 법적 설계의 문제다. 이 지점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제도만 앞서갈 경우 군은 새로운 혼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개정안은 장병의 권리 보호라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취지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군사작전 환경에서는 명령의 즉시성과 일관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다. 전장에서 개별 장병이 명령의 정당성을 사전에 판단해야 하는 구조가 일반화될 경우 지휘체계의 지연과 판단 혼선이 발생할 가능성은 현실적인 우려다. 특히 계엄 논란 이후 군 통제와 책임 문제에 대한 사회적 민감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책임의 명확화보다 ‘명령 거부 가능성’이 강조되는 접근은 군 내부에 또 다른 불확실성을 낳고 있다. 현장에서는 이미 “이 명령이 나중에 문제 되지는 않을까”라는 고민이 명령 집행 이전에 앞서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휘관이 군사적 판단보다 사법적 해석 가능성을 먼저 고려하게 되면 지휘의 적극성과 책임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결국 논쟁은 ‘어떤 명령이 명백히 위법한 명령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현재의 법체계는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군은 위법 명령에 대해 사후적으로 책임을 묻는 구조—지휘 책임, 군검사·감찰제도—를 통해 통제해 왔다. 이 제도를 정교화하는 대신 판단 부담을 장병 개인에게 이전하는 방식은 책임의 하향 이동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해외 군대의 사례 역시 이 지점에서 신중하다. 미국 군형법(UCMJ)은 ‘적법한 명령’에 대한 복종 의무를 분명히 규정하면서도 위법성 판단은 제도와 사법 절차에 귀속시킨다. 독일 연방군 또한 법적 근거 없는 명령은 무효라는 원칙을 명확히 하되 그 판단 기준은 법률에 의해 구체화돼 있다. 공통점은 명확하다. 모호한 개념을 개인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의 민주적 통제는 헌법 질서의 핵심 요소다. 그러나 민주적 통제란 군 내부의 판단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명확한 기준과 책임 구조를 통해 군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다. 통제와 안정성은 대립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기준이 분명할수록 군은 더 민주적으로, 더 책임 있게 작동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당한 명령’이라는 추상적 문구의 확대가 아니다. 위법 명령의 구체적 유형, 판단 주체의 명확화, 전시·작전 상황에서의 예외 규정, 그리고 사후 책임의 귀속 구조를 법률 차원에서 정밀하게 설계하는 일이다. 장병의 권리 보호와 군 지휘체계의 안정성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완성돼야 할 헌법적 과제다. 군에서의 모호함은 곧 혼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혼란은 전장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군에 대한 신뢰는 선언이나 선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분명한 법적 기준과 일관된 책임체계, 그것이 민주적 통제의 실질적 완성이며 군이 국가의 마지막 안전판으로 기능하기 위한 조건이다. ‘전장은 혼선을 허용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 역시 그래야 한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핵잠 논의’ 기대 높지만 과제 산더미

한미 양국이 원자력 추진 잠수함(SSN) 건조 추진에 뜻을 모았다는 발표는 국내 안보 논의를 단숨에 뜨겁게 달궜다. 전략자산 확보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 발표의 무게만큼이나 그 이면에 숨겨진 현실적 변수를 국제 전략 환경과 국내 여건을 모두 고려해 냉정히 검토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낙관이나 우려의 극단이 아니라 기대와 현실을 동시에 견디는 전략적 시각이다. 첫째, 합의의 구체적 범위는 아직 불명확하다. ‘뜻을 모았다’는 표현이 원칙적 공감대인지, 정책적 승인인지, 기술·연료 이전에 대한 실질적 합의인지 공개되지 않았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문구의 작은 차이가 향후 협력 폭과 기술 이전 범위를 결정할 수 있다. 미국과 호주의 원잠 협상 사례(AUKUS)에서도 원칙적 합의에서 실제 기술 이전까지 수년이 걸린 바 있어 현재 단계에서 지나친 기대는 경계해야 한다. 둘째, 우라늄 농축·재처리(ENR) 문제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 미국의 비확산 정책(NPT)과 관련 법령은 ENR 기술 이전에 극도로 신중하다. 정부가 협의 공간이 넓어졌다고 설명하지만 이는 기술 이전이나 단독 재처리 승인으로 직행하는 신호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이번 발표는 단순히 기회를 확보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출발 신호는 의미 있으나 목적지 좌표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셋째, 핵잠 확보는 전략적 효용과 부담을 동시에 수반한다. 원자로 운용 인력 양성, 정비·안전관리 체계 구축, 방사능 대비 인프라, 예산 투입 등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핵잠은 단순한 전력 보강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전체의 업그레이드를 요구한다. 즉시 전력화라는 인식은 현실과 거리가 멀며 비유하면 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도로·정비소·운전학교’를 동시에 만드는 일과 같다. 프랑스와 영국 사례에서 초기 인력 양성만 5~7년이 소요된 점도 참고할 만하다. 넷째, 미국 함정의 국내 건조 논의는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미국의 자국 선박 건조 원칙(Jones Act)과 ‘군함 애국조항(Buy American)’ 유지 정책은 수십년간 변하지 않았다. 한국 조선업의 역량을 고려해도 단기간 내 제도 장벽을 넘는 것은 쉽지 않다. 현재 단계는 어디까지나 논의 시작 수준으로 기술·인력·법적 절차 모두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다섯째, 한미 간 경제·군사 교환의 균형과 비용 구조도 살펴야 한다. 관세 인하 등 긍정적 효과가 예상되지만 대규모 무기 구매는 국방 예산 구조에 영향을 준다. 장기적 부담과 이익 구조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국제 사례를 참고하면 호주 핵잠 프로그램의 총비용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3% 수준으로 평가되며 장기간 재정 부담 우려도 나온다. 마지막으로 국내 정치 환경과 초당적 협력 구조가 중요하다. 외교·안보 의제가 정치 쟁점화될 경우 협상력과 정책 일관성 모두 흔들릴 수 있다. 핵잠 확보와 확장 억제 강화는 국가 전략 핵심축이므로 정치적 유불리보다 안정적 추진을 위한 협력 체계가 중요하다. 결국 이번 발표는 중요한 논의를 공식 테이블에 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발표만으로 안보가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 협력, 인력 양성, 예산 마련, 국제정치 변화, 한미 간 조정 과정 등 실제 과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분명 핵잠은 한반도 안보의 큰 축이 될 수 있으나 그 힘은 현실적 준비와 전략적 냉정 위에서만 발휘된다. 기대는 높되 과장은 경계하고 속도는 조절하며 방향은 명확히 해야 한다. 정부, 정치권, 산업계, 국민 모두가 이러한 균형 감각을 공유할 때 우리의 안보는 단단한 체계를 갖출 수 있다. 핵잠보다 중요한 것은 핵잠을 다룰 국가 시스템의 정비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계엄의 그림자가 삼킨 軍 명예

