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국가 코리아’ 부활기

지난 11월21일 2년여동안 결론 없이 표류해 오던 평생교육법 전부개정안이 드디어 국회를 통과하여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비단 평생교육계의 사사로운 경사로움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비로소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평생학습국가 코리아’로의 긴 물꼬를 확연히 틀어내는 가히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동법의 개정에 붙여 차제에 ‘학습민족 코리안’의 ‘위대한 학습국가 코리아’ 부활을 위한 대 서사시를 그려본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학습민족으로서의 풍부한 자질과 명민성 그리고 놀라운 학습잠재력을 지닌 민족임을 자타가 인정해 온 터다. 문득 한국교육사에 인용되었던 중국 고사의 한 귀절이 떠오른다. “동쪽에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다. 그곳에는 신기하게도 길거리마다 경당이라는 큰집을 지어, 미혼의 남녀자제들이 삼삼오오 류대로 벗을 정하여 동숙 기거를 하며 큰 소리로 경서를 읽는 소리가 하루 종일 온 거리에 그칠 줄을 모르더라….” 라는 구절이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얼마나 대단한 교육열을 지니고 있는 학습민족이었던 가를 가름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학습민족적 혼과 얼’은 신라의 화랑도 교육, 고려의 군자교육, 조선의 선비교육으로 이어지면서 이후 동학교육과 신교육 그리고 6·25동란 속 포탄이 총알처럼 날아다니는 속에서도 천막학교를 지어 한번도 공부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던 학습민족으로서의 웅지를 면면히 이어왔다. 우리네 민족의 학습중시성은 최근 학습국가 코리아 이른바 ‘러닝 코리아 21(LK21)’이라는 국가 프로젝트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타국의 벤치마킹이 되는 학습국가로서의 놀라운 성장세와 탁월한 위상을 과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금번 평생교육법 전부 개정안의 통과는 학습국가 코리아의 건설에 확실한 이정표이자 디딤돌이 되어 줄 것임이 자명하다. 동 법의 통과와 함께 명실상부한 국가 평생교육 추진체제를 갖추게 될 것이다. 중앙평생교육진흥원의 설립 운영과 각 시·도 평생교육진흥원으로 연결되는 거미줄 같은 국가학습 네트워크 추진체제를 구축하게 될 것이며 전문가로서의 정예화된 평생교육사들이 진용을 갖추고 양질의 평생학습 기회 제공과 프로그램 개발 운영 그리고 학습컨설팅과 멘토링, 코디네이팅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며 방대한 학습정보망 서비스 시스템이 구축되어 가히 행복한 학습시민들이 열어가는 글로벌 학습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평생학습 참여율은 아직 25% 수준으로 북유럽이나 OECD 선진 국가들의 50~60% 수준에 비하면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민의 평생학습 참여율이 국민 총생산성이나 국부를 가름하는 양적 통계지표와 정비례한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연구결과들을 통해 입증되어 왔다. 국민의 대다수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 생애주기에 걸쳐 평생 동안 자기개발과 성장을 위한 학습에 지속적으로 적극 참여함으로써 개인의 발전과 향상은 물론 국부 창출과 글로벌 국가 경쟁력 강화 그리고 사회적 민도 향상이라는 필생의 성과를 동시에 거양할 수 있다면, 이 아니 탁월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동 법의 통과를 계기로 학습민족 코리안의 학습국가 코리아 부활이 이루어지기를, 그리하여 우리 민족이 ‘세계학습혁명지도’의 한 중심에 우뚝 서는 옹골찬 ‘학습허브국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스가 아닌 우리의 한국형 ‘아고라’ 학습광장에서 모두가 함께 행복한 ‘평생학습 대 반란’을 일궈내기를 기대하며. 최운실 아주대 교육대학원장

로스쿨 지역배분, 객관적 기준 적용돼야

다사다난했던 2007년도 이제 저물어 가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2007년은 대선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온 나라가 말 그대로 선거 정국에 휩싸여 있는 느낌이다. 정치와는 별 관계가 없어야 할 대학들도 올 연말과 내년 연초는 정치적 변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선정 문제 때문이다. 지난 11월30일 오후 6시 전국 41개의 대학의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신청서가 마감됐다. 이제 남은 일정은 정부가 각 대학별 132개 항목의 500여쪽 분량에 이르는 설치인가평가보고서에 대한 서면평가와 현장 조사를 한 후 1월 말께 예비인가를 내리는 일만 남았다. 각 대학들은 그야말로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고 채점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결과의 평가 순위가 한 반 전체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분단별로 매겨진다는 것이다. 이미 정부는 법학전문대학원 선정에 있어서 전국을 5개 권역(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으로 나누고 권역 별로 인가신청서 항목 평가점수 순으로 결정하겠다고 공지한 바 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전국의 대학을 일괄적으로 경쟁시키면 수도권 대학들이 유리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지역균형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워 5개 권역으로 나눈 것이다. 지역균형을 고려한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인가 배분방식의 선정은 지난 9월20일 김천혁신도시 기공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로스쿨 설치 때 지역균형발전을 1차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취지가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및 운용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5조에 반영됐고 교육인적자원부는 이를 근거로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인가 기준에 지역균형을 반영하면서 경기도, 인천, 강원은 서울권역에 포함시켰다. 전국을 5개 권역으로 나눈 근거는 고등법원 소재지이다. 그러나 이처럼 고등법원 소재지 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권역을 구분한 것이 합리적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고등법원 설치의 기준은 기본적으로 사건수이며 이는 해당 지역의 인구수와 직결한다. 경기도는 서울보다 인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고등법원이 있는 서울에 가까운 이른바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고등법원이 설치되고 있지 않다. 고등법원이 없어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음에도 다시 이를 근거로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에도 불이익을 받는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본인이 학장으로 재직 중인 아주대학교는 경기도, 인천, 강원을 통틀어서 사법고시 합격자수가 가장 높은 대학이자 규모면이나 질적인 면에서도 서울 및 전국의 대학들과의 경쟁에서 법학전문대학원에 유치에 강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는 학교다. 그러나 문제는 아주대학교는 전국의 대학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41개 대학 중 가장 경쟁이 치열한 서울 소재 대학들과 경쟁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단 2개 대학만 신청한 대구, 경북을 별도 권역으로 설정한 점을 상기해 보면 지극히 모순된다는 결론을 쉽게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방 국립대학들을 중심으로 지방에 더 많은 정원을 배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정부 내에서도 반반에 가까운 배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지역균형이라고 할 때에는 인구수나 경제적 수준과 해당 관련 분야의 수요, 예컨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경우에는 소송사건 수 등 최소한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합리적인 근거 없이 정치적인 고려만이 우선돼서는 안 된다. 만일 지역균형의 기준 또는 권역 배분의 기준이 인구수라면 당연히 경기도에는 서울권역의 절반에 해당하는 정원이 할당돼야 할 것이다. 한반의 5개 분단이 있는데 한 분단은 24명이 있고 다른 분단들은 2·4·5·6명이 앉아 있다. 그런데 분단별 학생 수는 고려하지 않고 평등한 배분을 주장한다면 이는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명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골고루 발전되는 것을 반대하는 국민은 없다. 단지 한쪽을 무리하게 억눌러서 다른 쪽을 발전시키려고 하는 방법론이 국민들의 저항을 사고 있는 것이다. 백윤기 아주대 법대 학장·전 법무법인 두우 대표

