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중국 내몽골에서 산시성 ‘다퉁’으로

중국 내몽골 ‘엘렌하오터’를 출발해 남쪽으로 460㎞ 떨어진 산시성 ‘다퉁(大同)’으로 향한다. 시베리아와 몽골고원 통과까지 약 5천500㎞를 달려왔다. 오늘부터 중국 영토의 실크로드 시안, 난저우, 둔황, 투루판, 쿠차, 타클라마칸사막, 카슈가르, 파미르고원을 지나갈 것이다. 오늘 중국 내몽골 자치성 고비사막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7월 고비사막의 한낮 기온은 매우 높다. 광대한 사막의 하늘은 높고 푸르다. 우리나라 봄철 황사(黃砂) 발원지를 지나고 있다. 놀라운 것은 460㎞에 이르는 고비사막의 고속도로 양옆으로 무성한 ‘가로수 숲’이 조성돼 있다. 한 그루씩 심은 가로수가 아니라 넓은 폭으로 ‘가로수 숲’을 조성해 놨다. 소나무, 포플러나무, 백양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도로 옆에 넓게 숲처럼 조성돼 있다. 멀리서 물을 끌어와 매일 물을 줘야 나무가 자라는데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다. 사방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넓은 사막의 텅 빈 하늘에 새 한 마리 안 보인다. 몽골고원, 고비사막의 원시적 자연의 기(氣)를 흠뻑 받으며 달린다. 황량한 사막의 단순함과 광대함은 세속의 마음을 비우게 만들고 우리 마음도 자연의 일부로 순화되는 것 같다. 몇 시간씩 텅 빈 광야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내몽골 고비사막을 400㎞ 이상 지나 산시성 다퉁 가까이 왔다. ■ 뉴욕타임스 선정 세계 10대 위험한 건물, ‘현공사’ 숙소로 가기 전 다퉁시 외곽에 있는 타이항산맥 헝산의 ‘현공사’로 향한다. 오늘은 토요일 오후다. 현공사 입구부터 중국인 관람객이 인산인해다. 뉴욕타임스가 2010년 ‘세계에서 가장 기이하고 위험한 건물 10선’을 선정했다. 헝산 현공사는 피사의 사탑,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등과 함께 선정돼 유명해졌다. 1400년 전 선비족이 북위 시절에 세운 오래된 사찰이다. 토요일이라 중국인 관광객이 너무 많아 절 목조건물까지 못 올라가고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만 봤다. 당시 이곳 다퉁은 흉노족 이후 몽골고원의 강자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수도였다. 중국이 오랑캐라고 부르던 선비족이 세운 북위는 불교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현공사는 유불선(儒佛仙) 세 종교의 성인인 공자, 부처, 노자 세 분을 모시고 있다. 세 사람 성인을 한곳에 모시고 기원하면 복을 세 배 받을 것이라는 유목민의 단순한 생각이 엿보인다. 절을 지탱하고 있는 현공사 나무 기둥은 30m의 가느다란 나무를 오랫동안 기름에 절여 만들었다. 기둥이 낡으면 수시로 교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바위 절벽 하단의 빨간색 ‘장관(壯觀)’ 글자는 당나라의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태백(李太白)이 이곳에 와서 쓴 글씨라고 한다. 이태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음미해 본다.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타이항산은 고사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전설이 깃든 산이다. 아주 먼 옛날 태행산과 왕옥산 산속에 사는 90세 노인이 높은 산을 넘어 다니는 것이 불편해 산을 평평하게 깎아 길을 내기로 결심했다. 모든 사람이 노인을 우공(愚公), 즉 어리석은 사람이라 불렀다. 노인은 동네 사람의 비웃음에 굴하지 않고 내가 못 하면 아들, 손자, 손자의 손자 등 계속하면 언젠가 길을 낼 수 있다고 말하며 산을 깎기 시작했다. 태행산 산신령이 우공의 우직함에 감동해 산을 옮겨 주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라 한다. ■ 비단이 ‘로마’로 가게 된 역사적 사연 로마의 명장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저)’의 비단 사랑은 대단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당시 최고급 사치품인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위신을 과시했다. 당시 로마의 귀족 여인 사이에 비단옷이 대유행이었다. 속이 비치는 비단옷을 많이 입어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은 풍기문란을 걱정하며 여성의 비단옷 착용을 금지했으나 소용 없었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비단이 어디서 오는지, 누에가 뽕잎을 먹고 만드는지를 몰랐다. 어떻게 비단이 험난한 대륙을 지나 로마제국 수도로 팔려 갈 수 있었을까. 역사적 사건은 한나라 건국자 유방의 평성의 치욕을 뜻하는 ‘평성지치(平城之恥)’다. 한 고조 유방은 항우를 토벌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영웅이다. 기원전 200년 한 고조 유방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족을 정벌하러 ‘평성’(현재의 다퉁)에 왔다. 당시 흉노족 선우(왕) ‘묵특’은 4만 군사로 맞선다.묵특의 유인계에 빠진 유방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했다. 유방은 묵특선우의 부인에게 뇌물을 바치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해 목숨을 부지했다. 패배한 유방은 흉노족과 형제지간(한나라가 형, 흉노가 아우) 화친을 맺는다. 유방은 공주를 흉노왕에게 시집(‘화번공주’의 시초)보내고 매년 엄청난 양의 비단, 은화, 곡식 등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한다. 흉노족이 받은 비단은 초원의 길을 오가는 상인들을 통해 로마제국까지 간 것이다. 한나라에서 흉노족에 시집간 화번공주 중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이 있다. ‘왕소군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취해 날갯짓을 멈추고 땅에 떨어졌다’는 비유가 유명하다. 화공이 뇌물을 안 준 왕소군 초상을 추하게 그려 흉노왕에게 시집가도록 선발된 것인데 떠나는 날 임금이 절세미인임을 알고 초상화를 잘못 그린 화공을 처벌한 일화로 유명하다. 2천여년 전 흉노족의 비단 역사를 생각하며 다퉁에 도착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중국 내몽골 변방 도시 ‘엘렌하오터’

■ 중국 입국의 복잡한 행정절차 중국 최변방 고비사막 국경도시 ‘엘렌하오터’에서 중국 통과를 위한 복잡한 행정절차를 마쳐야 한다. 중국은 외국인의 자동차 여행을 금지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경우 제한적으로 허가한다. 우리는 서울에서 출발 전에 중국 컨설팅회사와 접촉, 우리 자동차의 중국 입국 허가 절차를 미리 마쳤다. 중국 컨설팅회사를 통해 5개 중앙부처(총참모부, 공안, 해관총서, 외교부, 문화관광부)의 허가를 받아 놨다. 컨설팅회사를 통해 중국 자동차 번호판 발급, 자동차 등록, 자동차보험 가입 등 여러 절차를 마쳐야 한다. 중국은 ‘국제운전면허증’이 통용되지 않는 나라다. 컨설팅회사를 통해 중국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여행 준비 과정에서 국가 간 자동차의 자유로운 여행을 지원하는 ‘제네바국제조약’이 있고 우리는 ‘가입국’, 중국은 ‘미가입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중국은 외국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와 소수민족 인권 및 환경 문제 등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외국인의 자유로운 자동차 여행을 통제한다. 입국허가 당시 사전에 우리 차가 지나갈 코스를 중국 정부에 신고했다. 우리 차량이 신고 지역을 벗어나는지 감독하는 감독관 한 명이 내몽골 국경부터 탑승해 함께 여행해야 한다. 이 사람은 ‘류 선생’이라고 부른다. 다행히 조선족이라 의사소통이 자유롭다. 중국 영토를 벗어날 때까지 류 선생의 급여, 숙식비 등 제반 비용도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 입국허가, 운전면허증 발급 등 중국 입국 비용이 상상 이상으로 거액이다. 옛날 실크로드 상인이 오아시스를 통과할 때 통행세를 냈던 것처럼 중국에 통행세를 낸다고 생각하고 있다. 엘렌하오터에서 한국에서 자동차부품 ‘터보’를 가져온 조선족 박씨를 만났다. 이미 울란바토르에서 중고 부품을 교체했기 때문에 터보는 예비용으로 가져가기로 한다. 박씨의 ‘터보’ 부품 공수 여비를 우리가 부담한다. 중국 입국 다음 날 중국 세관에서 자동차를 찾아왔다. ‘자동차 번호판’, ‘운전면허증’도 나왔다. 이틀 동안 쉬면서 빨래도 하고 시내에서 발 마사지도 받는다. 컨설팅회사의 한 사장이 베이징에서 이곳으로 와 통관 업무를 대행해 줬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오랜만에 푸짐한 중국 요리와 바이주를 먹는다. 컨설팅회사 사장에게 “한국은 여러 명의 남자 중에 여자가 한 명 있으면 여자를 ‘홍일점’이라고 한다. 중국은 이런 상황에서 여성을 어떻게 부르나”라고 질문하자 ‘봉황’이라 한다고 했다. 사장은 오랫동안 외국인 자동차 여행 업무를 해 왔는데 여성 입국자는 내 아내가 처음이라고 말하며 아내에게 험난한 장거리 자동차 여행 참가에 존경한다고 말한다. ■ 공룡화석 보고 ‘고비사막’ 고비사막은 공룡화석의 보고다. 지금은 척박한 사막이지만 아마 2억~3억년 전에는 초목이 우거지고 많은 공룡이 살았던 지형으로 추정된다. 엘렌하오터 외곽의 ‘공룡 지질학박물관’은 1920년대 러시아 지질학자들이 공룡화석을 발굴했던 장소인데 중국이 대규모 야외 공룡 박물관을 만들었다. 수십마리의 공룡뼈가 뒤엉켜 있는 어마어마한 공룡화석 매장지와 공룡알 화석이 인상적이다. 변방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고비사막의 오지여서 평일 관람객은 필자와 아내뿐이다. 공룡에 관심이 많은 서울에 있는 어린 손자들이 생각난다. ■ 내몽골(중국)과 외몽골(몽골)의 차이점 몽골이 독립하기 전인 100년 전 ‘자민우드’와 ‘엘렌하오터’는 같은 몽골족 마을이다. 현재 두 지역은 국경 철책선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도시가 됐다. 중국 땅은 나무를 많이 심어 녹음이 울창하고 시내 도로가 6차선 뻥뻥 뚫리고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도시의 가로수, 공원의 나무는 고무 호스로 하루에 몇 번씩 물을 흠뻑 준다. 400㎞ 이상 멀리서 물을 끌어와 변방의 고비사막에 초현대식 오아시스 도시를 건설해 놓아 두 도시가 비교된다. 시내에서 대낮에도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가 자주 난다. 처음에는 폭탄 터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결혼식, 생일날, 개업일 등 번성하라는 의미로 밤낮으로 폭죽을 터뜨린다. 주민들은 우리나라 것보다 훨씬 큰 해바라기 씨앗을 잘도 까먹는다. 몇 사람만 있어도 목청이 크고 소란스럽다. 언어가 ‘사성 구조’여서 목소리가 크다고 한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 군대가 많은 당나라 군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아랍인들은 중국인 포로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처음 듣고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구글, 카카오톡, 네이버 등 외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가 서울에서 가져간 무전기 ‘워키토키’는 반경 5㎞까지 통신이 된다. 워키토키로 서로 간 연락을 하기로 했다. 간첩죄가 엄하게 적용된다는 소문에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SNS는 적게 사용할 생각이다. 중국 여행을 동행하는 감독관 류 선생은 지린성 출신 51세의 조선족 남자다. 류 감독관은 우리들 여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정부 당국에 보고한다고 한다. 류씨 앞에서 중국 정치 얘기, 시진핑 주석 얘기 등 예민한 것은 입도 벙긋하지 말아야 한다. 여행하면서 남의 감시를 받는것은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심리적 스트레스다. 아내는 중국의 심한 감시에 신경이 날카롭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을 통과하다

광대한 고원과 사막 ‘서두르면 라싸에 못 간다’ 몽골 느림의 지혜 느껴 사막의 대륙성기후 용감한 전사 만들어 고려말 침략∙약탈 아픔도 몽골의 마지막 밤 변방 자민우드서 숙박 곳곳에 한국 식당 눈길 ■ 몽골고원을 통과해 중국으로 향하다 우리 차는 몽골고원을 통해 중국으로 내려가고 있다. 몽골의 영토는 동서 2천500㎞, 남북 1천400㎞에 이르는 광대한 고원과 사막으로 이뤄져 있다. 몽골고원은 해발 고도 1천m에서 1천500m 사이 건조한 고원 지역이다. 영토는 넓은데 인구는 350만명 수준으로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다. 넓은 영토에 사는 사람에게 공간, 시간의 개념은 좁은 영토에 사는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광대한 사막에서 삶의 지혜는 느림, 기다림, 여유로움이다. ‘서두르면 라싸에 못 간다’는 티베트 속담이 있는데 광활한 대지에 살아가는 느림의 지혜다. 과거 초원과 사막의 유목민은 사계절 초지를 이동하며 살기 때문에 정주민 국가처럼 도시가 없다. 당연히 성곽이나 건물 등 역사적 유적도 없다. 연간 강수량이 20~50㎜이고 주로 여름철에 비가 오기 때문에 사막에 초지(草地)가 곳곳에 형성돼 있고 초원에는 유목민 ‘게르’ 천막이 자주 나타난다. 가끔 소나 말들이 도로를 무단횡단하기 때문에 속도를 늦추고 가축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현재 몽골은 지하자원 매장량이 매우 많다고 한다. 몽골의 자원을 탐사한 일본 기술자는 “몽골인들은 보석과 황금이 묻힌 땅 위에 오두막집을 짓고 산다”고 비유했다. 미래 잠재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다. 사막의 정중앙에 길게 뻗어 있는 길은 환상적인 자동차 드라이브 코스다. 거대한 평원, 나무 한 그루 없는 600여㎞ 먼 거리의 단조로운 광야의 경치를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 고비사막의 황량한 생태계 우리 차는 남쪽의 고비사막으로 들어선다. 몽골의 남쪽과 중국의 북쪽에 있는 고비사막은 동서 1천400㎞, 남북 800㎞의 광대한 사막이다. 몽골 말로 ‘고비’는 ‘사막’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면 ‘인생의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7월 중순 사막의 한낮 기온은 40도를 넘어서고 있다. 겨울은 영하 20~30도로 떨어진다고 한다. 대륙성기후 사막에서 살아가는 삶의 척박한 환경을 말해준다. 몇 년씩 비가 안 오고, 혹한이 엄습하고, 갑자기 질병이 돌아 살기 어려워지면 생존을 위한 주변국 침략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유목민 전사의 호전성, 잔혹성, 공격성은 척박한 환경과 생태계가 만든 것이다. 두세 살에 말을 타고 어린 시절부터 사냥과 전투를 치르면서 자연히 용감한 전사가 될 수밖에 없다. 고비사막은 지리적으로 비가 안 오는 곳이다. 우리 땅은 삼면이 바다이고 1년 내내 수시로 비가 내리고 해외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항구가 있어 사람 살기에 적합한 입지임에 감사함을 느낀다. ■ 대륙의 중심국과 주변국 한반도의 비애(悲哀) 역사의 발전에는 ‘중심국, 주변국, 중간의 ‘반(半)주변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역사상 아시아 대륙의 중심국은 항상 중국이다. 가끔 몽골고원을 통일한 ‘유목제국’이 중심국이 된다. 고대 중국은 유목민을 ‘북적(北狄), 서융(西戎)’ 등 의도적으로 야만인으로 비하하면서 두려움으로 고비사막 경계선에 만리장성을 쌓아 지켰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항상 강대국의 주변국으로 약소국의 비애를 겪으며 살아왔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도 새로운 대륙의 통일왕조가 생기면서 시작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은 몽골 침략(1231~1270년)이다. 당시 고려는 무신정권 시대였다. 무신정권 실권자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본토는 39년 동안 몽골 군대와 장기간 전쟁으로 전 국토가 유린됐다. 우리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중기 이전 대부분 목조 유적이 몽골의 약탈 또는 화재로 사라졌다. 현재 남아 있는 오래된 건물은 몽골 침략 이후 고려 말에 지어진 것이다. 다시 16세기 말 일본의 임진왜란으로 고려 후기 지어진 건물은 또다시 대부분 소실된다. 현재 남아 있는 목조 유적은 대체로 임란 후 숙종, 영조 때 건축된 것이다. 고려 무신정권이 몽골과 전쟁 중 강화도에서 만든 팔만대장경이 고려의 대표적 유적이다. ■ 고비사막 국경 도시 ‘자민우드’와 ‘엘렌하우터’ 모든 공항은 출국과 입국이 24시간 가능한데 육상 국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국은 오후 8시 이후 야간과 토요일, 일요일은 국경 개방을 안 한다. 부득이 몽골의 최남단 변방 자민우드에서 하룻밤 숙박하고 다음 날 일찍 중국 국경을 통과할 계획이다. 고비사막의 자민우드는 중국에 들어가는 화물차 기사들의 하루 숙박지다. 몽골 변방에도 한국 식당 등 한국 상호 가게들이 많다는 것에 놀란다. 다음 날 아침식사는 한국 상호 ‘카페베네’ 커피숍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해결하고 오전 9시 중국에 입국하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한다. 오전 내내 기다리며 중국 입국 수속을 마치니 낮 12시가 넘었다. 세 번째 국가인 중국에 들어오니 내심 안도감이 든다. 중국 국경 내몽골 고비사막에 엘렌하우터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엘렌하우터시는 고층아파트, 넓은 가로수, 시내 공원 등 사막 속의 녹색 오아시스 도시다. 수백㎞ 멀리서 물을 끌어오는 중국 정부의 투자 덕분이다. 반면 바로 인접한 몽골의 자민우드는 나무가 거의 없는 메마른 도시다. 가난한 몽골과 잘사는 중국의 풍요로움을 잠시 비교하게 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약소국 ‘몽골’의 근세 역사를 생각하며

