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웅지마을 뒤 산밑에 위치한 수령 350여년 추정(지정일 기준)의 노거수다. 나무 높이 약 20m, 가슴높이 줄기둘레 4.68m로 물푸레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매우 크며 수형이 아름답다.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큰 나무로 목재의 재질이 단단해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의 용도로 널리 사용했다. 나무껍질은 건위제,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됐다. 문화재청 제공
지난 1884년 1월 독일 상사 세창양행 직원 기숙사로 만들어졌다. 현재 인천 중구 자유공원 조류사 일대에 지어졌다. 붉은 지붕에 흰 벽, 아치형의 베란다가 있다. 옥상에 사각형의 전망대를 가진 2층집이었고 온갖 수목이 있는 정원을 가진 인천의 대표적인 양관이다. 지난 1922년 인천부가 매입해 인천 최초의 부립도서관으로 문을 열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1941년 도서관이 이전한 뒤 일시 빈집으로 남았다가 생산품 등을 전시하는 향토관으로 탈바꿈했다. 광복 후 이경성이 인천박물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6·25전쟁 당시 소실됐다.
‘미사일록’은 19세기 말 주미공사를 지낸 이범진(1852~1911)이 주미공사로서 활동한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며, 공사관 서기생 이건호가 필사한 자료다. 이범진 공사의 부임 경로와 미국 측 인사 접견 내용, 미국 주요 기관과 문화시설 등을 답사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주미공사의 외교활동, 당시 영어 사용 용례 및 표기, 19세기 말 지식인으로서 서양국가에 대한 인식 수준 등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상륙작전 당시 가장 먼저 상륙한 사적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인천시장 김정렬이 시민의 뜻을 모아 세웠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이후 이 자리에 임시 헬리콥터 착륙장을 조성해 미군 포로 송환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북한에 포로로 잡혔던 미 24사단장 딘 소장이 송환되기도 했다. 그 후 목조 단층의 한국군인회관이 들어섰다가 철거된 후 맥아더 장군 동상이 그 자리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시 제공
일본 빅타축음기주식회사가 1935~1940년 유성기 음반을 찍기 위해 발매한 금속원반 587장으로 1992년 우리나라 ㈜서울음반(현 ㈜카카오엠)에 양도했다. 이 유물에는 전통음악, 대중음악 등 당대 공연예술 전반에 걸친 다양한 음악들이 수록돼 있으며 특히 빅타판 춘향전 전집은 판소리사의 불후의 명연으로 꼽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근대적 대중문화의 초기 발전과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음원이란 측면에서 가치 있는 유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제공
만국공원은 1888년 11월9일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러시아 토목기사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외국인 거류민단에서 경영해 만국공원, 혹은 각국공원이라 불렀다. 공원 중앙 광장에는 맥아더장군 동상이 서 있고, 남쪽에는 1965년 6월1일 제1회 시민의날 시민헌장비와 다짐을 선포한 시민의 다짐비가 있다. 약 100m 전방 서북쪽 봉우리에는 1982년에 건립된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리는 기념탑이 서있다. 남쪽 언덕 기슭에는 석정루와 연오정이 있다. 인천시 제공
16세기 중기 복식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복식과 장례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특히 ‘직금사자흉배 운문단 접음단 치마’는 조선전기 연금사(撚金絲)로 비단 바탕에 무늬를 짜 넣어 만든 사자흉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양반층 부녀들이 예복으로 착용한 ‘장삼(長衫)’ 역시 그동안 출토된 형태가 젖힌 깃인 데 반해 곧은 깃으로 제작한 여성용 습의로 희소성이 있다. 이외에도 치마의 앞부분을 접어 앞은 짧고 뒤는 길게 만든 ‘전단후장형 치마’는 허리말기 가까이에 잡았다는 점에서 치마의 새로운 제작법을 보여주는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세창양행은 독일인 마이어가 지난 1884년 제물포에 설립한 상사다.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동아시아 무역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초기에는 바늘, 염료, 면포 등 생활용품을 수입 판매하다가 점차 쇠, 강철, 약품, 기계, 무기 등의 중개 무역으로 큰 수익을 올렸다. 이 회사의 판매 품목 중 특히 옷을 꿰매는 바늘은 그 강도가 뛰어나 유명했고, 의약품 중 학질 치료약으로 알려진 금계랍 역시 상비약으로 이름을 알렸다. 세창양행은 동양 3국을 상대로는 영문 상호 대신 한자 상호를 사용했다. 1907년에는 이 회사 직원이었던 칼 월터가 단독으로 맡아 칼 월터 양행으로 개칭하기도 했다. 세창양행은 1896년 덕상세창양행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광고를 낸 상점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인천시 제공
안성천과 잇닿은 나지막한 구릉지에 지형을 따라 축조된 산성이다. 구조와 출토유물로 볼 때 4~6세기에 백제가 축조했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고구려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활용한 목책성이 경기 남부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됨에 따라 진천 대모산성, 세종 부강 남성골산성 등 기존의 고구려 관련 유적과 연계해 한강 이남 지역에서의 고구려 영역확장과 남진 경로를 살펴 볼 수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또 목책 구조가 잘 남아 있는 드문 사례로 삼국시대 책(柵)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어 고대 성곽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이 가옥은 우리나라 서양화가 1세대로 근현대 화단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장욱진 화백(1917~1990)이 198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 곳이다. 한옥은 안채와 사랑채, 광으로 구성돼 경기도 전통적인 민가의 튼 ‘ㅁ’ 모양이며, 장욱진 화백이 직접 수리해 작업실과 거주 공간으로 사용했다. 문화재청 제공