우리의 보석

어제 오후에 서울을 다녀오며 사당역 구내에서 아동들을 학대한 여러 사진들을 보면서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설리번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큰일을 이루시거나 크게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자 하실 때 매우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분은 지진을 일으키시거나 번개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아기가 평범한 가정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게 하신다. 그런 후 그 어머니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불어 넣으시고, 그 어머니는 그 생각을 아기의 마음속에 불어 넣는다. 그런 다음 기다리신다. “세상의 가장 큰 힘은 지진도 번개도 아니다. 세상의 가장 큰 힘은 아기들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아기들이 어떻게 양육되느냐에 따라 선한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될 수도 있다는 뜻 일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전하는 말 한마디, 표정 하나, 행동이 아이들의 미래 , 우리사회의 미래를 만든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갖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의무는 그들을 사랑하고 가르치고 존중하는 것이다. 성경의 잠언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우리가 가르쳐야할 것은 우리의 모범에 의하여 가르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서 그들 아버지와 어머니의 습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를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여기고, 그들을 친절히 대하고 모범으로 가르친다면, 또한 모든 어머니가 그들의 자녀를 그들 삶의 보석으로 여기며 진실한 사랑으로 그들을 키운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사회는 훨씬 더 아름다워 질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 허영심으로 가득한 한 무리의 여성들이 서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석들을 자랑하며 코르넬리아라는 여성에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보석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코르넬리아라는 자신의 두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아이들이 자신의 보석이라고 대답했는데 코르넬리아의 두 아들들은 후에 로마 역사상 가장 설득력 있고 영향력 있던 두 명의 개혁가인 가이우스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형제들이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보석들을 소중하게 다루어야지 그들을 때리고 발로 차고 내던지고 심지어는 성적 학대까지 가하는 비극적인 일은 없어야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석을 함부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보석이 될 원석처럼 우리가 잘 세공한다면, 즉 잘 가르치고 이끈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밝아 질 것이다. 훌륭하게 세공된 보석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처럼 훌륭하게 성장한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는 기쁨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클 것이다. 남경현 경기대 응용정보통계학과 교수

내가 지지하는 대선후보

미국의 만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에 하나가 찰리 브라운이다. 초등학생인 찰리가 하루는 박물관에 갔다가 인솔교사를 잃어 버렸다. 찰리가 공룡 구경을 재미있게 하고 있던 중에 인솔 교사와 일행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필자는 40여 년 전에 이 만화를 읽다가 미국 교육의 수준과 미국 박물관의 기능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시의 미국 박물관들과 어린이를 위한 교육방법은 한국의 현실에 비하여 너무 앞서 있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중 하나가 성장하여 ‘쥬라기 공원’을 제작한 스티븐 스필버그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크고 작은 박물관의 수가 400곳이 넘지만 그 중에는 전시실 하나짜리 초미니 박물관도 수두룩하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교육시설로는 새로운 대학이나 병원보다 세계적인 자연사 박물관 하나, 지구와 지구인의 문화를 이해시키는 세계 민족학 박물관 하나가 절실히 필요하다. 훌륭한 자연사 박물관 하나는 국립 과학대학 하나 보다 훨씬 교육효과가 크고, 세계 민족학 박물관 하나는 한국학생 전체를 세계인으로 키우는 종합 교육기관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런 기초 교육시설도 없는 풍토에서 자라난 한국인들이 세계인들과 경쟁을 해서 지금 여기까지 와있는 것은 기적이다. 왜 여기서 더 발전하지 못하고 몇년 째 10위권 밖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해답은 간단하다. 지식의 기초가 되는 실물교육을 경험할 수 있는 박물관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허술한 기초 위에 아무리 그럴듯한 집을 지어도 그 집이 오래 못 가듯이 기초지식이 약한 상태로 성장한 젊은이들이 세계를 상대로 정치, 외교, 무역을 하여도 분명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문과고 이과고 간에 그 현상은 똑같을 것이다. 교육의 기본으로 돌아가 새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문명의 충돌’ 저자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분석을 잘 살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40년 전 지구상에서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지금 세계 11번째의 무역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이룩해 온 수천년 간의 역사에 대한 자존심과 한글의 사용이라는 편리성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라고 그는 설파하였다. 문화와 과학은 별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밀고 당기면서 함께 자라는 것이다. 자연과학와 인문학은 서로 보완관계를 유지하며 인간을 성장시킨다. 2008년 정부예산안 중에 문화예술관련 예산이 2조원을 넘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총 예산의 1% 수준이다. 그러나 그 쥐꼬리만한 예산 마저도 많다며 삭감하자고 혈압을 올리는 국회의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과연 그들의 생활비 중에 문화와 예술에 필요한 돈이 1%밖에 되지 않는가. 대선이 다가오면서 여러 후보들이 난립하는 것도 후진국적 현상이지만 정부예산의 단 1%만으로 문화와 예술을 진흥시키겠다는 발상이 세계 최빈국 수준이다. 나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그런 한계를 뛰어 넘어 우리의 대한민국을 선진국 대열로 이끌고 갈 안목과 추진력이 있는 대통령을 원한다.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유권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김병모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국제박물관협의회 종신회원

입시문제 유출,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

김포외고 문제 유출 사건은 정말 일어나서는 안될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교육은 교과내용의 암기가 아니라 올바른 정의관과 같은 가치관의 전수이다. 신용불량자 아들에게 신용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려고 이른 아침 아들과 함께 신문을 돌린 어머니는 이런 산 교육을 몸으로 가르친 사례일 것이다. 이번 김포외고 입시문제 유출사건은 교육기관에서 실천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장 나쁜 교육을 행한 꼴이 됐다. 여기에 연루된 사람들은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허술한 시험관리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한 인식의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다기보다는 여기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이것이 범죄행위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낮았던 탓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고등학교 뿐 아니라 대학에서조차 엄격한 성적관리는 뒷전이고 성적을 부풀리려는 목적으로 미리 문제를 알려주는 일이 다반사인 것이 현실이다. 조금이라도 자녀들에게 유리하도록 하려는 학부모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평준화된 교육환경은 이처럼 문제 미리 알려주기를 더 부추긴 측면이 있다. 수영대회에서 ‘부정출발’ 한 선수가 있으면 다시 출발하게 하면 된다. 그러나 김포외고 입시는 문제를 미리 본 적이 없는 다수의 선수들을 다시 출발시키기도 어렵다. 더구나 공동출제 문제가 김포외고에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번 김포외고 문제유출 사건은 ‘법치’를 어기는 ‘실천’을 해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손실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이런 과정을 다시 해결하기 위해 발생할 또다른 많은 갈등과 비용을 치르도록 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 전쟁터에서도 많은 돈을 벌 가능성 때문에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물건을 실어나르는 상인들이 나타난다. 김포외고의 입시경쟁률이 13대 1이었다고 한다. 이런 높은 경쟁률은 반칙에 대한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유혹을 잠재우려면 가혹하다 싶을 만큼 높은 처벌이 따라야 한다. 이것이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법경제학’의 가르침이다. 지능적인 화이트칼러 범죄는 감시하기가 쉽지 않고, 성공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 그래서 철저한 감시로도 이를 예방할 수 없다. 범죄가 발각되면 높은 형량과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 그래야 들킬 확률이 비록 낮더라도 지불할 비용이 커서 기대비용(들킬 확률 곱하기 들켰을 때 치를 비용)이 기대수익보다 높아 발상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 독일 등 유럽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도입하고 있는 승차권 검사 방식이 이를 활용하는 사례다. 이번 김포외고 입시유출 사건도 유야무야로 넘어가지 말고 재시험에 따른 비용, 법치의 경시를 가르친 비용, 갈등을 일으킨 비용 등을 모두 감안해 제대로 처벌할 필요가 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준공검사가 부실했다고 성토만 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시공했을 때 회사가 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번 입시문제 유출 문제도 철저한 출제문제 관리만 강조해서는 효과적인 예방대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김포외고의 비정상적인 폭발적 경쟁률은 특목고가 강제화된 고교 평준화 속에서 비평준화된 일종의 명문고이기에 학부모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음을 반영한다. 학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나중에 사회에 더 잘 준비시켜줄 차별화된 교육을 원한다. 이제 몇 개 특목고들이 누리던 특권을 모든 학교들에 개방해 각 학교가 그 ‘차별화’를 위해 경쟁해 신흥명문고가 되려고 노력하도록 평준화 교육의 틀과 교육규제 자체를 바꿔야 한다.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과 투자가 비뚤어진 방향이 아니라 실제로 성과를 맺는 방향으로 가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자.