오후 테를지국립공원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는데 행복한 뉴스가 전해져 일행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일행이 울란바토르 자동차정비소를 전부 뒤져 중고 부품 터보를 구해 고장난 터보를 교체했다고 한다. 모두가 부품 교체에 환호했다. 오늘 저녁식사는 테를지국립공원 근처 식당에서 몽골 전통 요리 ‘후르헉’ 요리를 먹는다. 후르헉 요리는 양 한 마리를 분해해 커다란 양철통 속에 넣고 불에 달궈진 700~800도 뜨거운 돌을 양철통 속에 계속 넣어 익힌 몽골 전통요리다. 자동차 수리 소식에 모두가 귀한 한국 소주를 마시며 “가자! 이스탄불”을 합창한다. 이제는 몽골고원과 고비사막 통과에 걱정이 없어졌다. 점심으로 삼겹살에 이어 저녁에 양고기 후르헉을 먹게 되니 배가 불러 귀하게 준비한 후르헉 요리를 거의 남겼다. 숙소는 울란바토르 시내에 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호텔이라 매우 깨끗하다. 오랜만에 밀린 빨래를 했다. 건조한 사막성기후라 속옷을 빨아 걸어 놓으면 금세 마른다. ■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는 몽골고원의 분지로 해발 1천300m 이상에 있는 도시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란 뜻이다. 1911년 청나라 멸망 후 몽골은 왕국으로 독립했다. 1919~1920년 중국 군대가 침략했다. 수흐바타르 장군이 러시아군 도움으로 중국 군대를 격퇴했다. 붉은 영웅 수흐바타르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도시 이름을 울란바토르로 바꿨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한자 우매할 ‘몽(蒙)’을 사용해 야만인으로 비하하는 ‘몽고(蒙古)’로 부르는데 몽골인들은 이 호칭에 자존심이 상한다고 한다. 몽골공화국과 우리가 1990년 국교 수립 후 우리나라에 국호를 ‘몽골’로 표기해 달라고 외교적으로 부탁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 한국 브랜드 편의점, 커피숍 등이 매우 많다. 몽골 국민 가운데 한국을 다녀간 사람이 매우 많아 한국 브랜드의 가게가 잘된다고 한다. 몽골인의 꿈은 한국에 가는 것인데 한국 입국비자 받기가 매우 힘들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생아의 70%가 엉덩이에 ‘몽고반점’을 갖고 태어난다. 몽골인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낀다. 유전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실제로 우리 민족과 가장 닮은 종족은 만주 여진족, 일본인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 몽골의 티베트불교 역사 아침 일찍 울란바토르 시내 중심부를 통과해 고비사막 방향으로 향한다. 오늘은 몽골 남쪽 고비사막 국경도시 자민우드까지 약 680㎞를 가야 한다. 일정이 빡빡해 티베트불교 사찰인 ‘간단 사원’ 지붕을 멀리서 보며 지나간다. 몽골고원 초원을 가는 도중 마을에서 많은 티베트불교 사원을 자주 보게 된다. 몽골이 16세기 티베트불교 도입 후 몽골 주민 대다수는 티베트불교 신자다. 안내를 맡은 앙케 양에게 언제 절에 가는지 물어보니 음력 설날, 경조사 등 특별한 날에만 간다고 한다. 우리에게 대승불교는 익숙하지만 티베트불교는 낯설다. 1571년 몽골의 왕(알탄 칸)이 당시 활불(活佛)로 소문났던 티베트 라싸의 승려 소남 갸초를 몽골로 초청하고 달라이라마 명칭을 하사했다. ‘달라이’는 ‘바다’라는 뜻으로 달라이 라마는 ‘지혜의 바다’, ‘전 세계의 스승’이라는 의미다. 티베트불교는 환생과 윤회를 믿음으로 한다. 현재 인도에 망명한 티베트불교 수장은 14대 달라이라마다. 현재 몽골공화국 영토는 과거 몽골제국의 영토에서 북쪽의 초원지대인 바이칼호 주변 초원은 17세기 러시아에 빼앗기고 남쪽의 내몽골 스텝 초원은 중국에 빼앗겼다. 과거 몽골제국의 3분의 1로 줄어든 가장 척박한 ‘외몽골’ 사막지대가 현재 몽골이다. 근세 몽골은 러시아의 위성국가로 있다가 1991년 소련 해체 후 독립국이 됐다. ■ 몽골고원, 고비사막의 광야를 달린다 한가롭게 몽골고원의 단조로운 초원을 보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몽골 사람은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하다. 과거 초원에서 외롭게 혼자 살다가 오랜만에 친구나 손님을 만나면 독한 술을 밤새워 마신다고 한다. 오늘 사막의 일기예보를 찾아보니 가시거리가 무한대로 나온다. 몽골 사람의 평균 시력이 3.0이고 최고 좋은 사람의 시력은 5.0이라는 말이 있다. 고비사막의 넓은 광야는 야성미와 장엄미의 멋진 조합이다. 수백㎞의 단조로운 초원과 사막을 지나가고 있다. 내려놓음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평안한 마음이다. “배움의 추구는 날로 더해가는 것이고 도(道)의 추구는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무위(無爲)에 이르게 된다.” 경계선이 없는 끝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2500년 전 중국 노자의 말이 불현듯 가슴에 와닿는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기마 유목민·칭기즈칸 고향 ‘몽골고원’

■ 몽골 스텝 지대의 호전적 기마 유목민 영국의 세계적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역사를 두 가지 특징으로 표현했다. ‘유목민과 정주민의 전쟁’, ‘자기가 믿는 신이 최고라는 종교와 종교의 전쟁’이다. 세계 역사를 흔들었던 기마 유목민의 고향은 몽골고원 서쪽 오논강과 외팅겐 지역이다. 다르항 근처에 몽골족들이 신성시하는 오논강과 외팅겐산이 있다. 오논강 근처는 과거 돌궐족의 수도였고 칭기즈칸 출생지와 초기 몽골제국 수도였던 카라코람이 있다.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정복한 종족은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이다. 이들은 몽골고원을 통일한 다음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지역, 카스피해 북쪽 초원을 정복해 대제국을 일궜다. 남쪽으로 중국을 수시로 침략해 만리장성을 축성하게 했다. 만주 지방 고구려 전신인 부여를 멸망시킨 것도 흉노족이다. 유목민은 큰아들이 결혼하면 분봉해 멀리 떠나보낸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와 가장 늦게까지 산다. 부친의 후계자를 정하는 관습은 부모와 가장 늦게까지 생활하는 막내아들이 상속받는다. ‘옷치킨 제도’라고 부르는데 ‘화로’를 끝까지 함께한 막내가 상속권을 갖는다. 막내는 부친이 죽으면 남아 있는 부친의 개인재산, 남은 병력을 상속받는다. 친어머니만 제외하고 아들들은 죽은 아버지의 살아있는 부인, 죽은 형제의 배우자도 상속받는다. 한나라 시대 흉노 왕에게 시집간 중국의 4대 미녀 왕소군도 남편인 흉노 왕이 죽은 다음 전처 아들과 다시 결혼해 자녀를 둔 비극의 여인이다. 한나라 왕실에서 편히 살았던 왕소군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말한 환경이 이해된다. 복잡한 결혼동맹과 막내 상속제도는 왕의 사망 후 형제들. 씨족 간의 권력 다툼이 많이 발생하는 구조다. 몽골초원은 전쟁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호전적 사회구조다. ■ 테를지국립공원 오후 한가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테를지국립공원으로 향한다. 거리에 인파가 매우 많다. 동행하는 앙케씨(장지사장 비서)에게 이유를 물어 보니 몽골의 국가 축제인 나담축제가 어제 끝났다고 한다. 축제 기간 6일이 국경일이라고 한다. 나담축제 기간에 몽골인들은 대부분 휴가를 간다. 휴가는 가족 모두가 초원에 가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오는 게 일반적인 형태라고 한다. 우리가 바닷가, 산으로 휴가를 가는데 몽골 도시인들은 초원으로 휴가를 간다. 나담축제 관광객을 위한 노점상들이 도로 옆에 매우 많다. 테를지국립공원은 독특한 바위 지역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관광객 숙박을 위한 게르(천막), 리조트, 카페 등 완전 난(亂)개발이다. 10년 전 여름 테를지국립공원에 별을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당시 한적한 국립공원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지역이 관광객 유치를 위한 난개발 상태다. 우리 일행도 전망 좋은 카페에서 휴식을 취한다. 한국에서 나담축제를 보러 온 관광객을 카페에서 많이 만난다. 도로 사정은 안 좋고, 소득 증가로 자동차가 빠르게 증가하다 보니 울란바토르뿐만 아니라 외곽 지역도 교통체증이 심하다. 몽골인들의 운전 습관은 매우 험하다. 아무 데나 말 타고 다니던 습관이 자동차 운전에도 나타난다고 한다. 동행하는 몽골인에게 자동차 면허시험을 어떻게 보는지 물어봤다. 시험을 안 보고 돈 주고 면허증 사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광대한 초원에 흩어져 사는 사람이 대도시 자동차학원에 등록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현실은 이해가 간다. 후진국이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합리한 사회 현상의 하나다. ■ 몽골의 영웅 칭기즈칸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100만명을 죽이면 황제나 영웅이 된다”는 말이 있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호전적으로 유명하다. 국립공원 가는 길에 있는 칭기즈칸기념관에 들렀다. 기마상 높이는 40m로 미국 자유의 여신상처럼 머리 쪽으로 사람이 걸어 올라갈 수 있다. 말 머리 방향은 칭기즈칸의 고향 오논강을 향하고 있다. 머리 쪽에 사진 찍는 전망대가 있어 사람이 많이 밀린다. 지하 1층은 몽골제국의 칭기즈칸 후손들 초상화, 전쟁 무기 등이 전시돼 있다. 칭기즈칸은 1206년 몽골의 대칸(황제)에 올랐다. 이 동상은 몽골 건국 800주년이 되는 2006년 건립이 시작됐다. 전설에 의하면 칭기즈칸이 전쟁 중에 이곳에 떨어진 말 채찍을 주우려 허리를 숙였는데 그 사이 적군이 쏜 화살이 스쳐 지나가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가 있다. 13세기 몽골제국 전성기 정복한 유럽과 아시아 대륙 영토지도가 벽에 있다. 13, 14세기 약 100년은 팍스 몽골리카 시대다. 유라시아의 광대한 초원에 평화가 찾아오고 무역과 교역이 발달했던 시대다. 한 번이라도 자랑스러운 위대한 역사가 있는 국민은 자부심이 크다. 칭기즈칸 리더십 서적이 한때 크게 유행했었다. 칭기즈칸은 혈족과 부족에 충성하는 유목민 사회에서 능력과 실력으로 사람을 대우했다. 칭기즈칸 초창기 친구인 4명의 맹우에 노예 출신도 있다. 노예 출신 등용은 몽골고원 평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게 된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종전에는 각자 장군이 나누고, 일부만 상납하는 게 당시 관행이다. 칭기즈칸은 모든 전리품을 전체로 총괄해 모은 다음, 전공에 따라 전리품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 병사들이 씨족, 부족에 충성하지 아니하고, 칭기즈칸 개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꾸었다. 몽골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있던 1991년 이전까지 공산당은 칭기즈칸을 ‘인민의 착취자’로 낙인찍어 비판의 대상이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몽골은 국민 통합을 위해 영웅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대적 필요가 인민의 착취자에서 국가의 최고 영웅으로 돌변한 것이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은 죽은 지 수백년이 지난 후 영국의 넬슨 제독, 일본의 도고 제독의 평가로 유명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 성역화 등 재조명으로 국민 영웅으로 다시 탄생했다. 위대한 영웅도 후세가 업적을 제대로 평가해 줘야 영웅이 된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의 유명한 말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바이칼호에서 몽골고원으로

