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네마극장은 현재 인천 중구 신포동에 있던 상설 영화관으로 1909년 개관했다. 개관 초기에는 미국 영화사의 우수 영화를 상영해 인천의 대중 오락장으로서 으뜸의 위치를 지켰다. 후일 미국과 적대 관계가 되면서 주로 일본 영화를 상영했다. 광복 후 인천에 주둔한 미군이 ‘Sea hores theater’라 명명하며 사용하기도 했으나, 1947년 문화관이라고 개칭했다. 6·25전쟁 중 소실됐다. 키네마극장은 1961년 1월1일 신축 개관해 일류 외화 상영관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TV가 널리 보급하면서 경영난을 겪는다. 그러다가 1973년 외환은행 인천지점에 매각, 폐업하고 만다. 현재는 KEB하나은행 점포가 들어와 있다. 인천시 제공
고구려가 남진 과정에서 임진강변 해발 85m 산의 능선에 축조한 성으로, 주변 넓은 지역이 조망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인근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과 함께 임진강 북안에 설치된 중요한 고구려 방어시설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유적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보축·개축되고 조선 시대에도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대에 외성을 덧붙여 쌓아 사용해 왔던 성으로 삼국 시대부터 통일신라, 조선 시대에 이르는 여러 시기 축성기술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또 지난 2012년부터 총 5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결과 내성 전체 구간(600m)에 고구려 성벽이 구축된 사실이 확인됐다. 문화재청 제공
수준원점이란 우리나라의 국토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으로, 평균 해수면과의 차이를 측량해 1963년 육지에 설치해 놓은 시설물이다. 강원도 설악산과 제주도 한라산의 높이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수준원점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받침돌 위에 화강석으로 된 육면체의 설치대를 얹고 그 위에 자수정으로 수준원점을 표시했으며, 아담한 원형 벽돌 건축물이 수준원점을 보호하고 있다. 전국의 수준점을 정할 때 높이 기준이 되는 이 수준원점의 높이는 26.6871m다. 문화재청 제공
순라군이 도둑이나 화재를 경계하기 위해 밤에 사람의 통행을 금하고 야경을 돌 때 길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등기구다. 귀인이 밤길을 갈 때도 사용됐다. 형태가 박처럼 생겼다 해서 ‘박등’이라고도 불렸으며, 순라군이 도적을 잡을 때 사용했다 해서 ‘도적등’이라고도 불렸다. 오늘날의 손전등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내부에는 철제의 초꽂이가 회전할 수 있게 돼 등을 상하좌우로 움직여도 초는 항상 수평을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문화재청 제공
유가사지론은 인도의 미륵보살이 지은 글을 당나라의 현장(602∼664)이 번역해 천자문의 순서대로 100권을 수록한 것으로, 11세기 간행한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다. 이 본은 100권 가운데 제53권으로, 처음 새긴 본이다. 종이질은 닥나무종이이며, 가로 48㎝, 세로 28.4㎝다. 이 판본을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재조대장경 판본과 비교해보면 판수제와 권, 장, 함차표시의 위치에 차이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일동장유가’는 김인겸이 계미통신사의 삼방서기로 뽑혀 한양을 출발, 당시 일본 덕천막부의 정치중심지인 에도를 다녀와 복명하는 영조 39년(1763년) 8월3일부터 영조 40년(1764년) 7월8일까지 전 과정의 사행 견문을 담은 국문 가사다. 전체 필사본 2권 2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1권은 34장, 2권은 53장으로(겉표지 제외) 선장돼 있다. 연민 이가원 선생이 소장하고 있다가 1987년 6월 4일 단국대에 기증해 현재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파손 및 찢어진 부위가 많아 보존처리가 시급한 상황이다. 문화재청 제공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이다. 고종 18년(12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도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 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뤄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 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네 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한개씩 배치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 있다. 문화재청 제공
1922년 천주교당 내 성서활판소에서 간행한 판권이 남아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원래 한 책이었지만 분리된 속편이다. 한기근 신부는 ‘종도행전’ 등을 국한문혼용으로 번역한 바 있다. 행주성당 소장 ‘종도행전’은 비록 표지와 본문이 일부 일실됐으나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고 독립돼 제책된 초판본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식물본초는 음식물로 병을 예방하는 내용을 담은 전문 의학서적으로 1995년 인천시 보물로 지정됐다. 식물본초는 중종 21년(1526년)에 중국 명나라 요문청 등의 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을 중종~명종년간(1526~1556년)에 다시 갑진자로 간행했다. 이 책은 수(水)·곡(穀)·채(菜)·과(果)·금(禽)·수(獸)·어(魚)·미(味) 등 8류로 나눠 상권과 하권에 수록했다. 상권에는 수·곡·채·과 등 4류 212조가, 하권에는 금·수·어·미 등 4류 175조가 수록돼 있다. 각 유에서는 조목마다 해당식물의 맛, 본성, 이익, 해독 등을 적어 설명하고 끝에는 각 유의 식물에 대한 총론을 적어 놓았다. 식물본초는 희귀한 의학서적 중 하나로 서지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1949년 초축된 칠기가마를 1962년 개축한 가마로, 벽체 및 천장을 벽돌(봉통부는 망생이)로 축조했으며 외부는 점토를 발라 마감했다. 12칸의 계단식 칸 가마 구조로 돼 있으며, 전체 길이 27m에 너비는 2~3m로 추정된다. 내벽 폭을 따져봤을 때 1번 칸은 1.65m, 12번 칸은 3m인 형태다. 뒤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아궁이에서 굴뚝을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칸마다 출입구 1개, 불보기 창이 1개씩 설치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태사령 양우의 산거사요를 원나라 학자 왕여무가 증보·편집한 인천시 보물 산거사요는 4권 1책이다. 이 책에는 산촌에 사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알아야 할 네가지 요결을 사항별로 분류해 기록했다. 즉, 총 4요결을 74항목으로 나눠, 각 항목 아래에 해당 사례 및 대증, 처방 등을 서술했다. 간행 시기는 우리나라 사람이 쓴 머리글이나 맺음말이 없어 알 수 없다. 하지만 보존 상태로 미뤄 조선 성종 때로 보인다. 이 책은 건강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의서로, 조선 전기 의학서적간행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문화재청 제공
