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오디세이] ‘카이로스’의 시간

자연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계절에 따라 맺는 열매가 다르다. 그래서 제철에 맺는 열매가 가장 맛있다. 봄에는 딸기가 맛있고 요즘은 문경 사과와 제부도 포도가 제맛이다. 시간을 계절로 나누기도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헬라어는 시간을 ‘크로노스’ 와 ‘카이로스’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으로 순차적, 연속적인 의미로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쉽게 우리의 일상과 관계된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 혹은 기회의 시간을 의미한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이다. 며칠 전 4년 전에 결혼한 둘째 아들이 첫딸을 얻었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한 아들에게 병원에서 전화가 와 조퇴하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간다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 엄마를 반씩 빼닮은 아기 사진을 보내왔다. 며느리는 지난 열 달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심한 입덧과 잠을 설치고 손발이 붓는 고통스럽게 보낸 열 달이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열 달 동안 음식을 가려먹고, 건강하고 지혜로운 아이의 출산을 위해 기도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태교하고 무거워지는 몸을 버티며 보낸 결과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다. 우리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은 아기의 아빠를 분만실에 들어오라고 해 탯줄을 끊게 한다고 한다. 아들에게 아기의 탯줄을 끊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한 생각이 없었단다. 갑자기 물어 서둘러 대답하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첫아이의 탯줄을 자르면서 왜 특별하지 않았겠는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줬다. “열 달 동안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통해 생명을 공급받다가 이제부턴 아빠가 너의 생명의 보호자가 돼 네가 살아갈 이 세상의 필요를 책임져 줄게. 내가 아빠야.” 그 의미가 아니었을까 했더니 아들이 ‘맞다’고 했다. 이 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한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과정은 열 달의 크로노스의 시간을 거쳐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카이로스의 시간은 매우 중요하고 위험하다. 생명이 엄마의 몸에서 분리돼 이 땅에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완성되는 이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순간은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삶의 자리가 흔들릴 때도 그 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을 수 있다. 기회는 당연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고통과 수고가 수반된다. 그 과정을 통해 생명이 탄생하고 인류가 보전된다. 근래 우리나라 젊은이의 사망 원인 최고가 자살이라는 통계가 발표됐다. 힘들지 않았던 시대가 어디 있었겠는가.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다만 그 힘든 삶의 무게를 받아 주고 보듬어 줄 사람이 없으면 크로노스에 혼자 머물다 카이로스에 이르지 못해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음을 명심하라. 성경의 인물 다윗은 아버지가 맡겨준 양치기에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의 양을 지키기 위해 물맷돌을 던져 사자와 곰을 물리쳤다. 또 한가로운 시간에는 수금을 연주하며 음악적 재능을 배양했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는 훗날 왕이 돼 어린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물맷돌을 던지던 그 실력은 나중에 적군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키는 능력자가 됐고 그의 음악 실력은 사울왕이 악령에 시달릴 때 찬양을 통해 악령을 물리쳐 줬다. 다윗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게으름과 원망으로 보냈다면 그는 결코 골리앗을 쓰러뜨리지 못했고 유대의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간을 성실과 인내로 미래를 준비했다가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

[삶, 오디세이] 달 밝은 가을 저녁, 추석

식을 줄 모르던 한여름의 무더위도 시간 앞에 덧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은 그 이름에서부터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전해주는 계절이다. 높디높은 하늘과 청아한 날씨는 어디로든 떠나고 싶게 만들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그저 반갑고 즐겁게 만드는 시기다. 가을의 이러한 매력은 아무래도 1년의 후반부에 접어드는 시기이기에 다소 불안해지고 걱정도 있지만 그것들을 아름다운 날씨에서 좋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며 해소할 수 있게 하기에 우리는 가을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을 대변이라도 하듯 가을에 접어들어 맨 처음 맞이하는 명절이 바로 ‘추석’이다. 민족의 대명절이라 불리며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는 모습만으로도 어느덧 가을이 왔고 우리도 추석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요즘 추석이 갖는 ‘가족’의 울림이 다소 약해지는 듯해 안타깝다. 모두들 바쁜 일상을 살고 명절에도 일할 수밖에 없는 시기를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거나 가족들과 모여 식사 한 끼 하는 것조차 어려운 모습이다. 반면 추석 연휴를 이용해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준비하며 추석 차례상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에 부탁하거나 생략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이때만이라도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간 별일은 없었는지 혹은 가족들이 도와줄 일은 없는지 등을 물으며 결코 이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가족들이 있고 그들이 나를 믿고 지탱해 주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시기가 추석이다. 여러 뉴스와 미디어에서도 홀로 사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는 인간성이 상실된 황당한 사건 사고가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이 둘 사이에 중요한 관계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람다운 삶’이다. 홀로 태어나 홀로 살다 홀로 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상이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무수한 인연들과 함께하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고 더불어 살다 그들의 곁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밖에 없다는 식의 삶을 살아가려 하기에 점차 피폐해지고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秋夕’은 가을 저녁을 의미한다. 달 밝은 가을 저녁에 가족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저녁 식사 한 끼를 하는 그런 일상적 삶. 그런 일상을 보내본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자. 다시금 찾아온 추석에 가장 소중한 인연인 가족과 함께 내가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행복한 존재인지를 느끼는 가을 저녁을 맞이해 보자.

[삶, 오디세이] 기억의 파편 모아내는 대중문화의 힘

1970년대 할리우드를 빛낸 황금 아이콘, 로버트 레드퍼드가 17일 눈을 감았다. 193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90세 노인이건만 필자는 그의 주름진 얼굴을 모른다. 그저 ‘추억’의 번듯한 순정남, ‘스팅’의 능청스러운 사기꾼으로 그를 기억한다. 올해부터 동네 책방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독서모임에 들어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이 독서모임에서는 서로 이름도, 성도, 직업도, 고향도, 출신 학교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책으로만 만나 깔끔하게 토론하고 헤어진다. 쿨한 이웃들과 함께하는 느슨한 모임이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적절한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아침에 부고를 접하고 독서모임 단톡방에 영화 ‘추억’의 한 장면을 올리자 댓글이 쏟아졌다. 레드퍼드 영화 리스트, 미남 스타 사진, 스트라이샌드의 노래 영상 등이 줄줄이 올라왔다. 누군가는 마이클 잭슨을 추억하고 또 누군가는 잭 니컬슨의 근황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름도, 고향도 모른 채 책으로만 만나는 사이지만 대중문화의 기억을 나누는 순간 성큼 가까워졌다. 어느새 독서모임 이웃들이 친근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고향, 직업, 사는 곳, 출신 학교, 결혼 여부를 물어보는 건 실례지만 각자 좋아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펼쳐보이는 건 서로를 묶는 단단한 끈이 된다. 같은 노래, 같은 영화, 같은 스타를 나눈다는 건 이데올로기, 지역, 배움의 정도와 관계 없이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그 시절 추억을 털어놓는 일이다. 이런 점 때문에 대중문화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잇는 타임머신이며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데 묶는 언어다. 정치의 협소한 편가르기를 넘어 같은 노래와 같은 스타를 기억하는 경험이야말로 연대의 시작이다. 최근 영화 ‘얼굴’(연상호)과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도 그 힘을 보여준다. ‘얼굴’은 1970년대 동대문 피복공장의 현실을 소환하고 ‘은중과 상연’은 IMF 외환위기 직후의 불안한 사회상을 서사로 엮는다. 통계나 분석보다 영화와 드라마가 불러내는 기억의 힘이 크다. 극단의 정치 진영과 유튜브 알고리즘 현상으로 우리 편과 남의 편을 나눠 사고하는 현실은 부박하다. 대중문화는 이 같은 현실을 순화시키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나아가 연민해 연대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얄팍한 정치물로 같은 편끼리 위안하는 건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빛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이젠 숨지 않아”라는 가사를 품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세대를 넘어선 희생으로 마무리된 ‘오징어게임’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대중문화는 시대를 증언하고, 낯선 이들을 친구로 만들며,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다. 레드퍼드의 퇴장은 끝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한 추억의 시작을 다시 확인시키는 사건이다. 한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그의 영화와 그에 대한 추억 속에서 한 시대가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확인하고서 가슴이 뭉클했다.

