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곤의 말글풍경] TV 오락프로그램의 ‘호칭 인플레’

방송사에서 예능 프로그램은 큰 수익원이다. 광고나 협찬이 거의 집중된다. 차치하고 예능이란 이름이 맞나. 공자는 정명순행(正名順行)이라 했다. 실제에 부합하는 이름이라야 매사가 합리적으로 진행된다는 뜻.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해야 걸맞다. 예능과 오락은 엄연히 다르다. 예능은 재주와 기능의 영역이며 음악·미술·연극·영화 따위의 예술과 관련된 능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분야를 제외한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오락 프로그램이다. 오락은 쉬는 시간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분을 즐겁게 하는 일이란 의미다. 독일말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운터할퉁(Unterhaltung·오락)은 반드시 대화와 환담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공연이나 퍼포먼스 위주는 예능 프로그램, 토크와 재담 따위의 구성은 오락 프로그램으로 바루어야 제대로 된 이름이다. 오락 프로그램에서의 호칭은 무엇이 문제인가. 언제부턴가 연예인들이 우르르 나와서는 “아무개가 아무개보다 형. 네가 그러니까 동생. 인제 보니 누나네.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 언니였어요? 몰랐어요”라며 키득대는 모습을 본다. 몹시 잔망스럽고 보기 불편하다. “나이가 자기보다 곱절이 되면 아버지처럼 대하고, 열 살 이상 위면 형으로 대하며, 다섯 살 정도 차이면 웬만큼 공경하는 게 좋다.” 조선시대 학자 이율곡의 말이다. 적어도 열 살 차이는 나야 형∙동생 관계이니 요즘에 적용하면 초등학생에게 대학생은 물론 형이지만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친구뻘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현실과의 괴리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서너 살, 아니면 대여섯살 차이를 갖고 서열화∙위계화하는 모양새는 외려 퇴행적이다. 나이가 좀 위랍시고 상대에게 들입다 “야, 너” 반말을 하고 그 반대면 이내 ‘형님, 누나, 오빠, 언니’ 하는 모양새가 오히려 비례(非禮) 아닐까. 웬만한 나이 차이에서는 서로 높임법을 쓰고 적당한 거리를 두다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예사말을 쓰던 이전 세대의 모습이 차라리 낫다. 3~4세 안팎은 서로 아무개씨 하는 적당히 낙낙하고 느슨한 관계가 바람직하다.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예사말의 존재감을 망각하는 부박함이 안타깝다. 지칭(指稱)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진행자∙출연자들이 나이∙지위가 위인 사람들을 언급하며 형님∙누님에서부터 대표님∙사장님∙선생님∙대선배님 운운하며 극존칭을 쏟아낼 때 시청자는 당혹스럽다. 또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신인급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함부로 하대(下待)하는 따위도 생각 없기는 마찬가지다. 방송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시청자가 중심이며 주인이다. 연예인 특유의 라포(Rapport·친근감)를 앞세워 얼토당토않은 극존칭을 쓴다거나 역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하는 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의 구현을 방송 프로그램이 가장 자주, 크게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차제에 연예인 관련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오빠’를 다뤄보자. 오빠는 이제 ‘손위 남자 형제를 부르는 친족어’로서의 기능보다 연인이나 젊은 부부 사이에서 여성이 남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더 친숙하다. 명절 때 ‘오빠’를 부르면 친오빠와 남편이 동시에 돌아본다는 아내들의 경험담이 익숙한 현실이다. ‘오파(opa)’는 놀랍게도 글로벌적(?)이다. 독일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에서는 ‘할아버지’의 애칭 혹은 노인을 뜻하고 스페인어로는 ‘바보·멍청이’, 또는 ‘안녕‘이라는 인사말로 쓰인다. 우즈베크어는 ‘누이·형’을 아우른다. 그리고 베트남어는 희한하게도 우리처럼 그대로 ‘오빠’의 의미다. 케이팝 팬들의 ‘오빠, 오빠’ 아우성은 그래서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오빠에는 그런데 음습한 면도 있다. “아저씨가 뭐야. 오빠라고 불러, 오빠 믿지?” 이런 경우는 젠더(gender)의 위계를 교묘히 악용하는 사례 아닌가. 그 사람 자신을 뜻하는 ‘자기(自己)·자기야’가 차라리 상대를 직접 부르지 않고 간접 소환하는, 괜찮은 완곡어법이라는 생각이다. ‘자기’를 과감히 재소환하고 ‘오빠’는 다시 친족에게만 쓰는 건 어떨지. 물론 케이팝 팬의 ‘오빠’는 그 자체로 단단한 성채이니 손댈 일은 아니다.