바이칼호에서 달콤한 짧은 휴식을 보내고 우리는 몽골고원으로 내려간다. 지난해 7월 초 한여름 서울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 스코보로디노, 바이칼호 등 고(高)위도 ‘한대 지방’을 통과해 달려왔다. 이제는 중국의 시안까지 직선으로 약 3천㎞를 내려갈 계획이다. 한대기후에서 스텝기후, 반사막기후, 사막기후, 온대기후 등 며칠 동안 많은 기후 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러시아 ‘울란우데’에서 몽골 국경 도시 ‘다르항’으로 가야 한다. ■ 극동 시베리아 중심 도시 울란우데 화창한 햇볕을 맞으며 오전 8시 바이칼호 숙소를 힘차게 출발한다. 어제 오후 정비소에 맡겨 놓은 일행의 자동차를 찾기 위해 ‘울란우데’ 정비소로 향한다. 서울에서 140㎞ 떨어진 정비소라면 무척 먼 거리라 생각하지만 광대한 대륙성 분위기에 적응한 우리는 가까운 거리로 생각한다. 정비소 기사는 구멍 난 ‘터보’ 주위를 감싸 임시로 이동할 수 있도록 고쳤다고 한다. 어제 일행은 경기도에 사는 한 동생에게 전화해 새 부품 ‘터보’를 구입, 4일 후 중국 내몽골 국경 도시 ‘엘렌하오터’로 가져오도록 연락했다. 우리 차가 몽골고원을 제대로 통과하는 것이 당면 목표다. 중국 내몽골 국경에서 서울에서 가져온 새 ‘터보’로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할 계획이다. 몽골로 출발 전 울란우데 시청 앞에 있는 레닌 동상을 구경하기 위해 시내로 향한다. 레닌이 1924년 사망 후 후계자 스탈린은 레닌 우상화를 위해 소련 내에 수만개의 레닌 동상을 설치했다고 한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개방 분위기에서 대부분의 레닌 동상은 철거됐다. 울란우데 시청 앞에 설치된 레닌의 머리동상은 1991년 철거를 계획했다가 당시 철거비가 너무 많이 들어 포기했는데 지금은 울란우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역사의 재미있는 반전이다. 레닌 시신은 모스크바 붉은광장 레닌묘에 ‘미라’로 만들어 안치돼 있다. 울란우데부터 동쪽의 태평양, 사할린섬까지의 영토를 ‘극동 러시아’로 부른다. 극동 러시아의 인구는 겨우 800만명이다. 매년 인구가 줄어들어 영토 관리에 위기를 느끼는 지역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연해주 지역은 19세기 중반 청나라로부터 강탈한 영토이고 사할린 남쪽의 섬들은 일본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 후 빼앗은 영토다. 모스크바로부터 거리가 멀고 인구가 줄어들면 미래 이 지역은 지정학적 분쟁지역으로 발전할 수 있다. ■ 몽골고원의 스텝 지대 울란우데에서 남쪽으로 넓은 초지로 조성된 지리학상 ‘스텝’ 지대다. 이곳 스텝 지역을 중심으로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셀렝게강’이 바이칼호로 흘러 들어간다. 지리학에서 스텝 지역은 나무는 띄엄띄엄 자라고 초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남쪽 몽골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양, 말, 소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목가적 풍경을 보면서 자동차 여행의 지루함을 잊고 있다. 러시아의 남쪽 국경 세관이 있는 국경 도시 ‘캬흐타’까지 260㎞를 달려야 한다. 캬흐타는 1727년 중국과 러시아 간 국경을 확정한 ‘캬흐타조약’을 체결한 지역인데 오늘 통과한다. 오늘 러시아 남쪽 변방의 세관에 출국 신고를 하고 몽골공화국의 세관에 입국 신고를 해야 한다. 세관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내심 걱정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시베리아 대평원은 추운 한대기후지만 북극해로부터 실려 온 수증기로 인해 여름은 비가 자주 오고 겨울은 눈이 많이 내린다. 강수량이 충분해 산림지대와 초원지대가 형성돼 사람이 거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북극해로부터 멀리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몽골고원의 남쪽 지역은 비가 적게 오는 반사막, 사막기후로 변하고 있다. 바다는 수억년 전 생명 탄생의 고향인데 지금도 수증기를 증발시켜 육지에 비를 내려 인간 생활에 가장 큰 도움을 준다. 우리처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영토는 신의 축복을 받은 지역이라는 감사한 생각이 든다. 1년 중 7, 8월은 사막에도 비가 오는 우기(雨期)여서 몽골고원 초원은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고려청자의 비취색을 닮은 하늘, 연초록색 초원, 지평선 멀리 야트막한 구릉, 하얀 뭉게구름 등 대자연의 아름다운 조화가 여행의 피로를 날려 보낸다. ■ 러시아, 몽골 ‘육상국경’ 통과하기 2주일 전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의 해관(海官)으로 입국했는데 오늘은 러시아 남쪽에 설치된 육상국경을 통과해야 한다. 군대 초소, 경찰 초소와 출입국 기관, 세관 등 많은 정부 기관의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번 자동차 여행에 육상국경을 여덟 번 통과해야 하는데 오늘이 첫 번째다. 가장 먼저 국경으로부터 30여㎞ 후방의 군부대 검문소에서 여권을 검사한다. 군대 초소 앞에 앉아 무한정 기다린다. 40여분을 기다리니 통과하라고 여권을 돌려준다. 군대 초소를 통과해 수십㎞ 달려가니 경찰 초소 검문소를 만난다. 이후 캬흐타에 있는 세관에 도착한다. 우리는 자동차가 무사히 빨리 통관하는 것이 관심사다. 세관 직원들이 자동차가 러시아 입국 당시 신고 서류와 출국 차량이 동일한지 조사한다. 이러한 자동차 확인 과정에 무척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자동차 여행이 만만치 않음을 국경에서 다시 한번 체험한다. 관세법상 자동차는 ‘휴대전화’로 분류된다. 처음 출국할 때 가져온 차를 중간에 팔거나 다른 차로 바꾸면 안 된다. 사고가 나 폐차하게 되면 해당 국가의 ‘폐차 확인서’를 발급받아 서울에 가져가야 한다. 몽골 국경에서 자동차 입국 신고, 차량 검사에 1시간이 걸렸다. 두 나라 국경 통과에 4시간이 걸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오후 9시다. 국경에서 숙소인 몽골 도시 ‘다르항’까지 160㎞를 달려야 한다. 캄캄한 밤중에 갈 길은 먼데 몽골의 도로 형편은 시베리아 못지않게 구멍이 파인 포트홀이 많고 편도 1차선 좁은 도로다. 화물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여서 속도 내기도 어렵다. 문제는 일행의 차가 수리했음에도 언덕길은 잘 못 가고 평지나 내리막길에는 80㎞로 달려가는 수준이다. 일행의 차는 임시방편 운행을 하고 있다. 향후 1천㎞ 이상 몽골고원을 어떻게 통과할지 걱정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바이칼호, 샤머니즘 전설∙춘원 소설 ‘유정’ 배경

■ 한민족 정신세계의 시원(始原) 먼 옛날 한민족은 서쪽에서 출발해 시베리아 초원, 몽골고원을 통과하고 만주 평야를 지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로 이동했을 것이다. 수천, 수만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된 민족 이동은 늦게 온 민족은 서쪽의 발달된 선진문명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일찍 정착한 후진 주민과의 투쟁, 지배, 화합 과정을 거쳐 한민족을 형성하고 한민족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민족의 형성 과정에서 많은 전설과 설화는 구전으로 전해졌다. 한민족의 시원(始原)은 어디인가, 한민족의 공통된 정신세계는 무엇인가. 궁금한 질문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한민족의 원시적 사상은 유목민에게서 전수된 ‘텡그리신’과 샤머니즘 무속신앙이다. 과거 천신, 하느님은 같은 의미다. 하늘에 있는 ‘하느님’은 우주의 질서를 지배하는 절대적 ‘초월신’, 윤리와 도덕을 상징하는 ‘인격신’ 등 복합적 의미로 우리의 정신세계 기저를 이루고 있다. 샤머니즘은 모든 생명체, 무생명체, 죽은 조상 등 모든 곳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이다. 고대사회에서 ‘하늘, 하느님’을 비롯해 영혼과 소통하는 역할은 샤먼(무당)이 담당한다. 유목사회의 칸, 중국의 황제는 하느님의 아들, 천자(天子)로 호칭하면서 백성들에게 정치적 통치권 위임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하느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의 특권이고 하느님의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는 사상은 공자의 유학을 통해 동양의 통치 이념으로 발전했다. ‘하늘이 노한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하늘의 명령, 하늘이 복을 내린다, 지성이면 하늘이 감동한다’ 등은 고대 원시 신앙인 텡그리신, 천신 사상과 관련이 있다. 우리 애국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의 하느님도 여러 의미의 혼합이다. 샤먼(무당)은 하늘, 하느님, 죽은 혼령 등 많은 영적 존재와 소통한다. 샤먼은 영적 존재와의 소통 능력을 지닌 중간자로서 민중의 점성술, 복을 빌고, 질병의 치유, 미래의 예측 등 고대사회뿐 아니라 현재도 실질적 역할을 하고 있다. 시베리아와 바이칼호는 한민족 샤먼의 전설과 설화의 시원이다. ■ 한국인에 친숙한 바이칼호 시베리아 중심부에 있는 바이칼호는 한국 사람들에게 두 가지 이유로 익숙한 곳이다. 첫 번째 이유는 먼 옛날 한민족이 바이칼호 주변 시베리아 평원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민족이동 학설’이다. 당시 함께 이동한 무속인 샤먼(무당)의 영적인 성지가 알혼섬 외곽의 절벽 돌산 밑에 있는 작은 동굴이라고 한다. 세계 무속인 행사가 주기적으로 열리고 우리나라 무속신앙 연구자 등 많은 사람이 이 지역을 찾는다. 필자도 4년 전 추운 겨울철 이곳을 가봤다. 무속인 성지는 바이칼호 내부의 섬인 알혼섬에 위치한 작은 돌산인데 부랴트 몽골인들이 매우 신성한 지역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시베리아, 몽골고원을 비롯한 유목민의 옛날 전통 신앙은 ‘텡그리신’, 이곳은 무당들이 영적인 기를 받는 기가 매우 센 지역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하나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배경이 바이칼호다. 소설 유정은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돼 당시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4년 전 추운 겨울 바이칼호에 가게 된 배경도 50여년 전 학창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춘원의 소설 유정의 배경을 보기 위함이다. 유정의 내용은 삼각관계 러브스토리다. 1933년 당시 조선일보 독자들에게 매우 생소한 시베리아 바이칼호로 주인공 최석이 도피하고 바이칼호에서 사망하는 소설이다. 50대 이상 연령층은 소설 또는 영화로 ‘유정’을 기억하고 있다. 춘원 선생이 왜 바이칼호를 소설의 엔딩 배경으로 삼았는지 내용을 소개한다. 춘원 선생은 1892년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최고의 인기 소설가다. 191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신한일보’ 주필로 내정돼 시베리아 철도편으로 미국으로 가는 중간에 바이칼호를 간 것으로 추정된다. LA로 가기 위해 서울에서 출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탑승해 러시아 모스크바를 거쳐 배편으로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 미 대륙을 기차로 횡단해 LA로 가는 여정의 계획을 세웠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코스이지만 1914년은 이렇게 미국으로 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춘원은 시베리아의 ‘치타’(자동차 고장 정비를 위해 들렀던 도시)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고 한다. 치타에 머물고 있을 때 아마 바이칼호를 관광했을 것이고 바이칼호에 대한 강한 인상으로 19년 후 연재소설의 배경을 바이칼호로 설정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춘원 선생은 치타에 머물다 여비 부족으로 귀국했다. 나이 든 사람은 기억하는 고인이 된 여배우 남정임씨는 1966년 개봉된 영화 유정이 데뷔작이다. 남씨는 영화 유정으로 은막의 스타가 됐고 예명을 ‘남정임’으로 정한 것도 소설 유정의 여주인공 남정임 이름을 따온 것이다. 4년 전 겨울철인 2월, 얼음으로 덮인 바이칼호와 알혼섬 주변을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얼음 두께가 1m 이상 얼면 차량 통행을 허용한다고 했다. 당시 아침 기온 영하 30~40도, 해가 뜨는 낮 기온은 영하 20도의 추위인데 겨울옷을 많이 껴입고 여행했던 기억이 새롭다. 알혼섬 민박집에서 며칠 숙박하면서 북반구 겨울 하늘의 총총한 별을 봤던 감동이 진하게 남아 있다. ■ 행운의 여신이여! 남은 구간도 도와주소서 오전 6시 일어나 보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바이칼호 백사장을 여유롭게 산책한다. 바이칼호의 공기는 달고 가볍다. 산소가 많은 태곳적 청정지역이기 때문이다. 호숫가에는 백사장도 펼쳐져 있고 맑은 물속에 검은 몽돌이 많이 있다.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러시아인도 있는데 여름철 수영하러 놀러 온 것 같다. 몽골계 민박집 여주인이 아침식사에 본인이 키우는 젖소에서 금방 짜왔다는 따듯한 생우유를 가져와 맛있게 먹었다. 러시아인 남편과 함께 민박집을 운영하는데 팔려고 내놨다고 한다. 오늘은 절기상 7월15일 서울 기준 초복(初伏)이다. 서울은 무더위로 고생하는데 이곳은 가을 날씨처럼 선선해 저녁은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 낮 기온은 피서하기에 매우 쾌적하다. 처음 만나 서먹서먹하던 일행의 성격도 알게 돼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불규칙적인 식사, 지방질 많은 음식, 소화불량, 설사로 여러 명이 고생하고 있다. 내일부터 몽골고원과 고비사막을 통해 중국의 내몽골 국경으로 가야 한다. 앞으로 순탄한 여행의 흐름을 타면서 남은 구간을 안전하게 완주하고 싶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중간 목적지 ‘바이칼 호수’에 도착했다