상하이 ‘인생사계 쾌락학습축제’ 스케치

7년 만에 다시 찾은 상하이는 참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참으로 놀라웠다. ‘ASEM 교육연구 허브 구축 국제회의’ 참석차 그 곳에 간 나는 뜻밖에도 ‘인생사계 쾌락학습’이라는 독특한 명제의 상하이 학습축제에 참석하게 됐다. 당서기장 쯤 되는 듯 꽤나 높은 지위의 고관들과 함께 향기 좋은 차를 마시며 거대한 컨벤션 스타디움 맨 앞줄 VIP석에 앉아 개막식을 참관하면서 나는 뜻밖에 상하이의 저력과 위용 그리고 그들이 일궈 낸 놀라운 성장의 진원지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만리장성의 위용보다 더 무서운 대국의 학습저력이 물씬 배어나는 축제였다. 거대 도시 상하이의 수십 개 디스트릭(社區)과 커뮤니티(洞) 주민 모두가 함께 하는 그야말로 거대한 학습공동체 축제였다. 그 많은 상하이 시민들이 모였건만, 소란 한 점, 흐트러짐 한 점 없었다. 고요함과 엄숙함, 일사분란함과 질서정렬함 속에 묘하게도 엄청난 힘과 에너지와 다채로움과 생동성의 학습문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한쪽 팔을 들어 올리는 듯한 포즈의 독특한 거수 인사, 우렁찬 힘이 넘쳐나는 에너지 박수 등이 내겐 ‘상하이식 중국의 위력’으로 느껴졌다. 가장 중국적인 전통과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신세기적 문화학습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이른바 ‘과거-현재-미래 공존형 한편의 퓨전학습드라마’였다. 우리의 학습축제와는 사뭇 달랐다. 요란한 폭음의 불꽃놀이나 유명세를 타는 대중스타의 열광하는 환호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속에 지적이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그들의 학습축제는 시작됐다. 인생사계 학습축제는 만삭의 임신한 젊은 어머니가 태어날 아이에게 축복과 함께 뭔가 좋은 교육적 가르침의 경귀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서 아주 작은 꼬마들의 뮤지컬 경극, 어린 학생들과 청소년들의 다채로운 생활속 체험학습공연, 광부아저씨에서 거리의 미화원, 작업장 노동자, 지식인 등 각계 각층이 함께 하는 시민 대학습 시연과 일상학습 리포트가 무려 4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휠체어를 탄 장애우들의 밝은 미소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족히 80~90세는 됐음직한 머리 허연 어르신들의 작품 낭독과 역사 연설 중국체조 시연, 상하이 시민대합창 피날레 등 인생사계를 어우르는 쾌락학습축제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축제 백미 중의 하나는 축제의 한 막이 끝날 때 마다 주어지는 학습대상 이벤트였다. 뱃속 아기부터 어린아이들과 어른, 노인들에 이르는 참으로 많은 이들에게 상이 주어지는 시상식이었다. ‘용감한 마음을 가진 시민상’, ‘매력적 아기상’, ‘성공한 커리어인상’, ‘길거리 학습상’, ‘멋진 일터학습인상’, ‘역경 극복상’ 등 명칭도 이색적이고 다채로웠다. 마치 상하이인 전체가 상을 받고 모두가 상을 주는 듯 기쁨과 환희 속에 위대한 학습공동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축제가 끝날 무렵 나는 오랫동안 기립 박수를 치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은 감동스러운 시간이었다. 독특함이 듬뿍 묻어나는 축제였기에, 몇 사람만의 축제가 아닌 상하이 모두의 축제였기에,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효과적 축제가 아닌 생활 속에 체화되어 깊숙이 뿌리내린 삶의 축제였기에, 중국의 힘과 학습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일렁대는 학습축제였기에 그랬다. 그 속에서 나는 그들의 교육과 학습의 스펙트럼이 이미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전생애화 되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구호나 개념이 아닌 ‘삶 속에 체현된 생애학습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한 필의 아름다운 ‘학습비단’을 빚어내듯, 학습경험과 저력을 씨줄, 날줄로 자아내는 그들의 ‘상하이식 학습축제’에서 우리와는 또 다른 공신(工夫의 神)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07년 11월 그렇게 그들의 인생사계 학습은 계절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 옛날 문익점 선생이 붓통 끝에 목화씨 한 점을 몰래 들여오듯, 지금 예서 우리는 그 무엇을 배우고 그 무엇을 들여올 것인가? 최운실 아주대 교육대학원장 한국 평생교육학회장

경기도와 지역균형발전 그리고 로스쿨

수도권이 대한민국의 블랙홀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음은 상당히 오래됐다. 이는 서울, 경기 등 수도권의 면적은 국토의 11.8%에 불과하면서 인구의 48%와 생산기능의 60%가 집중돼 대한민국의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표현인 듯하다. 그래서 참여정부는 지역균형발전을 정부의 주요과제 중 하나로 선정해 행복도시, 기업도시, 혁신도시 등을 지방에 분산함으로 인해 수도권 과밀화를 억제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한 국가의 성장 동력이 한 곳에 집중된다는 것은 장·단점이 모든 지역의 사람이 골고루 경제 성장의 파이를 나누어 갖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수도권 이외의 주민들이 갖는 상대적인 불만은 당연하다. 또 이를 시정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모두 이의가 없을 듯 하다. 그러나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이름하의 수도권규제정책은 수도권 주민들의 역차별 불만을 낳고 있음도 엄연한 현실이다. ‘지역균형발전과 수도권 역차별’ 참으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차분히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모든 국민들이 골고루 잘 살게 하자는 것일 것이다. 여기에는 경제성장이 잘 사는 것이라는 가치와 파레토 법칙을 토대로 분배가 잘 사는 것이라는 가치, 양적인 발전 보다는 질적인 발전이 잘사는 것이라는 가치들이 충돌한다. 만일 수도권은 이미 양적인 성장을 이뤘으니 이제 질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진심이라면 수도권 주민들 역시 지역균형발전정책을 겸허히 수용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지난 9월17일 지역혁신박람회에서 국가균형발전은 수도권의 질적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라고 역설해 왔다. 그러나 10월30일 발표된 법학전문대학원 선정 방법을 보면 국가균형발전이라는 것이 단순히 수도권 억제에 귀착된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든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전국을 고등법원 관할구역을 단위로 5대 권역,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로 설정하고 각 권역 내의 우수대학을 설치인가 대학으로 선정하게 되어 있다. 경기 지역은 고등법원이 없는 이유로 서울권역에 편제되어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경기도가 서울과 가까이 위치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지역인 것은 확실하다. 다시 말해 경기도는 고등법원이 따로 없어 서울까지 가서 항소심 재판을 받아야 하고 이에 들어가는 시간과 경비가 따로 드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수도권에 속해 경기도가 당하고 있는 역차별 중의 하나이며 그야말로 경기도민들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정부 제공 법률서비스가 열악하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고등법원 소재지로 말미암아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에서도 경기도가 별도의 권역으로 선정되지 않은 것은 경기도민에 대한 이중적 부당대우이자 또 하나의 서울과 경기도 간의 역차별이다. 만일 경기도에 법학전문대학원이 설치되지 않는다면 경기도민들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서울로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할 것이다. 또는 자식들을 변호사로 만들기 위해 서울 시민들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법률서비스나 법학교육서비스 모두 삶의 질, 소위 후생복지를 가름 짓는 주요 요인이다. 정부가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국가균형발전이 수도권 주민들의 후생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정책이라면 경기도의 인구를 고려해 경기도에 전체 정원의 10%에 해당하는 200명의 정원을 할당, 경기도민들에게 적절한 법률 교육 관련 후생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경기도를 배제한 채 법학전문대학원이 설치된다면 경기도민들은 정부의 지역균형정책이 단순히 경기도 발전 억제 정책이라는 의구심을 도저히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경기도는 과연 어떤 위치에 서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짚어 보아야 할 때이다.