“그래도 지구는 돈다.” 신의 계시가 진리로 군림하던 시대,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들었다. 그는 스스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집요한 회의를 통해 인류의 세계관을 뒤흔들었다. 의심은 불신이 아니라 진실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2024년 12월3일 대한민국에서 ‘계엄’은 더 이상 유령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추측과 의혹으로만 회자되던 계엄이 실제로 발령됐고 해제 과정에서 정치와 사회는 벼랑 끝으로 몰렸다. 전직 대통령은 탄핵 후 구속됐고 장성들은 법정에 섰다. 국가 권력의 최후 수단이 현실에서 작동한 순간 한국 사회는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게 됐다. 조기 대선으로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계엄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계엄 사태 이후 군 신뢰도는 15% 가까이 하락했고 특히 20, 30세대의 신뢰 회복은 더디다. “군도, 민주주의도 믿을 수 없다”는 회의가 젊은층에 퍼지며 정치 냉소주의를 키우고 있다. 가장 깊은 상처는 군에 남았다. 군은 헌법상 통수권자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었지만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민 신뢰를 일부 잃었다. 한 장성은 간담회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군은 국민 신뢰 위에 존재합니다. 신뢰가 의심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존재 이유를 되묻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푸념이 아니라 군 전체가 짊어진 집단적 상흔을 대변한다. 정치와 언론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계엄은 정쟁의 도구로 소환됐고 일부 언론은 속보 경쟁에 치우쳐 사실 확인보다 의혹 증폭에 몰두했다. 그 결과 ‘군의 정치 개입’이라는 불신이 사회 전반에 확산됐다. 영국 철학자 스티븐 툴민은 “증거는 해석의 공동체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에는 그런 공동체적 해석이 실종됐다. 같은 사건이 진영에 따라 서로 다른 ‘진실’로 소비되고 민주주의는 점점 더 파편화되고 있다. 헌법이 보장한 계엄제도는 본래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한 합법적 장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정치적 계산에 따라 제도가 악용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제도의 본래 취지는 훼손됐고 그 부담은 군과 국민에게 전가됐다. 이는 군의 명예와 사기 훼손을 넘어 민주주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불길한 신호다. 새 정부가 풀어야 할 과제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군이 다시는 정치의 도구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법으로 확실히 보장하고 권력의 의도나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군이 흔들리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국회와 국방부가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 견제와 균형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하며 군의 작전권과 지휘 체계가 국민적 신뢰 속에서 운영될 수 있도록 보완해야 한다. 언론도 책임 있는 보도를 통해 사실에 근거한 공론장을 회복해야 한다. 정치권 역시 아렌트가 말했듯 “행동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증거 없는 주장과 무책임한 언사는 결국 군과 국민 모두를 해치는 칼날이 된다. 며칠 뒤면 국군의 날이다. 올해 국군의 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상처 입은 군의 명예와 사기를 회복하고 국민과의 신뢰를 다시 세울 소중한 기회가 돼야 한다. 화려한 열병식보다 중요한 것은 군 내부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국민에게 군이 ‘국민의 군대’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정치는 언제든 계엄을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언급이 충분한 증거와 책임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다음에 드리울 계엄의 그림자는 군이 아닌 민주주의 그 자체일 것이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세상을 확인했듯 우리 역시 근거 없는 의혹이 아니라 증거 위에 민주주의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군의 명예를 회복하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전략적 유연성과 동맹의 조율

최근 한미 간 관세 협상이 타결되면서 외교의 중심축이 다시 안보로 이동하고 있다. 방위비 분담, 주한미군 운용 변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등 굵직한 현안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그중에서도 ‘전략적 유연성’은 단순한 군사 개념을 넘어 한국의 외교적 자율성과 동맹 운영의 기본 원칙을 시험하는 중대한 과제다. 전략적 유연성이란 주한미군이 한반도 방어 임무를 넘어 미국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역외 지역에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개념이다. 이는 200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논의됐고 2006년에는 ‘한반도 방어 우선’과 ‘사전 협의’라는 두 원칙 아래 일정한 틀을 마련한 바 있다. 유연성은 전략의 본질일 수 있으나 그것이 한국의 안보 원칙과 국민적 공감대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매우 예민하고도 중요한 문제다. 이 개념은 9·11 테러 이후 대테러 작전의 세계화 속에서 부각됐으며 최근에는 미중 전략 경쟁의 격화에 따라 새로운 지정학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특히 대만해협이나 남중국해 등 동북아의 역외 분쟁에서 주한미군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한국으로서는 자칫 원치 않은 외교적 부담을 떠안을 우려도 있다. 국민 여론 역시 이러한 복합적 딜레마를 인식하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68%는 한미동맹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58%는 주한미군의 한반도 외 개입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는 동맹을 지지하되 그 운영 방식에 있어 절차적 정당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이중의 신호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논의는 한미동맹의 미래와 한국 안보전략의 현실을 직시하며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할 때만 정책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첫째, 주한미군의 존재 목적은 철저히 한반도 방어에 있다는 원칙이 재확인돼야 한다. 유연성 확대는 이 원칙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사전 협의와 국민 동의를 바탕으로 제한적으로 수용돼야 한다. 둘째, 전작권 전환은 단순한 지휘권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자주적 방위 역량을 실질적으로 확립하고 동맹 내 역할 균형을 재정립하는 과정이다. 선언적 목표를 넘어 구체적인 이행 로드맵과 전력 강화 방안을 병행해야 한다. 셋째, 외교·안보 정책은 반드시 국민 참여와 공론화 과정을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공청회, 국회 보고, 전략 문서의 단계적 공개 등을 통해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한국은 미중 전략 경쟁이라는 구조적 긴장 속에서 어느 일방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전략을 지향해야 한다. 주한미군 운용 변화가 중국과의 불필요한 마찰로 이어지지 않도록 사전 소통과 다자 외교를 통해 조율 능력을 키워야 하며 이것이 바로 동맹 관리의 핵심 역량이 돼야 한다. 일본과 호주 등 다른 주요 동맹국들도 유사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일본은 미일동맹을 강화하면서도 자위대의 활동을 헌법적 제약 속에 둬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고 호주 역시 미국과의 군사 협력에 참여하면서 특정 분쟁 개입에 있어선 조건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동맹과 주권 사이의 긴장을 제도적으로 조율하려는 노력이자 실용적 균형의 모범이다. 전략이란 유연한 운용에 앞서 분명한 방향성과 가치에 입각한 선택의 기술이다. 방향 없는 유연성은 결국 흔들리는 외교, 모호한 협력으로 귀결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 어디까지 조율할 것인가. 그 해답은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자율성, 그리고 평화를 향한 일관된 원칙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안데스서 다시 정의한 외교의 본질