숙박한 ‘사강 달리’의 7월14일 아침 기온은 13도로 상쾌하다. 위도가 높은 지역이라 7월 중순의 날씨는 우리의 5월처럼 기분 좋은 날씨다. 간단한 아침식사 후 시베리아의 다음 목적지 바이칼호를 향해 출발한다. 바이칼호에 도착하면 시베리아 대평원을 3천900㎞ 달려온 셈이다. 도로 상태도 매우 열악한 편도 1차선 노면이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왔다. 수시로 느리게 가는 화물차를 중앙선을 넘어 추월하는 위험한 곡예운전을 했다. 고장난 O사장, L실장 차를 수리해야 한다. 먼저 바이칼호 근처 3천900㎞ 떨어진 ‘울란우데’ 정비소를 예약했다. 울란우데는 러시아 부랴트공화국의 수도(인구 43만명)로 이곳에서 가장 큰 도시다. 일요일인데 출발 전 전화해 보니 울란우데 1급 정비소가 일요일에도 정상 영업을 한다고 한다. 우리도 과거 소득이 적을 때 주중 주말 구분 없이 일했던 경험이 생각난다. 울란우데 정비소에 구멍 난 터보 수리에 대해 전화로 예약했다. 터보가 고장 난 O사장 차는 제 속도를 못 내고 간신히 시속 80㎞ 저속으로 운행 중이다. 이 지역은 몽골족 일파인 부랴트족이 목축업을 하던 북부지역 몽골초원이다. 현재 몽골족이 30~40%이며 나머지는 러시아인이다. 부랴트 몽골족은 러시아에 완전 동화돼 몽골어를 잊어 버렸다. 1727년 청나라와 러시아가 바이칼호 주변 시베리아 지역의 몽골족 거주지를 러시아에 넘겨주는 국경조약(카흐타 조약) 체결 이후 300년 동안 러시아 지배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현재 몽골족의 독립 시도, 인종 갈등, 몽골 통합 등 소수민족 문제가 없는 지역이다. ■ 원시적 초원에서 피정(避靜)의 드라이브 시베리아 산림을 벗어나고 있다. 아름다운 목초밭, 초지가 멀리까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연두색 초원, 몇 조각 하얀 구름, 새파란 하늘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차창 밖 사진을 찍다가 사진으로 전체 풍경과 분위기를 담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포기한다. 그 대신 벅찬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로 한다.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초원에는 ‘모기, 등에, 파리, 벌, 독성이 있는 곤충’ 등 우글거려 들어가면 큰 사고를 당한다. 며칠 전 사진 찍으러 갔다가 물린 곳이 아직도 가려워 고생하고 있다. 목축업을 하는 농가가 초원에 자주 나타난다. 목재로 지은 주택이 많은데 규모가 작고 무척 낡아 보인다. 겨울철 추위와 난방비 절약을 위해 작은 집에 사는 것이다. 모든 목재 집의 지붕 중앙에 굴뚝이 한 개씩 설치돼 있다. ‘게르’ 중앙에 설치된 굴뚝처럼 바닥에는 음식 조리와 난방을 겸하는 화덕이 있을 것이다. 집집마다 마당에 나무 울타리로 겨울철 가축을 가둬 두는 우리가 설치돼 있다. 우리 크기를 보면 가축 수의 많고 적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봄여름 방목이 끝나면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건초를 먹이면서 가축을 키우는 장소다. 초라한 목조가옥은 서부영화에 나오는 퇴색한 시골 풍경과 무척 닮았다. 러시아는 평원과 초원을 이동하며 생활하는 유목민을 정착시키기 위해 제정러시아부터 소련까지 오랫동안 공권력을 투입했다. 유목민들은 정착 생활에 익숙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크게 저항했다고 한다. 러시아 정부의 정착 유도 의도는 정착민들은 통제하기 쉽고, 세금 징수에 편하고, 반란이 발생했을 때 진압이 쉽기 때문이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넓은 초원에 흩어져 살던 카자흐 유목민은 정부의 강제적인 정착 유도에 크게 저항했다. ‘카자흐’ 뜻은 ‘자유인, 방랑자’라는 뜻이다. 카자흐인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반강제로 정착 생활로 추진하는 데 많은 유혈 사태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카자흐스탄 사람 중 여름에는 초원에 가서 유르트(게르)에서 사는 사람이 많다. ■ ‘요수소’ 사태와 울란우데 자동차정비소 여행도 리듬을 타야 하는데 자동차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겨 여행의 흐름이 끊어진다. 우리가 탄 차의 요수소가 비어 간다고 빨간 경고신호가 계기판에 들어왔는데 오전 내내 요수소 가게를 못 찾고 있다. 급기야 중간에 요수소를 못 구한 채 요수소가 바닥 나고 차가 도로에 멈춰 섰다. 선두 차 가이드 H씨와 윤군이 함께 요소수 가게를 찾아 앞으로 무작정 달려간다. 이곳은 인터넷 연결이 안 되는 지역이다. 요수소를 사러 간 동료와 연락이 안 되니 답답하다. 두 시간 동안 시베리아 평원의 길가에 앉아 요수소를 못 구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80㎞를 달려 요수소 가게를 찾았다. 두 시간을 길에서 허비한 후 자동차에 요수소를 보충하고 출발한다. 울란우데로 운전해 가는 도로 위에서 러시아 표준시간이 한 시간 늦춰져 시계를 풀어 다시 시침을 조정한다. 우리는 서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오늘도 낮 시간을 한 시간이나 번 셈이다. 러시아는 광대한 나라로 표준시가 9개다. 우리는 이동 중에 표준시간을 세 번째 맞추고 있다. 오후 3시께 울란우데 정비소에 도착했다. 1급 정비소라 기대가 크다. 마침 직원이 몽골계다. 외모가 비슷한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다. 차를 맡겨 놓고 가라고 한다. 밤 사이 수리할 테니 내일 오전 9시에 찾으러 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O사장 차를 정비소에 맡겨 두고 나머지 두 대 차에 나눠 타고 바이칼호 숙소로 향한다. ■ 바이칼호 휴식 시베리아 코스의 중간 종착지, 바이칼호에 석양 무렵 도착했다. 울란우데 정비소에 자동차를 맡기고 바이칼호 숙소로 가는 도중에 슈퍼마켓에 들러 저녁식사 먹거리인 삼겹살, 러시아 술 보드카, 양파, 당근 등 식재료를 샀다. 길에서 노지 재배 딸기를 팔고 있다. 작고 볼품은 없지만 먹을 만하다. 저녁식사 후 디저트용으로 K회장이 노지 딸기 한 박스를 샀다. 숙소는 바이칼호 백사장 옆에 있는 3층짜리 민박 건물이다. 석양 무렵 바이칼호에 도착하자 모두 백사장으로 뛰어가면서 만세를 부른다. 모두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 아내는 잽싸게 양말을 벗고 호숫물에 발을 담그며 행복하게 환호한다. 바이칼호는 경상남북도 크기의 호수로 세계에서 제일 큰 민물 호수다. 아내와 4년 전 추운 2월에 눈 덮인 자작나무 숲과 얼어 붙은 바이칼호를 보러 왔던 추억이 생각난다. 당시 영하 30도의 혹독한 추위를 경험했는데 반대로 오늘은 날씨가 일 년 중 가장 좋은 7월 한여름에 바이칼호에 다시 온 것이다. 감회가 새롭다. 민박집 주인이 지하층 부엌을 저녁식사 요리에 사용하도록 빌려줬다. 유일한 여성인 아내, 나, L실장, 윤군 등 일행이 공동으로 삼겹살고추장구이를 준비했다. 주방용 칼이 매우 무뎌 고기 자르는 데 불편이 있었다. 반찬은 통조림 김치 한 가지다. 보드카와 삼겹살구이가 잘 어울린다. 필자가 러시아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윤군의 추천을 받아 보드카는 맛있는 것으로 세 병을 샀다. 지난 일주일 동안의 시베리아 대평원의 피로가 싹 가신다. 보드카 술잔을 들고 “가자! 이스탄불”, “고생 끝, 행복 시작” 여행의 완주와 안전을 염원하는 건배사를 합창한다. 옆자리에 식사하던 러시아 부부의 부인이 오늘 60회 생일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합석해 술도 함께 먹고 ‘해피 버스데이’ 생일 축하곡도 부르면서 즐거움을 나눈다. 밤중에 북반구 시베리아의 총총한 별을 보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보드카 술기운에 그냥 잠에 빠졌다. 바이칼호의 공기는 가볍고 매우 맛있다. 원시의 생명력이 넘치는 바이칼 호반의 숙소에서 행복한 꿈을 꿨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사강달리, 전투적 여행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지대 한 폭 그림 같아 서쪽 하늘엔 타오를 듯한 붉은 노을 러시아 민요 흥얼거리며 땅거미를 기다리는 시간 자욱하던 토탄 연기도 사라지고 아름다운 수목, 초원, 하늘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오늘은 670㎞ 떨어진 ‘사강달리’에 도착해야 한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므로 평소보다 일찍 출발한다. 자작나무, 소나무, 전나무 숲속을 달리는 구간은 적어지고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차창 밖의 멋진 초원의 야생화를 보면서 달리는 드라이브는 최고다. 위도가 북위 52도로 약간 남서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고위도 지역이라 늦게 핀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다. 시베리아 대평원 고위도 지방의 야생화는 대체로 단색이고 옅은 색상이다. 한국 봄날의 화려하고 진한 원색의 야생화는 보기 어렵다. 산들바람이 초원을 스쳐 지나가고 하얀 뭉게구름, 솜털구름이 멀리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며 떠 있다. 며칠 만에 보는 한가한 목가적인 전원풍경이다. 서쪽으로 달리면서 소나기가 가끔 뿌리며 지나간다. 소나기 다음에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나타난다. 자동차는 연초록색 물결의 평화로운 바다를 달리고 있다. 우리는 현재 자동차 ‘노마드족’이다. 특정 목적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즐긴다. 고요함, 침묵, 자유, 목가적, 광활함, 평화로움, 한가로움, 멈춤, 느림, 여유, 단순함, 원시적, 모성적 대지, 어머니의 품, 사랑, 대자연 등 평안한 단어를 생각하며 달린다. 단어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 무한한 상상력의 경계선을 넘나들 수 있다. 논어에 ‘심재(心齋)’라는 단어가 있다. ‘마음의 비움’을 심재라고 한다. 마음을 비우는 방법으로 공자는 제자 안회에게 말한다. “첫째, 귀로 듣는 것을 마음으로 듣는 것으로 바꾼다. 그다음 마음으로 듣는 것을 기(氣)로 듣는다.” 기는 한국과 중국 등 동양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로 생명력, 에너지, 원기 등 우주의 기본적 요소다. 시베리아 대평원의 기를 마음속에 받으며 달리고 있다. ■ 두 번째 심각한 자동차 고장 기쁨과 평안함의 시간은 오전까지였다. O사장의 차는 출고된 지 10년, 주행거리 20만㎞의 오래된 차다. 출발 전에 열악한 도로 사정을 감안해 바퀴 교체, 오일 교환, 엔진 출력 확장 등 많은 돈을 들여 수리한 차라고 한다.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러시아 극동군사령부가 있는 군사도시 ‘치타’에서 약 30㎞를 갔을 때 갑자기 O사장의 차가 엔진 출력이 떨어지고, 속도가 줄고, 검은 연기가 펑펑 나온다. 일행이 멈추고 자동차 전문가인 우리 차 카메이트 L실장이 보닛을 열고 살펴본다. 중요한 부품 ‘터보’에 미세한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 계속 달리면 차가 도로에 멈추는 상황이 생긴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치타’ 도시에 한국 기아차 딜러 회사와 정비소가 있다. 치타 정비소에 전화로 예약을 하고 30여㎞를 후퇴해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뒤돌아가는 일행 모두 불안한 상황이다. 정비사는 구멍 난 터보 부품을 새것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품을 서울에서 공급받으려면 2주일이 걸릴 것이다. L실장의 아이디어로 터보의 작은 구멍을 임시로 끈으로 동여매고 가기로 한다. 두 시간 이상을 치타 정비소에서 소비했다. 치타에서 숙소 ‘사강달리’까지 370㎞를 더 가야 한다. O사장 차는 평지나 내리막길은 정상 속도로, 오르막길은 시속 60~70㎞로 느리게 운전해 간다. 이번 여행을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혹시나 해서 가는 중간에 있는 구글로 정비소를 검색해 보고, 전화를 걸어보니 시골 도시 정비소 주인이 응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시골의 자동차 정비사를 만난 시간이 오후 9시다. 이 정비사도 방법이 없다고 한다. 최악의 경우 초반기 여행이 중단되는 비관적인 시나리오가 걱정된다. 터보 수리에 도움도 못 받고 정비소 두 곳을 찾아 헤매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정비소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석양의 찬란한 낙조(落照)가 시작됐다. 초원에서 방목하는 말들이 해질 무렵 주인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목가적이다. ■ 석양을 뒤따라가며 낙조를 즐긴다. 위도가 높은 지역이라 해가 완전히 지는 시간은 오후 10시쯤이다. 오후 9시 이후부터 서쪽 하늘에 화려한 낙조의 시작이다. 해가 떨어지는 대평원의 서쪽을 향해 자동차도 서쪽으로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우리는 서쪽으로 운전하면서 오후 10시까지 시베리아 대초원으로 해가 넘어가는 붉은 노을을 뒤따라가는 경험을 한다. 이동하면서 관찰하는 대평원의 장시간 낙조는 5분, 10분 짧은 시간에 해가 바다로 떨어지는 서해안 낙조와는 다른 체험이다. 자동차 고장으로 두 곳 정비소를 들르느라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쳤는데 그나마 아름다운 낙조를 한 시간여 감상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 성악 전공의 K교수님이 동화적, 몽환적 석양을 보면서 러시아 민요 ‘더 이브닝 벨(The Evening Bell)’ 노래를 무전기로 얘기한다. 유튜브에서 더 이브닝 벨 곡을 틀어들으며 가니 마음이 안정된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저녁 종소리 저녁 종소리/너희는 전해야 할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전했니/젊음과 집, 그리고 행복한 시간/내가 마지막 너희에게 들려주었던 노래/그 종소리 사라지고 행복했던 지난 날들.” K교수가 ‘검은 눈동자’ 등 여러 러시아 민요곡을 알려줘 유튜브에서 들으며 지루한 마음을 달랜다. 러시아 민요는 전반적으로 애절하며 차분해 우리의 정서와 비슷하다. 오후 11시 늦게 숙소에 도착했는데 최악의 여관이다. 방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별도로 없다. 여관 전체에 샤워실 겸 화장실이 복도에 한 개 있는데 공동 화장실이다. 아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못 들어가도록 복도에서 보초를 서야 한다. 화장실이 없는 사막에서 용무가 필요할 때 사용하려고 우산을 준비해 갔는데 시베리아 화장실 환경도 보통이 아니다. 일행 중 두세 명이 배탈이 나 화장실 출입이 잦은데 화장실 여건은 최악이다. 저녁 식사와 샤워를 하고 나니 오전 1시다. 오전과 오후는 낙관과 비관, 천당과 지옥 정반대의 시간을 보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시베리아 평원의 품속으로

토탄 불 연기로 자욱한 회색빛 하늘 ‘잠자는 땅’ 시베리아서 문명의 단절 느끼고 마음 평안 찾아 네르친스크 거쳐 우탄으로 서울을 출발한 지 10일째(7월12일)되는 날이다. 시베리아는 관광객이 없기 때문에 여관을 전업으로 하지 않는다. 숲속 길 옆 주유소에서 휴게소, 식당, 여관, 편의점 등을 한곳에서 하고 있다. 휴게소 주차장에는 화물차들이 밤을 보낸다. 오전 4시경이면 위도가 북쪽이라 훤하게 밝아지고 주차장에서 밤을 보낸 화물차들이 이른 출발을 위한 시동 거는 소리가 요란하다. 장거리 운전 화물차 기사는 휴게소에 200루블(3천원)을 주고 여관의 샤워실을 빌려 간단히 목욕한다. 화물차 기사는 휴게소 편의점에서 간단한 음식과 술 몇 병을 사 운전석에서 식사, 반주를 하면서 잠을 잔다. 출발하면서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 20ℓ를 넣고 출발한다. 도중에 큰 주유소를 만나면 품질 좋은 디젤을 가득 넣기로 하고. 이것이 오후 내내 우리 일행을 가슴 졸이게 만드는 큰 사건이 될 줄은 몰랐다. 자동차 앞 유리창은 피범벅으로 그냥 두고볼 수 없다. 운전 중 초원에 사는 나방, 곤충, 벌레들이 날아와 앞 유리창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카메이트 L실장은 매일 새벽마다 세척용 물비누를 사서 출발 전 자동차 앞 유리를 깔끔하게 닦는다. 그래도 한두 시간만 달리면 앞 유리가 벌레들의 핏자국으로 빨갛게 돼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 와일드 시베리아 생태계 영화 ‘와일드 아프리카’에 사자, 악어들의 약육강식 풍경이 자주 나온다. 토탄 산불로 휩싸인 시베리아는 정말로 와일드 시베리아의 야성미다. 새벽부터 토탄 불로 인한 연기와 매연이 자욱하다. 오늘 목적지 ‘우탄’까지 하늘을 덮고 있는 토탄 연기가 600여㎞를 갈 때까지 이어진다.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햇빛을 하루 종일 못 보고 있다. 유독한 연기로 인한 건강 위협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다. 어떤 곳은 지표면 토탄층 불로 나무가 죽어 가고 오래전 불이 난 지역에서는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토탄은 생성 역사가 짧은 석탄의 일종으로 열량이 낮아 화석연료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까지 약 800㎞에 걸쳐 토탄 연기로 덮여 있다. 정말로 광대한 땅이다. 활활 타는 불꽃은 없어 도로에 화물차 등은 계속 다닌다. 어디까지 ‘시베리아’인지 검색해 보니 우랄산맥 동쪽부터 태평양 오호츠크해까지 9천㎞를 지리학상 시베리아라고 부른다고 한다. 시베리아 지역을 한 단어로 간단히 정의할 수 없는 이유다. 원주민 언어로 시베리아 뜻은 ‘잠자는 땅’이라고 한다. 노상에서 시베리아 야생 딸기, 와일드 베리, 야생 꿀을 사고 싶은데 이런 험악한 상황은 장사는커녕 생명체가 살기도 쉽지 않다. 휴게소를 조금만 벗어나면 인터넷이 끊긴다. 위성항법시스템(GPS)이 안 되니 현재 있는 곳의 위치 정보, 즉 해발고도, 위도, 경도 등 현재 위치를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인터넷이 단절된 오지는 ‘시간이 직선으로 가지 않고 곡선으로 간다’. 문명과의 단절은 우리에게 시간의 느림, 멈춤을 느끼게 한다. 느림은 나그네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세상과의 단절이 주는 아름다운 고독이다. 시베리아 평원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강들이 자주 나타난다. 이곳의 모든 강은 겨울철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해로 흘러가기 때문에 인간의 경제활동에 도움이 안 된다. 이 강물이 남쪽의 몽골 지방으로 흐른다면 몽골은 매우 살기 좋은 비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간혹 강가에 낚시꾼이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이 손잡고 낚시하러 가는 평화스러운 모습을 본다. 낚시는 여름철 짧은 기간의 취미생활일 것이다. 단조로운 풍경이 주는 여유로움이다. 나의 귀여운 어린 손자들이 청소년이 되고, 함께 낚시하러 다니는 조손간에 다정한 관계와 평안한 노후의 시간을 보내는 그림을 상상해 본다. ■ 자동차 디젤 기름 찾아 삼만리 아침 출발할 때 중간에 점심을 먹으며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울 생각으로 출발했다. 수백 ㎞를 지나왔는데도 중간에 휴게소와 주유소가 없다. 점심으로 서울에서 가져온 과자 몇 개를 나눠 먹는다. 계기판에 주행거리가 50㎞ 남았다는 경고등이 켜진다. 모든 일행의 마음이 초조해진다. 시베리아 숲속에 고립된다는 게 무섭다. 기름이 거의 없어질 즈음 간신히 작은 주유소를 찾았다. 시골길을 돌고 돌아 2차 세계대전 때나 썼을 법한 초미니 주유소를 발견했다. 주유기 하나가 들판에 덜렁 서 있다. 전화를 하니 주유소 주인이 나타나 정말 어렵게 기름을 넣었다. 아내는 점심을 못 먹어 배고픈 것보다 기름이 없어 차가 멈추는 것이 더 무섭다고 말한다. 매일매일 긴급 상황이 한 가지씩 생긴다. 조용하게 지나가는 날이 없다. 그래도 인터넷이 연결되는 지역의 초미니 주유소를 찾은 것이다. 구글 맵 서비스가 없다면 오지의 여행은 참 힘들 것이다. ‘우탄’에 못 미쳐 ‘네르친스크’ 도시를 통과한다.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한 도시다. 17세기 중반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의 강대국, G2 국가는 청나라와 러시아다. 당시 아무르강에서 조선, 청나라 연합군과 러시아 군대 간에 두 차례 전쟁(나선정벌·1654, 1658년 조선 효종 때 청나라 요청으로 파병돼 러시아군과 벌인 싸움)을 치렀는데 전쟁을 중단하고 국경을 획정하기 위한 국제조약이다. 중국은 종주국으로, 주변 국가는 조공국 위치를 2천년 이상 유지해 왔기 때문에 대등한 국제조약을 맺은 적이 없는 나라다. 중국은 항상 ‘갑’의 위치에서 이민족과 불평등한 협상을 해왔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이 타국과 대등한 자격으로 맺은 최초의 국제조약으로 유명하다. 당시 조약문서는 ‘라틴어’로 썼다고 한다. 청나라는 선교차 와 있던 라틴어를 아는 예수회 신부를 데려갔고 러시아 측에도 라틴어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해가 늦게 지기 때문에 오전 9시 반에 도로 옆 위치한 여관 겸 휴게소에 도착했다. 토탄 연기를 뚫고 600㎞를 달려온 셈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니 오후 11시다. 서울서 가져온 고추장, 김치, 장아찌 등으로 식사를 맛있게 했다. 샤워 중에 여관의 전기가 나가고 물이 끊겨 생수를 가지고 이를 닦는 돌발 사태도 경험한다. 시베리아의 야생문화에 적응하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 불편한 침대지만 피곤함이 숙면을 가져온다. 하루 종일 ‘낭만적 여행’이 아닌 ‘전투적 여행’을 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스코보로디노