통계이야기

우리가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 숫자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이가 비슷한 두 자루의 연필 중 더 긴 것을 고를때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지만 왼쪽의 것은 17.5㎝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17.7㎝라고 말하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오른쪽의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 두 상황을 비교해 보면, 하나는 막연하게 길이를 비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를 구체적인 수로 표현한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두 송이의 꽃 중에서 더 아름다운 것을 고르라’고 할 때, 자신의 기준으로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한 송이를 고르게 된다. 이런 경우 일반화되지 않은 것 뿐이지 주관적이나마 그 아름다움의 정도를 비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심지어 인간의 감성까지도 수치로 표현이 가능하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은 수학의 함수인데 함수를 간단히 설명하면 원료를 넣어서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함수라는 기계는 투입하는 원료의 종류와 관계없이 항상 숫자라는 제품을 생산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연필의 길이를 알고자 할 때, 연필이라는 물건의 길이를 측정하는 행위는 함수라는 기계에 연필이라는 원료를 투입하는 것이고, 길이가 10.5(cm)라는 측정값을 구하는 것은 입력된 원료의 길이를 측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함수라는 기계가 10.5(cm)라는 제품을 생산한 것이다. 즉 함수는 판단의 대상이 되는 모든 개체들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고, 어떤 현상을 이렇게 수치로 나타내면 구체적일 뿐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비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판단의 기준을 정함에 있어서도, 객관적이든 또는 주관적이든, 이러한 수치화의 과정을 밟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통계에서는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한 개체의 현상’으로 보지 않고, 여러 개체들로 이뤄진 집단에 의해 나타나는 집단현상으로 간주하는데 ‘기성세대’, ‘신세대’, ‘부유층’ 등이 바로 이러한 집단이다. 통계용어로는 ‘모집단’이라 한다. 집단현상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대상이 되는 모집단의 생김새인 ‘분포’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모집단의 분포를 알려면 하나의 숫자로는 모집단의 생김새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수원에 소재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평균 성적이 75점이라면, 이 숫자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75점이라는 숫자만으로는 어떤 교육학적인 대책을 강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집단 속에 성적이 75점보다 우수하거나 열등한 학생들이 많지만 그 숫자만으로는 우수하거나 열등한 학생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각 개체들이 대표값을 중심으로 얼마나 퍼져있는가를 나타내는 산포도와, 대표값을 기준으로 볼 때 어느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가를 나타내는 왜도 등의 값을 이용해 설명한다. 통계는 생산자의 의도에 의해 오염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악용’이라고 한다. 또한, 통계는 그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왜곡되거나 잘못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을 ‘오용’이라고 한다. 또한, 통계가 마치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듯이 아무 곳에나 인용을 하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이것을 ‘남용’이라고 한다. 이러한 통계의 악용이나 오·남용에 의해 통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통계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커다란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통계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통계’라는 숫자를 접할 때에는 반드시 모집단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 수치는 집단현상을 표현하는 값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2단계 국토균형발전안

학급 학생들 아무나 바나나 우유를 마실 수 있으면, 서로 먼저 마시려고 경쟁해 우유는 금방 동이 난다. 이 때 양보심이 없다고 비난하기보다는 각자에게 하나씩 나눠주면 된다. 이는 아이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어른들도 누구의 것도 아닌 세금을 먼저 쓰려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 결과 이용객이 없는 공항이 지어진다. 그래서 한 경제 내에, 각자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을 공동세원을 통해 해결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자본이 낭비되고 모두 가난해진다. 그래서 도로 등의 시설에 관한 결정도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정부가 재정분권과 자기책임 하에 수행하는 것이 좋다. 지방정부가 해당 지역에 적절한 공공서비스를 제공해 경제가 잘될수록 더 많은 ‘우유’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공공지출의 비효율성은 비교적 이해되고 있으나 이것이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은 별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정부재정의 지원을 받으므로 돈벌이에 급급할 필요가 없는 학교가 사설학원에 비해 인내심 배양과 같은 목표를 더 잘 추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인내심 배양을 위해 어떤 사설학원에서는 체벌이 행해지지만 학부모의 환영을 받고 있고 학교체벌은 소송까지 빚고 있다. 왜 이런 역설적 현상이 발생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적당한 체벌이 자녀들에게 좋다고 여기는 학부모들만 그 학원에 자녀들을 맡기지만, 준(準)공공기관인 학교에는 체벌에 대해 견해가 다른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보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체벌을 금지하면 갈등이 없어질 것 같지만, 이는 적당한 체벌이 자녀들의 훈육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똑같이 학교재정에 기여한 납세자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 그래서 갈등요인을 최대로 줄이려면, 정부재정지출은 되도록 민간이 담당할 수 있는 분야를 배제하고 또 특별히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이를 무시할 때, 내재된 갈등이 폭발한다. 아담 스미스는 사회를 건물에 비유해 정의는 기둥이고 자비는 장식이라고 설파했다. 자선을 적게 베푸는 사회는 유지될 수 있으나, 사람들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기는 배분이 이뤄지는 사회는 붕괴한다. 심지어 도둑의 사회마저도 훔친 물건을 구성원들이 분개하는 방식으로 배분해서는 성립될 수 없다. 정부는 최근 2단계 균형발전방안을 내놓았다. 균형발전정책은 세금으로 낙후지역에 더 많은 재정투자를 하는 ‘강제적’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선의 시행에도 정의의 원칙이 필요하다. 공익을 내세운 규제에 따라 피해를 본 지역을 우선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단계 균형발전방안은 국방·상수원 보호 같은 공익을 앞세운 명분으로 토지이용에 중첩적인 제한을 받고 있는 경기북부 주민들을 차별해 분노를 사고 있다. 이 방안은 원래 기준으로는 정체지역으로 분류되던 팔당댐 지역의 양·가평을 경기도에 소재한다는 이유로 부산과 같은 성장지역으로, 또 남양주시와 여주군을 강남구와 같은 발전지역으로 분류하고 또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토지이용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동두천, 연천, 포천 등을 부산과 같은 성장지역으로 분류했다. 낙후지역 재정투자에서 이 지역들을 지속적으로 배제하려는 것이다. 사실 공익적 명분이 그 지역 낙후의 한 요인이 되고 있으므로, 정부는 공익과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 간에 균형을 맞추기 위한 보상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일일이 보상하기 어렵다면, 세금을 재원으로 한 재정투자에서 우선적으로 이 점을 고려하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2단계 균형발전방안에서 이들을 더 불리하게 차별하고 있다. 정의의 여신은 장님이다. 정의의 여신 앞에서 판정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권력자인지 아닌지, 혹은 부자인지 아닌지, 아예 알지 않기 위해서다. 지역균형발전정책이 최소한의 정의 원칙에 부합하려면, 재정지원 규모를 결정할 때 정의의 여신 앞에 선 사람이 경기도 사람인지, 강원도 사람인지, 혹은 충청도 사람인지 알 필요가 없어야 한다. 우리가 합법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부를 만든 것은 무엇보다 정부로 하여금 우리의 재산권을 외국이나 타인의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렇게 재산권에 중첩된 규제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균형발전을 추구한다면서 이 낙후지역들을 차별하는 것은 너무 몰염치한 짓이 아닐까? 왜 불필요하게 규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분노케 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는가? 김 이 석 경기개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학습시민들이 만들어 가는 ‘열공 세상’