해발 3,600미터. 하늘과 맞닿은 도시, 볼리비아 라파스. 숨이 턱 막히는 고도에서 나는 문득 질문 하나를 품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산소가 희박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존재의 무게가 피부에 와닿았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고도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던 ‘국가’라는 단어가, 실은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는지를. 말 그대로, ‘도달하는 국가.’ 우리 외교는 지금, 바로 그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었다. 지난 6월 말. 볼리비아에서 진행된 1주간의 해외안전 자문단 파견은 단순한 행정 점검이 아니었다. 볼리비아 대선을 앞둔 정치적 긴장 속에서 우리의 외교부, 대사관, 경찰청, 민간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상의 위기 상황을 설정하고, 재외국민 보호 훈련을 시행했다. 실제에 가까운, 살아 있는 실험이었다. 라파스 주재 한국대사관은 수개월 전부터 조용히 준비를 이어왔다. 교민 밀집 지역의 위험 요소를 점검하고, 긴급 연락망을 정비하며, 병원·소방·치안기관과의 협조 체계를 촘촘히 구축했다. 이는 단순한 준비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세우는 일이었다. 외교부도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특히 해외 안전상황실은 전체 훈련의 실무를 총괄하며, 위기 대응 매뉴얼을 공유하고, 시나리오별 실시간 연습을 조율했다. 책상 위의 시뮬레이션이 아닌, 실제 상황에 가까운 대응 훈련.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는 현장이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 훈련이 ‘기술 중심’이 아닌 ‘관계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시스템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과 제도, 공동체 간의 연결. 위기 대응의 성패는 결국 ‘곁에 있고, 신뢰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훈련이 끝난 뒤 열린 교민 간담회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한 교민이 말했다. “여기는 제 삶의 터전입니다. 그런데도 늘 ‘만약’을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그 ‘만약’이 와도 버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은 ‘국가의 존재’에 대한 정의를 다시 묻게 했다. 외교는 조약의 서명이 아니다. 닿는 손길이며, 도착하는 신뢰다. 실제로 한국 외교는 수차례 그 손길을 입증해 왔다. 최근, 중동 정세가 급변했던 이란에서 66명의 교민을 귀환시켰고, 2023년 수단 내전 당시에는 총성이 울리던 카르툼에서 육해공 전력을 동원해 200여 명을 구조했다. 또한 팬데믹 초기에는 마스크와 의약품을 들고 재외국민에게 가장 먼저 도달했다. 그 신속한 대응은 교민들의 마음속에 ‘국가’라는 두 글자를 새기게 했다. 이처럼 국가는 ‘기능’이기 이전에, 감각되어야 할 존재다. 그 손길이 닿을 수 있다는 확신, 그 곁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제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재외국민에게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일, 그것이 국가가 실천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약속이다. 20세기 논증학자 스티븐 툴민과 샤이메 페렐만은 말했다. ‘진실’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체감되고 설득될 때 살아난다. 외교와 국가 역시 사람들의 감각과 공감 속에서 그 존재가 입증된다. 이번 라파스 훈련은 그 체감의 현장이었다. 외교는 멀리 있는 국민에게 도달하는 일이며, 국가는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곁에 있어야 할 존재다. 선언이나 구호가 아닌, 실천과 신뢰로 완성되는 연결. 그것이 우리가 준비하고 실험한, ‘도달하는 외교’의 본질이었다. 고도 3,600미터 안데스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 나는 분명히 느꼈다. 국가는 단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곁에 있어야 하고, 함께 숨 쉬어야 한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나는 다시 새겼다. 그것이야말로 외교의 본질이며,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문민 국방장관, 국방개혁의 전환점 될 수 있을까

문민 국방부 장관, 아직은 낯설다. 그러나 낯설다고 해서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다. 역사는 늘 익숙함보다 불편함에서 시작했다. 그 불편함은 변화의 신호이자 변혁의 씨앗이기도 하다. 새 정부의 문민 국방장관 예고는 군 안팎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파격’이라 불리는 인사는 늘 양면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신선한 개혁의 신호로, 누군가에게는 불안과 반발의 대상이 된다. 낙하산 논란과 경험 부족 우려가 뒤따른다. 하지만 이 인사가 단순한 자리 배분인지, 국방개혁의 물꼬를 트는 출발점인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 있다. 군은 스스로를 ‘방패’라 자처한다. 그러나 그 방패가 진정 국민을 향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병영 내 폭력, 은폐된 사고, 반복되는 성범죄와 늦장 대응. 전시에는 철통 보안을 내세우면서도 평시에는 군 기강을 이유로 침묵했다. 헌법이 보장한 문민 통제는 명문화돼 있으나 국방부 수장은 여전히 예비역 대장의 관행에 묶여 있다. 군이 국민의 조직이라면 그 작동 원리는 국민의 민주적 감시와 견제에 기반해야 한다. 이는 불신이 아니라 헌법적 책임의 구현이다. 문민 장관은 그 책임을 국민 앞에 투명하게 비추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군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통제는 불신이 아닌 공공성과 투명성에 대한 헌신이다. 시민의 눈높이에서 운영되는 군은 더 강하고 유연하다. 단지 지휘와 통제만이 아니라 소통과 참여가 함께 작동할 때 안보도 살아 숨 쉴 수 있다. 반론도 있다. “전쟁이 나면 누가 결정을 하나.”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선진국은 모두 문민 장관 체제 아래 정교한 군사보좌 시스템을 갖췄다. 군은 장관을 ‘명령자’가 아니라 전략을 조율하고 문화를 혁신하는 ‘지도자’로 인식한다. 총을 들지 않아도 강한 리더십은 존재할 수 있다. 현대전은 단순히 무기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보전, 사이버전, 인공지능(AI)전, 우주전까지, 그 복합성과 첨단 기술성은 특정 군 경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 군의 미래는 더 이상 병영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 군을 사회와 단절시키는 구조로는 시대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 오히려 민간은 군이 놓치기 쉬운 감각을 지닌다. 인권, 성평등, 예산 투명성, 윤리. 이것들이 오늘날 국방의 진짜 연료다. 문민 장관은 단순한 관리자나 대체자가 아니라 이 연료에 불을 붙이는 ‘점화자’여야 한다. 그러나 국방개혁은 특정 개인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문민 장관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제도와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 첫째, 군사보좌기구는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춰야 하며 민간 전문가의 실질적 참여가 제도화돼야 한다. 둘째, 장병 가족·예비역·시민사회가 함께하는 ‘민군 협치 플랫폼’이 필요하다. 셋째, 인권 전담기구는 실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 세 가지는 군을 ‘닫힌 벽’에서 ‘열린 문’으로 바꾸는 장치이며 국민이 군의 진정한 주인임을 회복하는 통로다. 지금까지 군은 권위의 벽이었지만 앞으로는 책임의 문이 돼야 한다. 정치권은 문민 국방장관 임명을 진영의 이념 언어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보수는 안보를, 진보는 개혁을 말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념이 아닌 ‘신뢰’다. 실력과 책임 있는 리더십이 국방개혁의 진정한 동력이다. 군은 계급으로 움직이지만 국민은 신뢰로 판단한다. 신뢰를 잃은 군은 전쟁이 아니라 일상에서 먼저 패배한다. 아무리 전력이 강해도 국민이 외면하면 군의 존재 이유는 흔들린다. 국방개혁은 단순한 군 효율성 개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심장부를 다듬는 일이다. 지금은 누가 총을 드느냐보다 누가 책임지는지를 묻는 시대다. 문민 장관 임명은 군 통치가 아닌 국민과 함께 걷는 ‘동반자 선언’이어야 한다. 국방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다. 출신보다 방향이 중요하며 문민 장관은 군 통치에서 군 통합으로, 위계에서 협치로 나아가는 상징적 출발점이다. 국민은 ‘책임지는 군’, ‘국민 곁에 서는 군’을 원한다. 군이 먼저 국민을 믿을 때 국민도 그 믿음을 돌려준다. 보이지 않는 헌신, 그것이 국방의 진정한 힘이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위로의 대통령이 필요하다