[삶, 오디세이] 유능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

유능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필자는 유능한 사람을 ‘맡은 일을 잘해내는 똑똑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반면 위대한 사람은 능력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의 사제는 어떠해야 할까. 두말할 것 없이 위대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 엄중한 부름 앞에 서 계신 분이 바로 김대건 신부다. 그는 한국 최초의 방인(邦人) 사제로 신자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사람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의 권위를 내세워 신자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6개월의 사목활동 동안 안타깝게 체포돼 옥중에 있으면서도 신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격려했다. 또 혹독한 문초 가운데서도 신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질문에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25년이라는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희생과 헌신으로 한국 교회의 주춧돌이자 사제들의 수호자가 됐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2025년 현재, 한국 교회에는 7천명이 넘는 사제가 탄생했다. 필자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많은 사제 중 과연 몇이나 ‘위대한 사제’일까. 다른 이들에게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유능한 사제가 되고 싶은가, 위대한 사제가 되고 싶은가.’ 사제로서 15년 남짓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남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순간이 더 많이 떠오른다. 입술로는 사랑과 희생을 말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했다. 칭찬과 인정이 사제로서 잘 살고 있다는 증거라 착각하며 살아왔던 지난날을 마주한다. 유능함이 존재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능력이라는 조건으로 공허한 자존감을 채우려 했음을 고백한다. 초라하고 가난한 필자의 빈 마음 속에 김대건 신부의 옥중 서한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진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마음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主祐)를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혼 대사(大事)를 경영하라. ...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 하노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한국교회사연구소·1996·384-386) 필자를 포함한 이 시대의 사제들은 유능함이 아니라 위대함,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 바쳐지는 희생과 헌신의 삶임을 위대한 목자의 진심 앞에서 결심해야 할 것이다.

[삶, 오디세이] ‘칭찬’이 사라지는 시대

칭찬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 성품, 성과 등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의 수고와 노력과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힘을 주는 것이다. 성경의 잠언 말씀에도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 하지 말며…”(잠 27:2)라고 했다. 칭찬은 자기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상대방을 칭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칭찬을 받으면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돼 기쁨과 자신감을 얻게 된다고 한다. 아이들은 칭찬을 받으면 칭찬받는 행동을 반복하게 되고 칭찬을 통해 유대 관계가 깊어지고 긍정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칭찬이 사라지는 시대다. 좀처럼 남을 인정하고 칭찬하지 않는다. 또 남들로부터 칭찬받는 일도 별로 없다. 스위스 출신의 사회학자인 장 지글러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세계 인구의 30억명이 굶주린 채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40억명의 인구가 매일 밤 누군가로부터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그리워하며 잠자리에 든다.”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칭찬의 관계가 돼야 한다. 칭찬이 있는 곳에는 좌절도 낙심도 포기도 절망도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읽었던 연필과 볼펜의 칭찬 이야기를 소개한다. 연필이 볼펜에게 “너는 한평생 칼질당할 일이 없으니 마음 하나는 편하겠다. 죽을 때까지 같은 굵기로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니 대단해. 땅바닥에 아무리 세차게 내동댕이쳐도 심이 부러지지 않는 내공을 가졌구나”라고 칭찬하자 볼펜은 연필에게 “너는 깎을 때마다 향기가 나서 사람을 기쁘게 해. 또 실수했더라도 지울 수 있으니 무슨 걱정이야.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침을 흘리지 않는 비결은 뭐지”라고 칭찬했단다. 사람은 어떤 관계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칭찬거리가 있다. 목민심서에는 “베려고 하면 풀이 아닌 것이 없고 품으려 하면 꽃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잡초가 돼 풀처럼 베는 것도, 예쁜 꽃으로 존중받는 것도 누군가의 선택으로 되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은 시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고 노래했다. 가만 가만히 오랫동안 바라보면 예쁘고 사랑스러워 들풀도 꽃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들풀도 꽃으로 보는 눈만 있으면 누구든 칭찬할 수 있다. 필자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다. 큰아들이 태어나고 3년 후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아내와 함께 기도해 셋째를 낳았는데 딸과 아들, 쌍둥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자녀들이 장성하고 결혼해 3명의 손주가 있다. 10월에 또 한 명의 손녀가 태어난다. 아들딸을 키울 때는 바빴고 힘들었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느라 다 칭찬하지 못하고 그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이 몹시 아쉽고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그런데 손주가 태어나 자라는데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무한칭찬, 무한사랑으로 손주들을 만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에 심어 놓으신 것이 분명하다. 이 땅의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를 지극 정성으로 사랑하고 칭찬한다. 그 힘으로 연약한 생명들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8월의 무더위가 지나가고 푸르른 생명들이 열매로 익어가는 9월에는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 많이 칭찬하는 시간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모두가 지금에 산다

음력 7월15일은 ‘백중(百中)’이라는 세시풍속이 있는 날이다. 농경사회에서 무더운 여름 동안 휴식을 취하고 곳간에 쌓아 뒀던 음식을 먹으며 가을의 추수를 기다리던 우리의 옛 전통이지만 지금은 어떤 날이며, 왜 있는지조차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백중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불교만의 전통으로 이끌어 지금까지도 백중 기도의 법회를 열고 있다. 불교에서의 백중은 ‘百中’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百衆’이라고 해 모든 중생에게 공양을 베푸는 의미로 법회를 한다. 살아있는 지금의 우리와 더불어 우리를 있게 해준 부모와 인연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해 모두가 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길 바라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찰에서 이 시기에 백중과 우란분절 법회를 봉행한다. 백중 법회에서는 부모를 비롯해 우리와 인연된 모든 떠나 보낸 영가들을 위한 제사와 그들이 불교적으로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좋은 윤회의 삶을 받아 나아가길 바라는 천혼(薦魂)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우란분절은 산스크리트어의 ‘우람바나(ullambana)’를 음사한 ‘우란분’을 절기로 둬 ‘盂蘭盆節’이라 한 것이다. 즉, 다른 의례와 달리 우란분절은 민중의 절기로 삼았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깊이 신앙됐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전통의례다. 이 우란분절에는 부처님의 제자인 목련존자와 그의 어머니에 관한 설화를 담은 ‘목련경(目連經)’이 그 배경이 된다. 존경받는 수행자인 목련존자를 아들로 둔 그의 어머니는 다른 수행자들이 목련보다 수행이 낮고 부족한 이들이라 무시하며 많은 업보를 쌓았고 죽은 후 그 업에 의해 지옥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목련은 가슴 아파하며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제해 주시길 간청드리지만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업에 의한 과보를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공양을 베풀고 지극한 마음으로 업보를 참회하면 조금씩 그 삶이 나아질 것이라 가르쳐 주셨고 목련은 그 가르침대로 매년 우란분절에 많은 이들에게 공양을 베풀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려 그 공덕으로 어머니를 지옥에서 아귀로, 다시 개로 윤회하게 이끌었고 끝내는 도리천궁에 태어나게 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드린다. 이처럼 우란분절은 바로 자신의 부모님에게 불교적으로 효행을 해드리는 날로 혹시라도 사후에 어려움을 겪으실지 모르는 부모님을 생각해 기도를 올리는 법회다. 불교는 무아(無我)를 말하는 종교이지만 지금의 자신을 진아(眞我)라고 해 인연들과 더불어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건 부모와 인연들이 우리와 함께해줬고 지금도 함께하는 덕분이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오늘 하루지만 부모님과의 소중한 인연을 한 번 더 생각하고 기억함으로써 새롭게 맞이하는 가을의 문턱에서 감사한 시간을 스스로 만들고 행복한 지금에 모두와 함께 살아가자.

