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사강달리, 전투적 여행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장前 관세청장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지대

한 폭 그림 같아

 

서쪽 하늘엔

타오를 듯한

붉은 노을

 

러시아 민요

흥얼거리며

땅거미를

기다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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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옆 시베리아 초원에 피어 있는 야생화. 작가 제공

 

자욱하던 토탄 연기도 사라지고 아름다운 수목, 초원, 하늘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오늘은 670㎞ 떨어진 ‘사강달리’에 도착해야 한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므로 평소보다 일찍 출발한다. 자작나무, 소나무, 전나무 숲속을 달리는 구간은 적어지고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차창 밖의 멋진 초원의 야생화를 보면서 달리는 드라이브는 최고다. 위도가 북위 52도로 약간 남서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고위도 지역이라 늦게 핀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다. 시베리아 대평원 고위도 지방의 야생화는 대체로 단색이고 옅은 색상이다. 한국 봄날의 화려하고 진한 원색의 야생화는 보기 어렵다.

 

산들바람이 초원을 스쳐 지나가고 하얀 뭉게구름, 솜털구름이 멀리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며 떠 있다. 며칠 만에 보는 한가한 목가적인 전원풍경이다.

 

서쪽으로 달리면서 소나기가 가끔 뿌리며 지나간다. 소나기 다음에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나타난다. 자동차는 연초록색 물결의 평화로운 바다를 달리고 있다.

 

우리는 현재 자동차 ‘노마드족’이다. 특정 목적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즐긴다.

 

고요함, 침묵, 자유, 목가적, 광활함, 평화로움, 한가로움, 멈춤, 느림, 여유, 단순함, 원시적, 모성적 대지, 어머니의 품, 사랑, 대자연 등 평안한 단어를 생각하며 달린다.

 

단어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 무한한 상상력의 경계선을 넘나들 수 있다.

 

논어에 ‘심재(心齋)’라는 단어가 있다. ‘마음의 비움’을 심재라고 한다. 마음을 비우는 방법으로 공자는 제자 안회에게 말한다.

 

“첫째, 귀로 듣는 것을 마음으로 듣는 것으로 바꾼다. 그다음 마음으로 듣는 것을 기(氣)로 듣는다.” 기는 한국과 중국 등 동양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로 생명력, 에너지, 원기 등 우주의 기본적 요소다. 시베리아 대평원의 기를 마음속에 받으며 달리고 있다.

 

■ 두 번째 심각한 자동차 고장

 

기쁨과 평안함의 시간은 오전까지였다. O사장의 차는 출고된 지 10년, 주행거리 20만㎞의 오래된 차다.

 

출발 전에 열악한 도로 사정을 감안해 바퀴 교체, 오일 교환, 엔진 출력 확장 등 많은 돈을 들여 수리한 차라고 한다.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러시아 극동군사령부가 있는 군사도시 ‘치타’에서 약 30㎞를 갔을 때 갑자기 O사장의 차가 엔진 출력이 떨어지고, 속도가 줄고, 검은 연기가 펑펑 나온다. 일행이 멈추고 자동차 전문가인 우리 차 카메이트 L실장이 보닛을 열고 살펴본다.

 

중요한 부품 ‘터보’에 미세한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 계속 달리면 차가 도로에 멈추는 상황이 생긴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치타’ 도시에 한국 기아차 딜러 회사와 정비소가 있다.

 

치타 정비소에 전화로 예약을 하고 30여㎞를 후퇴해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뒤돌아가는 일행 모두 불안한 상황이다. 정비사는 구멍 난 터보 부품을 새것으로 교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품을 서울에서 공급받으려면 2주일이 걸릴 것이다.

 

L실장의 아이디어로 터보의 작은 구멍을 임시로 끈으로 동여매고 가기로 한다. 두 시간 이상을 치타 정비소에서 소비했다.

 

치타에서 숙소 ‘사강달리’까지 370㎞를 더 가야 한다. O사장 차는 평지나 내리막길은 정상 속도로, 오르막길은 시속 60~70㎞로 느리게 운전해 간다. 이번 여행을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혹시나 해서 가는 중간에 있는 구글로 정비소를 검색해 보고, 전화를 걸어보니 시골 도시 정비소 주인이 응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시골의 자동차 정비사를 만난 시간이 오후 9시다. 이 정비사도 방법이 없다고 한다. 최악의 경우 초반기 여행이 중단되는 비관적인 시나리오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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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정비소 골목의 오후 9시경 마을 풍경. 작가 제공

 

터보 수리에 도움도 못 받고 정비소 두 곳을 찾아 헤매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정비소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석양의 찬란한 낙조(落照)가 시작됐다. 초원에서 방목하는 말들이 해질 무렵 주인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목가적이다.

 

■ 석양을 뒤따라가며 낙조를 즐긴다.

 

위도가 높은 지역이라 해가 완전히 지는 시간은 오후 10시쯤이다. 오후 9시 이후부터 서쪽 하늘에 화려한 낙조의 시작이다.

 

해가 떨어지는 대평원의 서쪽을 향해 자동차도 서쪽으로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우리는 서쪽으로 운전하면서 오후 10시까지 시베리아 대초원으로 해가 넘어가는 붉은 노을을 뒤따라가는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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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대평원의 석양 풍경. 작가 제공

 

이동하면서 관찰하는 대평원의 장시간 낙조는 5분, 10분 짧은 시간에 해가 바다로 떨어지는 서해안 낙조와는 다른 체험이다.

 

자동차 고장으로 두 곳 정비소를 들르느라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쳤는데 그나마 아름다운 낙조를 한 시간여 감상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

 

성악 전공의 K교수님이 동화적, 몽환적 석양을 보면서 러시아 민요 ‘더 이브닝 벨(The Evening Bell)’ 노래를 무전기로 얘기한다. 유튜브에서 더 이브닝 벨 곡을 틀어들으며 가니 마음이 안정된다. 가사는 아래와 같다.

 

“저녁 종소리 저녁 종소리/너희는 전해야 할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전했니/젊음과 집, 그리고 행복한 시간/내가 마지막 너희에게 들려주었던 노래/그 종소리 사라지고 행복했던 지난 날들.”

 

K교수가 ‘검은 눈동자’ 등 여러 러시아 민요곡을 알려줘 유튜브에서 들으며 지루한 마음을 달랜다. 러시아 민요는 전반적으로 애절하며 차분해 우리의 정서와 비슷하다.

 

오후 11시 늦게 숙소에 도착했는데 최악의 여관이다. 방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별도로 없다. 여관 전체에 샤워실 겸 화장실이 복도에 한 개 있는데 공동 화장실이다. 아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못 들어가도록 복도에서 보초를 서야 한다.

 

화장실이 없는 사막에서 용무가 필요할 때 사용하려고 우산을 준비해 갔는데 시베리아 화장실 환경도 보통이 아니다. 일행 중 두세 명이 배탈이 나 화장실 출입이 잦은데 화장실 여건은 최악이다.

 

저녁 식사와 샤워를 하고 나니 오전 1시다. 오전과 오후는 낙관과 비관, 천당과 지옥 정반대의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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