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미래] 메타버스·AI 결합 ‘차세대 인터페이스’

애플은 6월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에서 ‘리퀴드 글라스(Liquid Glass)’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선보였다. 기존 스마트폰 화면이 하나의 판 위에 정보를 보여줬다면 이제는 여러 겹의 투명한 유리창이 겹치듯 정보를 전달한다. 사진첩을 보다가 알림이 떠도 알림창이 반투명하게 처리돼 뒤의 사진을 계속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발표 직후 인공지능(AI) 경쟁에서 뒤처진 애플이 한가하게 예쁜 디자인에나 신경 쓴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이 기술의 함의를 놓치고 있다. 애플의 증강현실 기기인 비전 프로(Vision Pro)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이 투명 인터페이스는 단순히 화면을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정보를 습득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큰 화제를 모은 스타트업 ‘클루리’의 데모 영상에도 이 투명 인터페이스가 등장한다. 영상 속에서 연애 경험이 없는 학생은 데이트 상대 앞에 앉아 눈앞의 투명한 정보창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AI 연애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대화를 이어간다. 클루리의 창업자 로이 리는 도발적인 인물이다. 그는 AI를 이용해 빅테크 기업들의 면접을 통과하는 과정을 공개했다가 컬럼비아대에서 퇴학당했지만 이후 오히려 수천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며 ‘모든 것을 커닝하라’는 슬로건을 내건 회사를 차렸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모든 정보를 AI가 가지고 있는데 굳이 그것을 암기하고 평가하는 방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인류는 AI라는 ‘치트키’의 도움을 받아 일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고 이 치트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기술이 주변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현실 세계와 디지털 정보가 겹치는 중첩형 투명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 세계 위에 디지털 정보를 덧입히는 방식은 이미 자동차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등을 통해 대중에게도 낯설지 않은 기술이다. 하지만 이 콘셉트가 새롭게 부각되는 이유는 투명 디스플레이 위에 펼쳐지는 것이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맥락을 파악해 전달되는 AI 정보, 즉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지능(Ambient AI)’으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 철학자 마크 와이저는 “가장 심오한 기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지는 기술”이라고 했다. 이 개념에 맞춰 애플의 투명 인터페이스, 그리고 메타와 구글이 선보이는 스마트 글라스는 현실과 디지털의 경계를 지우며 ‘보이지 않는 지능’의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마크 저커버그는 2016년 증강현실이 “10년 후의 기술”이라고 예측했다. 그 10년이 돼가는 지금, 인공지능과 결합한 증강현실은 단순히 스크린을 눈앞으로 옮기는 것을 넘어 세상 전체를 화면으로 바꿔 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작은 스마트폰의 화면에서 벗어나 시야 위에 중첩되는 현실 세계의 정보를 실시간 맞춤형으로 볼 수 있다. 풍속과 심박수 등을 고려한 최고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달리기를 할 수 있고 안경 위에 뜬 AI의 실시간 가이드에 따라 기계를 조작하고 복잡한 외과수술을 할 수도 있다. 용도 폐기된 것 같았던 메타버스가 AI와 결합되면서 모바일폰을 대체할 차세대 인터페이스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하는 미래] 반려와 유기 사이의 거리

네 집 건너 한 집쯤에는 온 몸에 털이 덮인 생명체가 하나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반려(伴侶)동물을 기르는 반려동물 천만 시대에 접어들었다. 개와 고양이가 대부분이지만 햄스터, 토끼, 기니피그,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등 다양한 생명체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과 살아간다. 이들은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이자 가족이라는 의미의 반려동물로 불리며 인류가 동물을 얼마나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생의 최고 지점에 서 있다. 그러나 세상에 빛만 존재하지 않듯 반려동물을 둘러싼 사회 곳곳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유기(遺棄)라는 말에 감춰진 현실이다. 10만이라는 이 적지 않은 수는 대한민국에서 1년 동안 발생한 유기동물 마릿수다. 2017년 이후로 국내 유기동물은 매년 10만마리 이상 구조됐다. 작년에는 이들 중 11%만이 보호자의 품으로 돌아갔고 27%는 입양되거나 기증됐다. 나머지 절반에 가까운 개체는 자연사하거나 인도적 처리라는 이름 아래 죽음을 맞이했다. 정부는 2000년대 후반부터 이 문제를 인식하고 동물보호법 개정을 통해 반려동물 등록제를 의무화했다. 그 덕에 귀가율은 5%에서 약 두 배 가까지 올랐지만 여전히 제도의 실효성은 갈 길이 멀다. 현재는 홍보를 강화하고 시행 대상을 고양이까지 확대하는 등 개선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민적 인식과 책임감이 함께 따라야 한다. 유기동물을 줄이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동물을 되찾아주거나 입양을 장려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근복적인 예방책이 필요하다. 바로 버리지 않도록 만드는 책임 교육이다. 초·중등 교육과정 안에 생명존중 교육이 충분히 포함돼야 하며 반려동물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전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개와 고양이 같은 동물을 기를 때 필요한 지식을 동물과학 수준에서 함양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위스는 반려동물의 복지와 책임 있는 소유를 강조해 입양 전에 행동 이해, 훈련, 건강 관리, 사회화, 법적 책임 등 다양한 주제를 포함한 법적 교육을 이수한다. 이런 교육은 반려동물과의 건강한 관계 형성을 돕는다. 스위스는 반려동물의 유기율이 낮고 동물복지 수준이 높은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반려동물은 누구나 처음에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너무 짓는다, 털이 날린다, 크게 자랐다, 늙고 병들었다, 결혼한다, 이사간다, 돌볼 사람이 없다 등의 이유로 버려지기도 한다. 그 이유가 가볍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 고민할 만한 중대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버릴 가족이었다면 애초에 가족이 되지 말았어야 한다. 함께 살기로 했다면 그 삶은 책임과 선택의 연속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최선을 다해 함께 살아가야 한다. 대부분의 반려견과 반려묘에게 보호자는 세상의 전부다. 그들이 우주이자 삶의 이유다. 화재 현장에서 큰 소리로 짖으며 온 몸을 날려 가족을 구한 개, 4천100㎞를 6개월 동안 홀로 걸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미국의 보비, 10년간 시부야역에서 죽은 주인을 기다린 하치, 11년간 주인의 무덤 곁을 지킨 아르헨티나 캡틴까지. 세상에는 수많은 ‘털 덮인 생명’들이 인간과 깊은 유대를 간직한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작은 책임감이어도 괜찮다. 오늘 없던 책임감이 생기고, 내일 더 깊어지고, 모레엔 단단해진다면 버려질 생명 하나가 줄어들 것이다. 반려와 유기 사이의 거리는 마음 하나 차이다. 선택이 아닌 약속이, 소유가 아닌 책임이 두 거리를 결정한다.

