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하 태 수 경기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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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말에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야당에서는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쇼라고 폄훼하고, 소위 범여권에서는 민족이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좋은 기회라고 평가한다. 어느 견해가 옳은 것인지는 현 시점을 역사로 볼 수 있을 때 드러날 것이다. 필자는 이번 정상회담이 대선용 쇼가 되어서도 안 되고, 민족운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사적인 합의를 도출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그저 2000년 정상회담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점진적인 발전만 있고, 향후 정상회담 정례화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만 하기를 바란다.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은 60년 가까이 정반대의 정치체제 하에서 운영되었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분단이전에 태어났던 사람들도 과거 공통의 경험은 망각하고 현재의 시스템에 길들여지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분단 이후 세대들이야 어떻겠는가? 남과 북의 시민들이 아직은 가치관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다. 너무 성급하게 통일을 추진하면 양쪽 시민들 사이에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나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소득수준에서도 남과 북은 10배 정도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 현 상태에서 바로 통일이 된다면 북한 시민들은 소외감 때문에 불만이 생길 것이고, 남한 시민들은 과도한 조세부담 때문에 불만을 가질 것이다. 동등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북한 시민들의 소득수준을 향상시키고 통일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영양 및 위생 상태에서도 남과 북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 의하면 현재 북한의 위생 상태는 남한의 60년대 수준이라 북한 시민들이 대거 남한으로 유입될 경우 결핵 등 바이러스성 전염병이 창궐할 위험도 있다고 한다. 민족감정에 도취되면 민족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남과 북의 격차를 좁힐 시간이 필요하다.

정전상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남한 주둔 미군 철수, 연방제 시작 같이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거창한 결정보다는 남과 북 사이에 신뢰를 조성할 수 있는 결정이 더 시급하다. 예를 들면, 북한은 억류하고 있는 국군포로나 납북어부들을 먼저 남한으로 돌려보내고 이산가족 상봉에 보다 적극적으로 응하고, 남한은 북한의 어려운 식량이나 연료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는 원조를 약속하는 것 등이다. 남과 북이 서로를 불신하게 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보다 큰 결정을 내리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냉전시대에 형성된 매듭을 하나하나 푸는 것은 짧은 시간 안에 되지 않을 것이다. 양측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들을 처리하여 남과 북이 서로에게 신뢰를 가지게 되면 다음 단계에서는 양측 모두 군사력을 축소시키고 그로인해 발생하는 잉여자원들을 경제발전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이미 개성공단 사례에서 보듯이 남한은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고 북한은 노동력을 제공하면 남한은 중국이나 동남아의 저임금 공세에 대처할 수 있고 북한은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시민들이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위에서 언급한 영양 및 위생 문제들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을 하나로 통일하는 일은 비로소 이 단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 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가야한다.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살고 20년이 넘게 점진적으로 접근한 독일도 통일 후에는 커다란 후유증을 겪었다. 통일과 남북정상회담 모두 감정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통일로 가는 긴 여정의 시작으로 보고 한 발짝씩 천천히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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