■ 야성미 넘치는 시베리아 대평원 북쪽 도시 ‘스코보로디노’로 올라 갈수록 활엽수인 자작나무는 적어지고 소나무, 가문비나무 등 침엽수림이 많아진다. 목적지인 북위 54도 스코보로디노로 향하고 있다. 북극해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하늘은 회색 구름이 많고 수시로 이슬비가 내린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고위도 지방으로 올라가고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침엽수림을 통과하며 하루 종일 비슷한 풍경을 계속 보면서 운전하고 있다. 시베리아 대평원의 경이로운 야성미, 압도적인 원시적 풍경이 우리를 자연인으로 만든다. “자연은 모든 아름다움의 으뜸이며 진실한 모성적 원천이다.” 독일의 헤르만 헤세는 자연을 이같이 예찬했다. 시베리아 대평원을 방랑하는 나그네처럼 달려가며 박목월 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 “방랑과 청춘과 사랑도 때가 있고 끝이 있습니다. 나의 나그네 길은 어디로 가나요?” 건너편 차선에서 마주 오는 러시아 트럭 기사들이 앞쪽에 교통경찰이 단속하고 있다고 서치라이트를 한두 번 깜박여 주며 달려간다. 선두 차를 운전하는 일행이 경찰과 눈을 맞추지 말라고 무전기로 연락해 준다. 러시아 경찰은 생트집 잡는 데 악명이 높다고 조언한다. 중간에 우리에게 반갑다고 인사하는 러시아인을 가끔 만난다. 점심에 휴게소에서 만난 트럭 기사는 한국 친구와 과거 일주일 동안 함께 오토바이 여행을 했다며 이름이 김은호라는 사람의 사진을 휴대폰에서 꺼내 보여준다. 도로 옆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을 때 어떤 러시아인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 3년 동안 일했다며 한국 사람 만나 반갑다고 한다. 헤어질 때 한국말로 ‘잘 가세요’ 인사를 한다. 작은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을 때마다 북새통이다. 일시에 8명이 주문을 하면 러시아 식당 종업원이 돈 계산을 못한다. 시베리아 휴게소 식당 여주인은 대부분 무뚝뚝하고 인상이 굳어 있다. 평생 시베리아 숲속에서 살아가는 단순한 삶일 것이다. 러시아어 통역을 위해 출발 전에 러시아어를 잘하는 대학생 윤군을 알바생으로 채용해 동행하고 있다. 동해항에서 출발해 목적지 이스탄불, 그리고 서울까지 전 구간을 함께한다. 윤군이 우리 일행의 식사 메뉴를 취합해 주문하고 식대를 루블화로 계산하는 절차가 매번 복잡하다.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제재로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되기 때문에 항상 현금 지불이 번거롭다. 휴게소에서 파는 소고기, 닭고기, 러시아 빵, 각종 러시아 음식은 이미 만들어져 진열돼 있다. 음식을 주문하면 종업원이 음식 한 개씩 전기레인지에 2, 3분 데워 팔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영어가 전혀 안 통하기 때문에 통역을 맡은 윤군은 식사 때가 가장 바쁘다. 우리가 지나갈 러시아, 몽골,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조지아 등 옛 소련권 국가는 러시아어가 통용되기 때문에 알바생으로 러시아어과 대학생을 두 달 고용해 함께 여행하고 있다. 시베리아 이동 중 가장 곤욕스러운 일은 불결한 화장실이다. 휴게실 부속 화장실은 20루블( 300원), 30루블, 40루블(원화 600원) 요금을 받는다. 쪼그리고 앉아 사용하는 재래식 변기는 우리의 40년 전 변기라 너무 불편하다. 화장실 물이 잘 안 나와 매우 지저분하고 휴지도 없어 화장실 갈 때마다 절차가 복잡하다. 외국 관광객이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을 칭찬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남자들은 도로변 산속에 적당히 해결할 수 있는데 아내는 휴게소 갈 때마다 매번 울상이다. 화장실에 돈 받는 사람은 대개 나이 든 할머니다. 화장실이 시베리아 노인 일자리 창출의 하나구나 생각하며 웃고 만다. 좋은 점은 나무와 목재 펄프가 많은 지역이라 식당이나 휴게소의 종이컵 인심은 후하다고 아내가 말해 모두 웃는다. ■ 불타는 시베리아 산림 점심 식사 후 스코보로디노 200㎞ 못 미쳐 간헐적으로 산불 연기가 대평원을 덮고 있다. 땅속에서 발생한 ‘토탄 불’ 때문에 나무가 말라 죽고 토탄에서 나오는 유독한 연기와 냄새가 숲을 가득 채우고 있다. 토탄은 석탄 중에서 역사가 가장 짧은 것으로 사람들이 연료로 사용하지 않는 초기 석탄의 일종이다. 유독성 냄새와 짙은 연기 때문에 야생 짐승이나 새들도 살기 어려울 것 같다. 토탄 불은 땅속의 광맥을 옮겨 다니며 불이 나기 때문에 진화가 안 된다고 한다. 겨울철 눈이 내리면 잠시 꺼진다고 한다. 눈이 쌓인 겨울은 땅속에 불씨로 남아 있다가 다음 해 여름철 건조해 되면 다시 불꽃이 되살아나 숲은 태운다고 한다. 대자연의 섭리에 인간의 능력은 제한적이다. 짙은 연기가 자욱해 하늘을 볼 수도 없다. 침묵의 원시림에 지옥의 불이 난 것 같다. 이러한 화재는 오래된 자연 현상인데 지구온난화 현상이 산불을 악화시키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연기 자욱한 불길 옆 도로를 지나가면서 자동차에 불이 옮을까 걱정된다. 이러한 불길이 수백㎞ 이어지고 있다. 화물차들은 토탄 불 연기에 익숙한 듯 잘도 달린다. 스코보로디노로 가는 중간에 북극해 도시 ‘야쿠츠크’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야쿠츠크는 이곳에서 800㎞ 떨어진 북극해 툰드라 지역의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추운 도시라고 한다. 유전 개발로 만들어진 도시다. 겨울철 영하 50도 이하가 돼야 학교는 휴업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영하 50도 추위를 기다린다고 한다. 툰드라 지대의 타이가 등 원시 생태계를 꼭 보고 싶은데 일정이 허락하지 않음을 아쉽게 생각하며 북쪽으로 달린다. 겨울철 ‘혹독한 추위’를 체험하러 관광객이 찾아오는 도시라고 한다. 환경이 변하면 사람의 성격도 변함을 경험하게 된다. 후미에 따라가는 우리는 선두 차에 목적지가 얼마 남았는지 무전기로 물어본다. 앞에서 무전기로 150㎞ 남았다고 말한다. 두세 시간 가야 할 먼 거리임에도 아내는 ‘얼마 안 남았네’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얼마 후 70㎞ 남았다고 무전기 연락이 온다. 아내는 ‘이제는 남은 거리가 정말 껌이네’라고 말해 웃으며 운전한다. 인간의 상황 적응력은 뛰어나다. 광활한 대지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본인도 모르게 대륙성 만만디, 대륙성 기질로 변하고 있다. 이곳에 우리도 몇 달만 살면 성격이 대륙성 기질로 변할 것 같다. ■ 스코보로디노 도착 ‘한대기후’ 지역이라 주변에 농경지도 없다. 경작 한계선을 넘어선 것 같다. 토탄 연기 자욱한 시베리아 평원을 달리며 낭만적인 겨울 설원을 상상해 본다. 바이칼호 설경을 보기 위해 방문했던 4년 전 시베리아 눈 덮인 자작나무 숲길이 생각난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낭만적 설원 풍경을 상상하며 자욱한 연기 속을 지나가고 있다. 이곳은 봄과 가을은 매우 짧고 긴 겨울과 여름 두 계절만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 주민들의 생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과거 몽골족은 수렵으로 야생 동물을 잡아 모피는 팔고 고기는 식용했다. 현재는 목재 산업 등 임업이 주된 업종일 것이다. 7월 중순 북위 54도인 이곳 낮 시간이 하루 17시간 준백야 지대다. 인구 1만명의 작은 도시다. 손님이 적으니 한곳에서 식당, 휴게소, 잡화점, 여관, 주유소를 함께 운영한다. 숙소의 침대 쿠션이 엉망이라 누우면 몸이 쑥 들어간다. 뚱뚱한 러시아 운전사들이 사용하는 아주 오래된 침대인 것 같다. 침대 시트도 언제 세탁했는지 지저분함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따뜻한 목욕물도 잘 안 나오는 낙후된 여관이다. 여관방에 비치된 물 끓이는 커피포트도 언제 세척했는지 알 수 없다. 야외 저녁 날씨는 쌀쌀해 이불이 필요하다. 토탄 타는 냄새가 이곳 숙소에도 심하다. 오늘 저녁도 피곤을 이기기 위해 반주로 러시아 보드카를 몇 잔 마신다. 서울 살 때 안락한 좋은 침대에서 잠을 잘 때도 밤중에 한두 번 깨어 뒤척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제는 나쁜 침대에서도 피곤함에 잠을 잘 잔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시베리아 시골 도시 ‘벨로고르스크’

■ 시베리아 소도시 벨로고르스크에서 오전 9시 시베리아 시골 도시 벨로고르스크의 자동차정비소가 문을 열면 문제가 생긴 L실장의 차를 고쳐야 한다. 오늘은 자동차 수리 때문에 늦게 출발할 수밖에 없다. 손님이 적은 시골 여관이라 아침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부득이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아내와 함께 시내 공원에 산책을 갔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레닌 동상은 대부분 철거됐는데 이곳은 시골 도시라 한 개 남아 있다고 한다. 레닌은 1924년 사망했으니 지난해가 사망 100주년이다. 레닌 사망 후 후계자 스탈린은 레닌 우상화를 위해 소련 각지에 수만개의 동상을 건립했다고 한다. 요즈음 러시아 전체에 남아 있는 레닌 동상이 희귀해 사진 찍는 관광 장소라고 한다. 아침 기온이 13도여서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는다. 한국의 초가을 날씨처럼 선선하다. 노상에서 동네 주민들이 시베리아 산딸기, 야생 베리를 팔고 있다. 시식해 보라고 권해 먹어 보니 모양새는 맛있어 보이는데 신맛과 약간 씁쓸한 맛이다. 이곳은 일조량이 적어 한국보다 과일 당도가 낮다. 어제 산 야생 꿀도 확실히 당분이 적은 것을 느낀다. 언제 시베리아에 다시 오겠는가 생각이 들어 두 종류의 야생 베리를 노점상에서 샀다. 한 컵 가격이 250루불(약 4천원)이다. 짧은 여름 한 번 먹을 수 있는 무공해 자연식품이라 아내에게 권하니 배탈 난다고 먹지 않는다. ■ 인근 도시 스보보드니: 자유시 참변 장소 스보보드니는 벨로고르스크에서 60㎞ 떨어져 있다. 러시아어 스보보드니는 한국말로 ‘자유’라는 의미다. 이 도시는 독립군부대가 참변을 당한 ‘자유시 참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봉오동전투가 1920년 5월, 청산리전투가 1920년 10월에 있었다. 일본군의 추격에 쫓기던 독립군은 추운 겨울 두만강 건너 지린성 백두산 자락에서 출발해 북만주 벌판, 헤이룽장, 싱안링산맥을 넘어 수천㎞ 먼 길을 걸어 1921년 봄 ‘스보보드니(자유시)’에 도착했다. 혹독한 만주의 겨울 추위에 빈약한 복장과 부족한 식사를 하면서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어렵게 이곳에 도착한 뒤 1921년 6월 러시아 적군과 고려공산당 군대에 의해 독립군이 학살당한 도시다. 독립군 측 기록에 의하면 600여명 사망, 900여명이 체포됐다. 학살로 대한독립군 부대는 거의 소멸돼 1921년 이후 일본군과 독립군의 변변한 전투는 없다. 청산리전투 사령관 김좌진 장군은 학살의 낌새를 눈치채고 사전에 빠져나와 참변을 면했다고 한다. 러시아 변방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은 대부분 무명용사일 것이다. 그 후손들이 독립유공자 혜택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스보보드니는 스탈린 치하 정치범수용소로 유명하다. 최대 19만명이 수용됐다고 한다. 스탈린 자신도 러시아혁명 이전 반체제범으로 체포돼 어느 시베리아 수용소에 2년 동안 수감된 경력이 있다. 억압받았던 자가 억압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 더욱 잔인해지는 일이 인간사와 역사에 많다. ■ 스코보노디노로 가는 여정 자동차정비소에서 시간을 많이 소모하고 아침 늦게 스코보노디노로 출발한다. 북위 54도에 위치한 인구 1만명의 작은 도시다. 오늘 이동할 거리는 550㎞다. 우리 여정의 시베리아 초원로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3일간 2천여㎞를 시베리아 숲길로 지나오면서 원시적인 자연계에 익숙해지고 있다. 시베리아 산림은 비슷하다. 자작나무 숲이 주종이고 때로는 소나무 군락지도 나타난다. 열대지방, 온대지방 등에 비해 수종이 매우 단순하다. 텅 빈 대초원도 번갈아 나타난다. 연초록색 물결이 출렁이는 초원의 바다다. 농사를 짓고 싶어도 근처에 사람이 안 살고 소비할 시장이나 판로가 없으므로 경작도 쉽지 않다. 도로변의 많은 초지가 텅 빈 채로 있다. 여름철 낮 시간이 16시간으로 매우 길고 강한 햇볕 때문에 짧은 여름 3개월 동안에 감자, 밀, 채소 등 경작이 가능하다고 한다. 공기는 매우 맑고,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무공해 자연은 아름답다. 거의 경치의 변화가 없는 시베리아 대평원 길을 며칠째 달리고 있다. 가끔 마을이 나타나는데 사람이 안 사는 폐가가 많이 보인다. 젊은이들은 모두 모스크바 등 대도시로 떠나고 시베리아에 살던 부모가 죽으면 우리 농촌처럼 자연스럽게 폐가가 될 것이다. 자작나무, 소나무가 서로 경쟁하면서 군집을 이루고 있다. 어떤 곳은 자작나무가 주종이고 어떤 곳은 소나무가 주종이다. 대체로 숲속의 나무는 매우 빽빽하게 밀집해 자라고 있다. 겨울 강풍과 추위에 서로를 지탱하기 위함이다. 가혹한 겨울 날씨에 살아남기 위한 식물의 지혜다. 초원에 잠시 사진을 찍으러 들어갔다가 야생 벌레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처음엔 모기에 물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초원의 야생 곤충에 물린 것을 알게 됐다. 곤충의 독성이 매우 강해 일주일 이상 붓고 가려워 큰 고생을 했다. 시베리아 곤충의 독성에 면역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가져간 모기약은 전혀 듣지 않는다. 밖에서 보면 아름다운 초원인데 속은 무서운 곤충들의 천국이다. 다시는 초원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면역력이 생긴 이곳의 농민이나 목동은 아마 괜찮을 것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하바롭스크 2