[삶, 오디세이] 세계화된 한국문화, 그렇지 못한 이주노동자 일터

한국 소프트파워의 글로벌 장악력이 체감되는 이 시대, 케이팝은 더 이상 낯선 이국의 장르가 아니라 세계인의 일상에 녹아 있고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OTT 플랫폼을 타고 전 세계 시청자들의 대화에 오르내렸으며 최근에는 미국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글로벌 성공을 거둠으로써 K-콘텐츠의 확장성을 입증했다. 이러한 가운데 대통령은 문화의 산업화를 선언하면서 문화는 이제 국가 성장엔진으로 인식되고 있다. 문화의 세계화는 어느덧 한국인의 자부심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무대 뒤편에는 전혀 다른 얼굴의 한국이 있다. 바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이다. 농촌의 계절 수확, 건설 현장의 고단한 노동, 공장의 단순 반복 작업 등 한국 사회의 기초는 이미 이주 노동자의 손길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매일 처하는 일터에서의 현실은 우리가 자랑하는 한국문화의 확장성이나 개방성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벽돌공장 이주노동자 학대 사건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세계화되지 못한 노동 감수성 속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냈다. 한국문화는 K를 머리에 붙이고 세계를 누비지만 열악한 숙소, 여권 압수, 브로커의 착취, 산업재해의 불균형한 위험 등 외국인 노동 현장은 국경 안에 갇혀 있다. 사실 K-콘텐츠는 오래전부터 이 모순을 비춰 왔다. ‘반두비’(2009년)는 이주민 청년과 한국 청소년의 우정을 통해 차별과 배제를 드러냈고 ‘방가? 방가!’(2010년)는 외국인 노동자로 위장한 한국 청년의 삶을 통해 사회의 편견을 풍자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년)은 외국인 노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고립과 차별을 생생히 드러냈고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2024년)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결혼이주여성의 시선을 통해 다문화 사회의 이질감을 보여줬다. 이렇게 스크린과 플랫폼은 한국인의 일상 속 그림자를 이미 오래 비추고 있었던 셈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과거에도 닿아 있다. ‘국제시장’(2014년)의 독일의 탄광과 병원에서 땀 흘린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는 타국의 외국인 노동자였다. ‘미나리’(2020년)는 낯선 땅에서 뿌리 내리려 애쓰는 한국 이민 가정을 통해 우리가 언제든 세계 속의 이방인이 될 수 있음을 환기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 내부의 외국인 노동 문제는 과거의 우리의 문제였고 현재 우리가 타국에서 겪는 문제일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외국인 노동자를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시민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 국적을 넘어 모두가 안전하고 존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보편적 권리의 확보다. 사업장 변경 제한 같은 구조적 종속을 완화하고 주거·의료·교육까지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적 개선 또한 절실하다. 이렇게 사회 내부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적 포용성이 일반화될 때 한국문화의 세계화도 지속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불균형에 대해 질문을 던져 왔다. 이 불균형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한국문화의 세계화는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세계시민 의식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존엄을 보호하는 일에서 비롯한다. 그 존엄성을 지켜낼 때 한국은 비로소 세계 무대에서 제 몫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삶, 오디세이] 동행의 축복

인생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고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행복한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누가 가장 행복한 인상을 사는 것일까. 비행기 일등석을 타는 인생이라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삼등석 맨 뒷자리에 앉아 가는 인생이라고 다 불행한 것도 아니다. 그럼 누가 가장 행복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가장 편하고 가장 행복한 인생이다. 그러니 인생길을 혼자 걸어가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어가라. 어릴 적 나는 강원도 시골에서 자랐다. 산속의 밤은 도시보다 일찍 시작된다. 산 넘어 옆 동네에 이모 집이 있었다. 종종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밤길을 나서 이모 집에 마실을 가시곤 했다. 낮이라면 혼자서도 갈 수 길이지만 밤길에는 항상 어린 나를 데리고 이모 집에 가서 놀다 오셨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은 어두운 밤에 이모 집을 들어서면 이모가 무척 반기시면서도 “아는 뭐 하러 데리고 왔나”라고 하시면 어머니는 “언니, 밤길에 얘라도 데리고 오면 든든하다”고 하셨다. 그렇다. 밤길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고 오히려 짐이 될 것 같은 어린아이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한 것이 인생이다. 신학교 다닐 때 종종 삼각산에 올라가 산 기도를 한 적이 있다. 금요일까지 대전에서 공부하고 토요일과 주일은 서울 집에 가서 교회 일을 했다. 토요일 밤에 성가대 연습과 교회학교 교사 훈련까지 마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서둘러 산 기도를 위해 혼자 삼각산에 올라갔다. 그때 막대기 하나, 돌멩이 하나를 손에 들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목자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 하나면 양 떼는 안전할 수 있다. 밤길에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다가오면 손에 있는 돌멩이, 막대기보다 먼저 인사하는 것이 최선이다.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하면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도 당연히 나와 같은 경계심과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고 인사를 받고 덧붙여 “편안한 길 되세요”라고 축복을 나누게 된다. 인사를 나누기 전에 불편했던 관계가 먼저 인사를 함으로써 동지가 되고 내 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잘하는 것임을 유학 생활 중에 깨달았다. 넓은 땅에 사람이 흔하지 않은 곳에서 사람을 만나면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 먼저 인사를 한다. 나에 대한 상대방의 경계를 풀고 그에게도 평화의 시그널을 보내므로 안전한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개인화되고 전문화되기에 좋은 만남, 좋은 이웃이 더욱 필요하다. 초등학교 1학년 방학을 맞은 손주가 집에 와서 놀다가 “지금은 AI 시대야”라고 하는 말이 신기하게 들려왔다. AI 시대, 첨단과학 다 좋은데 좋은 친구, 좋은 만남이 없다면 그는 불행하게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불행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적어도 동행하는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임을 늘 기억하고 평생 동행의 축복이 있으면 좋겠다.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혼자 가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조차도 동행하는 인생이 있다. 그리고 죽음 너머에 그를 기다리고 환영하는 동행이 있다.