[강성곤의 말글풍경] 남발하는 ‘앵커’ 호칭, 불편하다

호칭의 문제는 범주상 언어예절에 속하며 크게 보면 표준화법 테두리 안에 있다. 여기서 표준이라는 것은 절대적 구속력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실효적인 교집합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근사하고 세련된 화법을 구사할 수 있을까. 지칭·호칭에 있어 지향점은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의 실현에 있다. 물론 오만과 무례는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혁신과 창의성을 탑재해야 할 것이다. 방송미디어는 어떨까. 뉴스 프로그램에서의 호칭을 다뤄본다. 우선 앵커(맨)다. 1960~70년대 종합뉴스 시대를 연 미국의 월터 크롱카이트가 효시다. 1980~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 CBS의 댄 래더, NBC 톰 브로코, ABC 피터 제닝스는 소위 3대 앵커맨으로 불렸다. 본디 닻(anchor)을 내리는 사람, 중심을 잡아준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카리스마 시대가 아니며 뉴스 아이템의 신속성과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 영국은 프리젠터(presenter)라고 하지 앵커라고 하지 않는다. 독일 및 프랑스도 모데라토어(moderator), 프레상테퇴르(présentateur), 즉 진행자 개념이다. 일본은 앵커 대신 게스다(캐스터·キャスタ)를 쓴다. 중국은 주츠런(主持人), 즉 뉴스를 주되게 이끈 사람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요컨대 앵커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며 특히 호칭의 쓰임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독 앵커에 부질없는 애정을 부여잡고 남발하는 우물 안 개구리는 대한민국 방송사들 뿐이다. 사회의 큰 이슈, 이벤트가 있으면 앵커 명칭의 난장이 TV에서 펼쳐진다. “광화문광장에 나가 있는 이지연 앵커를 불러봅니다. 이지연 앵커!”, “예. 이지연입니다.”, “이 앵커, 지금 그곳 분위기 어떻습니까?”(자막에 ‘이지연 앵커’) / “이번엔 인천공항, 김영호 앵커를 연결합니다. 김영호 앵커!”, “네, 김영홉니다. 공항이 꽤 붐비네요.”, “김 앵커, 상황 전해주시죠.”(자막 ‘김영호 앵커’) 무신경에다 군더더기 투성이다. 때론 아무개 정치부장, 아무개 경제부 차장이라며 사내 직위를 자막에 띄우고 호칭으로 쓰기도 한다. 직함·직책·보직 추종 사회 습속이 적나라하게 발현되는 모습이다. 위계·서열·귄위주의의 그림자가 여전하다는 징표 아닌가. 호칭이 소거되면 왠지 어색하고 불완전한 느낌의 불안심리와도 맥이 같다. 대안은 무엇일까. 비우고 덜어냄의 알고리즘이다. “워싱턴의 볼프강 뮐러 연결합니다. 볼프강, 이번 사건이 테러와 연관이 있나요?” / “작센주 청사에 동료 에바가 나가 있습니다. 극우 시위가 다시 불붙는 모양새군요?”(자막 ‘에바 리히터’) 독일 공영방송 메인뉴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앵커나 기자를 호칭으로 안 쓴다. 어지간하면 이름만 부르며 간혹 베테랑급 시니어가 현장에 있을 때 성(性)과 이름을 함께 불러준다. 미국 영국 프랑스도 마찬가지. 일본 중국만 우리처럼 기자 호칭을 사용한다. “경제·금융 담당하는 박상민, 나와 있습니다. 상민(씨)?” / “다음은 수원컨벤션센터 연결합니다. 예진! 외국 기업이 얼마나 왔나요?”(자막 ‘최예진’) / “일산 킨텍스에 나가 있는 동료를 불러볼까요? 희선, 관람객이 많이 보이네요.”(자막 ‘정희선’) 깔끔하고 산뜻하지 않은가. 초기엔 어색할 수 있지만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불러튼 뉴스(Bulletin News·단신 위주 스트레이트 뉴스)의 리드(lead)도 개선이 필요하다. “한명준이 보도합니다.”, “강수영의 보돕니다.”, “보도에 윤기줍니다.”, “신지은이 취재했습니다.”, “취재에 임서진입니다.”, “조연아가 전합니다.”, “윤종혁입니다.” 이런 식이 세련되고 겸허하며 글로벌 트렌드에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쾨쾨한 인정 욕망을 내려놓고 담박하게 뉴스에 임하면 시청자도 환영할 터. 차제에 그 비장감 그득한 장엄서곡풍의 시그널 음악도 소박·담박해지면 좋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그토록 표나게 드러내야만 하는가. 되레 진부하고 식상하다. 모름지기 익숙한 것과의 결별 없이 진화와 발전은 난망한 법이다. 미니멀리즘과 스칸디나비아 노르딕 스타일이 각광 받듯 단순⸱간결의 가치와 미덕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다. 한중일의 동양적 친연성에 안주할 일이 아니다. K-컬처 당사국답게 앞서 나가야 한다.

[강성곤의 말글풍경] 일단은 되게 개인적으로

KBS에 있을 때 면접관 노릇을 자주 했다. 방송사는 PD, 기자, 아나운서의 경우 논술, 작문, 상식 등 필기시험을 통과하면 최종 면접 전에 실무적성시험을 치른다. 보통은 3차 시험을 대신하게 되는데 자기소개서와 관련된 질문과 함께 각 직무영역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하는 잣대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게 평소 언어생활 습관이다. 응시생의 교양, 지식과 함께 발음, 말투, 어조 등을 눈여겨본다. 단어만 놓고 봤을 때 요즘 젊은이들은 유감스럽게도 과거보다 퇴보한 듯 보인다. 구사하는 낱말도 상대적으로 적고, 적절하고 세련되고 정제된 표현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것처럼 느껴져 아쉽다. 세 가지만 추려본다. ①되게 영어 very에 해당하는 우리 부사는 매우 다양하다. 매우, 무척, 퍽, 사뭇, 썩, 꽤, 제법, 대단히, 정말, 참, 상당히, 몹시, 자못 등. 이를 맥락과 상황에 맞게 잘 가려 쓰면 세련된 우리말 화자로 인정받을 만하다. 그런데 유독 ‘되게’가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지배적으로 쓰인다. 언중의 자연스러운 선택 차원에서는 인정해야 하는 면도 있지만 그저 대충 편한 것만을 좇는 세태를 따른 것이라면 문제다. 발음도 대개는 [데게], [대게]로 잘못 낸다. ‘되게’의 범람은 단연코 우리의 거친 말글살이의 반영이다. 가장 조악하고 비루한 very가 바로 ‘되게’다. “직접 가보니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이제는 피아노를 제법 잘 치는 구나”,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무척 슬펐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매우 다양한 계층이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려 퍽 당황했겠군”, “그 옷은 썩 잘 어울리는구나”, “날씨가 몹시 추웠습니다”, “이번에 예정된 사업은 자못 기대됩니다”. 어떤가. 밑줄 친 부분에 ‘되게’를 넣은 것보다 낫지 않은가. 훨씬 교양 있고 스마트해 보일 것이다. ②개인적으로 바야흐로 ‘개인적으로’ 광풍이다. 특히 방송 출연자들이 더하다. 극단적인 오⸱남용이다. 영어 ‘I personally~’를 배후로 보고 있다. 서양인들은 자기 의견과 타인의 생각을 철저히 구별하는 데 익숙하다. 무언가를 인용할 요량이면 손가락으로 인용부호를 치며 말하는 게 습관화돼 있다. 이 대목이 발원지이고 시나브로 퍼진 듯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의 유행은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 확신의 부족, 책임 회피, 반대 의견 피력에 대한 두려움과 맞닿아 있다. 대화와 소통은 어차피 개인들끼리 벌이는 의견⸱생각⸱주장의 마당이다. 스스로 조직이나 단체를 대변할 경우는 극소수일 테다. “저는 ~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내용이 길어 별도의 텍스트가 필요할 때)”가 무난하다. 발음도 문제다. 적(的)의 발음은 유의해야 한다. 우선 ‘적’ 포함한 음절 수가 둘일 때, 가령 지적(知的)⸱미적(美的)⸱동적(動的) 같은 경우는 무조건 [쩍]으로 소리 난다. ‘적’이 들어간 3음절 이상 단어일 때는 그 앞 글자의 받침이 ‘ㄴ/ㅁ/ㅇ’이면 [적], 그대로 발음한다. [개인적] [미온적] [양심적] [성공적]이다. ‘ㅂ/ㄱ’일 때는 [쩍]이 된다. [합뻡쩍] [공격쩍]으로 소리 난다. ‘ㄹ’은 원칙적으로 [쩍]이나 점점 [적]으로 가는 추세다. [자발쩍] [저돌쩍] [정열쩍]은 된소리가 자연스럽고 [법률적] [포괄적] [현실적]은 예사소리, 즉 평음(平音)이 부드럽다. 평음의 경음화(硬音化)라는 큰 파도 속에 그 역(逆)의 분투는 반가운 일이다. ③일단(은) 말을 시작하고 나서 다음 말이 잘 생각 안 날 때 습관적으로 쓰는 것을 마주한다. ‘일단(은)’은 사전적으로 ‘우선 먼저’ ‘우선 잠깐’의 의미다. 그러니까 ‘나중’, ‘다음’이 뒤에 붙어야 자연스럽다. “일단 검토하고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일단은 경과를 보고 다음 일정을 잡겠습니다” 등이 바른 경우다. “(최근 본 영화 중 인상적인 게 있나요?) 일단은 없고요. 음~”, “이 책은 비타민의 허와 실을 잘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일단 드네요”는 그래서 적절치 않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습니까.” “네, 저는 일단은 개인적으로 소설을 되게 좋아하는데요.” 안타까운 일이다.

