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오디세이] 프로답게 산다는 것은

윤경원 세종사이버대 한국어학과 교수·한국어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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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개인적으로 미국에 대해 별다른 적대심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선호하는 마음도 없지만 미국의 대선 때만 되면 한 번쯤 미국에서 살 때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곤 한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대학원 펠로십이라는 이름으로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한 사립대학을 다닐 때의 이야기다.

 

평소 전공 분야뿐만 아니라 영화평론에도 관여하고 있던 터라 그날도 영화 리뷰 하나를 쓰기 위해 도서관 인문학 열람실을 찾았다. 참고로 그 대학 도서관의 경우 주중에는 24시간 개방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대에도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 대학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주중 24시간 개방이라는 학교 도서관 정책에 한번 놀라고, 그 늦은 시각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책에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또 한번 놀랐던 순간이다.

 

그렇게 인문학 서적이 진열된 장서실 여기저기를 대중없이 훑어보다가 우연히 정치학 코너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놈 촘스키. 촘스키는 필자가 속한 언어학 분야에서 변형생성문법 이론을 창시해 미국이 좁다 하고 전 세계 언어학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세계적인 언어학자다. 그런 언어학자의 이름을 대학 도서관의 정치학 코너에서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개인적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 순간에는 잠시 동명이인일 것이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책의 저자 소개란에는 언어학자 촘스키의 사진이 붙어 있었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 느껴졌던 한 인간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촘스키와 관련해 놀랐던 적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교수로 소속된 학교가 흔히 MIT로 불리는 매사추세츠공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 중심의 대학들은 언어학과 같은 순수 인문학을 대학 글쓰기나 외국인 유학생 대상의 한국어 등의 교양 과목 운영을 위한 조건 정도로만 여길 뿐 그것을 핵심 연구 분야로 두고 명성을 떨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MIT가 테크닉 중심의 기술인 양산이 아닌 인간을 생각하는 철학적 공학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됐다는 것은 익히 알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언어학이라는 순수 인문학이 공대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필자로서는 감히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만큼 놀라움이 컸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는 ‘문송하다’는 자조 섞인 신조어가 대학생들과 채용가를 중심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정도로 인문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학문의 경계를 넘어 학제적 연구가 자유롭게 이뤄지는 미국 대학의 개방성에 눈길이 간다. 이뿐만 아니라 연구자든 누구든 스스로를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정의할 필요가 없는 미국식 인재상 또한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국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이 여러 전문 분야에 걸쳐 이른바 멀티태스킹을 할 경우 어느 영역에서도 전문성을 갖지 못하는 한량처럼 정의하려 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국의 지배적 정서상 MIT나 촘스키 같은 멀티플레이란 한국에서 태생적으로 기대하기 힘든 구조인 것이 명확하다. 하지만 반가운 것은 그러한 한국의 경직된 사회 분위기가 지금의 MZ세대를 중심으로 크게 변하고 있는 점이다. 비록 구직 후 잦은 이직이 문제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 개인이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리라. 지금 여기에서 프로답게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반드시 프로여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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