[삶, 오디세이] 내일은 다르길

연일 이어지는 불안정한 날씨로 지구의 모두가 힘들어하는 요즘이다. 우리도 7월의 마른장마 이후 갑작스러운 극한호우로 여러 피해 지역과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폭염. 작년 이맘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으나 올해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장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내년엔 올해보다 더 더워질 것이고 반대로 겨울엔 더 추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름의 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즐겁게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 대신 “물 조심해라”, “어딜 가든 조심해라”는 말을 당연한 듯 하고 있다. 예전에도 여름엔 더웠고 장마엔 비가 많이 내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가 달라졌다. 과거의 기준으로 그것들을 표현할 수 없어 새로운 기상용어까지 만드는 실정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와 더불어 근원적인 물음도 필요한 시점이다. 당연히 그 원인은 우리 인간들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산업·공업화, 그리고 쓰레기다. 이것 외에도 너무나 많지만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다. 그러나 이것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발전할 수 있었고 지금의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참으로 모순적이고 양날의 칼과 같은 현실이다. 여러 미디어나 사회운동으로 쓰레기 줄이기, 자연환경운동, 재활용이 강조되고 있어도 모두가 쉽게 변화하고 따르지 못하는 것도 이처럼 편리함와 불편함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오늘을 살펴보자. 습식사우나와 같은 찜통더위, 더위를 식혀 주나 싶지만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극한호우,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초강력 태풍.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편리함을 쫓고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리의 업보다. 불교에서 업은 두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 개인의 행위에 의해 생기는 업을 ‘불공업(不共業)’이라 하고 한 집단이나 사회가 함께 만들고 함께 받는 업을 ‘공업(共業)’이라 한다. 그리고 공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연환경을 ‘기세간(器世間)’, 그 기세간에 살고 있는 생물을 ‘유정(有情)’, 즉 중생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바로 ‘공업중생’이다. 지금의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 공업중생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지금도 내일도 겪어야 하는 공업의 기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없고 우리의 자손들을 힘들게 할 수 없기에 지금부터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 불편함이 편리해지고 귀찮음이 당연함이 될 때 우리의 내일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공업으로 내일의 기세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온전한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 탓이 아닌 배려와 원망이 아닌 실천으로, 오늘 우리의 하루를 조금씩 바꾼다면 그 업이 공업이 돼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다시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삶, 오디세이] 설명 없이도 존엄한 ‘몸’

살 빠진 것 같다, 오늘 머리 스타일이 예쁘다, 동안이다 등 우리는 너무 쉽게, 때로는 너무 무심히 타인의 외모에 대한 인사를 건넨다. 칭찬으로 둔갑한 사실상의 평가와 지적인데도 말이다. 겉모습에 대한 인사는 예의상 이뤄지는 스몰토크 같지만 실은 너의 몸을 나는 이렇게 보고 있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그 악의 없는 인사말이 타인의 몸에 대한 권리를 아무렇지 않게 침범한다는 데 있다. 몸은 누구나 가진 것이지만 누구나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마른 몸은 칭찬받고 뚱뚱한 몸은 조언받는다. 젊은 얼굴은 부러움의 대상인 반면 주름진 얼굴은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특정한 외모를 이상화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몸을 교정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우리는 마치 남의 몸이 모두 코멘터리 가능한 대상인 양 굴고 스스로의 몸도 언제나 비교당할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소모전이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의 몸은 설명되거나 정당화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 어떤 몸도 타인의 시선과 발언을 통과해야만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매의 다양성은 인간 조건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에 그 어떤 몸도 평가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 외모에 대한 칭찬과 지적, 인사와 충고 모두가 타인의 신체를 통제하는 방식일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그 언어를 멈출 책임이 있다. 이러한 몸에 대한 관용은 좋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 아닌 타인의 외모에 대해 설사 좋은 말일지라도 침묵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윤리다. 그런 관점에서 몸이 불편해 보인다거나 옷이 안 어울린다거나 하는 등의 모든 말은 걱정이나 호의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주관적 시선에 기반한 통제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몸에 대해 말하는 순간 나는 그 말을 듣는 존재를 해석 가능한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간섭하지 않을 책임과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서로 보장하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몸의 공동체다. 타인의 몸에 말을 얹지 않을 자유, 나의 몸이 평가당하지 않을 권리, 그것이 지켜질 때 우리는 비로소 각자의 몸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무엇보다 몸에 대한 자존감은 남의 인정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이 지나온 시간과 경험을 스스로 긍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아팠던 날들, 견뎌낸 상처, 웃었던 얼굴, 늙어가는 손 등을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겉모습에 대해 말하고 싶어질 때 내 몸이 나의 시간이고 나의 역사인 것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누구도 타인의 몸을 가볍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몸은 감각의 통로이자 정체성의 토대이며 타인과 세상을 경험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누구의 몸도 이상적인 기준에 맞춰 조율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몸으로 존재하며 그 다름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그 어떤 수식어 없이, 설명 없이, 다만 그 자체로 충분히 존엄하다. 그러니 적어도 7일 중 하루는 타인의 겉모습에 대해 말하지 말자. 그 침묵의 시간이 쌓여 우리는 타인의 몸을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고, 더불어 내 몸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삶, 오디세이] 문단의 ‘잘못된 선민의식’ 사라져야

선민의식(選民意識)의 사전적 의미는 ‘한 사회에서 남달리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잘사는 소수의 사람이 가지는 우월감’이다. 이러한 선민의식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고대의 선민의식은 타 부족을 침략할 때의 이론적 토대로 작용했다. 현대의 선민의식은 더욱 다양해지고 공고해졌다.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도 선민의식이다. 또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선민의식 때문이다. 선민의식은 국제적으로도 다양한 분야에 폭력과 갈등의 불씨가 돼 문제를 일으킨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문단도 선민의식이 심하게 나타나 문제가 되고 있다. 선민의식은 문학상 심사를 불공정하게 만든다. 국내 유명 문학상 중 하나가 구상문학상이다. 구상문학상은 상금이 5천만원으로 국내 시 부문 최고다. 필자는 주최 측의 요구로 구상문학상을 특집으로 다뤘던 모 문예지에 2년 동안 수상작 작품론을 집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제14회 구상문학상 수상자로 문정희 시인이 결정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숭원 문학평론가가 문 시인의 운영위원 이력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 시인이 심사를 맡았을 때 수상자였던 김종해 시인이 심사위원장을 맡아서다. 결국 ‘셀프 수상’ 논란에 수상은 취소됐다. 우리 문단의 선민의식이 낳은 카르텔의 폐해다. 선민의식은 수많은 등단 장사꾼을 낳았다. 등단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권위지로 등단했다. 이들 장사꾼은 등단 과정에서 다양한 명목의 비용을 받는다. 심지어 시인증도 발급한다. 장사꾼들은 자신이 한국문학 발전을 위해 일한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다. 그리고 등단시킨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는다. 자기 말만 들으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상대를 끊임없이 세뇌한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낡고 진부하다. 현대성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작품만 쓴다. 기시감 가득한 전원시를 잘된 시라고 말한다.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등단하려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막는다. 현재 포엠피플 편집주간인 김네잎 시인도 장사꾼에게 속아 잘못 등단했다가 재등단했다. 김네잎 시인이 행운을 상징하는 ‘네잎’을 필명으로 쓴 이유이기도 하다. 장사꾼의 마수에 걸렸지만 김네잎 시인처럼 좋은 시를 쓰는 시인도 많다. 오늘도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등단 장사꾼들은 저인망 그물을 들고 시인 지망생을 찾느라 바쁘다. 선민의식은 출신지로 계급을 나누게 한다. 메이저 문예지나 중앙일간지로 등단한 일부 작가들의 우월감은 목불인견이다. 특히 불공정하게 등단한 경우는 더 심하다. 필자가 아는 K시인은 메이저 문예지 출신이다. 문예창작과 재학 시절 K시인을 가르쳤던 강사가 자기 파워를 자랑하기 위해 등단시켰다. 메이저 문예지가 신인문학상제도를 만들기 전까지 이렇게 등단한 작가들이 많았다. 이들은 평생 등단지의 프리미엄을 가지고 활동한다. 그리고 메이저 출판사에서 저서를 출간한다. K시인은 몇 년 전 모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자로 자기 제자를 선정해 물의를 일으켰다. 필자가 문단에서 알게 된 일부 메이저 출신 문인들의 선민의식은 대단했다. 그들은 메이저 출신이 아니면 작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문단의 잘못된 선민의식은 사라져야 한다. 선민의식은 K-문학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력으로 평가받는 문단이 돼야 한다. 구상문학상을 공모전으로 바꿔 무기명 심사를 하면 수많은 시인 지망생에게 희망을 줄 것이다. 그리고 등단 장사를 하는 문예지들이 사라지면 90년대 이전 활발했던 동인지가 살아날 수 있다. 당시 동인지를 통해 실력 있는 작가들이 탄생했다. 아르코나 문화재단의 지원금 심사도 무기명 미발표작으로 해야 한다. 심사가 공정했을 때 한국 문단은 역동적인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어디로 등단했든 실력으로 평가받는 문단이 돼야 한다. 문단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유리천장은 선민의식이 낳은 카르텔 때문이다.