[강성곤의 말글 풍경] 축구·야구 중계방송의 단어와 표현

전문 케이블 방송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지상파 방송의 위상과 영향력이 예전같지 않다. 특히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이 여럿 생겨 웬만한 스포츠 이벤트는 안방에서 즐길 수 있는 세상이다. 종편마저 왕왕 빅이벤트를 독점 중계하고 심지어 연예·오락 채널이 해외에서 펼쳐지는 A매치를 소화하기도 한다. 짚고 갈 문제가 있다. 채널이 다양하고 볼거리도 많은데 중계 캐스터의 스포츠 방송언어는 과연 어떠한가. 해설자와의 호흡도 관건이다. 무엇보다 수준 높고 다원화한 누리꾼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세상이다. 남발되는 외래어와 부정확한 경기용어 사용, 그리고 적절치 않은 상황 묘사 등이 자주 지적되곤 한다. 본격 개막한 야구·축구 시즌을 맞아 몇몇을 추려본다. 우선 축구다. ①‘치고 들어가는 ○○○’: 관성으로 답습하는 잘못된 표현이다. ‘치다’의 주체는 손이어야 한다. 발은 ‘차다’다. 실제 상황은 사람 혹은 사물을 친 경우가 없다. 공은 차는 것이고 사람은 치는 것인데 그저 순간적, 역동적으로 드리블하는 걸 습관적으로 ‘치고 들어간다’고 표현하곤 한다. 잘못이다. 오래됐고 익숙하지만 버려야 한다. ②‘○○○ 선수, 서두르지 않습니다’: 패스할 선수가 마땅치 않아 볼을 어쩔 수 없이 붙들고 있을 때도 많다. 캐스터는 전문가도 아니지만 평범한 관전자여서도 안 된다. 절대다수 관전자인 시청자의 특급 도우미 역할이 책무다. 정보와 재미, 그리고 열정으로 무장한 채 경기를 적실하게 묘사하고 이 장면, 저 상황의 궁금증을 해소해줘야 한다. 모름지기 경기를 잘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기 자체를 평소에 많이 관전하고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③‘업사이드’(발음)→‘오프사이드’(off-side)다. 베테랑들이 더 많이 틀린다. 과거엔 외래어 발음을 대충 해도 그냥 넘어갔다. 이제는 축구 덕후 시청자도 적지 않다. 업사이드(upside)는 ‘긍정적인 면’이라는 뜻의 전혀 다른 단어다. ④‘드로잉’(발음)→‘스로인(throw-in)’이다. 영어 발음 표시 ‘θ’이기에 ‘ㅅ’으로 표기하고 발음한다. ‘ð’가 ‘ㄷ’이다. ⑤해트트릭보다 더 많은 한 선수의 네 골 기록은 ‘포트트릭’이 아니라 ‘퀴드러플(quadruple)’이다. 다음은 야구다. ①‘밀어쳤습니다’: 배트가 밀리거나 늦은 스윙 탓에 소위 ‘먹힌 타구’가 적지 않다. 타구의 속도나 타격음에 따라 냉정히 판단해야 한다. 상황이 애매하면 멘트하지 않는 게 오히려 낫다. ②‘하나, 지켜봅니다’: 선구안이 좋은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망설이거나 주저하다 미처 못 친 경우도 많다. 판별을 잘해야 한다. 역시 실전 경험과 정확성을 벼리는 ‘매의 눈’이 필요하다. ③‘높게 띄워 봅니다’: 뭔가를 ‘해 보다’는 시도·연습이다. 타자가 일부러 플라이볼을 날리려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외야 플라이(희생타)라도 멀리 날리려 할지언정 높게 볼을 쳐볼까 하는 타자는 상상하기 힘들다. 큰 타구를 치기 위해 어퍼스윙(upper swing)을 하는 것을 ‘띄워 보다’라고 하는 건 잘못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쏘아 올렸습니다’도 자주 접한다. 역시 잘못이다. 활, 총, 대포 따위의 무기가 어떤 목표를 향해 발사돼야 적당하다. 타구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④‘3루 간 뚫습니다’: ‘3유 간’이다. 유격수(遊擊手)의 앞 글자 ‘유’를 말한다. 타구가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빠져나간 거다. ⑤‘좌(우)중간 완전히 갈랐습니다’: 외야수가 공중볼을 잡지 못한 상태로 볼이 튀거나 굴러 펜스까지 도달해야 가능한 표현이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를 쓰기엔 무리가 있다. ⑥‘담장~~ 넘어간다. 넘어간다’: 스포츠중계도 경어체에 격식체는 적용된다. 방송이기 때문이다. 자기 감정을 날것으로 표현하면 안 되는 이유다. 왜 난데없이 반말인가. 뜬금없는 독백(獨白)은 우습다. ⑦직구?: 속구(速球)로 바뀌었다. 패스트볼(fast ball)이라는 원래 야구용어 의미와도 부합한다. ⑧‘백홈, 들어옵니다’: 의외로 많이 틀린다. 백홈(back-home)의 주체는 주자가 아니라 야수가 던진 볼이다. ‘백홈, 그러나, 아무개 홈인!(들어옵니다.)’이라야 맞는다. ⑨‘롱 태그’: 포수가 2루로 도루하는 주자를 아웃시키려 던지는 송구는 ‘롱페그’다. 길게(long) 던지는 빨래집게(peg) 같다는 거다.