‘열공 주부’라는 신조어가 인터넷 카페나 신문지상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곤 한다. 땀방울 송글송글 맺혀가며 뭔가에 집중해 열심히 공부하는 열공 중년 여성의 다부진 모습이 떠오른다. 필자는 오랫동안 가깝고도 먼 나라, 세계적인 장수국가이자 생애학습의 메카로 불리우는 일본에 갈 때 마다 그들의 “일상 속에 뿌리 내린 열공풍조”가 부러웠다. 수십 년의 연조를 지닌 ‘일본 시정촌 평생학습마을 만들기’ 운동에의 열띤 시민 참여가 부러웠다. 마을 마다 예외 없이 설치되어 있는 공민관(시민관)에 주민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똘똘 뭉쳐 눈빛을 반짝이며 열심히 뭔가를 배우는 모습 그리고 지하철을 기다리는 틈새시간마저도 지나치지 않고 포켓북이나 신문을 꺼내 읽거나 귀에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중얼거리며 어학학습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들이 부러웠다. 어린 학생이나 젊은 직장인들만이 아닌 평범한 가정주부나 90대를 넘어선 연로한 노인들마저도 한결같이 “그들만의 열공세상”에 빠져들고 있음이 부러움을 넘어 “무서운 일본인”이라는 두려움으로까지 다가오곤 했다. 물질적 풍요로움보다 천배는 더 강한 위력의 선진 학습시민의 위용과 감동의 학습미학이리라. 그러나 요즘 나는 더 이상 그들이 부럽지도, 두렵지도 않다. 최근 우리 사회 전역에서 파도치듯 확산되고 있는 “열공세상 학습시민”의 모습이 크나 큰 감동으로 실감나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학습 유전인자”를 지니고 있는 ‘학습민족’이라는 조금은 과분한(?) 칭송을 들어 온 우리가 이제 다시 학습민족으로 부활하는 감동의 새 학습사를 써 내려가고 있음이다. 학교나 대학, 정부기관, 기업들 뿐 아니라 풀뿌리 시민단체들과 학습동아리들 모두가 학습의 대열에 나섰다. 70~80대의 글 모르시는 어르신들도 부끄러움 대신 당당함으로 야학이나 문해교육기관,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 시민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 여성회관, 문화센터, 대학평생교육원, 사회복지관, 주민자치센터, 평생학습센터 등에서 노트와 프로그램 북을 들고 이리 저리 교실마다 뛰어 다니시는 중년 여성들 노인들의 다부진 열공 모습이 눈에 뜨인다. 새로운 직업의 세계를 열고자 경력개발이나 자격취득 직업교육기관의 문을 두드리는 직장인과 중고령층 성인학습자들의 모습 또한 희망적인 학습시민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기를 더해가며 조성되고 있는 전국의 평생학습도시들과 그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뛰는 평생교육사와 자원봉사자들과 학습시민들의 열기 또한 상상 이상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도 늦은 시간까지 때론 밤12시를 훌쩍 넘겨가며 공부하는 야간특수대학원과 박사과정의 늦깎이 학생들 모습이 종종 발견된다. 하얗게 밤을 새워가며 시간을 잊고 나이든 어른 학생들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는 모습, 온 종일의 격무와 피로가 만만치 않으련만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졸린 눈꺼풀을 제치고 흔들며 무서운 집념으로 자기개발에 혼을 담는 모습은 가히 상상 이상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미 사회에서 일가를 이루고 상당한 정도의 자리매김을 한 그들이련만, 자신을 가일층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인생의 블루오션을 열고자, 더 나은 제2·3의 리포지셔닝을 위하여, 그들은 지금 목하 열공 중이다. 배움에 있어 그들은 결코 오만하지 않으며 늘 겸손하고 낮은 자리에 임한다. 그 또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이쯤해서 문득 애플사 CEO인 스티븐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사에서의 한마디 “Stay foolish(인생에 있어 약점마저도 환영하는 “바보스러움과 겸손함의 미학”을 견지하라)”라는 충언이 떠오른다. 2007년 위대한 교육민국을 열어가는 학습시민들의 희망 “열공세상” 진 풍경을 맞으며….

경기도에 필요한 로스쿨은

흔히 우리는 “집안에 의사, 변호사는 있어야…”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세상사가 다들 비슷한지 외국 역시 유사한 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도 그런말이 있는데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의사, 변호사 외에도 자동차 수리공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동차 수리공이 의사나 변호사와 같이 선망의 대상이라기보다 아마도 자동차가 생활의 필수품인 미국인 입장에서, 자동차정비 서비스가 의료서비스나 법률서비스만큼 생활에서 가장 많이 필요한 분야이며 동시에 서비스 수요자와 공급자간 정보 이해도에서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는 소위 ‘정보의 비대칭성’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법률서비스 공급자인 법률가에 비해 법률지식이 현저히 부족한 국민들이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저렴한 가격에 얻기 위해서는 많은 변호사들이 배출되어 경쟁과 특성화를 통해 법률시장을 다양화, 전문화하는 것이 좋은 방안일 것이다.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는 이런 취지에서 도입된 제도이다. 2009년부터 시행할 예정인 법학전문대학원제도 즉 로스쿨(Law School)제도는 대학에서 다양한 학문을 전공한 졸업생들을 3년의 대학원 교육과정을 통해 다양한 직역의 전문화된 법조인을 양성해 국민들에게 각 분야에서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제도 도입의 원래 취지와는 달리 현재 전국 대학에서는 법학전문대학원 유치를 위한 광풍이 불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 유치되면 법조인을 희망하는 우수한 학생들이 학부부터 그 대학으로 몰릴 것이고 이는 곧 입학성적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법학전문대학원을 유치하는 학교와 그렇지 못한 학교간의 위상이 급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이 때문에 경기도를 포함한 지방의 대학들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각 도 또는 광역단체별로 최소한 하나의 법학전문대학원이 설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법학전문대학원을 유치하면 당연히 지역이 발전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지역에서 길러낸 변호사들이 너도나도 서울로 몰려가 변호사를 개업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지역의 법학전문대학원이 지역발전에 공헌하기 위해서는 지역 특색에 맞는 변호사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의 개발이 우선이다. 예를 들어 예향의 도시인 전주는 문화콘텐츠를 보호, 발전, 육성시키기 위한 지적재산권 또는 엔터테인먼트 법을 특성화한다거나 자연환경이 우수한 강원도는 환경보호를 위한 환경법 전문가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경기도는 어떠한가? 경기도는 서울보다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경제적인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지역이며 특히 60만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활동하고 있는데 아주대학교가 외부에 의뢰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대기업과는 달리 많은 중소기업들은 고비용으로 인해 사전에 법률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고 대형 분쟁이 발생한 경우에만 변호사를 찾는 실정임이 확인되었다. 우리 경기도 중소기업들에게 필요한 것은 저렴한 가격의 양질의 법률서비스인 것이다. 이에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아주대학교 법과대학은 지역의 발전에 공헌하기 위하여 중소기업의 창업에 필요한 인허가 절차에서 시작해 기업 활동 과정에서 대기업과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 필요한 법률서비스, 세무 관련 법률서비스 그리고 국제적 진출을 위해 필요한 무역 통상 법률서비스 등 중소기업 운영에 필요한 전 과정에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중소기업법률전문가’를 양성을 위한 ‘중소기업법무’를 특성화 목표로 정하고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오고 있다. 아울러 지역 친화적인 교육 계획을 수립하고 졸업 후 지역 봉사에 따른 각종 인센티브도 구상 중이다. 한 집안에 의사나 변호사가 있더라도 집안일에 관심 없고 가문의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면 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경기도의 2007년은 경기 지역발전에 진정으로 공헌할 법학전문대학원의 유치가 절실한 순간이다. 백 윤 기 아주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전 법무법인 두우 대표

오른쪽으로 걷기

이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걷기나 등산 혹은 자전거타기를 할 때이다. 그 길이 일방통행이 아닌 이상 가끔씩 서로 자신의 길을 가다가 부딪치게 되는 원인 중의 하나는 각자의 통행방법이 한 사람은 왼쪽으로, 다른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좌측통행하던 사람이 우측통행하던 사람에게 왜 좌측통행을 하지 않느냐고 언성을 높이고 상대방은 이런 곳에서까지 꼭 그래야 하느냐며 시비를 벌인다면 두 사람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운동하러 나온 기분을 망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사람은 ‘좌측통행’이라고 배운 잘못된 지식 때문에 사람들이 헷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우측통행이면 사람도 우측통행이고 자동차가 좌측통행이면 사람도 좌측통행을 하는 것이 세계적인 관행인데 유독 우리나라만 달라서 무질서를 초래하고 동선의 교차 때문에 사고의 가능성이 높고 통행 속도가 느려진다고 한다. 자전거, 오토바이들은 어떤 방향으로 통행을 해야 하는가? 물론 오른쪽 방향에서 오른쪽 갓길로 주행을 해야 고속차량의 추월 시 안전하며 차량소통에 지장을 덜 주게 된다. 그렇다면 인도가 없는 차도에서 사람은 어떤 방향으로 보행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답 역시 오른쪽 방향으로 갓길을 따라 보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운전자 입장에서 자전거, 오토바이 또는 보행자 등 서행으로 가는 대상을 추월할 때 그 대상을 포함하고 있는 적당한 크기의 차량을 추월하는 마음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운전면허를 취득할 때 배웠던 사실을 기억해도 좋을 것 같다. 한편 인도가 따로 없는 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자기 자신이 차량을 운전할 때 마주 오는 보행자나 오토바이를 마주친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왼쪽 방향에서 다른 차가 마주 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주 오고 있는 차의 운전 상태에 대한 주시뿐만 아니라 오른쪽 방향에서 마주 오는 보행자, 자전거, 오토바이의 움직임 역시 철저히 살피지 않는다면 불행한 경우를 겪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 보면 ‘사람은 좌측통행’을 너무나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개찰구는 오른쪽에 있다. 인천 국제공항의 출국장에서도 국제관례에 따라 출입문은 오른쪽으로 통행하도록 되어있어 좌측통행을 하던 사람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들어 신체특성, 교통안전, 국제관례 등을 이유로 우측보행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많아졌다. 어느 여론조사기관의 설문조사결과 좌측통행을 우측통행으로 변경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은 38.5%정도라 한다. 조선총독부가 좌측통행으로 바꾼 것이 1921년 그로부터 86년간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왼쪽으로 걸으며 살아왔으나 이제 이를 바로잡아 오른쪽으로 걷기 운동 캠페인을 벌인다면 예전에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었던 것처럼 큰 비용 없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며 걷기나 등산 혹은 자전거를 타면서 진행방향이 서로 뒤죽박죽이어서 뒤엉켜 혼잡을 이루는 것은 물론 몸까지 부딪치는 것에 대한 불필요한 신경을 쓰는 일이 줄어지게 될 것이다. 남 경 현 경기대 응용정보통계학과 교수