[삶, 오디세이] 쉼, 새로운 창조

일주일 가운데 어느 요일이 가장 좋은가를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출근하지 않고 쉬는 토요일 혹은 일요일이라고 대답한다. 학생들도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을 택할 것이다. 쉬는 날, 쉬는 시간, 쉬는 공간의 쉼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면서 본능으로 심어주셨다. 하나님도 창조 사역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안식은 창조의 완성이며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복이다. 여섯째 날에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첫 번째로 주신 복은 ‘쉼’이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안식일인 일요일에 쉬고 일하는 월요일을 맞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쉼은 일을 마치고 받는 보상이 아니라 일하기 전에 쉼의 복을 받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주간의 시작은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이다. 여름이 됐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방학이 시작된다.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각자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가 돼 너무나 좋다. 교회에서도 신앙훈련의 목적으로 수련회나 캠프를 진행한다. 집을 떠난 아이들은 또래들과 특별한 장소에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어떤 경우는 해외 단기선교를 체험하기도 한다. 해외에 나가 낯선 문화와 언어를 접하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시작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를 잘 도와줘야 하는 주체적인 인생관을 갖는다. 직장인들도 매일 아침 출근전쟁을 멈추고 잠시 자연 속에서 회복의 시간을 갖는 여름휴가를 갖는다. 사실 우리나라는 참 바쁘게 사는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제일 일을 많이 하는 나라가 멕시코라고 한다. 대한민국도 이에 못지않다. OECD 평균 노동시간 1천742시간보다 130시간이나 더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다행히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근로시간이 줄어들고 자기계발과 쉼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젊은이와 직장인들은 쉼 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손주가 대전에 살고 있다. 유치원을 다닐 때도 만나기 힘들었지만 초등학생이 되면서 태권도 학원에서 방과 후 돌봄센터 프로그램까지 오후 5시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시간에 맞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영상통화로 얼굴을 보면 꽤 지쳐 있는 것 같아 “오늘 많이 피곤하니”라고 물으면 “핵~ 피곤”이라는 이모티콘으로 대답한다. 그럴 수밖에 없지만 안쓰럽고 애처롭다. 그래서 오늘은 피곤한 손주에게 여름방학이 되면 수원의 할아버지 집에 와서 자전거도 타고 바닷가에도 가 놀자고 희망을 가득 담아 약속을 했다. 굳이 방학이나 휴가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시간에서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쉼의 축복을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 마음을 담아 교회 앞에 빈 의자를 몇 개 준비해 뒀다. 그곳에 앉기를 부담스러워하는 분들도 있지만 종종 간섭받지 않고 빈 의자의 주인공이 돼 여유를 즐기는 분들이 참 보기 좋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조금은 여유롭고 편안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쉬면 충전되고 회복되도록 인간을 만드셨다. 운동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향기 짙은 커피를 마시거나 반가운 사람을 만나 공감하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쉬라’고 부르신다.

[삶, 오디세이] 선조의 지혜가 담긴 ‘윤달’

올해는 윤달이 있는 해다. 윤달은 본래 윤월(閏月)로 ‘더하다, 보태다’의 ‘윤(閏)’에 한글로 월(月)을 표기한 한자와 한글이 혼용된 표현이다. 그래서 윤달을 잉여의 달, 추가된 시기로 여기며 민간과 종교에서 특별하게 여겨왔다. 그런데 왜 이런 특수한 시기가 생겨나게 된 것일까. 지금과 같이 일상의 대부분을 양력으로 보내고 태어날 때부터 양력만을 사용해온 세대에게 음력도 다소 낯선데 윤달은 더욱 생소하고 자칫 종교적인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윤달은 특히 동아시아에서 발전된 개념으로 선조들이 이 땅에 정착하고 생활환경을 꾸리며 만들어낸 지혜로운 시간법이다. 우리는 예부터 농사를 생계의 중심으로 삼아온 농경사회다. 그렇다 보니 태양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시간과 천문과는 다르게 달과 별을 중심으로 시간과 날짜를 계산했다. 그러나 태양의 주기에 의해 생기는 사계절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모두 중요시하다 보니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계절과 천문의 움직임에 상세하고 정밀한 계산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이다. 이 태음태양력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이십사절기는 양력으로 하지만 농사를 비롯해 민간의 의례에 관한 건 음력으로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는 큰 차이가 있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윤달이다.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27.3일이다. 그러나 지구도 태양을 돌고 있기 때문에 속도에 차이가 발생하게 돼 태양을 돌고 있는 지구를 다시 달이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29.5일이 된다. 그리고 29.5일에 열두 달을 곱하면 354일이 되는데 양력의 1년인 365일과 약 11일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래서 양력과 음력의 1년의 시간차를 극복하기 위해 2, 3년마다 한 달을 더 넣게 되는데 이것을 ‘치윤법(置閏法)’이라 한다. 즉, 윤달은 양력과 음력을 동시에 사용하며 그 시간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치윤법의 산물이다. 이는 일상의 농사와 의례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안해낸 선조들의 지혜인 것이다. 이 치윤법에 의해 2025년에 윤달이 있게 된 것이고 양력 7월25일이 음력으로 두 번째 6월인 윤달이 된다. 이처럼 윤달은 같은 달이 두 번 있게 되기에 예부터 이 시기에는 그동안 소홀히 했거나 하고자 했던 것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행해 왔고 특히 종교계에서는 윤달맞이 법회나 기도회를 열어 자신과 인연들의 공덕을 쌓고자 한 것이다. 이번 7월의 윤 6월에 자신의 주변과 인연들을 보다 살펴보고 그동안 놓쳤던 것이나 하지 못했던 것들을 챙겨 다시금 해본다면 선조들이 만든 지혜로운 시기에 자신을 보다 발전시키고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가는 지혜로운 우리의 윤달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삶, 오디세이] 약한 이들에 먼저 닿는 재앙... 불평등한 기후 위기

