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유—운재’는 안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뤼순감옥에서 1910년 3월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지정한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 일본에 경계, 어떤 사람의 당호를 써준 것 등이다. 그중 ‘안중근의사 유묵—욕보동양선개정계시과실기추회하’는 뤼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오리타타다스가 받은 것으로 그의 가족이 조카에게 넘겨줬고 그것이 1989년 2월20일 단국대에 기증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보협인탑이란 ‘보협인다라니경’을 그 안에 안치해 붙여진 이름이다. 종래에 볼 수 없던 특이한 모습인데 중국 오월(吳越)이라는 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오월국의 마지막 왕인 충의왕 전홍숙(錢弘淑)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8만4천기의 탑에 나눠 봉안했다는 고사를 본떠 금, 동, 철 등의 재료로 소탑 8만4천기를 만들고 그 속에 일일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탑을 보협인탑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이 석조 보협인탑이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전면에 조각이 가득한 이 탑은 중국 보협인탑의 영향을 받은 듯하고 외형도 거의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보협인석탑으로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년)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등과 비교할 만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 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했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국가유산청 제공
원래 창리지역 과수원 안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이나 그 느낌이 독특하다. 아래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새겨져 있는데 움푹한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당시의 조각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각 부분의 재료가 두툼해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며 아래 기단의 안상이나 3단의 지붕돌 밑면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박동형(朴東亨·1695∼1739)은 1728년 이인좌, 정희량 등이 주도해 일으킨 무신난 발발 당시 반란 주동자의 한 사람인 박필현을 포획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공신의 반열에 올라 충주 박씨 가문을 공신 가문으로 격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728년 그려진 ‘전신좌상본’과 1751년 그려진 ‘반신상본’은 한 인물에 대해 동일초본에서 비롯한 것으로 전신좌상은 유소를 비롯해 옛 장황을 간직한 반면 반신상은 후대 장황으로 바꾼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각 초상의 보관함은 초상화가 제작될 때 함께 제작된 것으로 사료된다. 오사모에 단령, 소매 안으로 처리한 두 손, 배경 없이 교의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 쌍학흉배와 학정금대, 표피가 덮인 교의, 족좌 위에 놓인 두 발 등 일반 공신상의 전형적인 형태로 그린 화가의 기량을 알려주는 섬세한 필치에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안중근 의사가 중국의 뤼순감옥에 투옥 중이던 1910년 3월에 쓴 글씨다.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라는 열 글자를 1행에 해행서로 썼고 왼쪽에 작은 글씨로 1행에 ‘경술삼월 뤼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고 방서한 다음 아래에는 손바닥 도장인 장인을 찍었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뤼순감옥 경수계장 나카무라에게 써준 것으로 명심보감의 ‘황금이 가득한 바구니는 아들에게 하나의 경서를 가르침만 못하고, 아들에게 천금을 줌은 아들에게 하나의 기예를 가르침만 못하다’는 문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사적 가치가 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해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절에서 의식을 행하거나 불단 위에 올려놓고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하는 향로 가운데 이처럼 몸체 아래 나팔형으로 벌어져 원반형 받침을 지닌 것을 특별히 ‘향완’이라 했다. 청동 은입사 향완은 높이 28.8㎝, 입지름 29.1㎝로 몸체와 받침대 전체 면에 은실을 이용해 장식(은입사)했다. 몸체 표면은 네 곳에 2개의 선으로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梵字)를 1자씩 넣었고 원 주변에 꽃무늬를 새겼다. 몸 아래에는 연꽃을 둘렀고 받침대 윗부분에 연꽃잎을 둘렀다. 받침대에 용무늬와 아래에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고려 충목왕 2년(1346년)에 만들었고 원래 금강산 용공사용으로 제작된 것이었으나 6·25전쟁 때 남쪽으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향로는 14세기 은입사 향로 중 문양이 화려한 편이지만 몸체에 비해 받침대가 약화된 불균형을 이루는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국가유산청 제공