■ 어머니 품, 아무르강 하바롭스크는 위도가 북위 48도(서울 37도)다. 7월10일 현재 오전 5시 일출, 오후 9시 일몰로 낮시간은 16시간이다. 이곳은 ‘아한대기후’로 온대와 한대기후가 만나는 지역이다. 시내 중심부로 아무르강이 흐른다. 만주어로 아무르강은 ‘큰 강’이라 뜻이다. 중국은 ‘검은 강’ 헤이룽장(黑龍江)이라 부른다. 아침에 아내와 아무르강 강변을 산책한다. 평일인데도 낚시 인파가 많다. 강폭이 매우 넓고 유장하게 시베리아 대평원을 가로질러 흘러간다. 얼음이 얼지 않은 여름철 동안에만 이 강을 통해 태평양으로 화물선이 다닌다. ‘아무르강의 물결’이라는 러시아 민요가 생각나 유튜브에서 듣는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유유히 아무르는 그 물결을 실어 나르네/시베리아의 바람이 모두에게 노래를 불러 주네/아무르의 타이가숲 앞에 조용히 찰랑이며/취한 듯 물결이 자유롭게 도도하게 흐르네....” 러시아 특유의 쓸쓸함과 민중의 애환이 느껴진다. 시베리아 대평원을 흘러가는 아무르강은 마치 ‘어머니 강’처럼 포근해 보인다. 하바롭스크의 아침 날씨는 흐리고 구름이 낮게 깔려 있다. 아스라이 멀리 보이는 강 건너 땅은 중국 영토다. ‘황허강, 갠지스강’을 중국, 인도 사람들이 ‘어머니 강’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어머니 강, 우리의 젖줄은 아마 서울과 기호지방을 가로지르는 ‘한강’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 조선, 청나라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나선 전쟁’ 아무르강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선이다. 아무르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중국 사이 국경분쟁이 근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세계의 G2 강대국은 미국과 중국이다. 17세기 유라시아 대륙의 G2 국가는 청나라와 러시아였다. 두 나라가 아무르강에서 많은 국경분쟁을 했다. 17세기 ‘조선, 청 연합군’과 러시아 군대가 전쟁한 지역이 바로 하바롭스크 남쪽에 있다. 조선 효종 때 하바롭스크 남쪽 아무르강에서 두 차례(1차 1654년, 2차 1658년) 전쟁에 참전했다. 효종은 청의 요청으로 260여명의 군대를 두만강 회령을 넘어 출병시켰다. 조청 연합군이 승리를 거뒀고 조선실록은 ‘나선정벌(征伐)’로 기록하고 있다. ‘나선’은 한자어로 러시아를 뜻한다. 조선실록의 과장된 정벌(征伐)이라는 용어 대신 ‘참전’ 또는 ‘파병’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효종은 병자호란 패전 후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 갔던 왕이다. 왕이 된 효종은 청나라 복수를 위해 북벌(北伐)을 위한 군대 양성에 주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청나라 북벌을 위해 양성한 조선군이 러시아군과 싸우기 위해 파병됐다. 임진왜란을 겪은 광해군, 병자호란은 겪은 효종의 국제적 식견과 외교정책은 정반대다. 광해군은 임란 후 적국인 청나라와 일본에 유연한 실용주의 외교를 했고 효종은 최강대국 청나라에 복수한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북벌정책을 펼쳤다. 효종이 죽은 후 후대 왕들도 세계 최강대국 청나라와 학술·문화 분야의 교류조차 끊고 지낸다. 학술, 문화의 교류를 주장하는 ‘북학파, 실학파’의 의견은 무시된다. 청나라를 통해 서구 문물과 과학기술을 배울 기회가 차단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 시베리아 대평원 횡단하기 본격적인 시베리아 횡단 대장정의 시작이다. 의욕이 넘치는 원기 왕성한 출발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작은 도시 벨로고르스크(인구 5만명)이다. 북서쪽으로 670㎞를 달려야 한다. 사고가 없는 행복한 하루를 기대한다. 어제에 이어 강행군 이동이다. 두 시간 운전 후 20분 휴식이고 약 300㎞ 달리고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는다. 소련은 1991년 해체 후 15개 독립국으로 분열됐다. 스탈린이 1922년 소련 설립 후 70년 만에 해체된 것이다. 해체 이후 현재의 러시아 면적은 1천710만㎢다. 남한 면적(10만㎢)과 비교할 때 대단히 넓은 영토다. 대부분 영토는 광대한 시베리아의 대평원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캐나다 영토의 1.7배다. 러시아는 250년 동안 징기즈칸 몽골족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 중반 몽골 지배에서 벗어난 후 시베리아로 동진(東進)정책을 했다. 초기는 우랄산맥 동쪽 산림지대로 모피를 구하기 위해 동진했고 결과적으로 세계 최대 영토 국가가 됐다. 19세기 후반 미국에 알래스카를 팔지 않았다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17세기 서유럽의 귀족들의 취향은 모피 옷이다. 러시아의 모피 판매 수입이 한때는 국가 수입의 30%를 차지한 적도 있다고 한다. 초행길 운전에 구글맵, 위성항법장치(GPS)의 도움이 매우 크다. 밤중에 작은 도시 뒷골목에 있는 여관을 찾는 데 구글맵이 없다면 여행은 불가능할 것이다. 구글은 세계화 시대 여행의 가장 훌륭한 동반자다. GPS 애플리케이션(앱) 덕분에 현재 나의 위치를 알려주는 ‘위도, 경도, 해발고도’를 확인하면서 가기 때문에 초행길 불안감이 적다. 시베리아 대평원의 산속 길은 인터넷이 수시로 끊기고 구글맵, 국제전화, GPS가 멈춘다. 인터넷이 멈추면 우리는 문명인(文明人)에서 자연인(自然人)이 된다. 인터넷 연결이 끊기는 것이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익숙해지면서 우리를 단순하고 자유롭게 만든다. ■ 싱안링산맥을 넘어 몽골초원으로 들어간다 하바롭스크를 200여㎞로 지나 싱안링산맥을 만난다. 높이는 200m에서 400m로 높지 않지만 산맥을 통과하는 데 한 시간 이상 걸린다. 싱안링산맥을 경계로 동쪽은 여진족의 ‘만주평야’, 서쪽은 ‘몽골초원’의 시작이다. 시베리아 대평원은 동쪽부터 ‘몽골초원, 카자흐초원, 남러시아초원’으로 연결된다. 대초원은 인류 역사를 뒤흔들었던 유목 기마민족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 등의 활동 무대다. 싱안링산맥 지나는 도로변에서 현지 주민이 파는 시베리아 야생 꿀 한 병을 샀다. 500㎖ 물병 야생 꿀 한 병이 우리 돈 6천원이다. 봄철 3개월 피는 야생화에서 1년에 한 번만 채취하는 꿀이다. 와일드 베리(wild berry), 야생화꽃으로 만든 꿀이다. 운전 중 뜨거운 물에 타 먹기 위해 한 병을 샀는데 여행 중 감기로 고생할 때 꿀물은 큰 도움이 됐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오디세이 시베리아

오전 9시 우수리스크 마르코폴로 여관을 씩씩하게 출발한다. 7월9일 아침 기온 15도, 낮 기온은 25도 이내로 매우 쾌적하다. 시베리아는 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잔다. 오늘 목적지는 하바롭스크. 680㎞를 가야 한다.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실제로 오늘이 시베리아 대평원 자동차여행의 첫날이다. 우수리스크를 벗어나자 멀리 아무르강 하류 우수리강이 보인다. ■ 헤이그 밀사 ‘이상설 선생’ 유허비 우수리강에 헤이그 밀사 정사인 이상설 선생 유허비가 있다. 이 선생은 1917년 우수리스크에서 사망했는데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를 화장 후 우수리강에 뿌렸다. 광복회가 우수리강에 이 선생 유허비를 세웠다. 이 선생은 신식 서양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독학으로 수학, 화학, 법학을 공부했고 영어, 프랑스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탁월한 언어 실력으로 헤이그에서 열리는 1907년 ‘만국평화회의’ 대표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학책을 직접 지어 조선인 학생에게 ‘수리 과목’을 가르쳤다. 근대 ‘한국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20대 나이에 성균관 대사성을 거친 천재 학자임을 알게 됐다.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 역대 대사성 명단과 함께 선생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유유히 흐르는 아무르강에서 맴도는 고혼(孤魂)이시여 이제는 평안하소서.” 멀리 고국에서 온 후생(後生) 인사드립니다. ■ 시베리아 대평원을 향하여 출발 원주민 언어로 시베리아는 ‘잠자는 땅’이란 뜻이다. ‘시베리아’ 하면 연상되는 단어들이 있다. 원시림, 광활함, 혹독한 추위, 자작나무 숲, 영화 닥터 지바고 설원 등 광활한 대자연 단어가 연상된다. 여행은 언제 가느냐가 중요하다. 겨울철과 여름철 대자연의 얼굴은 전혀 다르다. 현재의 시베리아는 초여름 연녹색의 향연이다. 위도가 높아 봄이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나뭇잎 색깔이 연한 녹색을 띠고 있다. 차창 밖 줄지어 서있는 연녹색 산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하다. 도로 옆으로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산림 사이사이에 작은 농가 몇 가구, 널따란 대초원, 커다란 필지의 농지가 나타난다. 우수리스크를 벗어나 두 시간이 지나니 인가도 거의 없다. 도로 옆으로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만났다 헤어졌다 계속 달려간다. 아마 바이칼호까지 약 3천700㎞를 철도와 나란히 서쪽으로 달려갈 것이다. ■ 위험한 시베리아 국도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 국도는 고속도로가 아니고 편도 1차선(왕복 2차선) 으로 협소한 길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와 동쪽 태평양을 연결하는 국가의 중요한 간선도로임에도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미흡함을 느낀다. 산업용 도로이기 때문에 관광객이나 승용차는 적고 대부분 화물차다. 겨울철 눈으로 파손된 도로는 제때 보수가 안 돼 곳곳에 포트홀이 매우 많고 자동차가 튀어 오르는 바운딩이 자주 있어 운전 여건 최악의 위험한 길이다. 조금만 전방 주의를 소홀히 하면 포트홀에 빠지고 차가 위아래로 요동친다. 앞쪽의 화물차들은 천천히 달리므로 화물차를 만날 때마다 추월해야 한다. 반대 차선에서 마주 오는 차를 피하면서 중앙선을 넘어 추월해야 하므로 시속 150~160㎞의 위험한 급가속 운전을 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전쟁으로 러시아 재정이 어려워 도로 보수가 지체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를 검색해 보니 러시아 국방비가 전쟁 전 국내총생산(GDP)의 4.3%인데 지난해는 6.7%(한국은 2.9%)로 증가했다. 전비 조달을 위해 금년에 세금을 대폭 인상한다고 한다. 소득세율은 전쟁 전 13% 단일세율에서 금년부터 최고 22% 누진세율로 인상, 법인세율도 전쟁 전 20%에서 금년부터 25%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 평화스러운 숲속 길 드라이브 ‘카메이트’인 L실장은 여수에서 온 분이다. 향후 두 달 동안 좁은 차에서 함께 보내야 할 자동차 가족이다. 점심은 휴게소의 야외 식당에서 샤슬릭 꼬치구이를 먹기로 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우리를 유혹한 것이다. 샤슬릭 꼬치를 굽는 러시아 직원이 과거 마산에서 일했다고 하면서 반갑게 인사한다. 우리는 계속 광활한 산림과 대평원을 지나간다. 언어와 단어로 광활한 대평원의 느낌을 전달할 수 없다. 현대인들은 속도의 경쟁에서 중압감을 받으며 살아간다. 빌 게이츠가 말한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 뒤떨어지면 낙오자가 된다. 문명 세계의 속도, 빠름, 효율성, 날짜, 요일, 시간 관념을 이곳에서는 잠시라도 잊고 싶다. 무심히 창밖의 초원. 산림, 하늘만 쳐다볼 뿐이다. 하바롭스크까지 680㎞의 먼 거리를 달려 가면서 수시로 급변하는 다양한 얼굴의 시베리아를 마주한다. 어느 구역은 소나기가 계속 내리고, 어느 구역은 햇볕 쨍쨍한 파란 하늘이다. 어디는 흐리고, 어디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다. 동해안에서 서울까지 280여㎞ 짧은 거리를 차로 올 때도 날씨가 여러 번 변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 녹색의 대초원과 자작나무 숲속을 지나 석양 무렵에 목적지 하바롭스크 화려한 러시아정교회 첨탑을 마주한다. 첫날 680㎞를 무사히 달려왔다. 마침 시내에 고려인 식당이 있어 저녁식사는 한식으로 한다. 고객은 러시아인들이고 외국인은 우리 일행뿐이다. 검색해 보니 고려인 후손이 8천명 산다고 한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다. 이곳은 하바롭스크주의 주도이며 러시아 극동에서 가장 큰 도시다. 아무르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아무르강변의 호텔은 전망도 좋고 침대와 샤워 시설이 매우 깨끗하다. 샤워실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하루의 여독이 풀린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오디세이 시베리아 출정