어느 해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그날, 빗물은 반지하에 살던 우리 이웃의 삶을 앗아갔다. 그날 도심의 배수시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홍수 같은 물이 저지대로 몰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인재였지만 누구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같은 비를 맞았음에도 누구는 잠깐 불편했고 누구는 목숨을 잃은 것처럼 기후 위기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지구 온난화 관련 각종 과학적 수치가 쏟아지지만 기후 위기의 실체는 그 수치 뒤에 있다. 도심 외곽의 노후 주택, 에어컨이 없는 쪽방, 지하에서 일하는 노동자,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 등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장 깊은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기후 위기는 생태 문제이기 전에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한 불평등의 문제인 것이다. 폭염도 폭우와 다르지 않다. 냉방비를 아끼기 위해 하루 종일 창문만 열어 놓고 열기를 참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중 상당수가 65세 이상의 홀몸노인이다. 냉방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임에도 그것을 뒷받침할 공적 시스템은 여전히 미흡하다. 에너지바우처제도나 폭염 쉼터 정책은 있지만 수혜 범위는 제한적이고 접근성이 낮다. 이러한 기후 위기의 불평등은 도시와 농촌, 계층, 주거환경, 국적에 따라 격차가 뚜렷하다. 외국인 근로자 중 상당수가 컨테이너에 살며 폭염과 폭우로 인한 위험에 노출된다. 고온에서 농작업을 이어가는 노령층은 탈진과 열사병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에게 닥칠 피해가 예외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후 위기는 점점 더 일상이 되고 있고 그 위험 또한 구조화돼 간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은 보다 명확히 기후 불평등에 개입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가 차원에서 기후 취약 계층의 정의 등 기후 행정 시스템을 확립하고 이들을 우선 보호하는 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 폭염이나 한파 등 기후 재난 상황에서 단순한 대피소 제공을 넘어 주거환경 개선, 냉난방비 지원, 방문 돌봄 서비스 확대 등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후 재난 대응 시스템을 지역 실정에 맞게 세분화해야 한다. 지금처럼 전국 단위 경보만으로는 각 지역의 취약한 상황을 반영할 수 없다. 예컨대 저지대에 위치한 동네나 노후 주택 밀집 지역, 하천 인근 비주택 거주지를 우선 기후 행정 시스템 관리 구역으로 지정하고 사전 점검과 긴급 대응을 체계화해야 한다. 주민들이 실질적으로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지정하고 훈련까지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교육과 공공 커뮤니케이션에서도 기후 정의라는 관점을 강화해야 한다. 기후 위기를 단순히 지구를 위한 실천으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누가 가장 먼저 피해를 입고 어떻게 사회가 이를 막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시민이 공감하고 실질적인 대응이 가능해진다. 흔히 기후 위기는 모두의 문제라지만 이는 반쪽짜리 진실이다. 그것은 모두의 문제가 맞지만 그 재앙은 항상 약한 이들에게 먼저 닿고 지금까지 대응은 그 불균형을 바로잡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 시대의 정의란 단지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을 넘어 누가 가장 아픈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 질문에 응답하고 있는가. 혹시 못 본 척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삶, 오디세이] “이재명 정부, 문화예술 정책 재설계해야”

선진국을 재는 척도 중 하나는 문화와 예술이다. 높은 문화는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물화 중심의 세계를 좇다 보면 사회계약론자들이 지적한 자연 상태에 빠져 천민자본주의로 전락한다. 우리나라엔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있다. 이 기관을 아르코라 부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모토는 ‘문화예술과 국민을 잇고, 문화예술의 내일을 함께하는 아르코’다. 아르코지원기금은 모든 문화예술인이 받고 싶어 한다. 아르코기금을 받아 수준 높은 수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하지만 아르코가 문화예술인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작가이므로 아르코 사업 중 문학 부문의 개혁만 논하겠다. 첫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지원 신청 작품 심사는 무기명 미발표작으로 해야 공정해진다. 필자가 처음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은 것은 2018년도다. 필자는 1990년도 문예지를 통해 등단했다. 그러나 등단한 문예지가 폐간되자 문단의 주변인으로 남게 됐다. 이렇게 투명 시인으로 존재하다 문학평론으로 다시 등단했다. 재등단 결과 문학평론뿐만 아니라 시 청탁도 받을 수 있었다. 필자는 아르코 지원 신청 부문을 문학평론이 아닌 시를 선택했다. 그 결과 미발표작 시 7편이 발간지원에 선정돼 첫 시집을 등단 30년 만에 낼 수 있었다. 필자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기명 미발표작으로 심사했기 때문이다. 둘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지원 자격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아르코창작기금은 선정되면 3년이 지나야 다시 지원할 수 있다. 3년이 지나니 지원 조건이 바뀌어 있었다. 출판사 계약서와 작품 한 권 분량을 제출해야 했다. 메이저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작가에게 유리할 것이 자명했다. 아르코가 기득권자들의 카르텔에 의해 공정성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발간 지원을 포기하고 무기명 미발표작으로 심사하는 발표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작년에 평론으로 지원 신청을 하려고 보니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으로 또다시 바뀌어 있었다. 조건이 국내외 주요 문학상에 최근 10년 내 수상 이력이 있는 작가였다. 어쩔 수 없이 첫 평론집을 출간하기 위해 인천문화재단에 지원 신청을 했다. 이처럼 아르코는 지원 자격을 자주 바꾸면서 작가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했다. 셋째,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지원금을 대폭 상향해야 한다. 국내 총예산 700조원이 되는 나라의 문학 지원 기금이 적어도 너무 적다. 2024년까지 문학 발간 지원과 발표 지원 총 지원액이 12억원이었다. 그런데 2025년부터 발간 발표 지원이 없어지면서 12억원의 지원 기금이 절반으로 줄어 6억원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선 지원금을 개인당 1천만원에서 2천만원으로 오른 것처럼 홍보했다. 하지만 총지원금은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이라는 이름으로 6억원이다. 이것은 문학을 무시하고 작가를 기만하는 행위다. 국가 총예산 700조원에 대한 분배의 문제다. 2025년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의 경우 선정자는 30건이고 개인당 2천만원씩 총 6억원이 지원됐다. 이재명 정부는 아르코문학지원기금의 총액을 대폭 늘리고 무기명 미발표작으로 심사해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또정부와 지방정부는 제도적으로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의 부족한 고료를 보조해 주고 아르코나 지역 문화재단 기금으로 발간한 서적을 구입해 각 기관에 배포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문예지에 대한 지원금을 늘려 실질적 고료 상승을 돕는 것도 시급하다. 윤석열 정부에 의해 없어진 문학나눔과 발표지원도 즉각 복원하기 바란다. 유럽 국가의 문화예술 정책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이재명 정부는 선진국의 척도를 문화예술로 보고 문화예술 정책을 재설계해 블랙리스트 작가들의 상처를 하루빨리 치유해야 한다.