[함께하는 미래] 대선, 그 후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과 정의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계엄 사태로 촉발된 조기 대선이 막을 내렸다. ‘빛의 광장’의 목소리로 모아 낸 내란 청산과 사회 대개혁을 염원하는 국민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다. 장기간 거꾸로 가고, 헝클어지고, 내던져진 사회개혁 과제가 무논에 갓 모내기한 모가 뿌리 내리듯 소중한 생명으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위기 상황에서 빛나던 국민 개개인의 담대함과 통찰력, 용기 있는 집단지성이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걸음을 더 재촉하기를 응원한다. 대선 기간 각 정당의 후보자들은 수많은 공약을 발표했다. 선거는 끝났으나 조기 대선으로 인해 당선인이 국정을 차분하게 준비할 수 있는 인수위원회 절차는 없고 존속 기간이 짧은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오랜 정당 활동의 역사가 있기에 큰 틀에서 국정의 정책 방향과 이행 수단에 대한 예측이 어렵지는 않지만 열린 광장을 통해 봇물처럼 쏟아낸 국민의 기대를 제대로 수용하기 바란다. 무엇보다 탁상머리를 넘어 현장 중심의 경험과 소통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며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좌지우지한다는 국민 중심의 원칙을 되새기기 바란다. 잘못된 과거는 과감하게 청산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대선 기간 공표한 공약에 얽매이기보다 적어도 임기 초 6개월 이내에 국민 공론화를 통해 명료하고 촘촘하게 점검하며 필요한 경우 묻고 재설계해야 한다. 특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 인류 공동의 과제인 기후위기 대응과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공약이 그렇다. 이미 기후대응 선진국에서 검증되고 일반화돼 성과가 분명한 정책과 사업에 인력과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 그 결과가 사회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고 사람 관계 속에서 숨쉬는 것이어야 빛을 발할 것이다. 과거 우리가 누렸던 ‘플라스틱’이 현재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지 과도한 풍요와 편리함을 취한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는 것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제품일 것이다. 소위 ‘딜레마적 물질’이라고 불리는 플라스틱 제품은 일반적으로 값싸고, 만들기 쉽고, 가볍고, 편리해 그 쓰임새와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쓰는 과정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발생하고, 함유된 유해화학물질이 방출되며, 사용 후 소각 과정에서도 온실가스는 물론이고 대기오염 물질이 생성돼 인간과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그럼에도 마치 공기와 물처럼 당연시된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젠 정책의 실패를 경험하기에는 한정된 재원, 한정된 토지, 그리고 한정된 시간이 우리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후위기 대응과 재생에너지 사회로의 전환을 앞당기는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최근 지역 에너지협동조합의 모임인 경기시민발전협동조합협의회와 인천·경기기자협회,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이 ‘기후위기 대응 기후저널리즘’ 활동이라는 의미 있는 공동 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언론이 단순한 기상이변이나 재난 차원의 문제로 다루는 정보 전달 차원을 넘어 사고의 전환과 삶을 영위하는 방식의 변화를 동반하는 쟁점을 다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확인한 것이다. 작은 변화가 큰 파도를 만들어낸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기후위기와 싸우는 것을 도울 수 있는 10가지 방법 중 하나로 “목소리를 내라”고 권고한다.

[함께하는 미래] 새 정부를 위한 경제안보 전략

새 정부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경제안보 문제는 한미 관세 협상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2월 철강·알루미늄 관세 25%, 3월 자동차 관세 25%, 4월 상호관세 25%(7월8일까지 10%만 적용)가 우리나라의 대미 수출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5월1~25일 대미 수출에서 자동차 32%, 철강은 20.6% 급락했다. 이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협상이 하루빨리 타결돼야 한다. 현재 18개국과 협상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미국이 우리나라와만 특별히 빨리 협상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상호관세 인하 조치가 만료되는 시점까지 한 달 남짓 남았다.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해 신임 장관이 협상을 주도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새 정부는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신속하게 협상안을 마련해 교섭을 진행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8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통화에서 대미 무역흑자, 관세, 조선,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 알래스카 파이프라인 합작투자, 방위비 분담금을 언급했다. 그러나 25일 한미 ‘2+2 통상협의’ 및 산업부-미국 무역대표부(USTR) 간 장관급 협의 이후 환율과 방위비 분담금 문제는 협상 의제에서 배제됐다. 통상교섭본부와 USTR의 기술협의에서는 균형 무역, 비관세 조치, 경제안보, 디지털 교역, 원산지, 상업적 고려 등 6개 분야가 다뤄지고 있다. 특히 제2차 기술협의에서 USTR은 2025년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에 담긴 구글의 정밀지도 반출 신청 및 미국 기업의 유전자변형생물체(LMO) 감자 재배 적합 판정 등과 같은 비관세 장벽의 해소를 요구했다. 국방비 증액이나 방위비 분담금 인상보다 정치적으로 덜 민감해 이런 요구들은 심각한 논란 없이 합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 산업의 대미 수출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에 상호관세와 철강·알루미늄 관세보다 자동차 관세율 인하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해 완성차의 49.1%, 자동차부품의 36.5%가 미국으로 수출됐으며 전체 대미 무역흑자에서 자동차 비중이 60%를 넘었다. 지난달 8일 타결된 협상에서 영국은 완성차 10만대까지 관세율을 25%에서 10%로 인하하도록 미국을 설득했다. 2022년 이후 영국의 대미 완성차 수출이 10만대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국은 피해를 최소화했다. 우리나라도 영국과 유사한 방식으로 미국에 양보를 받아낼 수 있다면 대미 자동차 수출의 감소세가 둔화될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타결을 선언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렇게 된다면 당분간 한미 관계는 순항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우리 대통령을 비판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처럼 난처한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장관급 회담이 차선책으로 고려돼야 한다. 장기적으로 대외 의존도를 줄이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내수 활성화다. 미국은 상호관세 행정명령에 한국의 내수 비중이 49%로 미국의 68%에 비해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내수 비중이 늘면 대외 충격이 완화돼 정책의 자율성이 확대된다. 이런 점에서 내수 진작은 미국과의 갈등을 줄이는 동시에 경제안보의 기반을 견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함께하는 미래] 부고: 일자리 (RIP Jobs)

오픈 AI의 영상 생성 서비스 ‘소라’의 새 버전으로 ‘지브리 프사’ 열풍이 번지자 해외 소셜 미디어에는 ‘RIP Animator(부고: 애니메이터)’라는 문구가 떠돌았다. 그리고 지난주 구글이 동영상 생성 프로그램 ‘VEO 3’와 ‘FLOW’를 선보이면서 그 부고장은 곧 ‘RIP Filmmaker(부고: 영화감독)’으로 바뀌었다. 구글이 유튜브와 구글 포토의 막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선보인 이 서비스는 창작의 민주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2차 대전의 전장, 신비한 우주 탐험, 서울의 거리를 거니는 연인들까지—상상하는 모든 장면이 전문적 영상 지식 없이도 구현된다. 영화 제작 경험이 전무한 일반인조차 텍스트 몇 줄만으로 편집과 대사, 음향까지 완비된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은 영상 길이가 짧고 완성도 또한 방송 수준에 못 미치지만 생성형 동영상 기술이 대중에 공개된 지 1년 조금 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술의 발전 속도는 경이롭다. 누구나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시대, 그리고 기존 감독들은 대규모 제작진 없이 상상력만으로 원하는 콘텐츠를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는 분명 창작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환영할 만한 변화다. 자본과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 순수한 창의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신세계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냉혹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스태프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전문 인력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의미이고 모두가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창작자들의 경쟁이 그만큼 치열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해 초 마이크로소프트는 인공지능(AI) 투자에 집중하기 위해 전 세계 직원의 3%에 해당하는 6천여명을 해고했으며 놀랍게도 해고자 중에는 AI 부문 관리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의 한 시장 조사에 따르면 2026년까지 영화, TV, 애니메이션 분야의 10만개 이상 일자리가 AI의 직접적 영향권에 놓일 것으로 예측된다. 많은 이들이 AI 시대에도 과거 산업혁명 때처럼 사라지는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AI 혁명의 속도와 규모는 과거와는 그 성격과 차원이 다르다. 마부는 운전 기술을 배워 새로운 운송 수단인 자동차 운전기사가 될 수 있었지만 AI 시대에는 하나의 알고리즘이 수많은 운전기사를 대체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의 예언처럼 인간보다 뛰어난 기술의 발달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용 계급’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노동과 직업은 단순한 경제적 수단을 넘어 자아 실현의 통로, 인간 존재의 증명이다. 한 평론가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가’는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와 연결돼 있는데 AI 기술이 이런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던 근본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리가 AI가 열어가는 신기한 가능성과 놀라운 효율성에 감탄하는 사이 누군가의 생계와 정체성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AI 시대의 개인적 경쟁력 확보 방안과 함께 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혁신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자신의 일자리 앞에, 그리고 국가 경쟁력 앞에 부고장이 날아 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함께하는 미래] 가축의 편에서