구한말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 천주교가 박해시기를 지나 지역에서 어떻게 정착되며 신앙공동체를 꾸려왔는지를 잘 알려 주고 있는 건물이다. 1898년 65명의 신자가 칠울공소를 설립하고 1900년에는 145명의 신도가 이곳에서 생활했고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37명의 신도가 이곳에서 신앙 마을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고 있어 이곳은 성당뿐만 아니라 마을 진입로, 운동장, 조경, 가마터, 칠울공소(현 사제관), 인근 가옥 등 가톨릭 문화와 사적지로 장소적 의미가 있다. 문화재청 제공
신응경은 침구(침질과 뜸질)관계를 다룬 전문의학서적으로 성종 5년(1474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1993년 보물 제1180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인천 연수구 가천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책에는 머리말이 빠져 있어 손으로 직접 써서 내용을 보충해 넣었다. 또한 본문도 하단이 닳은 부분에 간지(間紙)를 넣어 포개 붙였다. 인조 21년(1643년)에는 훈련도감자판으로 다시 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서지학 및 한의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고양 상여·회다지소리는 고양시 송포면 대화리 김녕김씨 집성촌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장례의식요다. 조선시대 왕릉 조영의 영향으로 인해 나라님을 밟을 수 없어 광 밖에서 밟는 것에서 유래된 풍속이 있어 고양 일대에서 달구질을 할 때 광중 밖에서 밟는다는 특징이 있다. 현재 보존회장 김우규를 주축으로 고양상여회다지소리보존회를 통해 이 종목의 전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구 인천부 청사는 인천 중구에 있는 건축면적 694.2㎡, 연면적 2천14.7㎡의 건물로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인천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해온 역사적인 곳으로 모더니즘 양식의 건축물이다. 광복 후부터 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한 1985년까지는 인천시 청사로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구 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2층이었지만 1964년 3층으로 증축했다. 증기난방과 수세식 화장실 등의 신식 설비가 갖춰져 있어 당시 주목 받기도 했다. 문화재청 제공
청련사 생전예수재는 매년 중양절마다 불교 악가무의 종합예술을 곁들여 불자들이 내세를 위해 성전에 미리 공덕을 짓고 수행하도록 불법으로 이끄는 불교의례다. 2010년 보존회 발족 이후 보존회와 안정불교대학을 중심으로 예수재의 체계적인 전승과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예수재의 활성화를 위해 설행시기를 윤달이 든 해에서 중양절로 조정해 해마다 설행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은 인천 중구에 있는 건축면적 495.87㎡, 연면적 628.1㎡의 건물로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1935년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강당이다. 이는 학교 강당의 기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인천 지역 사회의 대형 집회 공간으로 이용해 온 역사적인 장소다. 15m의 너비를 중간 기둥 없이 처리한 것이 특징이며,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 기능적인 모습이다. 이 건물은 당시 제물포고등학교 학생들이 애국지사 등의 강의를 들으며 청운의 꿈을 키웠던 곳이기도 하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 후기에 제작된 보살상으로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통견을 입었으며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내려 각각 검지와 중지를 맞댄 설법인(說法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을 취하고 있어 과도기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가치가 크다. 또 이와 같은 양식적 유형의 보살좌상이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진 데 반해 드물게 금동으로 제작됐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화재청 제공
고법(鼓法)은 판소리에서 북 반주의 법례를 의미하며, 2013년 인천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고수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엇중모리 등의 다양한 장단을 치면서 소리꾼의 노래를 반주한다. 또 추임새를 통해 소리꾼의 흥을 돋우면서 소리판을 이끌어가기도 한다. 판소리에는 예부터 ‘일고수 이명창’과 같이 고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구마검은 동농 이해조가 쓴 작품으로, 제국신문에 1908년 4월25일부터 7월23일까지 연재한 소설을 1908년 12월 대한서림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무당과 점쟁이, 지관 등의 폐해를 통해 미신 타파에 대한 강렬한 주제 의식을 형상화했다. 포천 출신의 이해조는 신문학을 주창한 인물로 1907년 5월 제국신문 기자로 입사한 뒤 1913년 매일신보에서 퇴사하기까지 활발한 연재 및 작품 발표를 이어가 단행본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