토지수용과 규제, 충분히 보상해야

국방, 상수원 보호 같은 목적은 거부하기 힘들다. 이로 인해 경기북부는 토지이용에 중첩적 제한을 받는다. 주민들의 불만도 높다. 오래된 지혜를 빌려 이 문제를 생각해본다. 케이크를 두 형제가 똑같이 나눠 먹으라고 했지만 서로 다툰다. 힘센 형이 먼저 크게 베어가면 동생에게는 별로 남는 게 없다. 힘이 약한 동생은 항상 불만이다. 오래된 지혜는 “한 사람이 자르고, 다른 사람이 선택하게”(You cut, I choose) 하라고 가르친다. 이제 자르는 형도 눈에 띄게 크게 자르면 그 쪽을 동생이 차지할 것이므로 같은 크기로 자르려고 정성을 다한다. 형이 제멋대로 할 수 없다. 동생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두 형제는 어쩌면 양보의 미덕을 발휘할지 모른다. 그러나 케이크가 아니고 토지라면? 형제간이 아니라 남들 사이의 다툼이라면? 어떤 지역을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키로 했다고 해보자. 이제 그 지역의 일정 지역을 ‘도로’가 차지하도록 금을 긋고 토지를 수용할 것이다. 이 금 긋기는 많은 다툼과 불만을 야기할 수 있다. 이때 수용대상 토지에 대해 시장가격으로 충분히 보상케 하는 것이 이 오래된 지혜를 활용하는 길이다. 마치 자르는 사람과 선택하는 사람이 다를 때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되듯이, 시장가격 보상은 남을 배려하게 만든다. 아마도 보상총액이 적으면서도 주민들의 이용도가 높은 노선을 찾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 결과 갈등도 크게 줄어든다. 그런데 시장가격으로 수용되는 토지들을 보상하고서는 도저히 도로 건설비를 감당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공의 목적을 내세워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강제로 수용한 다음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옳을까? 그렇지 않다. 시장가격만큼 충분히 보상하는 것이 갈등뿐 아니라 토지이용의 비효율도 줄인다. 어떤 토지이든 그 시장가격은 사람들이 현재 최소한 그만큼 가치 있게 사용하고 있거나 장차 그렇게 사용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시장가격으로 토지들을 보상한 후에도 건설할 가치가 있는 도로라야 비로소 종전보다 토지를 더 잘 쓰는 셈이다. 그렇다면 토지의 용도제한은 어떨까? 사실 군사시설보호구역, 팔당 상수원 보호지역, 수도권 공장입지 제한 등, 수도권, 특히 경기도에 이런 용도 제한이 집중되어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득을 본다고 하더라도, 용도를 제한당한 토지의 가치는 떨어진다. 토지이용규제는 토지수용에 비해 분명 더 약한 강제조치로 보인다. 그렇지만 토지이용규제는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남발될 수 있다. 토지이용을 규제할 때에도 “You cut, I choose”의 지혜처럼 남을 배려하게끔 할 수 없을까? 떨어지는 재산 가치만큼 보상하거나, 만약 이렇게 보상해줄 만큼 재정사정이 좋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주는 방안을 고려해 봐야한다. 이렇게 고민하다보면, 일방적 희생만 강요하기보다는 불만도 줄이고 토지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김 이 석 경기개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아프간의 교훈

1991년 걸프 전쟁이 터진 날 필자는 네팔에 있었다. 힌두교 국가인 네팔의 카투만두 공항에서 태국 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 승객 모두가 전쟁 발발로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 때 한 무리의 동양인들이 공항 청사 내에서 합창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20대의 한국 사람들이었다. 알고 보니 어느 종교단체가 보낸 젊은이들 이었다. 갑자기 전쟁이 나니까 급거 귀국 중이라고 하였다. 공항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 자체도 예의에 어긋난데 주변에 가득한 힌두교도들을 무시하는 태도가 옆에서 보기에 매우 민망하였다. 누가 이 젊은이들을 이토록 무례하게 만들었는가. 국제사회의 기본적 예의도 익히지 못한 채 봉사활동에 나가고 현지의 문화도 자세하게 모르는 채 현지인을 상대로 봉사활동을 한들 그 효과가 얼마나 될까. 그들을 보낸 지도자의 부족한 자질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자식을 길러서 독립시키려면 가정교육이 엄하고 사회적 훈련이 철저해야 한다. 자식이 못되면 부모가 부끄러운 법이다. 탈레반에 억류되었던 젊은이들이 대부분 구출되었다. 참 다행한 일이다. 이번 억류된 한국인들이 이슬람 국가에 들어가서 봉사활동을 하도록 한 교회를 중심으로 정신세계의 지도자들이 이 사건을 잘 분석하여 향후로는 유사한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겠지만 그 대책은 즉흥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계속되는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는 원인은 타 민족의 문화에 대하여 너무 무지하다는데 있다. 아니 우리나라의 세계문화에 대한 교육 전체가 너무 허술한 것이다. 지구상에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국가의 수는 57개국에 달한다. 그 인구를 모두 합하면 14억명이나 되어 지구 인구의 4분의 1이나 된다. 그들의 분포는 중동과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유럽, 중국, 미국은 물론 한국도 포함되어 있다. 이미 천 년 전에 십자군 전쟁이 있었다. 그때부터 9·11까지 경제와 종교는 한데 어우러져 지구촌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그 이유를 분명하게 제도권 교육에서 주입해야 할 것 같다. 신앙은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다. 그러나 나의 신앙, 나의 사상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각자의 생각, 각자의 인격이 고루 존경되어야 세련된 사회가 된다. 그런 사회가 되려면 초등교육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것 같다. 세상에는 무수한 민족과 국가들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한다. 또 지구상에는 여러 가지의 습관과 종교가 공존해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우리 세대가 학생이었을 때도 세계문화사에 대하여 좋은 교과서가 없었다. 그렇게 허술한 교육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였다. 이번 사건이 났을 때 한국사람 중에 그 지역 전문가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구출과정에서도 국제적인 실수가 노출되어 여러 나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번 일처럼 뺨 맞고 흉잡히는 사건이 또 다시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역 전문가를 길러야한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지구상의 여러 국가에 가서 훌륭한 인격자들을 만나보고 품위 있게 성장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대화를 해보아야 한다. 우선 어른들부터 세계문화에 대하여 새롭게 공부를 시작해야 될 것 같다. 유네스코의 21세기 화두는 세계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교육이다. 우리세대의 부실한 교육의 결과로 희생된 젊은이들에게 조의를 표한다. 김 병 모 고려문화재연구원장 한양대 명예교수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