템플 그랜딘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카우보이 복장에 열정 가득한 눈을 가진 그는 가축 복지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박사다. 템플은 자폐를 안고 살았고 주변 사람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소음과 장면이 참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 밀려오곤 했다. 어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고모 부부가 운영하는 소 농장에서 지내면서 부터였다. 농장 심부름을 하며 바라본 소는 불안했던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그는 맑은 눈의 소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떨리는 순간이었다. 덩치 큰 소들은 일제히 그를 에워쌌지만 전혀 다치게 하지 않았다. 차츰 바닥에 앉기도 하고 때로는 누워 소와 시간을 보내면서 템플은 동물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는지 공감했다.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석사과정으로 동물과학을 공부하면서 가축 핸들링과 도축장 문제의 원인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지했다. 특히 도축장의 소가 앞으로 가지 못하고 갑자기 멈추는 일이 흔한데 핸들러들은 이유를 몰라 소리를 지르거나 막대기로 위협하는 일이 잦았다. 소가 멈추는 이유는 시각, 청각, 후각이 예민하고 정보 처리하는 전두엽의 운영체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햇빛에 반사된 물이나 작은 소음, 바닥에 음영이 나타나면 동물은 심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템플은 가축의 스트레스 행동과 환경 요인의 관계를 종합해 연구를 진행했고 이를 통해 가축 핸들링 기준과 동물복지 도축장 시설 설계를 이끌었다. 그가 설계한 곡선형 통로는 가축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유도해 스트레스를 최소화했다. 이 시설은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 대형 도축장의 절반이 채택해 수많은 동물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주고 있다. 동물보호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동물권리(animal right)를 떠올린다. 동물권리는 인간의 목적을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것 일체를 반대한다. 동물보호 단체의 이념과 실천 열정은 생명존중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먹거리 보급을 위해 가축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의 고통을 덜어주기가 어렵다. 인류가 살아가는 한 가축은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동물보호에도 동물복지와 같은 현실적인 노선이 병행돼야 한다. 인류에게 희생되는 가축이기에 더 외면받지 않아야 하고 사각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그런 가축이 처한 현실을 현장에서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이 바로 템플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일부 동물권리론자들은 그의 활동을 “가축 도축을 정당화하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가축의 운명을 살아가는 동물에게 일생을 바쳐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 노력했고 실질적인 결과를 선사한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이러한 사례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동물을 보호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때론 협력하고 때론 각자의 길을 응원할 때 비로소 더 많은 동물에게 보다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템플 그랜딘의 이야기는 동물 이용의 최전선에 놓인 가축의 이야기다. 가축의 편에서, 현실의 한가운데서 동물복지가 절실한 생명에게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한 사람에게 존경을 표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저서 ‘동물과의 대화(Animals in Translation)’ 첫 페이지에 나오는 글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나는 동물을 사랑한다. 그것이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다.”

[함께하는 미래] 기후를 묻다

최근 발표된 세계기상기구(WMO)의 ‘전 지구 기후 현황 보고서’는 작년 한 해 전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5도 상승한 것으로 발표했다. 2015년 국제사회가 파리협약을 통해 약속했던 제한선인 ‘상승 폭 1.5도’가 불과 9년 만에 깨져 지구촌의 노력에 빨간불이 켜졌다. 또 보고서는 북극 해빙 면적이 지난 18년간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으며 ‘티핑포인트’로 주목받고 있는 남극 해빙 면적도 지난 3년간 최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과 함께 지구 해수면은 10년 동안 연평균 4.7㎜씩 높아지고 있다는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내용들이 담겨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그 변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은 10년 전과 거의 변함이 없다. 국제사회가 약속한 기후위기 대응 방안은 단순 명료하다.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화석연료에 기반한 전력과 에너지원을 줄이면서 재생에너지 사용을 늘리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며, 탄소흡수원을 확대하거나 보호하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국가도 소외 및 배제되지 않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특히 재생에너지를 빠르게 확대해야 하는 ‘시급성’을 견지하고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바로잡는 ‘정의성’을 지키며 지구의 생태적 한계선과 인간의 사회적 기초를 반영하는 ‘충족성’을 동시에 이행해야 가장 현명하고 빠르게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얼마 전 환경단체가 발표한 ‘전기 생산하는 시원한 주차장-전국 주차장의 태양광 잠재량 평가 보고서’에서 분석한 자료만 보더라도 전국 50구획 이상 주차장에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할 경우 2.91GW 용량으로 연간 5천115GWh의 전력 생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 주변의 작은 공간만 이용하더라도 손쉽게 재생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 제21대 대선을 향한 법정 선거운동이 시작돼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후보자와 정당에서 수많은 공약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가 ‘지구 가열화’란 절체절명의 위기 시대에 같은 행성에서 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기후 유권자는 대선 후보자들이 내놓는 정책에서 미래 비전을 찾고 그들이 찾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시대 변화의 중심성을 확인하고, 그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희망을 찾는다. 기후변화로 인해 큰 피해와 불확실성이 높아진 농민과 농업이 있고, 폭우로 인한 수재민이 있고, 삶의 기초마저 위협받는 지하·반지하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기록적인 폭염과 한파로 고통받는 야외 노동자와 온열과 한랭질환자들의 생존마저 기후 위험에 노출돼 있다. 석탄발전소의 폐쇄로 인해 일과 생계를 걱정하는 노동자와 가족이 있으며 대규모 송전선로로 인해 삶의 터전과 일터마저 위협받는 사람들이 있다. ‘기후위기’는 경쟁과 불평등, 부정의를 심화시키고 있다. 후보자와 정당은 그 해법을 현장 속에서 찾으시길 바란다. 다행히 제21대 대선을 앞두고 기후 단일 의제 대선 TV 토론회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더 커지고 있다. ‘한 번도 듣지 못한 대답, 대선 후보들은 기후위기 해법을 말하라!’는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기후정치를 호소하며 대선 후보자들에게 듣고 싶은 질문을 취합하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기후’ 단일 의제로 후보 토론회를 개최해 달라는 유권자의 목소리가 성사되기를 소망한다.