[삶, 오디세이] 투지(鬪志)

현충일인 지난주 금요일 새벽에 국가대표 축구팀이 한국의 여름보다 더 뜨거운 날씨인 이라크의 바스라에서 열린 2026년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이라크를 2 대 0으로 이기고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라크의 한낮 기온은 45도를 넘고 오후 9시가 넘어서 열리는 경기인데도 35도라고 중계 캐스터가 말했다.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은 축구 종가 잉글랜드도, 아트사커 프랑스도 해 보지 못한 것으로 세계적으로도 평가받는 대단한 일이다. 필자는 1998년 5월 베트남 하노이를 여행한 적이 있다. 시내 중심에 있는 커다란 마트에 들렀는데 가전제품 매장 가득히 월드컵 개막에 앞서 대형 TV를 좋은 조건으로 특별할인 판매한다는 전단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매장을 오가던 모습이 신기했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월드컵 본선에서 경기를 할 수 있는 나라는 32개국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보다 객관적으로 축구 실력이 좋은 나라도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본선에는 관중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나라들도 많이 있다. 축구 경기의 게임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양편 11명이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발과 온몸을 이용해 패스와 드리블로 상대편 골문에 공을 더 많이 넣는 팀이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고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은 전 세계인들을 들썩이게 한다. 특정 국가에 대해서는 절대 지면 안 되는 라이벌 관계가 형성돼 대한민국이 일본과의 경기에는 무조건 이겨야 하기에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응원을 하기도 하는데 태국과 베트남,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잉글랜드와 독일,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과 포르투갈, 멕시코와 미국도 한일전과 같은 대단한 라이벌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이 얽혀 있다. 축구 경기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당연히 실력이 좋아야 하지만 그 외에도 변수가 많이 있다. 이번 경기에서는 전반 22분 이라크의 주 공격수 알리 알 하마디가 우리나라 수비수 조유민 선수의 얼굴을 걷어차 퇴장당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1명이 퇴장당한 이라크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고 홍명보 감독이 후반전에 교체한 선수 2명이 상대를 압도하는 탁월한 실력으로 두 골을 넣어 쉽게 이겼다. 필자는 오랜만에 새벽잠을 포기했지만 맘 편하게 응원하며 즐겁게 애국할 수 있었다. 나는 즐겁고 편했지만 승리를 위해 뜨거운 모래바람을 가르며 승리를 이룬 선수들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중에서도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수비수 조유민 선수의 ‘투지’가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경기가 시작돼 치열하게 볼 다툼을 하는 중 상대 선수의 발이 자기의 얼굴을 향해 날아올 때 꿈쩍하지 않고 끝까지 볼을 패스한 후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조유민 선수의 얼굴은 축구화 스커트에 쓸려 상처가 나고 피가 났지만 절대로 피하지 않는 강력한 정신력의 투지가 아름다웠다. 나의 삶을 돌아본다. 상황에서 쭈뼛거리지 않고 손해인 줄 알지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뜨겁게 헌신하는 투지가 내게 있는가. 교회 앞에 뜨거운 여름날을 기다리고 있는 수국 화분이 있다. 꽃이 얼마나 예쁜지 교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세차게 부는 바람에 그 화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넘어진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놓고 뒤돌아보면 투지 있게, 흔들리지만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화분에 물을 가득 담아 두기로 했다. 물이 가득한 화분이 넘어질 때도 있지만 또 물을 채워 예쁜 꽃을 피워 교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꽃과 함께 포기하고 싶지 않다.

[삶, 오디세이] 말의 무거움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가 일상을 지내며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을 꼽으라면 단연코 ‘말’일 것이다. 특히 요즘 시대는 말이 더욱 많아지고, 말로 인해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생겨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치러진 선거에서도 수많은 말이 오갔고,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말과 그로 인한 이슈가 생겨나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말은 가장 빠르고 무엇보다 가볍게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빠름과 가벼움과는 달리 말이 지닌 힘은 어떤 행동보다 무겁고 무섭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을 조심시키고 말을 무겁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다. 불교에는 중생이 살아가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을 계율로 정하고 있다. 계율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공통되게 들어있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를 ‘성계(性戒)’라 부른다. 성계의 네가지는 ‘불살생, 불투도, 불음행, 불망어’로 이를 어기면 불교인으로서의 자격(성품)을 박탈당하거나 큰 업을 짓게 된다고 한다. 이 중 ‘불망어’가 바로 말과 관련된 것이다. 불망어는 ‘거짓말하지 말라’로 번역되지만 그 안에는 망어(妄語·거짓말), 기어(綺語·속이는 말), 양설(兩舌·두 말), 악구(惡口·욕설)의 네 가지가 전부 포함돼 있다. 그리고 계율 중 보살계에는 10계가 있는데 그중 4계가 앞의 말로 인한 것으로 돼 있을 정도로 말을 조심시키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 오래된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는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자는 나쁜 말을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기 자신을 찍는다’고 설한다. 말은 부메랑과도 같아 일단 자신의 입을 떠나면 여러 사람을 거치지만 다시금 그 자리로 맹렬하게 되돌아와 다름 아닌 자신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이는 명심보감에 나오는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라는 말도 같은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제 말로 만든 길목에 다시금 서게 됐다. 우리가 뽑은 이 나라의 대표가 우리에게 했던 공약(公約)이 어떻게 실천되고 실현될지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말을 다시금 해야 할 때다. 그저 지켜보고 남 일과 같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걸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수없이 말한 약속이 공약(空約)이 아니라 모두와의 약속으로 실현되고,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의 무거움과 무서움을 보여줘야 한다. 대한민국은 우리가 사는 곳이고 우리가 국민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말을 함부로 하게 되면 구업(口業)을 짓게 되고 그 구업은 말과 같이 가장 빠르게 현세에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무서운 말이 있다. 말의 무서움을 여실히 알고 무거운 말로 그 약속들이 실현되는 그런 오늘이 되도록 이제 우리가 그 말의 거울이 돼야 할 때다.