동국대 신 모 교수로부터 불거진 학력위조 사건의 파장이 점입가경이다. 교육계에서 시작된 학력 위조 문제는 연예계에서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그 여파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유명 인사들이 자신의 학력을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속여 온 사실을 고백하고 있고 정보 제공업체에 자신의 학력을 정정해달라는 사람도 크게 늘고 있다. 청춘남녀의 맞선을 주선하는 업체 관계자는 신청자들에게 학력 입증 서류의 제출을 요구하자 반 가까이가 맞선을 포기하는 촌극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입학도 하지 않은 대학을 모교라 하여 그 대학에서 특강까지 한 대중스타를 그 대학에서는 잘 몰랐다는 말로 책임을 면하고 있다. 자신의 저서에 허위 학력을 기재한 어떤 이는 자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왠지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다. 얼핏 보면 개인의 도덕성 문제지만 이렇게 학력 만능주의가 만연하도록 만든 사회적 책임이 더 크다. 학벌 지상주의 사회가 학력 콤플렉스를 부추겼다는 분석이 세를 얻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콤플렉스를 가지고 산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콤플렉스라는 이름으로 우리 마음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 중에서 더 많이 배우지 못한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가슴을 멍들게 한 학력 콤플렉스는 오기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더 좋은 대학 졸업장으로 학벌사회에 편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유명 대학에 대한 콤플렉스 또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학위 비인가 대학에서는 이같은 학력 콤플렉스를 이용해서 학사와 석박사 학위를 패키지로 묶어 1천 달러 남짓이면 일주일 안에 학위를 발급해 주는 학위 장사를 하고 있고, 미국 저명 대학의 유능한 보직 교수조차 학력을 위조한 사실이 발각되어 학교를 떠나야 했다는 소식은 학력 콤플렉스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학력 콤플렉스는 그 정도가 심하다는 지적이 많다. 열이면 여덟, 아홉이 대학 졸업장을 따는 현실이고 보면 머지않아 우리 사회는 학력 콤플렉스에서 학벌 콤플렉스로 옮아갈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학력과 학벌이 평생 달고 다니는 훈장이거나 평생 짊어지고 가야하는 멍에로 인식되는 한 우리 사회에 오만과 편견이 넘쳐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학력과 학벌 콤플렉스가 사회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해서 엉뚱한 평등주의를 의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좋은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더 많이 배워서 실력과 능력을 갖추는 것은 개인과 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장려할 일이다. 병폐는 학력이 평가 척도의 전부인 것 같은 사회 분위기와 특정 학벌이 권력화하는 것이다. 유명 대학의 교육 프로그램과 사회적 기여의 전통을 존중하고 인정하되, 진정한 능력을 갖춘 학력(學力)이 간판 중심의 학력(學歷)에 우선하는 사회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교육의 형식보다 교육의 내용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배우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자신의 일에 정성을 쏟을 줄 아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들녘 한 모퉁이에 핀 이름 모를 풀꽃은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온실에서 철모르고 길러진 장미나 튤립 같은 꽃에게 왜 나보다 아름답냐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듯이 각자의 역할에 따른 제대로 된 사람의 평가가 우리 사회에 정착돼야 한다. 남보다 앞서기 위한 교육보다 남과 더불어 함께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열심히 해서 많이 이룬 사람을 인정하는 자세와 많이 갖지 못하고 이루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태도를 중시하는 가르침을 우선해야 한다. 이 승 후 재능대 아동학과 교수 전국대학문예창작회장

올림픽과 도시국가를 향한 인천의 역할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이 풍부한 대륙으로 규모도 가장 커 세계 육지면적의 30%인 약 4천461만 4천㎢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인구의 약 3/5이 30여개국에 분포해 생활하면서 세계문명의 핵심지 역할을 하고있다. 인천은 2014년도에 아시안 올림픽을 개최하는 도시이다. 이 행사의 최고 목표는 인류사회의 진보를 이룩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서구인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고, 역사의 발전에서 소외된 아시아 많은 나라들의 정체성을 수복하고, 작은 힘들을 모으며 단합을 과시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시아 모든 도시들이 국가의 힘을 빌어서까지 치열한 유치경쟁을 벌이는데서 나타나듯 실질적으로는 도시의 발전을 극대화 시키는데 효율적인 수단이며 자국과 도시를 세계에 각인 시키는 전시의 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천은 도시의 실질적인 발전과 함께 한국이 발전하고, 아시아와 세계에서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아시안 올림픽을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활용해서 치뤄야 한다. 역사의 발전과정을 고려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동아시아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국가가 사라지고 세계화(globalization) 과정과 신문명에 걸맞는 정치체제로 전환 될 것이 자명하다. 그때는 현재 국가가 집행하던 일들을 몇몇 대도시들이 대체할 것이다. 인천은 이러한 국가중심체제 이후의 단계를 대비하는 과정의 하나로서 아시안 올림픽을 미리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국가단위와는 별도로 아시아에서 유력한 도시들과 관계를 맺기에 유리하다.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 인천이 베이찡, 오사카 등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은 올림픽을 처음 개최한 그리이스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이스반도와 에게해 주변에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있었다. 도시국가들은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충돌을 했고, 한때는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동맹을 맺고,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어 대전쟁의 도가니 속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단 외부의 적인 페르시아가 대규모의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하자 일치단결해 승리를 거뒀다. 그 승리를 기념할 목적으로 도시국가들이 참여해 벌인 행사가 바로 올림픽이고 그 중심에 아테네가 있다. 인천은 아테네한 역할을 담당하기에 매우 적합한 지정학적인 위치와 역사적인 경험을 지니고 있다. 기원을 전후한 무렵에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 있는 54개의 소국들이 합쳐서 마한 연맹을 이루었고, 다시 진한, 변한의 소국들과 합쳐져서 모두 78개의 소국들이 삼한 연맹체를 이루었다. 일종의 도시국가 연맹체이다. 인천은 남만주의 졸본부여를 출발해 황해를 남항해 온 비류가 기원전 18년을 전후한 시기에 세운 일종의 해항도시국가이다. 이어 온조가 현재 서울지역에 세운 하항도시국가와 연합하였고, 힘이 강해진 그 나라는 점차 주변소국들을 통합하여 마침내 우리가 아는 강국인 백제가 되었다. 그런데 유사한 성격과 발전과정을 지닌 고구려에서 치뤄진 동맹 또는 국중대회의 내용을 보면 아마도 백제에서도 올림픽정신과 유사하며, 경기종목과 방식도 거의 유사한 행사를 치뤘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경험을 계승하고, 점점 더 지정학적, 지경학적으로 유리한 위상을 확보해가고 있는 인천은 스스로의 성격과 능력, 희망 등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올림픽을 통해서 인천은 다가오는 세계에서 인천의 역할론을 확실하게 인식할 뿐 아니라 주변세계에 적극적으로 과시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의 거대한 해항도시국가인 인천의 미래를 떠올려본다.

<경기시론>與정치인들 사기극, 더이상 속지 않는다

우리나라 정당사(政黨史)에 웃지 못할 코미디가 연출되고 있다. 지난 10일 범여권의 ‘대통합민주신당’이 열린우리당과의 합당을 공식 선언한 게 그것이다. 민주신당과 열린우리당이 민주신당이란 간판을 내걸어 마치 민주신당이 열린우리당을 흡수 통합하는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민주신당의 실체는 무엇인가? 열린우리당 탈당파와 통합민주당 탈당파, 손학규씨, 일부 시민단체 인사들이 모여 9일 전에 급조한 당이다. 지난 2월 탈당소동이 벌어지기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집단탈당이 다섯 번 있었다. ‘신당’이란 이름이 붙은 정당 두 개, ‘통합’이란 이름이 붙은 정당 한 개 등이 만들어졌다. 불과 반년 사이에 세 번이나 탈당하고 세 번이나 창당하는 세계적인 진기록을 남긴 정치인들도 나왔고, 자기가 어느 정당 소속인지를 몰라 소속당이 아닌 곳에 탈당계를 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로써 열린우리당은 창당 3년9개월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고, 열린우리당 탈당파와 구(舊)민주당이 합쳐 지난달 만든 통합민주당은 구민주당으로 되돌아갔다. 한마디로 이들이 벌이는 정치쇼는 얄팍한 대(對)국민 속임수다. 국민들이 헷갈릴 정도로 돌고 돌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잔꾀와 간계한 속임수를 쉽게 알 수 있다. 열린우리당은 지난 4년 동안 집권하면서 나라를 뒤집고, 사회를 갈라놓고, 국민을 욕보이다가 버림받은 당이다. 민주신당 소속 의원 143명 중 97%인 138명이 열린우리당 출신이다. 여기에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 5명을 덧붙였을 뿐이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승산이 없자 14년 동안 온갖 혜택을 누려온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온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현 정권과 연계됐던 일부 진보진영의 시민단체 인사 몇사람 더 끌어들인 게 전부이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이 1~4차례에 걸쳐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민주당과 합당했다가 다시 탈당하고, 신당을 만들고 하면서 지난 7개월 동안 난리를 피웠다.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가 되돌아온 의원들이 표변한데 대해 새삼 놀랄 것도 없다. 그들은 탈당하면서는 “참회한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자질이 문제”라거나, “오만”, “민주 자산(資産) 다 팔아먹어”라는 등으로 돌팔매질을 하고 탈당을 한 사람들이 몇 달만에 되돌아와 슬그머니 친노(親盧)세력과 다시 한 배를 타기로 한 것이다. 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정치적 영화(榮華)를 더 보려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국민에게 버림받은 열린우리당으로는 연말 대선과 내년 총선을 치를 수 없기에 다시 합칠 것을 전제로 ‘위장이혼’이나 ‘기획탈당’을 하면서 ‘위장폐업’을 한 뒤 간판만 바꿔 단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열린우리당이란 이름으로 국민들의 심판을 받는 게 두려워 그 이름을 합법적으로 폐기할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로 열린당’ 만들고 대통합했다고 큰 소리를 치니 기가 막힌다. 민주신당의 강령과 당규, 정책 등은 열린우리당과 똑같다. 강령이 같고 그 안의 사람이 같으면 같은 당이지 다른 당이 아니다. 흡수 합당이란 꼼수를 쓴다고 당의 본질이 바뀌겠는가? 7개월 동안 돌고 돌아서 ‘도로열린당’이 됐는데 말이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밖에 걸린 당 간판 하나뿐이다. 대선에 나서겠다는 손학규씨와 국회의원 공천에 눈독 들이고 진을 친 시민단체 사람들 정도가 달라진 풍경이다. 이들 속임수를 쓰는 정치인들이 기대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새 간판을 달았으니 국민이 헷갈리기를, 과거를 잊어주기를, 속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당으로서 최소한 갖춰야 할 정치 도의마저 내팽개친 셈이다. 이런 정치인들이 대통령 선거까지 앞으로 남은 넉달 동안 또 무슨 잔재주와 꼼수를 쓰며 국민들을 속이려 할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국민들은 그 당이 눈속임용 신장개업을 하려는 계략임을 이미 다 알고 있다.