정치는 단순히 권력을 쥐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아픔에 응답하고 공공의 이익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집단적 약속이자 공동체의 의지이다. 결국 정치는 ‘사람을 향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것은 삶을 돌보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바로 그 본질이다. 그래서 ‘정치는 무엇인가’ 하는 고대 아테네에서 던져진 이 질문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 불렀다. 정치를 공동체 구성원의 선(善)과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치를 정말로 사람을 향한 일로 보고 있을까. 정치권의 언어는 때때로 거칠고 비난과 대결을 부추긴다. 그 언어는 국민의 신뢰를 갉아먹고 사람들의 마음을 차갑게 한다. 정치는 진심을 잃으면 국민은 등을 돌린다. 냉소와 무관심은 사회를 잠식하고 그곳에 희망은 사라진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는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피어 나는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런 정치라면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 정치권은 국민의 절박한 목소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나. 정치인의 말은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그 한마디는 국민에게 하나의 ‘신호’로 읽힌다. 때로는 위로가 되고 어떤 때는 상처를 준다. 침묵조차 메시지를 담고 있다. 대통령의 발언, 정당 대표의 말 한마디는 국민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그렇기에 정치인의 언어에는 온기와 책임이 함께 담겨야 한다. 1933년 대공황의 절망 속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라며 국민을 위로했다. 그 진심 어린 한 문장이 미국 사회를 다시 일으켰다.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는 혹한의 겨울, 거리에서 얼어 죽은 이웃들을 위해 “친구들이여, 제발 도와주십시오. 세상이 이토록 비정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외쳤고 국민은 그 호소에 응답했다. 진심은 결국 마음을 움직인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 필요한 시기다. 청년은 희망을 잃고, 중년은 생계에 치이고, 노년은 고립 속에서 살아간다. 자살률 세계 1위, 출산율 세계 최저. 미래를 책임질 세대가 절망에 빠져 있다. 그러나 정치권은 여전히 끝없는 비난과 공방만을 주고받고 있다. 국민은 더 이상 구호나 슬로건에, 또 보여 주기식 이벤트에 감동하지 않는다. 눈앞의 문제에 진심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어떤 정치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국민의 고통은 정치적 싸움의 배경으로 소비된다. 이 무너진 신뢰와 반복되는 거짓은 결국 우리 사회의 비극을 낳았다. 국민은 언제까지 희망 없는 정치를 견뎌야 할까. 정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그것은 단순히 기능적 대응으로 해결될 수 없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고통에 공감하며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려는 진심이 필요하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는 방향을 제시하고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말 속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날 수 있다. 정치는 말의 예술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담는 예술이다. 이제는 솔직한 인정과 투명한 설명, 책임 있는 응답이 필요한 시대다. 위기일수록 지도자는 말로써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고 국민을 위로하며 길을 열어야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어렵지 않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현장에서 함께 서는 일이다. 그것이 진심의 시작이며 정치를 정치답게 만드는 첫걸음이다. 곧 대선이 다가온다.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전략이 아니라 진심이다. 국민의 상처를 진심으로 안을 수 있는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를 다시 이어줄 수 있는 지도자. 나는 그런 ‘위로의 대통령’을 원한다. 지금 간절히 그를 꿈꾼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소크라테스가 오늘날 한국 정치를 본다면

정치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질문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제기된 근본적인 물음이다. 2천400년 전 고대 아테네에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이 질문에 답하려 했다. 그는 당시 민주정의 몰락을 목격하면서 대중의 열광과 선동에 휘둘린 정치가 어떻게 파국을 맞이할지 경고했다. “여론은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내면에 숨어 있는 구조적 취약점을 꿰뚫은 통찰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가 공공선을 위한 철학적 성찰과 도덕적 책임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도자는 단순히 다수의 인기를 얻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더 나은 지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현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절제’와 ‘진실’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한국 정치의 현실은 어떤가.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 정치적 변화와 혼란은 한국 정치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오늘날 정치는 점점 ‘숙고의 공간’이 아니라 ‘감정의 장’으로 변해 가고 있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분노와 불안을 자극하는 언어로 표심을 끌어들이고 유권자들은 정책보다는 이미지와 말투로 지도자를 평가한다. 정치 담론은 깊이가 아니라 자극을 좇고 실용보다는 선동이 앞선다. 이런 감정 정치가 반복될수록 정치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사회는 합리적 해결 능력을 잃게 된다. 최근 여야 공방은 정치가 대결과 진영의 프레임에 갇혀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한쪽은 정권 심판을 외치고 다른 한쪽은 야당의 발목잡기를 비난한다. 비전과 실현 가능한 정책은 사라지고 언론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정치적 구호와 혐오의 언어로 넘쳐 난다. 국민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은 커져만 간다. 이대로라면 정치의 본령은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정치는 본래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숙의와 협력의 과정이어야 한다. 싸움도, 쇼도, 권력 쟁탈전도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적 정략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이다.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이 필요하다. 정쟁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정치, 증오가 아니라 공감의 정치가 절실하다. 