[함께하는 미래] 한미 관세 협상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달 30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한국, 일본 등은 선거 전에 무역 협상의 틀을 완성하고 그 성과로 선거운동을 하려 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언급했다. 미국과 조속한 협상이 여당의 지지율을 올려줄 것이므로 선거 전에 빨리 처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캐나다와 호주의 총선에서는 베센트 장관의 주장과 정반대로 미국에 일방적 양보를 거부하는 여당이 모두 승리했다. 지난달 28일 캐나다 총선은 트럼프 상호관세의 정치적 영향을 측정할 수 있는 시험대였다. 올해 1월까지만 해도 자유당은 쥐스탱 트뤼도 총리의 경제 정책 실패로 보수당에 20% 이상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 및 캐나다의 미국 51번째 주 편입은 선거 구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반(反)트럼프 여론에 편승한 자유당은 상호관세에 강경한 대응을 주장한 마크 카니 전 캐나다은행 총재를 트뤼도 총리 후임으로 선출했다. 카니 총리는 피에르 포일리에브르 보수당 대표를 캐나다의 트럼프로 맹렬히 비했다. 그 결과 정권교체를 기대했던 보수당은 총선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포일리에브르 대표도 의원직을 상실했다. 지난 3일 호주 총선에도 반트럼프 여론이 선거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불과 2개월 전만 해도 노동당은 물가 및 집값을 잘 관리하지 못해 자유당·국민당 연합에 패할 것으로 예측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호주에 주력 수출품인 철강, 알루미늄에 대한 관세 면제를 거부한 3월 이후 반트럼프 여론이 급속히 확산됐다. 설상가상으로 트럼프를 모방해 정부효율부(DOGE) 도입을 통한 공공 부문 인력 감축 공약을 제안했던 피터 더튼 자유당 대표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그 결과 자유당·국민당 연합은 노동당에 역전당했을 뿐만 아니라 더튼 자유당 대표도 지역구를 지키지 못했다. 캐나다와 호주에서 반트럼주의의 승리는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월7일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1조달러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등 타협을 모색했다.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지난달 17일 첫 실무회담에서 베센트 장관에게 포괄적 합의를 가능한 한 조기에 실현하겠다는 의사를 제시했다. 그러나 지난 1일 열린 2차 실무회담에서 일본은 철강·알루미늄 관세 및 자동차 관세를 면제 대상에서 제외하고 상호관세에 대해서만 24%에서 14%로 인하하겠다는 미국의 양보안을 즉각 거부했다.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은 3일 세 가지 관세를 모두 인하하는 패키지 딜이 아니면 미국과 협상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일본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미일 협상은 당분간 교착될 것이다. 미국과 빠른 타협이 선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베센트 장관의 주장은 캐나다와 호주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이미 틀린 것으로 증명됐다. 따라서 정부는 이달 중순 예정된 2차 실무회담에서 미국의 요구 사항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만 논의하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협상 의제와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국가 이익을 적극적으로 수호하려는 자세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다음 달 대선에서 유권자의 냉정한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함께하는 미래] AI와 생각의 근육

런던의 블랙캡 택시 기사들은 도시의 2만5천개가 넘는 복잡한 도로와 골목, 2만개에 달하는 건물과 공공시설의 위치까지 모두 외워야 하는 ‘The Knowledge(지식)’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방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활용하는 런던 택시 기사들의 뇌 속 ‘해마’의 크기가 일반인이나 정해진 노선만 운행하는 버스 기사들보다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마치 근육이 운동에 따라 발달하거나 위축되듯 뇌 역시 사용 방식에 따라 특정 영역이 발달하거나 퇴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이러한 과학적 사례가 아니라도 ‘머리는 안 쓰면 퇴화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상에서 체감하고 있다. 내비게이션이 등장한 후 예전에는 잘 찾아가던 길도 헤매게 되고 휴대폰에 번호를 저장하기 시작한 후에는 수십개씩 외우던 전화번호를 하나도 기억 못 하는 일이 흔해졌다. 자신의 전화번호를 묻는 기자에게 “전화번호부에 있는 것을 왜 기억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했던 아인슈타인의 일화처럼 이러한 기억의 아웃소싱은 한정된 두뇌 자원을 더 중요한 일에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단순한 기억이나 정보 처리뿐 아니라 핵심적 판단 능력까지 외주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동항법장치에만 익숙해진 조종사가 실제 매뉴얼 비행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하거나 내비게이션만 믿다가 강물에 빠지는 사례들은 판단 능력을 외주화할 때 발생하는 위험성을 경고한다. ‘자동화 편향’이라고 불리는 인공지능(AI)과 자동화 시대의 징후이다. 듀얼 브레인, 세컨드 브레인이라는 개념이 일상화된 지금 AI는 단순한 정보 처리를 넘어 의사 결정과 창의력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신입사원 채용에서부터 광고 기획, 작가의 창작 과정, 심지어 심리 상담까지 AI가 인간의 본질적 영역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이처럼 이성적, 감성적 판단마저 AI에 의존하게 되면 사용하지 않는 근육이 위축되듯 인간 고유의 사고 능력은 급속히 퇴화할 것이다. 이러한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AI의 한계와 문제점을 이해하는 AI 리터러시를 강조한다. AI의 판단을 무조건 수용하지 말고 항상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창의적 영역에서는 가급적 스스로의 능력으로 먼저 시도하고 AI는 검증이나 보완 도구로만 활용하는 접근법이 중요하다. 자신의 사고 과정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메타인지 능력을 기르고 디지털에서 벗어나 전통적 취미 활동 등을 즐기는 정기적인 AI 디톡스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AI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뛰어난 도구이자 생산성과 창의력을 높이는 동반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도구는 도구일 뿐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싱귤래리티(singularity) 시대가 도래한다 해도 최종 결정과 책임의 주체는 인간이어야 한다. 도구가 사용자를 대체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라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한번 위축된 근육을 다시 회복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AI가 제공하는 편리함과 효율성에 완전히 매몰되기 전에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정기적인 ‘생각운동’을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그것이 AI라는 거대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 우리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단단한 닻이 돼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미래] 야생동물, 공존 넘어 상생 바라볼 때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는 나무 구멍에 긴 나뭇가지를 넣었다. 잠시 후 꺼낸 가지 끝에는 흰개미가 잔뜩 붙어 있었다. 그레이비어드가 흰개미를 잡은 이유는 단 하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침팬지다. 저명한 동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은 처음 다가온 침팬지에게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1961년 유인원 관찰 캠프인 탄자니아 곰베에서 생활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어졌지만 침팬지 또한 도구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사실이 구달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이 위대한 발견은 생명을 존중하는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에서 비롯됐다. 구달은 어린 시절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홀로코스트 이후 인간성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지를 깊이 고민했다. 너그러운 어머니와 현명한 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자연과 동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넘어 생명과 생명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인류와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려면 서로의 다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이 먼저여야 한다. 젊은 구달은 곰베에 도착하자마자 바위 숲을 올랐다.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햇빛과 노을이 숲의 계곡 사이로 퍼지는 아름다움을 느끼며 그는 자연과 하나 되는 경험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연구를 멈추지 않은 그는 침팬지를 비롯한 야생동물의 가치를 재발견했고 지금도 전 세계를 순회하며 환경과 인권을 위한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구달 박사처럼 자연에 대한 경외와 애정을 담아 연구하고 행동한 이들이 없었다면 지구 환경과 생명 파괴는 훨씬 더 가속화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깨어 있는 선각자들의 노력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류는 기후변화, 전염병, 기근, 자연재해, 대멸종 등 복합적인 위기를 겪고 있다. 이는 결국 자연과 야생동물을 대하는 인류의 오랜 태도와 생각이 누적돼 나타난 결과다. 그러나 구달 박사는 말한다.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야생동물과 그들의 삶의 터전을 생각한다면 결코 늦은 때는 없다고. 간절한 바람을 품은 인간의 힘은 무한하며 실제로 인류는 그 끈기와 용기로 수많은 기적을 이뤄 왔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간성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기꺼이 함께 살아가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규범 속에서 질서 있는 공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공존은 함께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서로에게 이익을 주고받는 상생(相生)으로 확장될 수 있다. 우리가 손해를 감수하고 조금씩 양보하며 살아갈 때 뜻밖의 도움과 따뜻한 배려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야생동물에 대한 인류의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태초부터 무수한 생명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유지된 아름다운 지구를 떠올려보자. 그 속에서 야생동물이 지닌 고유한 존재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보다 넓은 차원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자연과 야생동물이 지닌 가치를 직접 느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당장 주변 공원을 산책하며 푸르른 참나무 잎의 살랑거림과 참새의 지저귐에 잠시 귀 기울여 보자. 그렇게 자연 속에 나를 놓아두는 일이야말로 인간과 야생동물이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돕는 상생의 문을 여는 가장 따뜻한 시작일지도 모른다.