[말글 풍경] 외래어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 下

우리 외래어 표기법은 원음주의(原音主義)를 뼈대로 한다. 한자(漢字)를 공유하는 대표적인 두 나라 일본과 중국에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곧 중국어·일본어 표기를 글로벌 언어 체계와 함께 다룬 것. 동양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았고 한국어의 문자 및 음운체계에 예외적 허용을 거절했다. 물론 한중일은 역사·정치·문화가 다른 여느 나라에 비해 유사하고 밀접하다. 그러나 모름지기 어문규범을 관통하는 일관된 정신, 간결성·체계성·통일성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1988년 개정된 이래 현재까지 시행 중인 외래어 표기법(문교부 고시 제85-11호)은 오롯하다. 일부 기관·단체명·상호 등의 표기가 생경하고 조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문규범 자체를 함부로 손대는 건 근시안적이다. 중국·일본 인명·지명의 한국음화(韓國音化)는 더 큰 부작용을 낳는다. 중국어를 잣대로 문제를 짚어보자. 첫째, 난삽한 한자의 범람 문제다. 우선 인명. 중국인 이름을 우리 식으로 발음하려면 그 한자를 독음(讀音)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대다수 국민에게 한자 읽기는 여전히 큰 부담이다. 모택동(毛澤東)·등소평(鄧小平)·주은래(周恩來)의 친연성에 함몰돼 요즘 화제인 인공지능(AI) 기업 딥시크의 주역 량원펑과 뤄푸리를 양문봉(梁文鋒), 나복리(羅福莉)로 해야 할까. 중국 인명에 등장하는 한자는 그 범위와 종류가 상상 이상이다. 난삽한 한자들이 우리 눈을 어지럽힐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중국 인명을 소리 나는 대로 중국음에 따라 적는 것이 합리적이다. 지명의 경우도 광둥성의 광저우(廣州)를 ‘광주’라 표기하면 경기도 광주(廣州)의 정체성은 난감해진다. 후난성(湖南省)·허난성(河南省)도 호남성·하남성이 돼 그 유사성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또 이 땅의 수많은 주(州)·산(山)·천(川)으로 끝나는 지명은 뜻 모를 열패감에 사로잡힐 개연성이 농후하다. 둘째, 글로벌화에 어긋난다. 동양권의 인연을 볼모로 세계화를 멀리하는 것은 어리석다. 세계인이 시진핑·라이칭더(대만 총통)라고 하는데 우리만 습근평(習近平)·뇌청덕(賴清德)을 고집할 것인가. 중국 인명·지명의 한국음화는 하나를 얻고 열을 잃는 결과다. 한자를 따로 익혀 그들의 이름과 땅을 우리 식으로 읽으면 끝나나. 그것이 통용되는 글로벌 표준, 곧 이들의 본이름을 따로 기억해야 하는 큰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참고로 중국 인명은 신해혁명(1911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 인물은 한국음, 이후 인물은 중국음으로 하는 양해 규정을 뒀다. ‘공자·맹자’를 ‘쿵쯔·멍쯔’로 하기엔 뜨악하지 않은가 말이다. 신해혁명이 기준점인 이유는 봉건 왕조의 몰락, 중화민국의 탄생을 역사 변환의 큰 물줄기로 본 것. 손문(孫文)이 아닌 ‘쑨원’, 원세개(袁世凱)가 아니라 ‘위안스카이’인 이유다. 지명은, 모호하긴 하지만 아주 익숙한 지명일 때 중국음을 인정한다. 북경·상해·대만·대북 등이다. 셋째, 일본어와의 형평성 문제다. 한자를 공유하면서 중국과 일본을 차별하는 것은 우습다. 현 총리 이시바 시게루를 석파무(石破茂)라고 하면 생경하다. 촌상춘수(村上春樹)는 누구인가. 유명인이지만 이제 이 사람을 이런 식의 한국음으로 기억할 필요가 없다. 한국음을 발화(發話)했다고 해서 자주성이 고양되는 게 아니다. 일본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일본 인명을 무심히 독음하는 게 우리 외래어 표기에 걸맞다. 이 점을 망각해선 안 된다. ‘촌상춘수’라 하지 않고 그저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豊臣秀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의 유혹은 그래서 무효(無效)하다. 지명의 한국음 표기 주장은 더 옹색하다. 찰황(札幌)·충승(沖繩)·횡빈(橫濱)은 과연 어디를 말하는가. 삿포로·오키나와·요코하마면 충분할 터. 우리는 일본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일본 인명과 지명을 우리 표기대로 발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익숙한 지명은 역시 예외를 둔다. 동경·대마도·북해도 등이 속한다. 외래어를 둘러싼 여러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일부 개선의 여지도 있으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은 무엇이 시대정신에 걸맞고 미래지향적인가에 대한 숙고와 통찰이다.

