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글 풍경] 외래어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 上

외래어 표기는 ‘한국어 의사소통’ 목적
원음에 가깝고 음운체계 규칙 맞아야
일관성·실용성 균형 맞는 표기법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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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곤 KBS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前 KBS 아나운서

적잖은 사람들이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 이견과 의문을 제기한다. 타당성과 일리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외래어 전반과 우리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한다. 가장 큰 오류는 외래어와 외국어의 의미 구분과 역할 및 기능을 혼동한 채 외래어 표기를 외국어의 적극적 활용을 위한 잣대로 삼으려 한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전제가 외래어 표기는 우리 국민의 언어생활을 위해 만든 것이지 외국인이나 외국인용 회화를 위함이 아니라는 것. 이제 세상은 글로벌화됐다. 수많은 경제·사회·문화·정보기술(IT) 분야 신어(新語)들이 명멸한다.

 

그 많은 용어·개념어를 일일이 순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가령 Taxi라는 단어를 보자. 보통 그 Taxi는 ‘택시’라는 익숙한 한국어식 발음을 탑재할 것이다. 평범하게 ‘택시’라고 부를 때 이것이 외래어적 쓰임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외국인을 위해 “Can I get a Taxi for You?” 했다면 어떨까. 이럴 땐 아마 최대한 영어식 원어 발음으로 Taxi를 구사할 가능성이 높을 터. 이때의 Taxi는 외국어적 활용이라고 하겠다. 정리하면 이제 개별 단어가 더는 외국어인가, 외래어인가의 원천 속성을 타고 나지 않는다. 우리 국민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한 한국어식 발음이면 외래어, 외국인용 회화를 위해 원음처럼 소리 내면 외국어인 것이다. 그러니 서로 내국인이라는 조건에서 외국어식 발음을 고집하는 축은 이 기준에 무지하거나 이를 무시·왜곡하는 경우가 되는 셈이다. 10여년 전 불행했던 ‘오렌지·어륀지’ 사건(?)이 바로 이 대목과 관련이 있다.

 

외래어 표기는 원지음(原地音)에 최대한 가깝게 적되 우리 음운체계와 법칙에 합당해야 한다. 이 둘이 상충하는 경우 후자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게 옳다. 가장 논란이 많은 ‘f’ 발음의 경우를 보자. 우리 표기법은 이를 ‘ㅍ’ 하나로 대응시키고 있다. 여기에 대한 불만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f’를 한글이 못 살리니 새로운 기호로 대체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ㅎ’이나 ‘후’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새 기호 운운은 외래어 표기를 위해 제 나라 자음을 일그러뜨려야 하는 부담에다 ‘v’ 발음도 고려해야 하며 그 밖의 주요 외국어의 독특한 자음과의 형평성 문제도 발생한다. ‘ㆄ’를 만들어 ‘f’로 하자는 주장은 시기상조다. 무엇보다 새 자음에 대한 필요성이 보통의 국민에게 그토록 절실할까에 대한 의문이다. 그것을 새로 익힌다는 게 얼마나 번거롭고 까다로울 것인가.

 

‘f’의 ‘ㅎ’ 적용 주장은 설득력이 더 약하다. 예컨대 ‘fight’를 ‘파이트’로 적으면 이상하니 ‘화이트’로 하자고 하면 ‘white’는 어떡할 것인가. 무엇보다 ‘f’가 뒷음절에 자리하면 치명적 결함을 드러내고 만다. ‘커피’, ‘골프’를 ‘커휘’, ‘골후’로 하란 말인가. 결론적으로 ‘f’의 ‘ㅍ’ 대응이 현재로서는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다음은 파열음과 마찰음 표기 문제다. 라틴 계통의 언어에 있어 특히 무성파열음 ‘p t k’는 ‘ㅃ ㄸ ㄲ’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더 큰 가치, 즉 외래어 표기의 간결성·체계성·규칙성을 앞질러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한글로 옮겨야 하는 단어는 너무나 많다. 타갈로그어, 스와힐리어, 플랑드르어까지도 그 대상이다. 그 많고 많은 언어를 이건 격음, 저건 경음 하며 구분하는 게 어차피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통일해 표기하는 게 바람직하며 설사 원음(原音)과 좀 멀어진다 해도 감수하는 게 나은 길이다. 어떤 언어든 전사(全寫)는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우리 외래어 표기법은 고심 끝에 격음을 택했고 최선의 방법이다. 경음을 전면적으로 인정해 버리면 기존에 굳어진 ‘피자’, ‘쿠바’, ‘캉캉 춤’ 같은 걸 어떡할 것인가 등 형평성 문제가 다시 불거지는 부작용이 동반된다(물론 호찌민, 푸껫 등 태국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언어 가운데 약간의 예외가 있긴 하다). 마찰음도 ‘service·써비스’, ‘circus·써커스’가 실제 발음과 가깝다며 쌍시옷이면 깨끗이 해결될 것 같지만 cider·사이다, soda·소다, slump·슬럼프 등이 버젓이 버티고 있다. 또 ‘ㅆ’ 등이 마구 등장하면 소리 자체도 사나운 데다 활자 꼴이 미워지고 거칠어진다. ‘뻐쓰’, ‘쎈쓰’ 등이 만연할 때를 상상해 보면 감지할 수 있으리라. 외래어 표기를 관통하는 굳센 정신은 조화, 타협, 균형임을 기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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