[함께하는 미래] 새로운 정부의 과제, 기후위기 대응

123일 만에 광장의 봄을 맞았다. 하지만 그 봄맞이 기쁨도 잠시, 한반도 전역을 잿더미로 만든 산불 청구서를 받으면서 우리에게 닥친 현실을 다시금 뒤돌아보게 했다. 그나마 마음을 달래준 벚꽃마저 때 아닌 돌풍과 비바람 앞에서 속절없이 져버린 탓에 온전한 봄을 시샘했나 싶다. ‘어쩌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맞이할 봄이 매년 새로운 봄으로 기록될 수 있겠다’는 해서는 안 될 생각이 잠깐 스쳤다. 올봄 전국을 휩쓴 산불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는 물론이고 자연생태계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곧 아니면 먼 훗날 받게 될 자연생태계의 손실 청구서와 온실가스 청구서에는 어떤 기록이 담길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산불은 인위적인 발화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실화로 인한 산불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모든 산불을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괴물 산불’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나마 대형 재난을 막는 최선의 길이다. 우리나라 산림 관리는 국가기관이 담당해 왔다. 그동안 막대한 세금과 인원을 투입해 왔기에 그 노력의 효과성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매우 세밀한 확인과 철저한 규명이 필요하다. 숲은 그 자체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생명터이기 때문이다. 4월 초, 지난 한 해 동안 발생한 이상고온, 호우, 대설 등의 이상기후 발생과 분야별 피해 및 대응 현황, 향후 대책을 담은 ‘2024년 이상기후 보고서’가 발간됐다. 요약하면 ‘기후위기가 심각하게 진행돼 기후 재난이 현실화되고 있기에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최근 수년간 반복되는 진단과 이미 캐비닛이 돼 버린 약속을 되풀이했다. 무너져 버린 국가권력의 쓸쓸한 뒤안길을 보는 느낌이다. 이미 “심하게 뜨거워졌다”는 비상 신호를 계속 보내는 지구 앞에 그나마 남아 있는 인내마저 한계를 보이게 한다. 어쩌면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은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6월3일. 대선이 확정됐다. 곧 대선 후보자들이 수많은 공약을 내놓을 것이다. 사회대개혁 광장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온 의제가 하나하나 숙의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특히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재생에너지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의제는 단일주제로 후보토론회가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난해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도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졌고 특히 올해 9월까지 유엔에 ‘2035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기후재난이 일상화되는 현실에서 수년간 허송세월을 한 것도 모자라 거꾸로 가던 것들을 최소한 원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공론장이 필요해 보인다. 그 공론장에서는 “기후위기가 어떻고 에너지 전환이 어떻고”가 아닌 온실가스를 매년 얼마만큼 어떻게 감축하기 위해 재생에너지를 얼마만큼 어떻게 늘릴지, 화석연료발전을 언제 어떻게 멈출지, 이로 인한 경제와 일자리는 어떻게 보호할지, 행정조직은 어떻게 개편할지, 재정은 얼마나 투입할지 등 구체적인 대안과 계획을 듣고 싶다. 최근 북유럽 최대 석탄 소비국인 핀란드가 탈(脫)석탄발전 대열에 동참했다. 석탄발전의 종주국이던 영국의 뒤를 이었다. 광장의 봄으로 맞이한 6·3 대선에서는 지난 대선 후보토론회에서 가장 낯뜨거운 장면으로 남아 있는 ‘RE100’ 논란이 재연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함께하는 미래] ‘주가 폭락·경기 침체’ 가져온 트럼프 상호관세

지난 2일 미국이 모든 교역국에 10∼50%의 상호관세 부과를 발표한 후 이틀 동안 다우존스지수 9.3%,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 10.5%, 나스닥지수는 11.4% 폭락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급속하게 확산됐던 2020년 3월 이후 최대 하락으로 인해 뉴욕 증시의 시가총액이 약 6조6천억달러가 감소했다. 이 금액은 관세를 통해 향후 10년간 확보할 수 있는 6조달러의 세수보다 더 컸다. 주가 급락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적자 문제가 해소될 때까지 관세율을 낮추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중국, 유럽연합(EU), 캐나다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가 보복 대신 협상을 모색하고 있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에 따르면 이미 70개국 이상이 미국에 협상을 제안했다. 46%의 상호관세를 부과받은 베트남 또럼 공산당 서기장은 4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산 제품의 수입 관세를 0%까지 인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7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5년 연속 세계 최대 대미 투자국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관세율 인하를 요청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도 8일 미국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상호관세를 낮추겠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협상 시도는 주식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상호관세가 무역적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통상질서를 교란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난해 상품 무역수지(국가별)를 상품 수입액(국가별)으로 나눈 상호관세율에는 비관세장벽, 보조금, 부가가치세를 포함하는 불공정 무역관행이 반영되지 않았다. 중국이 취한 대미 보복 조치도 시장의 불안정성을 증폭시켰다. 2018년 제1차 무역전쟁에서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과 타협을 추구했다. 이번에 중국은 보복을 불사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 관세가 104%까지 상승하면 중국에서 생산하는 애플 및 테슬라 같은 기업은 물론이고 테무와 쉬인 등에서 저렴한 제품을 수입하는 소비자도 피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주식시장의 침체가 계속되면서 관세전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정치적 반발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 주말 미국 전역에서 ‘트럼프는 손을 떼고 떠나라’는 시위가 1천200건 넘게 발생했다. 공화당 내에서도 상호관세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 2일 민주당이 상원에서 발의한 캐나다 관세 철폐안에 4명의 공화당 의원이 찬성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는 상호관세정책을 설계한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했던 월스트리트의 후원자들도 상호관세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상호관세가 2만개가 넘는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했던 스무트-홀리 관세법과 유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1929년 10월 주가 폭락으로 대공황이 시작됐는데도 불구하고 후버 대통령은 1930년 6월 관세법에 서명했다. 1929년 8월에서 1932년 7월 사이 다우지수는 380 선에서 40 선으로 거의 90% 하락했다. 주가 폭락과 경기 침체가 심화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제2의 후버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함께하는 미래] 지브리피케이션

지난달 25일 발표된 오픈AI의 새로운 이미지 생성 기술이 연일 화제다. 누구나 디자이너나 애니메이터 수준의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 혁신적인 기능 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지브리’의 그림체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기능이었다. ‘지브리피케이션’이라는 새 유행어가 탄생하면서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는 지브리풍으로 바뀐 자신들의 사진과 그림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으며 백악관까지 이 열풍에 동참했다. 누구나 이제 애니메이션의 거장이자 지브리의 수장인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 기술 혁명을 환영한 것은 아니다. 창작자 커뮤니티에서는 정보기술(IT) 기업이 거장 예술가의 지식 재산권을 무단으로 훔쳤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몇 년 전 AI 애니메이션을 ‘삶에 대한 모욕’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던 미야자키의 인터뷰까지 다시 주목을 받으면서 생성형 AI 기술이 창작의 민주화를 이끄는 혁신인지, 아니면 창작자의 예술혼을 훼손하는 천박한 모방이자 무단 복제인지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어느 쪽에 서 있든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독창적 원본’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사람들이 AI가 만든 지브리풍의 외형적 스타일에 열광하는 밑바탕에는 미야자키의 원작 애니메이션 속에 담긴 섬세한 스토리텔링과 철학적 깊이, 그리고 작품을 통해 공유했던 감정과 시간에 대한 기억, 예술적 아우라에 대한 향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일본 아이치현에 문을 연 ‘지브리파크’가 큰 성공을 거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테마파크는 놀이기구 대신 ‘이웃집 토토로’의 숲, ‘마녀 배달부 키키’의 거리 등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공간을 현실에 그대로 구현해 놓았다. 관람객들은 가상이 아닌 현실의 공간을 직접 걷고 체험하면서 자신들이 작품을 보며 느꼈던 감흥과 기억을 되살리고자 이곳에 모여든다. 지자체와 지역 산업계가 협력해 조성한 이 파크는 개장 직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연간 180만명의 관광객 유치, 480억엔의 경제효과를 창출하면서 자동차산업지구였던 아이치현에 ‘지브리의 성지’라는 새로운 문화 브랜딩을 부여했다. 이 모든 성공의 배경에는 한 장인이 수십년에 걸쳐 묵묵히 쌓아 올린 독창적 세계관과 예술적 깊이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특정 스타일을 무한히 재생산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그 가벼운 재미에 빠질수록 사람들은 복제할 수 없는 창작의 깊이와 진정성을 더욱 갈망하게 될 것이다. 컴퓨터 앞에서 누구나 손쉽게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함께 모여 독창적 창작품의 숨결을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적 경험을 더욱 그리워할 테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의 가치는 높아지며 가상의 공간에서 유사한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독창적 오리지널리티를 직접 경험하려는 욕구도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즐겁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과정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독창성과 인간 고유의 가치를 되짚어보는 것, 이것이 ‘지브리피케이션’ 현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의미다.