[말글 풍경] 외래어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 上

적잖은 사람들이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 이견과 의문을 제기한다. 타당성과 일리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외래어 전반과 우리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한다. 가장 큰 오류는 외래어와 외국어의 의미 구분과 역할 및 기능을 혼동한 채 외래어 표기를 외국어의 적극적 활용을 위한 잣대로 삼으려 한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전제가 외래어 표기는 우리 국민의 언어생활을 위해 만든 것이지 외국인이나 외국인용 회화를 위함이 아니라는 것. 이제 세상은 글로벌화됐다. 수많은 경제·사회·문화·정보기술(IT) 분야 신어(新語)들이 명멸한다. 그 많은 용어·개념어를 일일이 순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가령 Taxi라는 단어를 보자. 보통 그 Taxi는 ‘택시’라는 익숙한 한국어식 발음을 탑재할 것이다. 평범하게 ‘택시’라고 부를 때 이것이 외래어적 쓰임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외국인을 위해 “Can I get a Taxi for You?” 했다면 어떨까. 이럴 땐 아마 최대한 영어식 원어 발음으로 Taxi를 구사할 가능성이 높을 터. 이때의 Taxi는 외국어적 활용이라고 하겠다. 정리하면 이제 개별 단어가 더는 외국어인가, 외래어인가의 원천 속성을 타고 나지 않는다. 우리 국민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한 한국어식 발음이면 외래어, 외국인용 회화를 위해 원음처럼 소리 내면 외국어인 것이다. 그러니 서로 내국인이라는 조건에서 외국어식 발음을 고집하는 축은 이 기준에 무지하거나 이를 무시·왜곡하는 경우가 되는 셈이다. 10여년 전 불행했던 ‘오렌지·어륀지’ 사건(?)이 바로 이 대목과 관련이 있다. 외래어 표기는 원지음(原地音)에 최대한 가깝게 적되 우리 음운체계와 법칙에 합당해야 한다. 이 둘이 상충하는 경우 후자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게 옳다. 가장 논란이 많은 ‘f’ 발음의 경우를 보자. 우리 표기법은 이를 ‘ㅍ’ 하나로 대응시키고 있다. 여기에 대한 불만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f’를 한글이 못 살리니 새로운 기호로 대체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ㅎ’이나 ‘후’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새 기호 운운은 외래어 표기를 위해 제 나라 자음을 일그러뜨려야 하는 부담에다 ‘v’ 발음도 고려해야 하며 그 밖의 주요 외국어의 독특한 자음과의 형평성 문제도 발생한다. ‘ㆄ’를 만들어 ‘f’로 하자는 주장은 시기상조다. 무엇보다 새 자음에 대한 필요성이 보통의 국민에게 그토록 절실할까에 대한 의문이다. 그것을 새로 익힌다는 게 얼마나 번거롭고 까다로울 것인가. ‘f’의 ‘ㅎ’ 적용 주장은 설득력이 더 약하다. 예컨대 ‘fight’를 ‘파이트’로 적으면 이상하니 ‘화이트’로 하자고 하면 ‘white’는 어떡할 것인가. 무엇보다 ‘f’가 뒷음절에 자리하면 치명적 결함을 드러내고 만다. ‘커피’, ‘골프’를 ‘커휘’, ‘골후’로 하란 말인가. 결론적으로 ‘f’의 ‘ㅍ’ 대응이 현재로서는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다음은 파열음과 마찰음 표기 문제다. 라틴 계통의 언어에 있어 특히 무성파열음 ‘p t k’는 ‘ㅃ ㄸ ㄲ’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더 큰 가치, 즉 외래어 표기의 간결성·체계성·규칙성을 앞질러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한글로 옮겨야 하는 단어는 너무나 많다. 타갈로그어, 스와힐리어, 플랑드르어까지도 그 대상이다. 그 많고 많은 언어를 이건 격음, 저건 경음 하며 구분하는 게 어차피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통일해 표기하는 게 바람직하며 설사 원음(原音)과 좀 멀어진다 해도 감수하는 게 나은 길이다. 어떤 언어든 전사(全寫)는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우리 외래어 표기법은 고심 끝에 격음을 택했고 최선의 방법이다. 경음을 전면적으로 인정해 버리면 기존에 굳어진 ‘피자’, ‘쿠바’, ‘캉캉 춤’ 같은 걸 어떡할 것인가 등 형평성 문제가 다시 불거지는 부작용이 동반된다(물론 호찌민, 푸껫 등 태국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언어 가운데 약간의 예외가 있긴 하다). 마찰음도 ‘service·써비스’, ‘circus·써커스’가 실제 발음과 가깝다며 쌍시옷이면 깨끗이 해결될 것 같지만 cider·사이다, soda·소다, slump·슬럼프 등이 버젓이 버티고 있다. 또 ‘ㅆ’ 등이 마구 등장하면 소리 자체도 사나운 데다 활자 꼴이 미워지고 거칠어진다. ‘뻐쓰’, ‘쎈쓰’ 등이 만연할 때를 상상해 보면 감지할 수 있으리라. 외래어 표기를 관통하는 굳센 정신은 조화, 타협, 균형임을 기억할 일이다.