정치는 삶의 질을 높이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 돼야지 상대를 꺾기 위한 전쟁이 돼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훗날 플라톤에게 ‘철인왕’을 이상적인 통치자로 묘사하게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를 문자 그대로 따를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가르침—지도자는 지혜와 도덕성을 겸비해야 하며 권력은 국민을 위한 책임이어야 한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말 잘하는 인기인이 아니라 국가의 본질적 문제를 꿰뚫는 통찰과 실천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책임 있는 언행, 삶에서 드러나는 품격, 그리고 비전 제시의 능력이 결합된 리더십이 절실하다. 특히 급변하는 국제 질서와 기술 혁신의 시기에 고정관념에 갇힌 정치가 아니라 유연성과 통찰을 겸비한 정치가 필요하다. 다가오는 조기 대선은 단지 정치적 변화를 위한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본질을 다시 묻고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를 성찰하는 계기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 이미지가 아니라 정책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절차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선택이기도 하다. 유권자의 선택 하나하나가 미래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소크라테스가 오늘의 한국 정치를 바라본다면 아마 광장에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지금 당신들이 뽑으려는 지도자는 진정으로 국가를 위한 준비가 돼 있는가.” 그 물음에 우리는 떳떳이 답할 수 있을까. 정치의 본질은 권력 쟁취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책임과 헌신임을 지금 이 순간 다시 새겨야 한다. 국민이 현명한 선택을 할 때 정치도 바뀐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공작인가, 양심인가

대통령 탄핵 선고가 임박하면서 국론은 갈라지고 찬반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탄핵심판의 핵심은 단순히 대통령의 거취에만 있지 않다. 중요한 문제는 탄핵 절차가 헌법적 질서를 유지하고 법치주의를 지킬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탄핵 절차는 헌법적 질서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헌법재판소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지켜져야 한다. 심판 선고 이후 정치적 견해에 따라 격화될 수 있는 국가적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진실을 직시하고 정치적 의도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이번 탄핵심판에서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대통령 내란 혐의의 근거가 된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 사령관의 진술이다. 최근 공개된 지인과의 통화 녹취록에서 그는 ‘양심선언’을 요구받았다고 토로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갈등을 넘어 진실의 왜곡과 법치주의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곽 전 사령관의 주장은 권력 남용과 진실 왜곡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치적 압박 속에서 개인의 양심이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사건은 정치적 압력이 양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경고하며 그로 인해 법치주의와 정치적 윤리가 얼마나 훼손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관점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 사건을 민주당의 탄핵 공작으로 보고 곽 전 사령관의 진술이 정치적 압박에 의해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반면 민주당은 이를 대통령 탄핵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양심선언으로 해석하며 이를 통해 탄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하지만 정치적 압박 속에서 나온 ‘양심’은 진실을 말하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맞게 왜곡될 위험이 크다. 중요한 점은 진술이나 고백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적 압박은 진실을 왜곡할 수 있으며 이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본을 위협할 수 있다. 진실은 철저한 검증과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공방이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국민은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고 변질될 수 있는 정치적 의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곽 전 사령관의 녹취록에서 주장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의 초기 진술은 명백한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 이는 정치적 권력이 개인을 압박하고 진실을 왜곡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그 주장이 조작된 것이라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 개입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진실을 직시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탄핵심판의 본질은 재판관들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 진실을 직시하는 데 있다. 그들의 결정은 역사적 책임을 동반하는 어려운 선택이다. 이성이 결여된 판단이 내려진다면 그 결과는 국민적 불신만 초래할 것이다. 사상적 성향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법적 절차와 기준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 심판을 통해 국민 모두는 정치적 압박이 어떻게 양심을 변질시키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어떻게 위협받는지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진실을 지키는 것이 법치의 방어선이며 그 방어선이 흔들릴 때 민주주의의 근본이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심판의 결과는 미래에 중요한 교훈을 남길 것이다. 결국 정치적 혼란 속에서 진실과 양심을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양심은 결코 정치적 의도에 의해 변질될 수 없다. 이 기준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는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진실은 정치적 게임의 희생양이 돼서는 안 된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문제는 사법의 중립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와 그로 인한 탄핵 논란은 단순한 정치적 대립을 넘어 사회 전반에 깊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보수와 진보 양측의 입장이 날카롭게 엇갈리면서 논의의 중심에는 재판의 공정성과 법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법원의 판단이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면 그 결과는 개인의 명예나 권리를 넘어 국민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법치주의의 근본적인 기초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 관점에서는 비상계엄 선포를 국가 안보와 국정 안정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보고 있다. 이들은 비상계엄 해제가 법적 절차에 따라 이뤄졌고 군인들이 물리적 충돌 없이 철수하면서 질서가 잘 유지됐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를 내란죄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며 계엄을 국가의 안정과 질서를 위한 임시적이고 필수적인 통치적 조치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상계엄에 대한 과도한 비판은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결국 국가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반면 진보적 관점에서는 비상계엄을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과도한 조치로 비판한다. 