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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여성 수학자 영수합 서씨의 ‘산학계몽(算學啓蒙)’

▲ 족수당집내지
▲ 족수당집내지
자녀들이 부모에게 자신의 고민이나 생각을 시를 지어 표현하자 그 부모는 같은 방식으로 자녀들에게 시로써 화답하였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시를 써서 주고받았다. 정조·순조대에 살았던 족수거사(足睡居士) 홍인모(洪仁謨, 1755~1812)와 영수합 서씨(令壽閤 徐氏, 1753~1823, 이하 “영수합”이라고 약칭함) 부부, 그리고 그 자녀들의 가족 풍경이다.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나 시우(詩友)가 될 배필감을 만나다.

 

영수합은 본관이 달성(達城)이며, 이조참판 서형수(徐逈修)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딸 사이에서 5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선조의 부마 달성위 서경주(徐景霌)의 6대손으로, 증조는 이조참판 서종대(徐宗大)이고 조부는 이조참판 서명훈(徐命勳)이다. 외조부 김원행은 대제학 이재(李縡)의 제자이자,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농암(農岩) 김창협(金昌協)의 손자이다. 

 

영수합은 글 읽기를 좋아하는 독서광이었다. 어려서부터 남형제들 곁에서 함께 글공부를 익혔기 때문에 결혼 전에 이미 웬만한 경서를 모두 섭렵했다. 서형수가 어린 영수합에게 “세 아들이 모두 뛰어나지만, 네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한세상을 풍미했을 것이다”고 애석했을 정도로 그녀는 영민했다. 할머니도 “문장에 뛰어난 여성은 팔자가 매우 박복하다”고 손녀를 걱정하면서 글 배우는 것을 반대하였다. 

 

영수합은 1766년(영조 42) 14세에 홍인모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선조의 사위 홍주원(洪柱元)의 7대손으로 명문 집안의 자제였다. 증조 홍석보(洪錫輔)는 이조참판을 지냈고, 조부 홍상한(洪象漢)은 예조판서를 지냈다. 홍인모는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가 삼촌 영의정 홍낙최(洪樂最)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영수합보다 두 살 연하였지만, 그녀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고 학식 수준을 높여줄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홍인모는 호조참의, 우부승지 등 엘리트 코스를 두루 거친 데다 박식하고 글재주가 뛰어나서 문장 수 편과 시 2천여 편을 남겼다. 그녀의 뛰어난 자질과 학구적인 가정 분위기는 유교적 규범에 얽매어 여성이 문장의 능력을 숨겨야 했던 시기에 마음껏 문학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시와 수학에 능통한 시인이자 여성 수학자 

영수합은 수학적 직관과 사고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녀는 조선판 수학의 정석인 <산학계몽(算學啓蒙)>을 보다가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공식을 간편히 푸는 방식을 직접 창안해 냈다. 그 노력 덕분에 일반 사람들이 평분(平分), 약분(約分), 정부(正負, 양수와 음수), 구고(句股, 직각삼각형), 개평방(開平方, 제곱근풀이) 방정식, 삼각형 등의 수학 문제를 손쉽게 풀 수 있었다. 그녀가 새롭게 고안한 수학 원리와 계산 방법은 중국 청대에 편찬된 서양 수학서 <수리정온(數理精蘊)>의 풀이법과 일치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수학자라 할 수 있다.

 

영수합의 문학적 재능 역시 남달랐다. 어려서부터 도연명(陶淵明)의 ‘전원으로 돌아가리[歸田園]’를 항상 암송해왔다. 그러나 그녀가 최초로 시를 짓기 시작한 때는 결혼한 후 남편 홍인모가 농서(隴西, 황해도 瑞興의 옛 이름)로 부임해 가면서부터다. 평소에 시 짓기를 좋아했던 남편이 자신의 시에 화답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영수합에게 시작(詩作) 할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녀는 평측법(平仄法, 시구 안에서 평성자와 측성자를 고르게 배치함으로써 낭송 시 성조의 和諧를 도모하는 법식)을 모른다고 거절하였다.