■ 시베리아 출정식 오후 늦게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5일 만에 자동차를 러시아 세관에서 운전해 가져왔다. 우리는 자동차 3대 앞에서 시베리아 출정식을 하면서 “가자! 이스탄불”을 힘차게 외친다. “자동차여행은 목적지 도착이 목표가 아니고 지나가는 과정을 멋있게 즐기는 것이다.” 시베리아 구간은 바이칼호까지 약 3천700㎞를 달려야 한다. 하바롭스크, 벨로고르스크, 스코보로디노, 울란우데 등 발음도 어렵고 지명도 생소한 시베리아 대초원을 통과해야 한다. 시베리아 대평원은 관광객은 거의 안 다니고 화물차 등 산업용 도로다. 숙소, 도로, 휴게소 상태가 어떨지 걱정스럽다. 블라디보스토크 위도는 43도(서울 37도)인데 스코보로디노(북위 54도)까지 서북쪽으로 올라갔다가 서쪽 바이칼호로 향하는 길이다. 오늘은 짧은 거리인 우수리스크 지역까지 이동한 후 숙박한다. 맛집을 검색, 조지아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조지아 대표 음식으로 딤섬 일종인 ‘킨칼리’와 풍선빵을 시켰다. 만두에 손잡이가 있어 내용물을 흘리지 않고 먹는 요령을 직원이 설명한다. 작은 공 크기의 둥근 ‘게살 풍선빵’을 주문했는데 직원이 바람을 빼고 칼로 잘라주는데 맛이 독특하다. 조지아는 향후 카스피해 북쪽을 지나 캅카스산맥을 넘어 우리가 지나갈 국가다. 조지아 음식이 우리 입맛에 맞는다고 말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음식 가격은 서울의 약 60%다. 7월 초순 이곳 대학 졸업 시즌인데 졸업생 가족들의 축하 세리머니가 이채롭다. 축하 음악을 크게 틀고 식당 종업원 5, 6명이 졸업생 좌석으로 달려가 세리머니를 시작한다. 남자 졸업생에게 털 장식 모자를 씌워주고 여자 졸업생에게는 하얀 면사포를 씌워준 다음 직원들이 모여 축하 노래를 불러준다. 처음 보는 풍경이라 약혼식인지 물어봤더니 대학 졸업 축하 이벤트란다.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 여학생에 물어보니 정보기술(IT) 분야 전공이다. 우수리스크로 가는 길은 우리의 시골 농촌 풍경과 닮았다. 토양은 흑갈색으로 매우 비옥하다. 시베리아 대평원의 시작은 하바롭스크부터다. 이곳은 1천500년 전 고구려의 변방 땅이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의 영토이며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농사짓던 땅이다. 서기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약 20만명의 고구려인이 당나라로 포로로 끌려갔다고 한다. 포로의 후손 중에 당나라 현종 때 안서도호부 절도사를 지낸 명장 고선지 장군도 있다. ■ 왜 유라시아 대륙횡단 여행인가 유라시아 대륙을 자동차로 횡단하는 여행을 알게 된 것은 4월 초순 모 일간지 주말 섹션판의 실크로드 여행 기사다. 나와 아내는 실크로드 종주를 위해 6년 전 중국 시안을 출발해 둔황, 투루판, 우루무치, 톈산의 천지호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 코로나19로 여정을 멈췄다가 금년 여름 신라의 구법승 혜초 스님이 통과한 파미르고원 실크로드 구간을 가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신문에 난 실크로드 기사를 보고 자동차 여행에 합류한 것이다.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 시베리아 대평원, 기마유목민의 본거지 몽골고원과 고비사막, 1천300년 전 신라 구법승 혜초 스님이 다녀온 길, 위구르어로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든 땅’이라는 타클라마칸사막, 해발 3천~4천m의 톈산산맥과 파미르고원, 카스피해, 캅카스산맥을 체험해 보고 싶다. 유라시아 대륙의 속살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은 욕구는 50년 전 고등학생 시절 ‘김찬삼 교수의 세계일주 여행기’의 감동 때문이다. 아내를 동반자로 설득해 함께 가는 일이 어려웠다. 먼저 아들들이 여행 도중 사고를 염려해 적극 반대한다. 아내를 설득하는 데 한 달여 걸렸다. 아내는 최근 ‘콜드(cold) 알레르기’가 있어 추운 지역에 가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 한다. ■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출발 역, 리즈돌노예역 우수리스크를 가는 중간에 시베리아 철도역 ‘리즈돌노예’역이 있다. 현재는 폐역으로 넓은 주차장에 수목만 무성하다. 스탈린은 1937년 8월 하순 블라디보스토크 군경에 연해주 거주 고려인 약 17만명을 3개월 이내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도록 지시했다. 정거장 건물 뒤쪽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아마 이 주차장에서 매일 수천 명이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끌려와 6천~7천㎞ 떨어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의 황무지로 이송됐을 것이다. 망국의 고려인은 통곡했으리라. 히틀러가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낸 것과 비슷하다. 강제 이주 이유는 고려인들이 일본 군대의 첩자 역할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다. 가을 수확철인데 많은 고려인들은 갑작스러운 이주 통보로 가을걷이도 못 했다. 반대하는 사람 수천 명을 우선 처형했다. 주택이나 전답 등 재산을 처분하지도 못하고 강제로 끌려갔다. 겨울철 집도 없이 황무지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움막을 짓고 무서운 겨울 추위를 이겨냈다고 한다. 이주 초기 어린아이의 희생이 컸다고 한다. 강제 이주한 1937, 1938년에 출생한 아이들이 호적에 별로 없다고 전한다. 강제 이주 대상에는 1920년 5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홍범도 장군도 포함돼 있었다. 후에 카자흐스탄에서 경비원을 하셨다. 망국의 민족 수난사의 현장에서 간단한 묵념을 했다. 성악과 출신인 K교수가 위로곡을 한 곡 멋지게 불렀다. 숙연한 마음으로 텅 빈 철도역 주변을 둘러보고 오늘의 목적지 우수리스크로 출발한다. 우수리스크까지 가는 도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이라 매우 양호하다. 첫날 묵는 우수리스크의 여관 이름이 뜬금없이 ‘마르코폴로’다. 좋은 징조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여정에 마르코 폴로가 700여년 전 지나간 파미르고원을 통과할 예정이다. 베네치아의 모험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에게 큰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마르코 폴로가 피렌체 감옥에 포로로 갇혔을 때 동료 죄수인 문인이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방견문록은 16세기 유럽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은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근처 중국 식당에 갔는데 맥주 등 술은 안 판다고 한다. 그 대신 편의점에서 술을 사다 먹는 것은 괜찮다고 한다. 러시아 국민은 세계 최고의 술 소비량으로 악명이 높다. 정부는 국민의 과도한 음주를 줄이기 위해서 오후 9시 이후 소매점에서 술 판매를 금지하고 식당의 주류 판매를 엄격하게 규제한다. 위도가 높아 해가 늦게 떨어진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오후 11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블라디보스토크 문화탐방

■ 러시아정교회, 시바토수도원 방문 자동차가 세관에서 나올 때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곳곳을 소요하고 있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포크롭스키 주교좌교회를 방문했다. 우리는 동방정교회, 러시아정교회, 조지아정교회 등 정교회(正敎會)에 낯설다. 정교(正敎)는 한자 의미대로 ‘옳은 교회’라는 의미다. 로마가톨릭 교회가 8세기 게르만족 포교에 필요한 성화 제작을 허용할지, 우상숭배로 볼지 등 교리 다툼으로 갈라진 교회다. 성화 제작을 우상숭배로 반대했던 비잔틴 교회는 스스로 ‘옳은 교회’, 정교(正敎)회라 칭했다. 교회 벽면의 이콘 성화가 화려하다. 정교회도 결국은 포교를 위해 성화를 허용했다. 예배 시간 내내 사제와 신자는 계속 서 있어야 한다. 교회 홀에 의자는 없다. 성가도 악기 없이 육성으로만 부른다. 러시아정교회는 결혼한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결혼한 신부는 주교 등 고위직 사제는 될 수 없다. 러시아 혁명 후 스탈린은 ‘1도시 1교회’ 원칙을 정하고 러시아정교회, 이슬람교 등 종교를 탄압했다. 원칙적으로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만 인정되고 나머지 교회나 사원은 폐지했다. 포크롭스키 교회는 1도시 1교회에 해당돼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스탈린이 1953년 사망하고 후계자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과 함께 종교의 자유도 허용함에 따라 스탈린 사후 많은 신설 교회가 생겼다고 한다. “인류 역사는 세속의 정치 권력과 영적인 종교 권력의 투쟁, 내가 믿는 신이 최고신(最高神), 참된 신이라는 종교와 종교의 투쟁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말이 생각난다. 택시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러시키섬에 위치한 시바토 수도원에 갔다. 태평안 연안 러시키섬에 위치한 시바토 수도원은 신부 2명, 수도사 20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검은 사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신부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고 사진 촬영을 요청하니 기꺼이 응한다. 향후 이런 오지의 수도원에 찾아올 한국인은 없을 것이라고 우리끼리 말하며 서로 웃는다. ■ 아르바트 거리,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19세기 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조선인이 처음 정착한 장소가 ‘개척리’라고 한다. 현재 이곳은 블라디보스토크 젊음의 거리인 ‘아르바트’ 거리로 변했다. 초창기 정착지로서 움막 등 주거환경이 매우 불결하고 전염병이 창궐해 1911년 러시아 정부가 외곽에 새로운 주거지를 만들어 ‘신한촌(新韓村)’으로 이주시켰다. 옛 개척리인 아르바트 거리는 서구식 건물, 예술 조형물, 젊은이 대상의 문화거리다.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은 항구 옆에 있다. 제정러시아가 1904년 완공한 시베리아 철도의 종착역이다. 모스크바까지 9천300㎞, 기차 정거장만 850개로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다. 이 역에서 1907년 고종의 헤이그밀사인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 등 세 분이 출발한 역이다. 힘없는 망국 조선의 젊은 관리 세 명이 비장한 각오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출발한 역을 바라본다. ■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 기념비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 기념비가 있는 곳을 들렀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수립됐다. 상하이, 연해주, 한성에 있던 세 개의 독립단체를 통합해 설립한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이다. 이동휘 선생은 조선 말기 한성무관학교를 나온 무관이다. 조선 멸망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다. 1920년 소련의 레닌이 200만루블을 상하이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줬다. 이 선생의 측근이 40만루블을 공산당 확장에 사적으로 사용한 것이 발견돼 감찰 담당이던 김구 선생이 척살했다. 이승만 대통령, 안창호 선생 등과 노선 차이로 일찍 임정과 결별하고 1921년 1월 연해주로 돌아가 고려공산당 창당 등 평생 공산주의 운동을 한 인물이다. 조선 말,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된 것은 당시의 시대상이다. 이 선생은 1920~30년대 스탈린의 공포 정치와 잔혹한 숙청 정치를 목격했는데 공산주의 실상은 잘 모르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건국훈장도 공산주의 경력 때문에 매우 늦은 1995년 수상했다. 역사의 현장을 역사학과 대학생처럼 많이 걸어다녔다. 어두웠던 100여년 전 우리의 역사 현장을 보면서 다시는 이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 자동차 5일 만에 세관 통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지 5일째인 7월8일 오후 자동차가 세관에서 통과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른다. 한국 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무사고 완주를 다짐한다. 일행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K 교수는 “걱정을 떨치고 즐겁게 갑시다”로 건배사를 한다. 모두 “가자, 이스탄불”을 힘차게 소리쳤다. 영어로 여행은 ‘travel’인데 어원은 ‘고생, 고난’이라는 ‘travail’에서 나왔다고 한다. 우리도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는데 서양도 여행은 고생이라는 뜻에서 문화적 동질감을 느낀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장기간 여행하면서 마찰 없이 보내기 것은 쉽지 않다. 서로 마음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고난을 함께 겪으면서 우정이 생기기를 희망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편안하게 소요하기

블라디보스토크는 관광도시가 아니다. 자동차가 나올 때까지 5일간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목적 없이 시내를 소요(逍遙)하기로 했다. 소요의 어원은 기원전 4세기 활약한 중국의 장자와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한다. 장자는 목적 없이 산책하며 즐기는 ‘소요유(逍遙遊)’를 수양의 한 수단으로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요학파’라고 부른다. 정원에서 자유롭게 산책하며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 군사도시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가 서쪽에서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하고 있지만 이곳은 전쟁의 긴장감이 전혀 없다. 시내 곳곳에 군인 동상이 많다. 박물관도 군사역사박물관, 육군박물관, 잠수함박물관, 태평양함대박물관 등 군 관련 박물관이다. 군인 존중의 상무정신,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 고취는 전체주의 국가의 일반 현상이다. 우리의 경우 북한의 핵무장, 휴전선 군사도발 등 안보 현실은 군인 존중,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근현대 한반도 격동기 역사는 러시아와 직간접으로 관련이 많다. 고종의 아관파천, 제2차 세계대전 후 분단, 북한의 6·25전쟁 사주 등 러시아의 제국주의 팽창주의는 우리 근대사의 비극과 관련이 깊다. 망국의 슬픔이 가장 큰 서러움이라고 선조들은 말한다. ■ 발해의 유적을 찾아서 ‘아르셰니예프 향토박물관’으로 향한다. 입장료는 500루불(약 7천500원)이다.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서 수집한 샤머니즘 관련 자료가 매우 풍부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샤먼의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한다. 점을 보는 역술인을 포함하면 3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정보기술(IT) 강대국이라는 현실과 역설적이다. 반면 샤먼의 본거지인 시베리아나 몽골지역은 현재 무당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곳은 발해 유적을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은 발해 유적이 전무하다. 박물관 1층에 발해관이 있는데 한국어로 된 설명서가 있다. 다음은 박물관에 비치된 한글 설명서 첫 장이다. “발해는 중국으로부터 파괴된 고구려 터를 기반으로 7세기(698년)에 건국됐으며, 훗날 동해안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발해는 현재의 만주, 연해주, 북한지역의 영토를 지배했으며 말갈인들을 비롯해 자국 멸망 후 새로운 나라를 구하던 고구려인들이 거주했다.... 수도는 상경(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동경성 인근)이고 동쪽 수도는 동경(현재 두만강 건너 훈춘)이다. 채굴, 금속가공, 가죽 가공 등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다”고 설명한다. 전시품은 8세기 궁궐과 사찰의 지붕 장식물, 무덤에서 발굴한 불교 조각상, 청동거울 등이다. 발해사는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이 우리 역사에서 제외함에 따라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조선 후반기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발해 역사를 재발견했다. 동해안을 따라 원산 이남의 땅은 통일신라, 원산 북쪽의 땅은 발해 땅이다. 유득공은 거란족에 의해 발해가 멸망(926년)함으로써 만주지역 고구려의 옛 영토가 영원히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의 일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발해 멸망 후 왕족과 주민 수만명이 귀순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후계국인 고려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태조 왕건은 발해 왕자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고 잘 보살폈다고 전한다. 기억 속에서 사라진 우리 고대 역사의 숨어 있는 망국의 유물이 현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음에 역사의 순환을 생각해 본다. ■ 러시아인의 동양인, 중국인 인종차별 블라디보스토크는 중국인 관광객이 매우 많다. 인접한 헤이룽장성에서 버스를 타고 놀러 온 관광객이다. 시내 음식점 등의 간판은 중국어가 병기돼 있다. 시내 중심가 어디를 가나 중국인 단체 관광객의 목소리가 요란하다. 러시아인의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 비하를 경험했다. 미국 달러를 루불화로 교환하기 위해 은행에 갔다. 은행원이 “미화 100달러 지폐가 약간 구겨졌다”, “흠이 있다”며 환전을 거부했다. 러시아정교회 예배를 구경하기 위해 건물에 들어가려 하니 경비원이 한 시간 후에 오라며 못 들어가게 막는다. “우리는 한국 관광객이다. 예배에 참석하고 싶다”고 하니 친절하게 들어가라고 한다. 알고 보니 중국인으로 오해해 은행과 교회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 ■ 영화배우 율 브리너 생가 방문 ‘왕과 나’, ‘십계’ 영화로 유명한 미국 배우 율 브리너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시내를 배회하다가 율 브리너 생가에 들렀다. 주택은 수리 중이고 마당에 동상이 서있다. 1950~60년대 활약한 배우로 대머리에 카리스마 넘치는 눈매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다. 요즘도 크리스마스 때 ‘십계’ 영화를 TV에서 가끔 상영한다. MZ세대는 율 브리너를 모를 것이다. 딱히 갈 곳을 정하지 않고 시내 여러 곳을 자유롭게 소요(逍遙)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