이들은 계엄이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악용될 위험이 크고 법치주의의 근본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그들은 계엄 외에도 다른 정치적, 행정적 방법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선택한 것은 권력 남용에 해당한다고 보고 탄핵을 통해 대통령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향후 유사한 상황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이다. 만약 법원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면 법의 공정성은 이미 훼손된 것이며 사회적 갈등은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질 것이다. 최근 일부에서는 사법부가 정치적 압력에 노출돼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부 판결이 특정 판사의 정치적 입장과 지나치게 일치하거나 법관 인사에서 정치적 성향이 개입된다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란이 계속될수록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깊어지고 법원은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개별 법관의 정치적 편향이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면 법치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비상계엄과 탄핵 논란은 국가 안보, 민주주의, 법치주의 간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양측의 입장이 엇갈리는 이유는 각자의 가치관과 우선순위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확실히 보장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법원의 독립성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 유럽식 독립 임명위원회를 도입해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판결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며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감시 기구를 마련함으로써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강화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임명 절차 개혁과 국민 감시 체계를 동시에 구축해 이념적 극단을 피하고 공정하고 신뢰받는 사법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법은 정치적 이념을 초월해 모든 국민을 공정하게 보호해야 한다. 사법부의 공정성과 중립성은 단순히 법적 원칙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적 신뢰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다. 따라서 사법부가 정치적 편향과 압력을 피하고 국익을 고려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도적 개선을 추진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사법의 공정성이 무너지면 법치주의는 껍데기일 뿐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사법의 중립성이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비상계엄과 군의 명령 복종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40일이 지났다. 이 과정에서 장성급 군인 7명이 계엄에 동조한 혐의로 구속됐으며 그들의 계급은 별 20개에 달한다. 비상계엄은 국가의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헌법적 조치지만 이번 사태는 군의 역할과 명령 복종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와 충돌하면서 심각한 논란을 일으켰다. 군에서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위기 상황에서 군의 신속한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불법적인 명령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 군사법원법과 군형법은 “명백히 위법한 명령”에는 따를 의무가 없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명백히’라는 기준이 모호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는 상관의 불법적인 명령을 거부하고자 하더라도 실제로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이론적 논쟁을 넘어 보스니아 내전과 5·18 광주화운동에서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 사례가 ‘상관의 불법 명령’이 책임을 면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확립된 “명백히 위법한 명령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원칙은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군의 지휘 체계와 명령의 정당성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비상 상황에서 위법성을 즉각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를 인정해야 하지만 군 병력 출동 같은 중대한 명령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위기 대응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1980년대 초 일부 군인이 정치적 압력에 따라 군사력을 행사하며 헌법적 가치를 훼손한 사례는 군 명령 체계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현재 명령의 적법성을 판단할 제도적 장치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군인들에게 윤리적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를 개선하려면 실질적이고 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비상 상황에서도 군 지휘관이 명령의 적법성을 신속하게 검토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나 유엔의 사례처럼 군내에 법률자문팀을 상시 배치해 명령의 법적 타당성을 독립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라이 학살(1968년) 사례에서처럼 이러한 자문팀은 명령의 법적·윤리적 적합성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상 상황에서도 헌법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군의 전통적 가치인 명령 복종이 민주주의와 충돌하지 않도록 헌법적 원칙과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는 구체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위법한 명령을 식별할 수 있는 윤리적 판단력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군형법의 모호성을 해소하고 ‘명백히 위법한 명령’에 대한 판단 기준을 명확히 명문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위기 상황에서도 군 조직이 법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고히 지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군의 법적 판단과 군사작전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핵심 수단이다. 물론 명령 복종과 관련된 위법성 문제는 향후 법적 판단을 통해 명확히 규명될 사안이다. 그러나 이번 계엄 논란은 군의 안보적 역할과 정치적 중립성이 얼마나 잘 유지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군이 명령 수행 과정에서 작전의 적시성과 법적 균형을 효과적으로 조화시킨다면 국가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신뢰받는 군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논란과 오용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번 논란이 군 조직과 명령 체계가 헌법 및 윤리적 원칙에 부합하도록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기 바란다. “군은 헌법적 가치를 바탕으로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방패여야 한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우리는 왜 극단으로 치닫는가