임진란 때 선조와 세자를 호종하고 피란할 때 시종한 공로로 난후인 1604년 김응남에게 내린 것이다. 본 교서의 구성은 김응남의 관계(官階)에 이어 선조가 몽진(蒙塵)할 때 의주까지 호종한 공로로 2등 공신에 책봉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포상으로 본인과 부모·처자의 벼슬을 2계(階)씩 올려주고 자식이 없으면 조카나 여조카에게 1계씩을 올려 주며 적장자에게 벼슬의 지위를 세습하게 하며 노비 9구, 전 80결, 은자 7냥, 표리 1단,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는 내용을 열기했다. 김응남의 전기자료로 임진난사 연구의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고문서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여러 호성공신교서 중에서도 1604년 책록 당시의 원장을 잘 보존하고 있어 호성공신교서의 형태적 기준이 되고 교서문을 지은 제진자와 교서문을 쓴 서사자가 적혀 있는 건수도 극히 희소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범망경은 범망보살계경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자기 안에 있는 부처님의 성품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경이다. 이 책은 후진의 구마라집이 번역한 범망경 중 보살이 명심해야 하는 10가지 무서운 죄와 48가지의 가벼운 죄에 해당하는 계율을 설명한다. 책의 끝 부분에는 고려 충렬왕 30년(1306년)에 원나라의 고승인 소경(紹瓊)이 쓴 글이 있다. 소경은 고려시대 고승 혜감국사 만항, 보감국사 혼구와 친밀한 교류가 있었던 인물로 ‘고려사’, ‘고려사열전’ 등에 그에 대한 여러 기록이 전하고 있다. 본문의 글씨체와 책 끝 부분에 있는 소경이 지은 글의 글씨체가 다른 점으로 미뤄 원래의 판본을 보고 고려 말에 다시 새겨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고려시대 원나라와의 불교를 통한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가월리와 주월리 유적은 임진강 하안단구 일대에 형성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1988년 유적이 최초로 발견된 후 1993년 유적의 일부 지역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일반적으로 구석기시대란 처음 인류가 등장한 때부터 약 1만년 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가월리와 주월리 유적은 전곡리, 금파리 등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다른 유적과 기본적인 성격을 같이한다. 이곳에서 주로 확인되는 유물은 주먹도끼, 가로날도끼, 찍개, 몸돌, 격지 등 주로 대형 석기이며 발굴 과정에서는 망치돌, 소형석기, 사용된 석재도 다수 발견됐는데 당시 도구 제작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현재 이 지역은 경지정리로 대부분 숲을 이루고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유적은 4만~5만년 전후 시기일 가능성이 크며 석기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문화층이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전곡리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구석기시대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남양주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세기 전반기 전국 각지에서 크게 활약한 조각승 무염을 비롯해 성수, 심인, 상림, 경성 등 모두 5명의 조각승이 참여해 1649년(인조 27년) 완성한 불상이다. 높이 67㎝의 단아한 규모에 머리에는 연꽃과 불꽃 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가사는 두 벌 겹쳐 입은 이중착의법에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린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고 신체의 자연스러운 양감이 돋보인다. 날렵하고 갸름하게 처리한 턱선, 높게 돌출된 코, 자비로운 인상에 실재감 있는 이목구비의 표현 등 1650년대를 전후로 아담하고 현실적인 조형미를 추구한 무염이 참여한 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무염이 수(首)조각승을 맡아 제작한 작품으로 정확한 제작 시기와 봉안처를 알 수 있고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해 17세기 중엽 불교조각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국 과정을 비롯해 생애와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해 일대기를 새겨 넣은 비석이다. 이 신도비는 1409년(태종 9년) 세운 것으로 비신 및 귀부, 이수가 잘 보존돼 있어 조선 초기 신도비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건원릉의 신도비는 조선 건국 후 고려시대 석비 조형을 탈피하고 명나라의 석비 전통을 받아들여 세운 새로운 형식의 신도비로 평가된다. 비록 비좌 부분이 새로 제작됐지만 조선시대 석비의 기준작이 되며 비신에 새겨진 글씨와 내용은 서예사를 비롯한 역사·문화사의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정몽주(1337~1392)는 고려 말기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영일, 호는 포은이다.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뒤 예조정랑, 대사성, 대제학, 문하찬성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89년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웠으나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 하자 이들을 제거하려다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경기도박물관 소장 ‘정몽주초상’은 1555년 이모했던 구본(舊本)으로 추정된다. 