정상회담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야

이달 말에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야당에서는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쇼라고 폄훼하고, 소위 범여권에서는 민족이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좋은 기회라고 평가한다. 어느 견해가 옳은 것인지는 현 시점을 역사로 볼 수 있을 때 드러날 것이다. 필자는 이번 정상회담이 대선용 쇼가 되어서도 안 되고, 민족운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사적인 합의를 도출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그저 2000년 정상회담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진적인 발전만 있고, 향후 정상회담 정례화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만 하기를 바란다.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은 60년 가까이 정반대의 정치체제 하에서 운영되었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분단이전에 태어났던 사람들도 과거 공통의 경험은 망각하고 현재의 시스템에 길들여지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분단 이후 세대들이야 어떻겠는가? 남과 북의 시민들이 아직은 가치관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다. 너무 성급하게 통일을 추진하면 양쪽 시민들 사이에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나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소득수준에서도 남과 북은 10배 정도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현 상태에서 바로 통일이 된다면 북한 시민들은 소외감 때문에 불만이 생길 것이고, 남한 시민들은 과도한 조세부담 때문에 불만을 가질 것이다. 동등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북한 시민들의 소득수준을 향상시키고 통일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영양 및 위생 상태에서도 남과 북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 의하면 현재 북한의 위생 상태는 남한의 60년대 수준이라 북한 시민들이 대거 남한으로 유입될 경우 결핵 등 바이러스성 전염병이 창궐할 위험도 있다고 한다. 민족감정에 도취되면 민족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남과 북의 격차를 좁힐 시간이 필요하다. 정전상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남한 주둔 미군 철수, 연방제 시작 같이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거창한 결정보다는 남과 북 사이에 신뢰를 조성할 수 있는 결정이 더 시급하다. 예를 들면, 북한은 억류하고 있는 국군포로나 납북어부들을 먼저 남한으로 돌려보내고 이산가족 상봉에 보다 적극적으로 응하고, 남한은 북한의 어려운 식량이나 연료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는 원조를 약속하는 것 등이다. 남과 북이 서로를 불신하게 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보다 큰 결정을 내리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냉전시대에 형성된 매듭을 하나하나 푸는 것은 짧은 시간 안에 되지 않을 것이다. 양측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들을 처리하여 남과 북이 서로에게 신뢰를 가지게 되면 다음 단계에서는 양측 모두 군사력을 축소시키고 그로인해 발생하는 잉여자원들을 경제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이미 개성공단 사례에서 보듯이 남한은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고 북한은 노동력을 제공하면 남한은 중국이나 동남아의 저임금 공세에 대처할 수 있고 북한은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시민들이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위에서 언급한 영양 및 위생 문제들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을 하나로 통일하는 일은 비로소 이 단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 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가야한다.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살고 20년이 넘게 점진적으로 접근한 독일도 통일 후에는 커다란 후유증을 겪었다. 통일과 남북정상회담 모두 감정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통일로 가는 긴 여정의 시작으로 보고 한 발짝씩 천천히 가야 한다.

이상한 말버릇

텔레비전을 보니 결혼 5년 이내의 젊은 부부 가운데 3분의 1은 아내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고 한다. 결혼한 지 20년 이상 된 나이든 부부 가운데 15%는 남편이 아내를 ‘어이’ 하고 부른다고도 한다. 이런 통계를 말하면서 사회자나 출연자 모두 즐겁게 깔깔 웃는 것을 보면 이런 이상한 말버릇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건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면 정작 친오빠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결혼 전에는 자기보다 조금 나이 많은 남자친구를 친근한 감정으로 ‘오빠’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난 후에는 절대로 그런 호칭을 쓰면 안 된다. 이런 말투를 한국어에 서투른 외국인이 듣는다면 이 나라 사람들은 친형제 간에도 잠자리를 같이한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아내를 ‘어이’ 하고 부르는 것도 문제다. ‘여보’라든지 ‘아무개 엄마’라고 불러도 될 걸 왜 ‘어이’ 하고 부르나?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투의 이런 말버릇도 고쳐야 한다. 우리말의 오염과 비속화는 심히 걱정스러울 정도다. 말과 글의 올바른 사용을 선도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게 가꾸어나가야 할 신문이나 방송이 오히려 언어와 문자의 오염과 비속화를 조장하는 사례가 많다. 이상한 외래어와 상스러운 비속어를 남발하는 영화나 티브이 오락프로 등의 영상매체는 한국어의 품위를 떨어트리기 위해 앞장서는 것 같다. 바른 문자생활을 이끌어야 할 신문에서 오히려 더 자극적이고 저질스러운 용어나 문장을 골라 쓰는 일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예컨대 ‘일 대 일 토론’이라고 하면 될 걸 굳이 ‘맞장 토론’이라고 제목을 뽑는 심리의 저변에는 자극적인 말투로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추려는 태도가 뚜렷하다. 깡패 두목들 편싸움도 아니고 동네 아이들 골목대장 뽑는 일도 아닌 대통령 후보들의 일 대 일 토론을 맞장 토론이라고 하는 세상이니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엔 틀림없다. 하기야 이 나라 대통령이라는 분은 전 국민이 보고 듣는 공식석상의 연설에서 ‘쪽 팔린다’고 하는 판이 아닌가? 친한 친구들하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도 그런 말본새는 삼가야 할 터인데 왜 그럴까? 아마도 바르고 품위 있고 아름다운 언어는 지식인 계층이나 가진 자들의 위선과 가식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있거나, 험하고 천하고 속된 말을 씀으로써 못 배우고 못 가진 자들과 한 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려는 계산속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기의 태도에는 인격이나 지성이 은연중 반영되는 것 외에도 음험한 계산속이 깃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조금도 친한 것 같지 않고 틈만 있으면 상대를 깎아내리려 하면서도 말끝마다 ‘우리 아무개 의원’이라고 말하는 국회의원의 말투에는 어깨동무하고 뒤통수치겠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고,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는 114 안내원의 말투에는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친절로 분위기를 잡아보겠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인터넷 언어의 거칠고 속되고 질 낮은 말투는 우리 시대의 풀기 어려운 골칫거리다. 말하는 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익명성, 만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의 즉흥성과 단편성, 상업주의의 선정적 자극과 폭력적 스타일에 물든 사람들의 과격성은 물불 가리지 않는 험하고 천하고 상스러운 언어를 쏟아낸다. 현대판 이두문자 같은 국적불명의 외국어나 한자를 아무렇게나 조합하여 만든 광고문안 등을 보면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의 말버릇과 말본새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조 창 환 아주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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