[말글 풍경] 바른 언어문화 보급, 방송과 학교에 달렸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 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주장, 느낌을 입을 통해 말로 표현한다. 말은 그래서 그 사회의 정신문화를 가늠하는 척도다. 말이 거친 국가와 사회는 제 아무리 경제적 소득이 높아도 국민들의 삶은 강퍅하고 척박하다. 지금 우리 사회 구성원은 말 때문에 빚어지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정치인, 지도층이 쏟아내는 막말과 극언에 놀라고 분노하며 비속어, 은어, 외계어(?)에 함몰돼 있는 청소년, 젊은이들의 언어 행위에 혀를 찬다. 그래서 방송의 기능과 역할에 기대를 거는 국민이 많지만 방송은 사실상 이중적인 모습을 지닌다. 바르고 고운 말을 소개하며 표준어를 보급하는 순기능이 있으나 선정적·자극적 말들의 온상으로서의 역기능이 그에 못지않다. 시청률을 앞세운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의 걸러지지 않은 말 오염은 여전하고 요사이는 특히 종편과 케이블, 심지어 공영방송까지 비판에서 예외가 아니다. 허울만 교양 프로그램인 채 패널 등의 주목도를 앞세운 저급한 발언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무관심보다는 미움을 사고 비난을 받더라도 관심받고 싶다는 한심한 세태, 딱 그 형국이다. 막말·비속어 사용 진행자 및 출연자의 삼진아웃제, 출연자의 언어 능력 라이선스제 등 방송 출연에서의 언행과 관련해 자격 요건 강화 등의 대책이 수년 전부터 논의돼 왔지만 진척이 없다. 방송은 우리 언어문화를 향상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매체지만 방송 프로그램화하는 과정에서 오는 시스템적인 한계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이제 ‘나쁜 말을 더 이상 쓰지 말자’, ‘비속어·은어를 계속 쓰면 제재하겠다’ 식의 대증요법(對症療法) 방식으론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고 본다. 보다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방법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혼란의 가장자리에서 대안이 싹 튼다 했다. 우선 학교를 주목하고 싶다. 문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틀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다. 언어생태계를 변환시키는 국어 학습 현장의 탈바꿈을 제안한다. 초·중·고교 학급에서 국어 교과목 일부 시간(주 1회 이상)을 언어예절과 말하기 수업으로 구성해보는 것은 어떨까. 교사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 전문가(자원봉사자)가 함께 참여하는 방식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수업을 지도하는 직장인 및 회사원에게는 해당 기업, 기관에서 유·무급 출장·휴가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신념, 무엇보다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언어 습관과 능력을 배양한다는 목적 의지만 분명하다면 못 할 이유가 없다. 실제 북유럽 나라들이 실행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기 및 언어예절 등을 연극이나 팬터마임 등 역할극 형태로 학생 친화적이고 새로운 접근 방법을 통해 실현함으로써 효과를 거두고 있으며 실제 실험 및 일상 체험에서도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읽기 교육의 부활 및 강화가 시급하다. ‘말 잘하기’에 앞서 ‘제대로 읽기’가 자리한다. 언제부턴가 학교 현장에서 ‘정확하고 아름답게 읽기’라는 가치가 사라졌다. 말을 제대로 다루고 부리기 위해서는 읽기 능력이 필수다. 이를 위해 발음·발성 교육, 리딩(reading) 기술 향상 등을 역시 전문가와 함께 고민하고 수행해야 할 것이다. 공교육 종사자와 전문 인력 집단이 머리를 맞대고 커리큘럼으로 안착시키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방송도 시대적 과제로 인식하고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정보·재미 중심의 프로그램 생산자로서의 정체성(正體性)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현장 중심, 상황 중심의 말하기 및 언어예절을 보급하는 첨병 역할에 적극 나서고 학교 현장과 연계해 시너지를 내야 할 것이다. 학습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읽기 및 말하기 상황을, 연출자 위주가 아닌 수용자 중심에 초점을 맞춰 프로그램화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방법론을 개척할 것을 주문한다. 아울러 어문학자, 음성언어 전문가, 커뮤니케이션 학자 등의 전문가 풀을 치밀하고 역동적으로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콘텐츠를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임무도 요구된다. 정치인, 지식인, 명망가 등이 청소년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근사하고 따뜻하게 말하는 모습을 담은 방송 프로그램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언어문화를 우상향시키는 노둣돌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말글 풍경] 공공언어의 중요성, 미디어의 책임감