영일 정씨 종가에서 줄곧 소장하고 있다가 2006년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작품은 한국의 대표적 문인이자 충절의 인물인 정몽주의 초상화라는 점에서 주목될 뿐만 아니라 비록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원본은 아니지만 원본의 양식적 특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조선 중기로 올라가는 이모본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가장 오래된 정몽주 초상으로 알려졌던 보물보다도 70년가량 앞선 정몽주의 초상화라는 점에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석남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20년(680년) 고승 석선이 세웠고 고려 초기 혜거 국사가 넓혀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나중에 화덕이 다시 지은 절이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의 끝이 짧고 약간 밑으로 처진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는 조선 초기 건물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기법이다. 튼튼하게 균형 잡힌 모습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했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돼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했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해 영조 40년(1764)에 공인됐다. 윤관 장군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용주사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은 목판 42판, 동철판 7판, 석판 24판 등 세 종류가 있다. 모두 73판으로 1796~1799년 조성됐다. 이 경판들은 정조의 명으로 조성돼 주자소에 내입(內入)됐다가 화성 용주사에 보내진 기록이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수록돼 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은 매우 정교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변상도에는 단원 김홍도의 화풍이 고스란히 살아 남아 있으며 본문은 당대의 명필인 오수 황운조 서풍의 명품 경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는 정조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혼심을 쏟아 조성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종류의 경판은 당대 최고 장인의 예술성까지 곁들여져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보존 상태가 온전하다는 점, 18세기 말의 국어사 자료가 된다는 점 등에서 가치가 충분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 말의 승려인 나옹 화상(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나옹은 1344년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했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지에서 은거하다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뒀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 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다. 국가유산청 제공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년) 안성에서 출생해 10세에 출가했으며 17세에 융천사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비는 비받침인 귀부(龜趺)와 비몸돌, 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문종 14년(1060년) 세워진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 도망쳤다고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 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하진은 조선 중기의 문인·명필로 본관은 여주, 자는 하경, 호는 매산·육우당이다. 소릉 이상의의 손자이며 이지안의 아들이다. 1666년 문과에 급제해 대사간, 대사성,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이하진 후손 댁에 전래하는 것으로 표지에 ‘천금물전’이라 쓰고 오른쪽에 ‘공십(共十)’이라 쓰여 있어 전체 10첩임을 알 수 있다. 글씨는 여러 크기의 해서, 행서, 초서로 쓰여 있다. 해서는 왕희지의 소해(小楷)를 기본으로 했으나 획이 좀 무르고 짜임이 늘어진다. 행서는 해서를 흘려 쓴 정도인데 좀 거친 편이다. 이에 비해 초서는 매우 가는 획으로 원필(圓筆)의 분방한 필치를 보여주는데 서풍은 황기로의 필법을 배운 숙부 청선 이지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국가유산청 제공
이 교서는 선조 37년(1604년)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왜군과 대적해 크게 이기고 정유재란 때 통제사가 돼 적선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전사한 원균(1540∼1597)에게 공신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신교서다. 내용은 왜군을 물리치고 장렬하게 전사한 원균에게 사후에도 그 후손들을 계속해서 보살필 것임을 밝히고 노비 13명, 전 150결, 은 10냥, 옷감 1단, 말 1필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교서와 함께 있는 치제문은 선조 38년(1605년) 정월 18일 임금이 의정부좌찬성으로 증직된 원균의 영전에 그의 죽음을 기려 제사를 지내게 한 글을 담은 문서다. 이 교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운 원균 장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