[함께하는 미래] 전시 넘어 보전과 공존으로

기린을 실제로 바라본 적이 있는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앞다리에 몸보다 높은 목을 나무처럼 뻗은 이 신기한 동물을 직접 올려보면 경이로움에 ‘와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아프리카에 서식지를 둔 기린을 우린 언제든 볼 수 있다. 보여주는 목적으로 동물원과 체험 시설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전시동물이다. 최근 동물원에서는 전시에 대한 비판으로 교육, 보전 연구로 목적을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전시동물은 여전히 존재하고 인간사회의 이해 관계 안에서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또 목적이 교육, 보전 연구로 바뀐다고 해도 실효성과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동물의 미래는 겉돌게 된다. 실물로 보는 동물은 처음엔 사람들에게 감탄과 흥미를 유발한다. 움직이는 호랑이, 사자의 하품, 큰 덩치의 코끼리는 아이들에게 신선한 시각적 자극을 줘 관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필요하다.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과연 교육의 전부일까. 우리가 동물 교육을 통해 얻어야 할 진짜 소양은 관심이나 감탄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고 그들을 존중하며 공존하려는 삶의 태도야말로 교육의 본질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전시 중심’ 교육은 그 목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은 다양한 기술 발달로 동물 교육을 다른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는 시대다. 증강현실, 고화질 다큐멘터리 등은 오히려 자연 속 동물의 본모습을 왜곡 없이 전달한다. 사람들은 동물원의 좁은 철창 너머가 아니라 야생 공간 속에서 먹고 자라고 싸우는 동물의 삶을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다. 이는 단지 감각적 체험을 넘어 동물의 삶에 대한 존중과 경외를 배울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또 체험동물은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동물을 만져야만 교감할 수 있다는 생각은 결국 인간 중심의 위안이다. 우리가 포근함을 느끼고 정서적으로 위로받는 경험은 반려동물과의 관계를 통해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낯선 동물을 반복적으로 사람 손에 맡기며 체험시키는 행위는 그들에게 감각적 폭력이 될 수 있다. 보전 연구라는 명분 또한 마찬가지다. 전시를 통해 멸종위기 동물의 존재를 알리고 관심을 끌어내는 일이 의미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전이라 부를 수는 없다. 보전과 연구는 동물의 생존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그 시작은 ‘야생과 유사한 환경 조성’이다. 그리고 이 환경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생태계 전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갖춰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어떤 동물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아는 것은 동물의 일생, 즉 한살이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며 언제 이동하고 주변의 동식물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아는 일이다. 이는 곧 생태를 이해하는 일이며 진정한 환경 조성은 인간의 눈에 보기 좋은 시설이 아니라 동물이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태적 연결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복합적인 이해야말로 앞으로의 동물 교육, 보전 연구가 반드시 포함해야 할 핵심 내용이다. 궁극적으로 야생 전시동물은 사라져야 한다. 동물은 관람의 대상이 아니라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여 주기가 아닌 ‘함께 살아가기’를 해야 한다. 성숙한 어른으로서 후손에게 지속가능한 공존을 물려주고 싶다면 이제 동물의 존엄을 마음 깊이 생각해야 할 때다. 기린의 눈을 들여다봐야 할 때다.

[함께하는 미래] 재생에너지를 촉진하는 원스톱서비스

지난 2월26일, 수원시 월암IC 교통광장에서 ‘서수원·월암IC 시민 햇빛발전소 건립 착공식’이 열렸다. 행사는 경기도민 1만1천여명이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경기시민발전협동조합협의회 소속 39개 에너지협동조합이 의왕시 월암 나들목 인근 공공부지 2만7천㎡에 무려 5천200㎾에 달하는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하게 된 것을 널리 알리는 자리였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시민들과 경기시민발전협동조합협의회 관계자, 그리고 도와 수원시, 의왕시의 공무원 등 200여명이 참석해 서로에게 축하와 격려가 담긴 인사와 함께 준공까지 안전하고 원만하게 공사가 진행되길 응원했다. 일반적으로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은 설치하고자 하는 당사자가 설치 가능성이 있는 부지를 발굴, 이를 관계 기관의 사전 검토를 통해 허가가 나면 규모에 따라 주무관청의 발전사업 허가를 받고 이후 해당 지자체의 개발행위 허가를 얻어 발전설비를 설치하는 과정을 밟는다. 이후 시설 설치가 완료되면 한전과 ‘계통 연계’라는 절차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인 과정으로 수많은 변수와 우여곡절이 존재해 장기간의 준비 과정과 많은 비용이 든다. 하지만 서수원·월암IC 시민 햇빛발전소는 이러한 난관을 상당 부분 민관의 소통과 협력을 통해 해결하는 모범적인 정형을 만들어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고 한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거부하며 온갖 의심의 씨앗을 퍼뜨리는 낡은 시대의 현실을 이겨내고 부지 발굴에서 인허가까지 재생에너지 확산을 가로막는 온갖 걸림돌을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결국 착공이라는 결과까지 만들었다고 하니 그 노고에 아낌 없는 박수를 보낸다. 민관 협력을 통해 얻은 서수원·월암IC 시민 햇빛발전소의 귀중한 사례를 헛되게 하면 안 된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하루빨리 재생에너지를 확산시켜 전 지구적이고 국가적인 과제를 달성해야 하는 중차대한 현실에서 그 역할의 일정 부분을 개인이나 소규모 발전사업자, 에너지협동조합에 감당하게 해야 한다면 국가와 지자체는 복잡한 절차와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체계를 마련할 의무가 있다. 광역·기초지자체가 ‘부지 발굴에서 인허가까지 원스톱서비스’를 제공해 누구나 손쉽게 재생에너지를 설치할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갖추면 우리의 재생에너지 확산 속도는 훨씬 더 빨라질 것이고 시민의 관심과 참여도 더욱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행정은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시민과 에너지협동조합은 에너지공동체를 조직하고, 발전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설치 후 운영·관리하면서 더 많은 시민이 에너지기본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매년 재난으로 인한 연간 보험금 지급액을 분석해 ‘기후재난보고서’를 발간하는 영국의 자선단체 ‘크리스티안 에이드’의 대표인 패트릭 와트는 “기후위기로 인한 인간의 고통은 정치적 선택을 반영한다. 가뭄과 홍수, 태풍(허리케인)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라며 “화석연료를 계속 태우고 배출량을 증가시키는 세계 정책들로 재난이 심화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탄소중립 사회로의 전환이 쉽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세뇌된 익숙한 모든 방식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어떤 불행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재난의 판도라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미 과학적으로 확인되고 검증된 행동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것이 현재의 위험 확률을 줄이고 대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함께하는 미래] 트럼프 상호관세보다 더 심각한 미국의 경기 침체