공공언어란 좁은 의미에서 공공기관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를 일컫는다. 넓은 의미로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모든 언어로 확장된다. 공공 부문의 문어(文語·글말)로는 정부 문서, 민원서류 양식, 보도자료, 법령, 판결문, 게시문, 안내문, 설명문, 홍보문 등이, 구어(口語·입말)로는 정책 브리핑, 대국민 담화, 전화 안내 등이 해당된다. 민간 쪽의 글말은 신문, 인터넷 등의 기사문, 은행·보험·증권 등의 약관, 해설서, 사용 설명서, 홍보 포스터, 광고문, 거리 간판, 현수막, 공연물 대본, 자막 등이, 입말에는 방송언어, 약관이나 사용 설명 안내, 공연물의 대사 등이 속한다. 공공언어를 향한 국민의 불만은 대개 다음과 같은 사항으로 요약된다. ①낯선 한자어 등 어려운 단어 ②외국어 및 외래어 ③복잡하고 길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 ④권위적이고 고압적인 표현 ⑤맞춤법 등 어문규범에 맞지 않은 표기 ⑥기타(순우리말, 전문용어, 신조어 등).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유도(誘導)하다’, ‘이송(移送)하다’, ‘제고(提高)’, ‘착수(着手)’ 등의 용어는 ‘이끌다’, ‘보내다’, ‘높이기’, ‘시작’ 등 더욱 알기 쉬운 우리말로 순화할 수 있다. ‘제고(提高)를 위해’는 ‘높이기 위해’, ‘사양(仕樣) 조건을 나열하고’는 ‘품목 조건을 나열하고’, ‘디스크 팽윤(膨潤)의 경우’는 ‘디스크가 부을 경우’, ‘물건을 편취(騙取)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물건을 빼앗은 혐의를 받고 있다’로 고칠 수 있다. 잘 정비된 사례도 있다. ‘금번(今番)’은 ‘이번’, ‘금주(今週)’는 ‘이번 주’로 많이 개선됐고 ‘지참(持參)하고’를 ‘가지고’, ‘은닉(隱匿)한’을 ‘감춘’, ‘면탈(免脫)’을 ‘회피’ 등으로 바꾼 경우도 적지 않다. ‘당(當)해’가 ‘그 해’로 ‘감소(減少)되다’ 대신에 ‘줄다’, ‘소폭(小幅)’이 ‘조금’으로 정착돼 가는 분위기도 고무적이다. 그러나 ‘저작(咀嚼)·연하(嚥下) 용이(容易)’ 대신 ‘씹거나 삼키는 데 쉬움’, ‘가일층(加一層)’ 대신 ‘한층 더’ 등의 표현을 쓸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불우(不遇) 이웃’ 대신 ‘어려운 이웃’, ‘편부(偏父)·편모(偏母)’를 ‘한부모’ 등으로 개선 의 필요성을 권고하는데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외국어 및 외래어로는 ‘문화바우처’(→문화복지상품권), ‘테마’(→주제), ‘슬로건’(→표어 또는 구호), ‘시너지 효과’(→상승효과), ‘글로벌’(→국제), ‘인프라 구축’(→기반시설 구축), ‘컨설팅’(→상담), ‘클러스터’(→연합), ‘코스’(→경로), ‘패턴’(→유형), ‘이슈’(→쟁점), ‘리플릿’(→광고 또는 쪽지·광고지), ‘인센티브’(→성과급), ‘이벤트’(→행사), ‘퍼포먼스’(→공연), ‘컨설팅’(→자문 혹은 상담) 등으로 확실한 개선이 필요하다. 국어문화원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공공언어가 어려웠던 경험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72%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어려운 순서로는 정책 용어⸱민원서류⸱안내문⸱법령⸱약관⸱계약서 등이 차지했는데 특히 갑을, 피고인, 피의자, 여신거래 등의 단어가 어렵거나 부정적 느낌을 준다고 답했다. 스트리머, 힐링, 욜로 등 신조어 또한 개선이 필요한 대목으로 지적됐으며 LTV, DTI 등 영어 약자로 표기되는 단어도 거북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갖게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참고로 LTV(Loan to Value)는 주택담보대출비율, DTI(Debt to Income)는 총부채상환비율을 뜻한다. 공공언어를 쉽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개선해야 할 필요성과 그 효과는 자명하다. 첫째, 정확한 정보 제공이 가능해진다. 둘째, 지역⸱세대⸱계층 간 정보 습득의 차이를 방지할 수 있다. 셋째, 행정 업무 처리 시간 감소 등 정부 업무의 효율성 향상이 기대된다. 넷째, 공공기관이 언어 사용의 모범을 보이는 홍보 효과 및 정부 업무의 투명성이 향상된다는 이점이 있다. 마지막이 대단히 중요한데, 국민들로 하여금 어려운 용어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신문과 방송 등 미디어 언어는 가장 중요한 공공언어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대상이기에 그렇다.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의식을 가질 일이다.

[말글 풍경] 문해력 문제, 입체적으로 보자

혼숙을 ‘혼자 숙박’, 구두가 ‘신발’, 두발은 ‘두 다리’ 아니냐는 문해력 소동이 최근 있었다. 가결, 혈연, 이지적 등의 단어는 중고등학생들이 아예 뜻을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돌이켜보면 그 시작은 ‘심심한 사과’ 사례일 터. 이를 소재 삼아 담론화하고자 한다. 수도권의 한 카페가 연전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사과문 “심심한 사과 말씀을 드린다”. 매우 깊고 간절하게 사과한다는 뜻의 ‘심심(甚深)한 사과’를,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 하는 사과로 해석해 누리꾼들이 주인을 비난한 것이다. 여론 다수는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단어를 모를 수 있느냐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일각에선 “‘진심 어린 사과’나 ‘깊은 사과’ 등 다른 쉬운 말을 두고 굳이 ‘심심한 사과’라는 말을 써야 하느냐”라는 반발도 나왔다. 예컨대 ‘심심한 사과’라는 글이 아니고 말로써 카페 주인이 진정성을 담아 [심:심한 사:과]라고 발화(發話)했어도 같은 사태가 벌어졌을까. 아니었으리라. 바로 발음과 음성의 힘이다. 우리가 글, 문서, 텍스트의 영역으로만 여기는 문해력의 새뜻하고 근본적이며 구조적인 지평은 이렇다. ‘심심하다’는 뜻이 넷이다. 먼저 심심(甚深)하다. ‘심할 심’, ‘깊을 심’이 겹쳤다.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의 뜻. 주로 ‘심심한 사과, 심심한 사의(謝意), 심심한 감사’ 등에 쓰인다. 다음은 심심(深深)하다. 말 그대로 ‘깊고 깊다’라는 뜻이다. [심ː심산천](深深山川)은 깊고 깊은 산천, [심:심산곡](深深山谷)은 깊은 산의 골짜기다. 셋째와 넷째는 고유어, 토박이말이다. 심심하다[심심하다]는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라는 뜻으로 짧은 발음이다. 다음 ‘슴슴하다’로 많은 경우 잘못 쓰는 ‘심심하다’도 있다. 음식 맛이 조금 싱겁거나 간을 적게 한 건 ‘슴슴하다’가 아니라 ‘심심하다’라야 맞다. 따라서 곧잘 쓰이는 ‘슴슴한 물냉면’은 잘못이다. 느낌으로도 심(甚)하거나 깊거나(深) 하는 건 ‘낮고 깊고 길게’ 발음해야 어울리지 않나. 지루할 때, 싱거울 때는 짧은 발음이 걸맞고 말이다. 바로 이런 감각을 키우는 발음과 읽기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문해력을 낱말, 어휘력, 한자어라는 박제된 틀 안에서 해석하는 건 단견(短見)이다. 언어 능력은 입체적으로 다뤄져야 하는 것이며 이 대목을 너무 소홀히 여겨왔다는 생각이다. ‘읽기’라 하면 많은 사람이 ‘지문 읽고 이해하기(Reading Comprehension)’로 받아들인다. 지필 시험 문제의 한 장르로만 여기는 것이다. 혀, 입술, 허파, 성대 등을 활용해 소리를 밖으로 내는 본연의 ‘읽기’를 망각하고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아름답게 읽기가 낭독(朗読)이다. 낭독을 위해서는 우선 단모음과 이중모음을 명료하게 구별하는 발음과 더불어 텍스트의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알맞은 어조, 호흡, 휴지, 억양을 유지하며 연결, 분절, 강조의 기술을 부리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래야 다른 이의 청각을 근사하게 자극할 수 있다. 텍스트가 음성에 실리는 것을 전제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힘, 이게 문해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곧 ‘읽기 문해력’인 것이다. 요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말하기는 또 어떠한가. 무슨 말로 시작하고 본론은 어떻게 펼치며 끝을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할까. 어느 대목에 인상적인 내용을 넣어 상대를 매료시킬까. 어떤 설득의 기법을 쓰고 감동을 주는 포인트는 어디에 둘까. 신체언어(보디랭귀지)는 어떤 정도로 어느 시점에서 구사할까. 이런 다방면의 고려가 곧 ‘말하기 문해력’이다. 듣기는 더 절실하다. 소통의 출발이 잘 듣기여야 함은 불문가지다. 상대의 말을 잘 듣고, 자신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의 고갱이를 숙지하며 어떤 응대를 해야 할지 판단하는 역량이야말로 ‘듣기 문해력’이 추구해야 할 핵심적 지평일 테다. 맨 앞의 예에서 남녀의 혼숙(混宿)은 [혼:숙]으로 긴소리다. 말로 하는 구두(口頭)는 [구:두]로, 짧은 발음 [구두]인 신발이 아니며 머리털을 뜻하는 두발(頭髮)은 발[足]이 둘이라는 [두:발]이 아닌 것이다. 문해력 문제는 기능국어, 즉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라는 틀에서 입체적으로 접근해서 다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말글 풍경] 배려와 공감의 언어