[삶, 오디세이] 가족의 소중함 되새기며

난 내 부모를 잘 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익숙한 말투, 즐기는 음식, 반복하는 농담이며 과거 에피소드까지 줄줄 꿸 정도였던 터라 오랜 세월 함께했으니 당연하다 믿었다. 그러나 요즘 연로하신 부모님을 뵐 때마다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린다. 이런 나의 심리는 최근 스스로에게 자주 하는 질문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나는 정말 이 두 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정말 이 두 분이 내가 알고 있는 그분들이 맞는가. 이래서 인간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하나 보다. 그만큼 나는 내 부모를 충분히 안다고 착각했다는 것인데 돌아보면 그렇게 믿는 순간부터 오히려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게 됐던 건 아닐까 싶을 뿐이다. 이런 사유는 어느 날 치매안심센터에 어머니를 모시고 간 순간부터 시작됐다. 기억력 감퇴로 불안해하는 어머니의 팔을 잡고 센터 입구에서 ‘너는 곧 치매로 판명될 거다’라고 무언의 압박이라도 하는 듯 큼직하게 세워져 있는 입간판을 지나 조심스럽게 센터의 문을 여는 순간 뭔지 모를 애석함이 밀려 왔다. 어릴 적 나를 이끌던 든든한 그 손이 어느새 바싹 마른 고목처럼 야윈 모습으로 내 한쪽 팔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흐려지고 몸은 쇠약해지며 존재는 조금씩 빛을 잃는 것, 그것이 생의 순리임을 잘 알지만 그렇기에 더욱 뼈아픈 순간이었다. 사실 부모님을 병원이나 센터로 모시는 것도 쉽고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미루시거나 의사의 말을 흘려듣는 두 분을 볼 때면 정말이지 가슴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 옛날 나 역시 비슷하게 투정을 부렸을 텐데, 이젠 상황이 역전되다 보니 늙음이란 나에게 더 이상 막연한 그 무엇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현실이 돼 나를 흔들었다. 그렇게 보면 계절마다 피고 지는 식물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제 몫의 생만을 살아야 하는 순리에 순응하는 태도는 인간보다 더 단단하니 말이다. 한때 부모는 나의 전부였다.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기준을 세웠다. 그러다 사춘기엔 그들을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성인이 된 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멀어졌다. 그러다 이제야 약해진 부모를 바라보며 그들도 나처럼 흔들리며 사랑했던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두 분의 고집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방어였고 어설픈 조언은 마음 깊은 곳의 애정 표현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자식들은 늘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뒤늦은 후회만을 안고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매일 낯선 가족을 마주하고 변해 가는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며 새롭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산다. 그래서 결국 가족을 안다는 믿음은 때로는 착각일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 그 소중함을 잊고 지내기 쉽지만 바로 그 익숙함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서로를 완벽히 알 수 없어도 함께 걷는다는 것, 이해가 부족해도 끝내 품는다는 것. 그 따뜻한 반복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이 가벼운 듯 무거운 마음을 안고 조심스레 내일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나의 부모도, 형제들도 다들 그러하겠지 하고 위안을 삼으며.

[삶, 오디세이] 블랙리스트 작가

필자는 블랙리스트 작가다. 필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질문과 분석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것이 성인이나 신이라 할지라도 분해되고 다시 조립돼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사람들이 금기시하는 정치나 종교에 대해 견해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필자는 청탁받은 원고를 쓸 때도 정치나 사회를 비판했고 단체의 성명서 발표가 옳다고 생각되면 이름을 올렸다. 모 문예지에선 필자의 글을 실어야 할지에 관해 편집회의를 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어느 날 필자는 블랙리스트 작가가 돼 있었다. 한강도 블랙리스트 작가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필자와 함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됐다. 박근혜 정부는 사회적 이슈와 인권 문제를 다루고 이를 확장하려는 작가들을 불순 세력으로 봤다. 블랙리스트 명단이 밝혀지자 한국 문학계에 비상이 걸렸다. 군사독재정권의 악몽이 되살아나며 작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글을 쓸 때마다 정부 당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없어지고 문학작품의 소재는 축소된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작가들은 정부의 억압적인 태도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블랙리스트 작가는 늘 불안하다. 관리 대상이 돼 예술가 지원 혜택에서 배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들은 글을 쓸 때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강이 쓴 ‘소년이 온다’도 정부에 의해 유해 도서가 되고 세종도서에 배제됐다.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행위다. 문화와 예술이 발전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된다. 예술의 부가가치는 국가의 국격을 높이며 제조업의 경쟁력도 높인다. 간섭받지 않는 절대 자유 속에서 작품을 집필할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작가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는 작가의 살생부다. 군사독재 시대에는 군인들이 작가의 책을 검열했고 박근혜 정부는 작가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는 지원 삭감으로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를 없앴다. 문학나눔 도서 보급은 우수 출판물을 선정해 전국 주요 도서관에 보급하는 사업이다. 문학나눔에 선정되면 출판사는 아르코 지원금으로 2쇄를 발행하고 저자는 2쇄의 인세를 받는다. 결과적으로 독자들은 작품성이 검증된 도서를 읽는다. 그런데 문학나눔이 사라졌다.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에 적힌 소수를 부정적으로 보고 배제했다면 윤석열 정부는 문학나눔을 없앰으로써 문학인 모두에게 불이익을 줬다. 그러므로 윤석열 정부는 박근혜 정부보다 더 나쁘다. 필자는 블랙리스트 작가로 윤석열 정부 초기 소송에서 승소했다. 그때만 해도 정부가 문학나눔을 없애는 등 광범위하고 심각한 행위를 할 줄은 몰랐다. 이제 6월3일이면 새 정부가 들어선다. 작가로서 새 정부에 바란다. 제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지 마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지원 서류를 간단히 하라. 원로 예술인들은 서류 제출이 어려워 지원 신청도 못 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예술과 문학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고 정책을 펴기 바란다. 블랙리스트로 살생부를 만들어 관리하는 국가에서 노벨 문학상이 나왔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작가의 정신이다. 작가들은 절대 자유 속에서 글을 쓰고 싶다.

[삶, 오디세이] 커피 한잔의 감동

필자는 목사이지만 교회 주변, 동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커피를 배워 바리스타 자격증을 갖게 됐다. 나의 바리스타 자격증은 그냥 인터넷 온라인 강의로 적당히 배운 것이 아니라 거금의 수강료를 내고 명성이 있는 교수님을 찾아 세종에 가서 수개월 동안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다. 커피를 공부할 때 교수님이 ‘맛에는 사회성이 있습니다’라는 말로 강의했는데 아주 많이 공감했고 커피를 배우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맛있다’와 ‘맛없다’를 구분해 표현한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은 그 사람의 성장 배경과 사회성에 의해 형성된다. 한국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된장찌개를 외국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정착해 산다면 된장찌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맛의 사회성 때문이다. 사자성어 가운데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말이 있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라는 뜻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목적만 이루려 하다가는 수고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물고기를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물가로 가야 하는데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사회성의 과정을 뛰어넘어 고집과 강요로 목적을 이루려 할 때가 많다. 상대방을 설득해 목적을 이루려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은 강요라는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강요와 위협은 가장 단순하고도 쉬운 설득 방법이다. 강도가 칼을 들이미는 것이 굶고 있는 자기 가족들의 비참한 사진을 보여주며 필요를 요청하는 설득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은 절박한 상태에서는 적절한 다른 수단을 찾기보다 강압적인 방법인 강요를 택하기 쉽다. 구약성경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가까워졌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때 발락 왕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에 발람 선지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설득하는 방법이 감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위협적인 강요였다. 필요를 설명하거나 정당한 이유로는 설득할 수 없으니까 결국 발락 왕은 높은 지도자들을 발람 선지자에게 보내고 또 보내며 감동이 빠진 강요를 한 결과는 모압의 멸망과 발람 선지자의 죽음이었다. 어떤 상담학 통계에 따르면 커피 향이 있는 상담실에서 상담할 때 대화가 더 원활하게 진행되고 내담자도 속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쉽게 말하기 때문에 상담의 결과가 좋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강요하지 않고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인 줄 알지만 “언제 만나서 식사 한번 해요”, “커피 드실래요”라는 말에도 감동한다. 필자는 아침마다 교회에 나와 카페 문을 열고 행복한 향기가 가득한 커피를 내리고 음악 소리를 높이고 창문을 활짝 연다. 그리고 교회 앞을 지나가는 분에게 “커피 한잔하고 가실래요”라고 말을 건다. 오늘 아침에는 지난번 만났던 동네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어와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대통령선거 이야기에서 시작해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야기와 수원kt 야구팀 이야기까지 커피 한잔이 모자라도록 마음을 열고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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