“단결하면 강해지고 분열하면 무너진다.” 이 주장은 국가가 겪는 분열과 갈등의 본질을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요약한 격언이다. 이 말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이념의 다양성과 상이한 의견을 존중하는 원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역사 속에서도 이 같은 교훈은 중요하게 다뤄졌으며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점점 더 분열이 심화되는 세밑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이 격언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념, 지역, 성별, 세대, 빈부 격차 등 여러 갈등이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사회의 불안정성을 증대시키고 그로 인해 사회는 깊은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현대 한국 사회는 마치 모든 것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갈등의 간극은 더욱 깊어지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사라진 채 오직 ‘적’을 규정하는 사고 방식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왜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극단’은 단순히 맹목적이거나 폭력적인 선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협을 거부하고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불안’이다. 불안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불확실성에서 느끼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며 이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분열로 확산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이념 논쟁이나 세대 간 대립은 바로 이러한 불안의 표출이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이념 대결이나 젠더 갈등은 서로의 이해를 넘어 상대를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경향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불안은 또한 미디어와 정치적 선동에 의해 증폭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뉴스와 정보를 선택적으로 소비하며 그 결과 다른 집단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결국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도가 강화되며 갈등은 심화된다. 이러한 불안이 집단적 갈등으로 확대되면 대화는 단절되고 공격과 배제가 우선시되는 사회로 변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공공 장소나 온라인 공간에서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기보다는 극단적인 프레임을 통해 상대를 악마화하고 공격적인 언어로 대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정치적 갈등 또한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이념의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안보 의식 역시 문제를 심화시킨다. 극단적 갈등은 외교 정책의 일관성을 약화시키고 안보 전략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내부 갈등이 심화되면 외부 위협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고 이는 결국 국가적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쟁은 매일의 현실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그것은 다른 나라의 일로 여겨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침과 부족함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중용의 미덕’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을 경계하고 스스로 절제하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중용을 잃어 버린 듯하다. 과시하고 증명해야만 인정받는 사회에서 균형을 상실하면 갈등을 더욱 부추기게 된다. 사회적 균형이 깨지면 평화와 상생의 가능성은 점차 사라진다. 지나친 자기 확신과 상대를 배척하는 태도는 결국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불안을 증폭시켜 악순환을 일으키며 극단적인 갈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균형과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평화는 상대를 이해하고, 타협하며, 때로는 물러설 줄 아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론화 과정과 같은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갈등을 해결하는 숙의 민주주의 모델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또 교육과 미디어는 상대를 적대시하는 방식을 넘어 공감과 협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갈라진 사회가 하루아침에 상생으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극단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설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과 관점을 존중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돼야 한다. 평화는 단순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행동에서 비롯된다. 정부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고 국가의 미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2025년 서울의 거리가 여전히 시위와 대립으로 계속된다면 정말 큰일이다. 화합이 아닌 평화는 허망한 이상에 불과하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전쟁은 정말로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전쟁은 정말로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의 위협을 넘어 인류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찰을 요구한다. 현대 세계는 문명 간의 갈등과 국가 간의 불안정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헤겔의 ‘정반합’ 개념은 변증법적 과정으로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류는 진리와 참된 인식을 탐구하며 발전해 왔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 또한 동반해 왔다. 정(正)에서 반(反)으로, 그리고 중간의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과정이다. 세계와 남북 간의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된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서구 가치가 보편적이라는 오만한 가정에 대한 비판을 받는다. 세계는 서구의 기대와 달리 국가 간 분쟁과 문명 간 충돌이 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새뮤얼 헌팅턴이 제시한 ‘문명 간의 충돌’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과거 냉전 시대에는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이 이념에 의해 결정됐지만 현재는 문명과 종교가 그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이로 인해 억압받던 문명 간의 대립이 다시 표면화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은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그 참화가 계속되고 있다. 