우리 사회에 장애인, 노인에 더해 새로운 약자들이 늘었다. 배려와 공감으로 대하되 늘 언어 표현에 조심해야 할 일이다. 탈북자(脫北者)는 글자 그대로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어감이 그리 좋지 않기에 ‘탈북인’, ‘탈북남성’, ‘탈북여성’이 요즘 추세다. 국내에 정착한 경우 ‘새터민’이라는 새 이름이 쓰였다. 썩 좋은 이름이라고 여겼는데 탈북민 단체와 당사자들이 탐탁지 않아 해 쓰지 않는다. 북한인의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비록 독재와 억압에 시달렸던 땅이라도 ‘헌것’과 ‘새것’이란 상대 비교가 마뜩잖았던 까닭이다. ‘조선족(朝鮮族)’이란 말도 지양해야 한다. 중국의 주류인 한족(漢族)이 소수민족 지칭의 하나로 부르는 말이다. ‘중국동포’, ‘재중동포(在中同胞)’를 주저하면 안 된다. 동포라는 낱말에 인색하지 않을 일이다. 식당과 일터 등에서 만나는 옌볜•하얼빈•지린 지역 동포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온다. 일부 신문, 방송이 언중의 현실적 쓰임이란 잣대로 조선족을 고집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교포’는 타국에 거주•정착한 그 나라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는 법적•행정적 뉘앙스가 강하다. 반면 ‘동포’는 같은 민족의 사람을 따스하게 다정히 부른 말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경우는 동포로 일반화하는 것이 여러모로 설득적이다. 그런데 타국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럴 때는 동포는 사치고, 교포도 저어하게 된다. ‘한인(韓人)’이 소박한 대안이다. 한인은 본디 한국인의 뿌리 정도만 있는 사람들을 칭할 때 혹은 교포, 동포 등을 모두 아우를 때 쓰기 좋다. 국내 거주 외국인 250만 시대다. 이 중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민자(다문화가정)가 절반 이상이다. 특히 동남아시아 이민자가 눈에 많이 띈다. 한류 열풍으로 요즘은 미국, 유럽에서도 케이팝, K-드라마, K-푸드에 열광하지만 그 시작은 어디까지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었다.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서남아시아 국민은 그래서인지 일반적으로 한국인에게 호의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문제다. 가난하고 자기보다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홀대하고 무시하는 습속 말이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문제가 덜했으나 이제는 그들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끼리의 농담이라도 피부색이나 말소리 등으로 ‘필리핀 사람 같다’, ‘태국에서 왔니’ 운운한다면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십상이다. 듣는 이 입장에서는 놀림조로 인식되며 크게는 동남아시아인 전체에게 실례다. 자신의 출생지, 고향, 성장지, 거주지 등과 관련한 표현도 생각해 볼 문제다. 스스로의 지리적 배경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일단 전향적이다. 그러나 지나친 건 문제며 반대로 뜻 모를 열패감, 수치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타인을 향할 때다. 설익은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일반화하거나 확대 해석해 함부로 단정 지어 언급하면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는 동시에 화를 부를 수도 있다. 먼저 출신지, 성장지를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충청도 사람은 이러저러하고 하는 화법은 경솔하고 위험하다. 내용이 중립적이거나 좋은 것이라 여겨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며 해석하기 나름이다. 세 지역이 고향에 해당될 때 ‘우리 전라도•경상도•충청도 사람은’ 하며 자기를 내세우거나 낮추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대안으로 ‘충청인’, ‘호남인’, ‘영남인’을 제안한다. 진중하고 사려 깊어 보인다. 동향인(同鄕人)들 앞에서는 ‘우리 충청도 사람’, ‘우리 경상도 사람’, ‘우리 전라도 사람’ 운운해도 큰 문제는 아닐 테다.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도 ‘우리 호남인’, ‘우리 영남인’, ‘우리 충청인’ 하는 게 더 교양있고 근사하다는 생각이다. 서울, 경기도, 강원도의 경우 서울인, 경기인, 강원인이 어색하기에 불필요하다. 그만큼 지방색이 덜하다는 이야기니 섭섭해 할 일은 아니다. 뭉뚱그리면 우리 사회 소수자, 비주류를 배려하고 다원성 사회를 의식하는 말글살이를 체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 대화나 공적 말하기에 있어 상대에게 언짢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어나 표현을 피하고 수신자, 수용자 중심의 어법을 구사하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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