일본인 해운업자 호리 리키다로가 1887년 착공해 188년에 완공한 벽돌 3층의 양관이었다.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호텔이 생겨난 이유는 개항 이후 제물포에 들어오는 외교관, 선교사, 여행가, 사업가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숙박 문제가 크게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아직 철도가 부설되기 전이어서 제물포에 입항한 이들이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전 하룻밤을 묵거나, 또 출국하는 경우 배편 스케줄에 따라 불가피하게 숙박해야 하는 점 등으로 인해 호텔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1899년 경인철도 개통, 이어 1904년 경부선 개통, 1906년 경의선 개통 등으로 숙박 손님이 줄어들면서 경영이 어려워지자 1918년 청국인에게 매각해 북경식 요리 전문점으로 변신했다. 이는 1970년대 초반 무렵 폐업한 뒤 1978년에는 건물마저 철거되었다. 근래 2018년 3월에는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개관했다. 인천시 제공
안성향교 대성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7세기 중엽에 재건된 이후 현재까지 여러 차례 수리가 이뤄졌으나 건축의 형태와 구조, 의장 등 전반에 걸쳐 건립 당시의 고식기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또 지붕 가구의 삼중량 구성은 구부러진 대들보와 반듯한 직선의 중량, 종량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시각효과는 17세기 전반에 자연 곡선의 목재를 사용하는 시대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1885년 9월 본원사 부산별원 인천지원으로 인천에서 개교를 시작했다. 1891년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인천 거류민 2세 교육 사업도 펼쳤다. 교세 확장에 따라 1894년 관동에 200평 정도의 땅을 마련해 가본당을 짓고 점차 거류민들의 장례식, 군 묘지와 일반인들의 묘지 관리를 맡았다. 1899년 인천지원에서 인천별원으로 승격, 1900년 3천평 대지 안에 절을 지으면서 본격적인 사찰로 출발했다. 현재 답동 로열맨션이 들어선 자리다. 인천시 제공
석왕사 소장의 ‘불조삼경’은 원나라 판본을 저본으로 1361년(공민왕 10년) 전주의 원암사(圓嵓寺)에서 번각한 목판본이다. 권말에 간기(刊記)와 유판처(留板處) 기록이 있어 비구 행심(行心)이 발원하고 법공(法空)이 간행의 책임을 맡아 윤선(尹善) 등의 도움으로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1900년 9월1일 인천 중구 답동 3번지에 설립된 이 학교는 일찍부터 신자들의 자녀 및 무산 아동을 모집해 초급 학력 과정을 교육하는 한편 전도에 힘쓰던 속칭 천주학방이 발전한 것이다. 프랑스 출신 전학준 신부가 설립자 겸 학교장으로 1914년에 이르러 급증하는 아동을 수용하기 위해 인천 사립박문소학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했다. 이어 다음 해 6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다시 신축했다. 이에 1917년 4월2일 2개교를 통합, 인천 박문학교로 개칭했다. 그 후 1925년 11월17일 인천 사립박문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인천시 제공
파주 보광사 동종은 중국 종의 형식을 수용하는 동시에 우리 고유의 미감을 반영하며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 조선 전기(15∼16세기) 범종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이 동종은 조선 전·후기의 접점에 있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틀을 이어 붙여 주조하는 분할주조 방식으로 제작된 단초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동종 제작 기법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 제공
1975년 11월17일 인천상공회의소 7층 사옥이 준공돼, 송학동 사물실에서 이전해 왔다. 당시 인천에서 가장 높은 고층 빌딩 중 하나였다. 1994년 남동 신축 회관으로 이전했다. 경기은행은 1967년 인천은행으로 발족했으나, 1972년 6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면서 영업지역을 경기도 전역으로 확대하고, 주식회사 경기은행으로 상호를 바꿨다. 인천시 제공
연천 재인폭포는 신생대 제4기에 만들어진 현무암 주상절리 폭포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지질명소 중 하나로 지질·지형학 등 학술적 가치가 있고 생태적으로 가치가 높은 장소다. 문화재청 제공
축지활판소는 가부키좌 인근에 있었다. 1924년 9월 정부 예산 감축에 따른 경기 불황으로 사장 아키야마가 임금 삭감과 감원을 통보하면서 인쇄 직공 30여명이 파업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 주로 관공서를 상대로 한 인쇄소였던 듯하다. 가부키좌까지 불태운 화재로 1935년 소실됐다. 1949년 발간한 ‘경제연감’에 장만달이 대표로 있는 사동 소재 축지활판소가 보이는데 상호만 같은 신성 업체로 보인다. 1959년 세관 건물이 신축될 때까지 인천세관이 축지활판소 자리에 임시로 들어 있었다. 인천시 제공
월롱산성은 파주 일대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까지 조망되는 북쪽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가는 서쪽변경을 방어하던 성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의미가 있다. 월롱산성은 한성백제의 토목 기술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