■ 블라디보스토크 세관 통과하기 공항 세관은 익숙하지만 항구 세관인 해관(海關) 경험은 흔치 않다. 2천년 전 로마 시대부터 항구에 세관을 설치하고 수입품에 관세를 징수했다. 관세(關稅)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세금이다. 우리 일행은 여객선에서 가장 늦게 하선했다. 일행 중 한 명의 가방이 없어져 부두에 흩어져 있는 여러 짐가방을 뒤져 어렵게 찾았다. 문제는 사람과 짐가방이 아니라 자동차 통과였다. 통관 전문업자에게 위임했지만 최소한 5일이 걸린다고 했다. 러시아 세관 공무원에게 항의할 수도 없다. 자동차 여행에서 감수해야 할 기다림과 체념이다. 향후 열 번의 육상 국경의 세관 통과가 미리 걱정된다. 러시아 구간 운전에 따른 자동차보험 가입, 영어 표시 국제번호판 부착 등 준비를 병행한다. 다행인 점은 공통 경비를 보관 중인 일행의 짐가방이 세관검사에서 무사히 통관한 점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전쟁 제재로 달러와 신용카드 사용이 금지되고 사막 등 오지 통과 때문에 현금을 많이 가져갈 수밖에 없다. 세관 직원이 일행의 돈가방을 열어 보라고 했는데 위쪽만 살짝 보고 아래쪽은 확인하지 않아 모두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러시아 공무원은 생트집 잡기 등 악명이 높다고 여러 여행자에게 들었다. 1만달러 초과 세관 미신고로 처음부터 곤욕을 치를 뻔했는데 다행이다. 향후 교통법규 준수, 육상 국경 세관 통과 시 현금 분산 보관 등 큰 공부를 한다. ■ 연해주의 신한촌, 근현대 우리 민족 수난사의 현장 첫째 날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살았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독립운동가의 유적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처음 방문지는 ‘신한촌(新韓村)’ 기념탑이다. 스탈린에 의해 1937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한 조선인이 살았던 동네에 세워진 기념탑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북쪽 도시라 7월 날씨는 서울과 달리 덥지 않아 걸어가기로 했다. 러시아 키질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도로표지판은 도움이 안 된다. 낯선 외국 도시의 초행길임에도 휴대폰 구글맵을 켜고 걸어가니 큰 불편은 없다. 한 시간 걸어가니 약 90년 전 강제 이주된 조선인 거주지역이다.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마을인데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은 어느 단독주택 문 앞에 설치한 ‘서울거리’라는 작은 문패뿐이다. 서울거리 근처에 있는 신한촌 기념탑을 찾기 힘들어 지나가는 러시아 여성에게 물어봤더니 친절하게 기념탑으로 안내해 준다. 서민아파트 단지 모퉁이에 설치돼 있다. 그나마 철조망으로 막혀 가까이 접근은 안 된다. 기념탑의 기둥 셋의 의미는 ‘남한인, 북한인, 고려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일행이 근처 공원에서 야생화를 따와 약식으로 헌화하고 위로의 묵념을 했다. 철문에 누군가 붙여 놓고 간 빛바랜 노란색 리본에 쓰인 문구를 읽으니 숙연해진다. “조국의 후손임이 자랑스럽습니다. 대한민국이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해주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근현대 한민족 수난사의 대표적 사례다. 국가가 멸망하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격동기, 조선 역사상 최대의 변혁기이며 경험해 보지 못했던 혼란기에 살았던 함경도, 평안도 주민들의 애환이다. 19세기 말기 조선시대 두만강 국경지대에 살았던 주민들이 관리의 폭정과 부패, 과도한 세금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의 지린성, 러시아의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했다. 사람이 안 사는 황무지를 개척해 농사를 지어 생업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연해주지역은 청나라의 영토였는데 1860년 청나라가 서구 국가와의 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후 러시아에 빼앗긴 지역이다. 최초 이주는 1863년 두만강 근처의 13가구가 러시아 영토에 이주한 것으로 러시아 관리가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말 연해주지역은 인구가 많지 않아 러시아는 조선인의 이주를 관대하게 대했다. 러시아인은 고려인을 ‘카레이스키’라 부른다. 고려 사람이라는 뜻이다. 1937년 가을 스탈린은 연해주지역에 살던 17만여명의 조선인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유대인과 같은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시작이다. 조국이 없는 망국의 국민을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오늘날 약 50만명의 고려인 4세, 5세들이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 역사는 진행형이다. 강제이주 당시 신한촌에 아마 수만명이 살았을 것이다. 1930년대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대학, 중등학교, 많은 교회 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독립군에도 입대하고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자금도 지원했다. ■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자택 방문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한일병합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일본 경찰은 총기와 자금 지원 등 배후를 캐기 위해 안 의사를 심하게 고문했으나 안 의사는 끝까지 자백하지 않고 이듬해 뤼순감옥에서 총살됐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역사다. 안 의사에게 거사 자금을 지원하고 안 의사 사망 후 유가족을 보살펴준 사람은 최재형 선생이다. 안 의사는 거사 얼마 전 연해주에서 손가락을 절단했고 평소 최 선생 집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최 선생은 19세기 말 어린 시절 함경도 부모님을 따라 연해주로 가서 러시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러시아어 실력으로 군납사업 등을 해 당시 가장 성공한 기업인이 됐고 교민사회 후원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최 선생은 1920년 일본군에 의해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돼 즉결 처형됐다. 최 선생 기념패는 러시아 정부가 세운 것으로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3개 언어로 돼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말 설명은 없다. 특히 영어, 중국어 등 이름 표기가 ‘최재형’이 아니고 ‘최재현’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우리 영사관에서 향후 이름 오자도 바로잡고 한국어 설명도 추가해 다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기념패 내용은 “최재형(1858-1920)은 한국의 애국자, 독립운동가, 지도자다. 1962년 한국 정부의 건국훈장을 수상했다. 한국 언어와 한국문화 보급에 힘쓰고, 러시아문화를 한국인에게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지난 6월 모 신문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어렵게 사는 최 선생의 외증손녀 주택을 KT와 국가보훈부가 고쳐줬다는 훈훈한 기사를 읽었다. 장장 6시간을 걸었지만 울림이 있는 첫날을 보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블라디보스토크행 국제선 여객선에서

■ 동해의 국제여객선 선상에서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에 장맛비는 계속 강하게 내리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온다. ‘거친 바다가 훌륭한 선원을 만든다’, ‘삶의 과정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원과 같다’는 몇 가지 명언이 생각난다. 선원이나 어부들은 양면의 다른 얼굴을 가진 바다를 무서워했다.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 폭풍우와 높은 파도가 몰아치는 무서운 바다다. 과거 폭풍우와 태풍의 과학적 원인을 몰랐던 선조들은 바다 깊은 곳에 사는 용왕이 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봄·가을 좋은 날에 용왕님께 제사를 지냈다. 비바람 속에 블라디보스토크행 여객선은 7월2일 오후 3시 정시에 출발한다. 시속 30㎞ 속도로 가는 여객선은 블라디보스토크 도착까지 25시간 갇혀 있어야 한다. 처음 타보는 국제선 3등실 객실이 매우 비좁다. 갑판에 나가보면 비바람이 강하게 불고 짙은 해무(海霧) 때문에 시야가 수백m에 불과해 답답하다. 식사는 일률적으로 1만5천원짜리 한 가지인데 음식은 형편없다. 식권을 사서 1층에 설치된 뷔페식당에서 한다. 식당의 좌석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 줄 서서 기다리다가 앞 사람이 먹고 나면 다음 사람을 들여보낸다. 군대 배식처럼 식사시간 10분 전에 미리 줄을 서 기다려야 한다. 비행기와 달리 여객선은 가방을 손으로 가지고 타는 핸드캐리가 폭넓게 허용된다. 배에서 내릴 때 짐 찾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가져온 여행가방을 모두 직접 들고 배에 탔다. 샤워실은 복도 중앙에 있는데 수건이 없어 손수건으로 간신히 물기를 닦는다. 러시아인들은 한국 라면을 엄청 좋아한다. 휴게실에서 뜨거운 물을 제공하기 때문에 컵 라면을 안주삼아 술자리가 요란하다. 여객선 면세점에서 위스키 한 병을 샀다. 향후 통과할 지구의 지붕, 파미르고원의 산신령에게 작은 산신제를 할 생각이다. ■ 자동차 관련 여행 준비 제주도행 카페리에 차를 싣고 육지에서 제주도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다. 자동차를 외국으로 가지고 떠나는 자동차 여행은 국내 여행보다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 첫째, 영문으로 작성된 ‘자동차 여행증명서’가 필요하다. 자동차는 관세법에서 ‘휴대품’으로 분류한다. 자동차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동차의 차대번호, 제작 연도, 차량 종류 등을 영문으로 표시하는 정부의 증명서를 받아야 한다. 한국에서 가져간 자동차를 다른 나라에 팔고 빈손으로 귀국하거나 헌 차를 가지고 나가 새 차를 사 오면 안 된다. 사고 때문에 폐차가 아니면 차량을 다시 한국에 가져와야 한다. 특히 개인 소유 차량이어야 하고 법인 명의 차, 렌터카는 반출 허가가 나지 않는다. 동해항에서 자동차의 선적,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동차 반출 업무는 전문업자에게 위임했다. 둘째,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장기간 운행에 대비해 수리와 부품 교체를 미리 한다. 자동차 타이어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예비 타이어 한 개를 더 가지고 간다. 엔진, 에어컨 오일 등 각종 오일도 새것으로 교체한다. 우리는 자동차를 3대 가지고 간다. 차종은 미국의 사막 이름을 딴 ‘모하비’ SUV. 본인 차를 가져온 사람은 여행비용을 적게 내고 차를 안 가져온 사람은 비용을 더 부담한다. ■ 함께 여행 가는 동지들 여행을 함께 가는 일행은 8명이다. 전체 인원 8명을 동해항에서 처음 만났다. 유라시아 대륙의 자동차 여행에 대한 공통된 관심으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다. 우리 부부만 빼고 자동차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출신 지역도 여수, 임실, 제천, 이천, 서울 등 다양하다. 여성은 미세스 송 한 사람뿐이다. 미세스 송은 여행 도중 대화할 여성이 없는 점이 불만이다. 일행 중 한 사람은 러시아어과 재학생으로 러시아어 통역을 위해 두 달 동안 채용한 알바생이다. 출신지, 직업, 연령 등 모두 다르다. 차량 3대에 각각 두 명, 세 명, 세 명 나눠 탑승하고 운전은 교대로 하기로 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장기간 여행 중에 생길 수 있는 트러블이 걱정된다. 일행 간 상호 소통과 배려가 중요한데 끝까지 화합하며 다녀오기를 기원한다. 나와 미세스 송은 부부간이라 룸메이트 문제가 없지만 처음 만난 성인 남성들끼리 룸메이트 조화, 식사 메뉴 선택, 관광지의 선호도 등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염려가 된다. 우리 일행은 여행의 완주와 단합의 구호를 외치며 준비한 현수막을 앞세우고 동해항 대합실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 블라디보스토크항 도착 배는 망망대해 동해 바다를 가로질러 북동쪽으로 향한다. 과거 동서고금 공통으로 해가 뜨는 동쪽을 신성한 지역으로 생각했다. 아마 이런 의미를 담아 애국가 1절이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것 같다. 옛날 중국은 우리나라를 해동(海東)의 선비 국가라고 불렀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국가도 해가 뜨는 동쪽은 산 자의 땅, 해가 지는 서쪽은 죽은 자의 땅으로 구분했다. 드디어 다음 날 오후 늦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멀리 안개에 살짝 덮인 금빛 찬란한 러시아정교회 돔 양식이 보인다. 25시간 항해 끝에 도착한 것이다. 모든 항구는 출발점이면서 종착점이다. 고향에 돌아온 러시아 사람들에게 항구는 종착점이지만 유라시아 대륙으로 출발하는 우리에게는 이제부터 여정의 출발점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지배하라’는 의미로 19세기 러시아 제국주의를 상징한다. 선원들이 배에서 30명씩 끊어 순차로 내리게 한다. 배에서 내리는 데에만 3시간이 걸렸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출발, 시베리아 초원으로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는 금언이 있다. 삶의 과정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는 뜻이다. 학창 시절부터 오랫동안 꿈꿔 왔던 소망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싶은 소망이다. 누군가는 늦었다고 할 수 있지만 나에겐 가장 이른 지금, 70세를 기념해 이를 실천한 여행기를 싣는다. 경기일보 독자께 가슴 설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닿았으면 한다. ■ 오지로 자동차 여행 2024년 7월2일 오후 3시 동해항 여행터미널에서 카페리호에 자동차를 싣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한다. 국제선 출발 3시간 전, 출국 체크인을 위해 12시까지 동해항에 도착해야 한다. 아침에 서울에서 자동차로 영동선 고속도로를 타고 강릉 방향으로 향한다. 장맛비가 출발할 때부터 계속 내린다. 평창, 대관령에 들어서면서 강한 비에 산안개까지 진하다. 자동차 앞 유리창 브러시가 쉼 없이 움직여 더욱 마음이 심란하다. 이번 장거리 여행에 동반자로 함께 가는 아내(미세스 송으로 부름)의 심기는 매우 불안한 기색이다. 이번 여행은 설렘, 즐거움보다 뭔지 모르게 걱정, 불안 등 무거운 기분이 짙게 깔려 있다. 유라시아 대륙 횡단 자동차 여행. 서쪽으로 계속 가면서 북쪽과 남쪽으로 오르내리는 장거리 여행이다. 이동해야 할 거리도 약 2만2천㎞다. 여행사조차 관광상품으로 팔지 않는 오지, 초원, 사막, 반사막, 스텝지역, 고산지대를 운전해 가는 것이다. 낭만적이기보다는 고행길이고 터프한 여행이다. 여행을 결정한 이후부터 걱정의 연속이다. 장거리 여행 도중 미지의 세계에서 부딪치게 될 예측 못 할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다. 내 나이가 70세이고 미세스 송은 66세다. 나이가 드니 겁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함께 가기로 약속한 미세스 송의 불안감과 신경의 예민함, 수시로 자기는 빼고 나 혼자 떠나라는 하소연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한다. 동해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아들들, 손자들, 친구들과 보내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고 투덜댄다. ‘향후 나와의 여행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선언까지 한다. 불안감이 커질수록, 미세스 송의 반발이 커질수록 이번에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못 가게 된다는 생각으로 못 들은 척 무시한다. ■ 유라시아 대륙 여행 코스 자동차 양쪽 벽에 우리가 갈 여행 코스를 나타내는 대형지도를 붙여 놨다. 함께 가는 일행이자 자동차를 선두에서 리드하는 현대장의 아이디어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지겨워하는 한국지리, 세계지리 과목을 나는 좋아했다. 광대한 시베리아 초원, 유목민들이 살았던 사막, 스텝, 실크로드 유적, 카스피해 등 언젠가는 가보리라 생각만 했던 곳을 향해 드디어 출발한다. 통과하는 국가는 러시아, 몽골, 중국,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재입국, 조지아, 튀르키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서쪽 시베리아를 따라 바이칼호로 간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와 몽골을 지나 중국으로 들어가는 코스다. 험하기로 소문난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사막, 카라쿰사막, 키질쿰사막을 통과해야 한다. 몽골고원, 파미르고원, 톈산고원, 아나톨리아고원 등 고산지대도 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자동차 여행이 무척 힘든 나라다. 지구 반대편의 서유럽 국가는 국경 통과가 자유롭고 맘만 먹으면 자동차로 동유럽, 튀르키예, 러시아, 중앙아시아 국가를 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륙으로 가는 길목을 북한이 가로막고 있다. 북한을 우회해 카페리에 자동차를 싣고 인천에서 중국 산둥반도로 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은 자동차 여행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제네바협약) 미가입국이다. 우리나라 관세청에서 중국으로 자동차 여행을 위한 승용차 반출 허가가 나지 않는다. 이에 불가피하게 러시아와 몽골을 경유, 중국의 네이멍구로 우회하기로 여행계획을 짰다. ■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국제여객선 탑승 동해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거리로 900㎞, 운항 시간은 25시간이다. 일주일에 한 번만 왕복하는 국제선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으로 러시아로 들어가는 항공편이 중단됐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 편이 유일하다.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니 대다수 승객이 러시아인이다. 러시아 언어만이 대합실에서 시끄럽다. 키도 크고 몸도 뚱뚱한 사람들이 많다. 마치 어느 러시아 지역에 온 것 같다. 배에 싣고 갈 보따리가 많다. 상당수가 보따리상이거나 누군가의 부탁으로 짐을 가지고 가는 것 같다. 아침 출발할 때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더욱 강해지고 계속 내린다. 배가 정시에 출발할지, 파도가 높으면 배 멀미는 어떨지, 당초보다 운항 시간이 훨씬 늘어날지 걱정이다. 여객선 예약이 늦은 관계로 선실은 10여명이 함께 쓰는 3등실이다. 러시아 사람도 몇 명 같은 방에 있다. 사람당 퇴색한 갈색 매트리스와 베개 하나씩 배정됐다. 꼭 설악산 등산객 산장처럼 매트리스가 촘촘하게 붙어 있다. 이러한 상태로 25시간 누워 갈 생각을 하니 한심하다.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면 누워 있는 옆 사람을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출발 첫날부터 예상보다 매우 불편한 여정이다. 미세스 송은 말은 안 하지만 정말로 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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