취임 후 50일 만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첫 번째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감세와 규제 완화를 통한 황금시대를 예고했던 그는 과도기에는 경기가 침체될 수도 있다고 말을 바꿨다. 이러한 말 바꾸기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지난 10일 하루에 다우지수 2.08%, 스탠더드앤드푸어스500 2.7%, 나스닥은 4.0% 폭락했다. 주가 폭락의 직접적 원인은 불황에 대한 우려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이고 재무장관까지 나서 경제 성장의 둔화 가능성을 시인했다. 이에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들은 경기 침체 위험도를 상향 조정했다. 앞으로 남은 50일 동안 트럼프 대통령이 이러한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지 않으면 그가 주가 상승을 견인할 것이라는 트럼프 풋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경기 침체 가능성이 커진 가장 중요한 요인은 관세 인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심화다. 계란 한 알이 1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폭등하면서 미국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몇몇 국가로부터 계란을 수입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작년 선거에서 핵심 쟁점이었던 인플레이션을 조만간 제어하지 못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중간선거에서 패배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통치 방식에 대한 불만도 무시할 수 없다. 50일 동안에 트럼프 행정부는 무려 83개의 대통령 행정명령을 통해 경제·외교·국방·원조·이민·정부조직 개혁을 밀어붙였다. 특히 각 부처의 업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정부효율부(DOGE)가 기존 부처의 조직과 예산을 일괄적으로 감축하라고 요구하다 보니 정부효율부와 기존 부처 사이의 갈등 및 반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정부효율부에 대한 반감은 일론 머스크가 경영하는 테슬라 주가가 하루 만에 15% 급락했다는 사실에 잘 반영돼 있다. 현재 우리 경제는 미국의 경기 침체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상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의 전국 50인 이상 508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년 기업규제 전망조사’에서 ‘올해 경제위기가 1997년보다 심각’(22.8%)하거나 ‘1997년 IMF 위기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한 위기가 올 것’(74.1%)으로 답변했다. 자영업자 수는 지난해 11월 570만명보다 20만명 이상 감소한 550만명으로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8년의 561만명보다도 적다. 원-달러 환율도 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1,400원대를 석 달 이상 유지하고 있다. 대외 충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외경제정책의 초점을 상호관세 협상에서 경기 침체 대비로 빨리 전환해야 한다. 미국의 경기 침체는 관세 인상보다 우리 경제에 훨씬 더 심각한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관세는 특정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약화시키지만 경기 침체는 수출 전반을 감소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환율과 금융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부가 금융시장과 환율을 조속히 안정시키지 못하면 미국의 경기 침체가 제2의 IMF를 불러일으키는 촉매로 작용할 수도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한국은행에 제공한 3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덕분에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방위분담금 9배 인상을 요구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자금을 지원해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따라서 미국의 도움을 기대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함께하는 미래] 인공지능과 시니어

흔히 인공지능(AI)은 젊은 세대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모든 첨단 기술이 그렇듯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은 주로 젊은 세대의 몫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매킨지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Z세대의 절반과 밀레니얼세대의 60% 이상이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65세 이상 시니어층의 활용률은 20%에 불과하다. AI와 노년층을 연결하는 담론 또한 주로 돌봄, 말벗, 건강 관리 등 ‘수혜자’로서의 위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AI 시대 시니어들의 경쟁력을 간과한 것이다. AI의 장점은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능력이며 이는 플랫폼에 접근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제공된다. 따라서 AI 시대의 진정한 개인 경쟁력은 데이터화하기 어렵고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원천 경험’에서 비롯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시니어들은 오히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AI는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하고 패턴을 발견하는 데 탁월하지만 최종적인 판단이나 복잡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다. AI는 윤리적 판단, 전체적인 맥락 파악,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과 설득력 발휘 등에서는 취약한 반면 특정 분야에서 오랜 기간 경험을 쌓아온 시니어들은 자신만의 경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직관과 통찰력을 발휘해 이러한 AI의 약점을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 시니어들은 AI가 제시하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현실에 최적화된 선택을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AI의 답변 속에서도 오류나 비약, 허점을 짚어내는 현장 경험으로 축적된 직관과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니어들의 경험과 지혜가 AI의 막대한 데이터베이스 및 추론 능력과 결합될 때 비로소 AI 시대가 요구하는 혁신이 탄생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미국의 벤처캐피털 ‘브릴리언트 마인드’는 50세 이상의 창업가들을 중점적으로 지원, “시니어의 지혜야말로 AI가 대체할 수 없는 혁신의 원천”임을 강조하면서 정년이나 은퇴 같은 고정관념은 AI 시대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일부 로펌에서도 고참 변호사의 전문 지식과 노하우를 AI에 학습시켜 신입 변호사의 업무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숙련된 지혜를 공유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이러한 물결에 동참하고 있다. 물론 단지 나이만으로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 있는 경험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소화해 독창적인 통찰력을 가진 시니어들만이 AI 시대의 새로운 기회를 활용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다. AI 시대에 경쟁력 있는 시니어가 된다는 것은 풍부한 스토리를 지닌 매력적인 인간으로 성숙해 간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자신만의 경험을 새로운 기술에 접목하는 ‘젊은 시니어’와 기술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성숙한 주니어’들이 함께 만들어갈 미래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한 지식 창고이자 AI 시대의 능동적인 창조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그런 세상일 것이다.

[함께하는 미래] 실험을 위한 생명의 무게

귀여운 햄스터가 인류와 맺은 최초의 신분은 실험동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햄스터는 작고 세대교체가 빠르고 다루기 편하다는 이유로 1930년대부터 실험동물이 됐다. 실험설치류는 햄스터와 기니피그를 포함해 마우스와 래트가 주를 이룬다. 이들은 감염병과 암 치료, 신약 개발, 식품과 화장품의 독성실험 연구에 사용돼 왔다. 연중 사용되는 실험동물은 미국에서만 최소 2천만마리로 추정되며 설치류가 그중 90%를 차지한다. 중국, 러시아, 유럽 등의 자료를 합하면 규모는 몇 배수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 동물실험연구는 오늘날까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맹신과 불필요한 이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실제 동물실험 결과가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는 연구나 교육 목적의 해부 수업은 굳이 동물을 사용해야 했느냐는 비판을 받는다. 실험을 위해 일부러 질병을 주입하는 동물이 있다. 이들은 사는 동안 큰 고통을 받는다. 실험 특성에 따라 고통의 단계도 다르다. 김진석 박사는 자신의 저서 ‘동물의 권리와 복지’에서 위해의 수준을 4단계로 설명했다. 1단계는 관찰 위주의 실험으로 동물이 해를 입지 않는다. 2단계는 한 번의 표본 채취로 작은 불편이 존재하며 3단계는 표본이 자주 채취되거나 억류되는 실험으로 중간 수준의 불편을 겪고 4단계는 본능적 생리를 박탈함으로써 심각한 위해에 직면한다. 동물들은 실험 내내 숱하게 중등도 이상의 고통을 받는다. 다행히 전 세계적으로 이들을 위한 복지 전략으로 ‘3R’s 체계’를 도입하고 있다. 동물실험을 대체할 방법을 찾고(Replacement), 실험에 이용되는 마릿수를 줄이며(Reduction), 고통과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단을 취하라(Refinement)는 뜻이 담긴 이 법은 동물실험윤리위원회를 통해 시행되고 있으나 실험동물에게 실질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실험동물로 만들어졌으나 실험에 쓰이지 못하는 동물에 대한 대책은 없으며 실험이 끝나 쓸모를 다한 이들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지, 산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보장의 노력과 관심은 너무나 적다. 그래서 실험동물의 사전·사후 대책에 관한 최소한의 정책과 관리 방안이 꼭 필요한 실정이다. 위대한 연구일수록 실험동물의 기여는 훌륭하고 이들의 고통이 대신한 비용은 적지 않다고 말한다. 작은 동물의 노고를 인정하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과학적 성과에 초점을 둔 해석만으로는 실험동물이라는 ‘생명’의 가치를 온전히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의 희생이 연구의 성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실험동물의 희생은 값으로 환산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무게로 이야기돼야 한다. 실험동물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으며 실험의 일부로 평가된다 해도 그들은 물건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다. 태어나기 전부터 누군가를 대신할 운명을 부여받는 생명이 있는가. 우리는 과연 그들의 삶과 죽음을 연구 성과를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만 여겨야 하는가. 실험동물의 희생을 이야기할 때 그들의 존재를 존중하고 책임지는 태도가 먼저 논의돼야 한다. 작은 몸을 가진 햄스터 한 마리, 실험대 위의 쥐 한 마리에게 우리가 지고 있는 빚은 연구 성과라는 명목으로 덮어둘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정하고 갚아 나가야 할 묵직한 몫이 아닐까.