서구 기독교권과 중동 이슬람권의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서구는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이슬람은 편협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는 문명과 체제의 우위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듯이 폭력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9·11테러 같은 비극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한반도의 안보 상황도 최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 위협과 남한에 대한 적국 규정,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전선 투입 문제는 긴장을 더욱 고조시킨다.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일상에서 불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폭탄과 비명에 질린 아이들의 눈빛은 중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수많은 외침을 겪어 왔고 남북 간 대립은 여전히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북한의 행동은 단순한 군사적 대결을 넘어서는 복합적인 국제 및 내부 요인이 얽힌 결과다. 미국은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제재를 강화하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과의 전략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단순히 남북 간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정치의 흐름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북한의 장사정포와 특수부대는 언제든지 위협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단순한 군사적 대응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북한은 올해도 12회의 미사일 발사와 30회의 오물풍선 살포로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반도의 피해는 불가피할 것이다. 전쟁에 대해 논하는 이들은 많지만 그 참혹함을 직접 겪어본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더 이상의 분열을 멈추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어수선하지만 전쟁의 불안을 제거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공통의 안보 이익을 위한 접근이 필요하다. 서로를 적으로 간주한다면 안보와 평화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안보 체제를 강화해 전쟁의 불가피성을 줄여야 한다. 테러와 핵 같은 대량살상무기 문제는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다. 외교는 현실적이고 전략적이어야 하며 군사 행동에 앞서 철저한 안보 외교가 선행돼야 한다. 북핵 문제와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은 국가 안보의 중대한 시험대다. 전쟁을 부추기는 무책임한 언사를 멈추고 화합과 평화라는 정반합이 이뤄져야 한다. 평화 없이는 국가도 존재할 수 없다.

[이만종의 클로즈업] 계엄 논란의 허상과 책임 있는 정치

최근 정치권에서 계엄 논란이 다시 불거지며 국민의 불안이 증폭됐다. 야권은 정부의 계엄 준비설을 제기하며 강하게 공세를 펼쳤고 이로 인해 여야 간의 논란이 격화됐다. 그러나 헌법과 법률에 비춰 볼 때 실제로 계엄령이 발동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란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공포와 불안이 정치 지도자들에게 쉽게 악용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대중의 불안은 권력 강화를 위한 유력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미국의 ‘적색 공포’나 냉전 시대의 ‘매카시즘’은 과도한 공포를 부추겨 대중을 통제하고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이번 계엄 논란도 이러한 정치적·심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계엄이라는 단어는 한국 현대사에서 군사 독재와 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강력한 상징이다. 이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국민들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과거의 억압적 통치와 투쟁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야권은 이러한 상징성과 기억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국민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로 비친다. 그러나 이러한 계엄 논란은 장기적으로는 국민의 신뢰를 잃고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 정치적 선동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하고 국민의 불신을 심화시킬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므로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우리 헌법과 법률은 계엄령 발동 절차를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국무회의 의결과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권 등 다양한 견제 장치가 마련돼 있어 계엄령은 매우 제한된 상황에서만 발동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엄 음모설이 여전히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럽다. 프롬이 지적했듯이 정치적 선동은 국민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권위주의로의 회귀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근거 없는 계엄령 소문을 남용해 국민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은 극히 무모한 정치적 전략이다. 하지만 야권만 비판할 수는 없다. 정부 또한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 계엄 논란이 확산되는 동안 정부는 명확한 해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켰다.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불안을 잠재울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되는 정치적 공방의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정치의 중심은 언제나 민심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번 논란은 단순한 정치적 충돌을 넘어 한국 정치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 현실 정치에서 여야 간의 정치적 갈등은 불가피할 수 있지만 그 해결 방식은 성숙한 자유 체제의 원칙에 기반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우려되는 점은 여야가 국가 안보라는 중대한 문제를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긴박한 안보 상황을 외면하고 이를 정치적 논쟁의 도구로 삼는 것은 결코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행위다. 안보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논쟁의 소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양극화와 음모론의 확산이다. 양극화는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저해하며 국민 간의 불신과 혐오를 더욱 심화시킨다. 또 음모론은 국민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며 민주주의의 기능을 저해하는 독으로 작용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진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근거 없는 두려움을 조장하는 선동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진정성이다. 안보가 정치적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닌, 국민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강건해질 것이다. 이제 정치권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책임 있는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허상에 기대어 논란을 이어간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적 토대는 더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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