[함께하는 미래] 광장의 빛을 재생에너지로

최근 미국 국립빙설자료센터(NSIDC)의 데이터를 영국 BBC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2월13일까지 5일 동안 북극과 남극의 해빙 총 면적은 1천576만㎢로 이는 같은 기간 2023년 1~2월 기록된 종전 최저치인 1천593만㎢를 경신한 수치라고 한다. 2년전보다 무려 우리나라 면적의 약 2배 가까이 해빙이 녹아내린 셈이다. 해빙 면적이 줄어든 만큼 지구는 평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지구촌 곳곳에 인간이 과학기술로도 예측하기 어려운 천재지변으로 재난을 만들어 낼 것이다. 가속화되는 지구온난화로 모든 지표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데 지구 반대편에선 지난 세기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나라의 수장이 취임하면서 내뱉은 일성이 우리가 닥친 현실을 다시금 되뇌게 했다. 소위 초강대국 최고 책임자의 기후위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취임사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그 도발적인 망언은 과거 30여년 동안 힘겹게 기후 보호를 위해 쌓아 온 공든 탑을 도미노처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며, 온갖 시련을 딛고 기후 대응을 위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실현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로 하여금 당분간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화석연료로의 회귀에 대한 공포에 치를 떨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국회 입법조사처는 “미국이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하더라도 에너지 전환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우리나라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최소한 ‘탄소중립 기본법’으로 정한 에너지 전환을 충실히 이행해 에너지 안보와 탄소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이 현실로 다가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강대국의 패권주의와 일방주의가 횡행하면 약소국은 발등에 놓인 여러 급한 불을 동시에 꺼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명한 대처 없이는 나라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될 수 있다. 정치 일정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광장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위한 수많은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장기간 불통과 일방통행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간절한 민의의 외침이다.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불과 몇 해 전 수많은 논쟁 및 갈등을 동반한 공론화 과정과 국민적 합의를 통해 그나마 마련한 2050 탄소중립 선언과 계획이다. 최근 무도함에 뿌리까지 흔들리기를 반복했지만 시민 스스로가 키운 불씨는 다행히 완전히 꺼지지 않았고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서서히 싹을 틔우고 있다. 자주성과 지속가능성을 모태로 시민 누구나 주인이 돼 재생에너지를 통해 현재와 미래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는 에너지협동조합의 활동이다. 이들의 주장은 단순 명료하다. 시민 모두가 에너지 생산과 이용의 주인이 되자는 것이다. 우수가 지나고 곧 동면하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인데 이 절기에 겪는 한파가 현 시국을 닮았는지 쉽게 끝나지 않고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애태운다. 날씨가 널뛰어도 해는 어김없이 봄을 재촉한다. 서둘러 마무리하고 보습을 닦고 쟁기질을 준비하는 농부처럼 무너진 살림살이와 새까맣게 멍든 마음을 치유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이 반복되서는 안 된다.

[함께하는 미래] AI 쇄국정책으로 딥시크를 막을 수 없다

지난달 중국의 헤지펀드 회사 환팡퀀트 소속 인공지능 연구기업 딥시크(DeepSeek)가 전 세계 인공지능(AI) 산업에 큰 충격을 줬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 때문에 성능이 낮은 H800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딥시크의 R1 모델이 가장 강력한 성능을 가진 H100 칩을 활용한 오픈AI의 o1 모델과 대등한 기술력을 보여줬다. 더 놀라운 점은 자본금 1천만위안(약 19억9천만원)으로 설립된 딥시크의 R1 개발비가 1천570억달러(약 208조원)의 가치를 가진 오픈AI의 챗GPT 개발비의 5.8%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딥시크 충격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양면적이다. 한편에서는 AI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산업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식 다음 날인 지난달 21일 미국 오픈AI, 오라클, 일본 소프트뱅크가 참여하는 총 5천억달러 규모의 ‘스타게이트(Stargate)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틀 뒤에는 자유로운 기술개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의 AI 규제를 철폐하는 ‘AI에서 미국 리더십을 위한 장벽 제거’ 행정명령이 공포됐다. 한편으로는 미국 관공서와 군부대는 딥시크 R1의 사용을 금지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처리 방식이 불분명해 R1에 보안 침해 가능성과 함께 개인정보 유출이 의심된다는 이유에서다. 기기 정보, IP 주소, 키보드 입력 패턴 등이 불법적으로 수집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면서 미국 의회는 틱톡 금지 법안과 유사한 딥시크 금지 법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업정책이 논의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AI기본법’을 제정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글로벌 인공지능 3대 강국(G3) 도약, 중소벤처기업부는 AI생태계 활성화를 목표로 올해 대규모 재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반면 행정안전부는 이달 4일 중앙부처와 17개 광역지방자치단체에 생성형 AI 사용에 유의해 달라고 요청하고 이에 외교부, 국방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이 외부망과 연결 가능한 업무용 PC에서 딥시크의 사용을 차단하는 등 보안정책까지 언급되고 있다. 미국처럼 대규모 투자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성비가 훌륭한 딥시크의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면 우리나라가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과의 격차를 줄이지 못할 것이다. 올해 우리나라 예산 중 AI 관련 예산은 총 1조8천억원으로 미국의 200억달러(약 29조원), 중국의 1천917억위안(약 39조원)에 비해 턱없이 적으며 민간투자(2023년 기준)에서도 우리나라가 13억9천만달러로 미국(672억2천만 달러)은 물론이고 중국(77억6천만달러)보다도 훨씬 적다. 중국 AI 산업의 저력은 풍부한 연구인력에 있다. 중국 내에만 생성형 AI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이 700개가 넘는다. 미국 폴슨연구소의 ‘글로벌 AI 인재 현황 2.0’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미국 기업과 연구기관에 소속된 최상위 AI 연구자의 47%가 중국 대학 졸업자이며 미국 대학 졸업자는 18%에 불과했다. 미중 격차는 앞으로 더 벌어질 것이다. 2025년 처음으로 네이처 인덱스의 2~11위를 중국 대학이 차지했다. 1위인 하버드를 제외한 스탠퍼드(12위), MIT(13위), 옥스퍼드(14위), 도쿄대(15) 모두 중국 쓰촨대(11위)에도 추월당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중국에서 제2, 제3의 딥시크가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생성형 AI에 대한 정책은 기술·산업 육성과 보안 침해 방지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제한된 재원과 인력으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가성비가 좋은 중국 AI 모델을 적절히 참고해야 한다. 중국 AI 모델의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는 쇄국정책은 기술 발전을 촉진하기보다 후퇴시킬 가능성이 더 높다. 정부와 업계는 보안을 강화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딥시크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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