 

▲ 족수당집표지1
▲ 족수당집표지
그러나 홍인모가 건네준 당율시(唐律詩) 한 권을 독파한 지 열흘도 못되어 율시를 창작하였고, 장편 경운(硬韻)을 지었을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홍인모가 영수합의 자질을 알아보고 독서와 시작 활동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지만, 그녀는 집안사람들에게조차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을 일체 보이지 않았다. 홍인모가 자녀들에게 어머니가 시를 지으면 몰래 베껴두라고 지시했다. 그 노력에 힘입어 그녀의 작품이 홍인모의 문집인 <족수당집(足睡堂集)>에 <부영수합고(附令壽閤稿)>(한시 191수, 사(辭) 1편)로 고스란히 실려 전해진다.

 

영수합의 시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두보(杜甫)를 비롯하여 이백(李白),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등 중국 시인의 시에 차운(次韻) 했다는 사실이다. 차운이란 자신이 즐겨 읽는 시의 시운(詩韻)을 본 따 시운을 맞추어 시를 쓰는 것을 말한다. 그녀가 차운해서 시를 지은 것은 부녀자의 직분에 어긋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저술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녀는 문학에 대해서 ‘아녀자의 일이 아니라는’ 일관된 신념을 가지고 가족들 이외에는 어울려 시를 짓지 않았다. ‘영수합’은 남편 홍인모가 직접 지어준 당호인데, 지우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더 이상 시문을 짓지 않았다. 부부의 인연을 맺은 영수합이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홍인모와 시문 화답을 즐긴 시우였던 만큼 그녀의 문학적 소질과 재능은 독보적이었다.

현모양처, 시작(詩作)으로 대화하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다.

명문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유교적 윤리 관념을 몸소 체득한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문학적 재질은 학식이 뛰어난 남편에게 학문의 동지가 될 매개가 되었고, 자식이라는 거목에게 질 좋은 거름이 되었다. 

 

3남 2녀를 낳은 영수합은 자녀들에게 직접 경전을 가르쳤고 시문과 격언을 읽어주는 등 자녀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그녀의 애정 어린 가르침을 받고 자란 장남 홍석주(洪奭周)는 좌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대학자였고, 둘째 홍길주(洪吉周)는 초야에 묻혀 요즘 말로 ‘조선의 셰익스피어’라 불릴 정도로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드날렸다. 정조의 딸 숙선옹주(淑善翁主)와 혼인한 셋째 홍현주(洪顯周)는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해거시집(海居詩集)>을 남겼고, 장녀 홍원주(洪原周)는 유명한 여류시인이 되어 <유한당시집(幽閒集詩集)>을 남겼다. 

 

홍인모와 영수합 부부는 시대를 앞선 부모였다. 영수합이 시를 짓기 시작한 후로 온 가족들은 시시때때로 한데 모여 서로 시를 읊었다. 시를 나누며 즐겼던 가족은 언제나 화목했고 늘 활기찼다. 실제로 홍석주는 자작시에서 “책상 앞에는 형제자매가 모여 있고 방 안에는 시서(詩書)가 벌려져있네. 누이동생은 칠언시를 공부하고 동생은 많은 책을 다 읽었구나!”라고 어렸을 때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회상한 바 있다. 가족 구성원 간에 시를 지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부부의 가정교육이었고, 이 집안의 가풍이었다. 아래 시는 가족이 함께 창작한 작품으로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相看歡笑沾 만나서 실컷 웃으며 떠들었고(홍인모)
團坐醉醒僉 단란하게 둘러앉아 밤새도록 술을 권했네(영수합).
揮芼騁詞苑 붓을 휘둘러 시를 짓는데(영수합)
傾壺報漏籖 제때 못 지으면 벌주를 마신다(홍석주).
繞階羅寶樹 섬돌을 에워싼 훌륭한 자녀들이(홍석주)
供膳和晶塩 진수성찬 갖추어 바치는구나(홍길주).
茶孰詩腸潤 향기로운 차 끓었음에 시상이 넘쳐나고(홍길주)
琴淸玉手纖 맑은 거문고 곡조는 미인이 타는구나(홍원주).
怡怡眞可樂 흐뭇하고 흐뭇하여 참으로 즐거우니(홍원주)
去去不辭淹 가면 갈수록 재미에서 헤어날 수 없구나(홍현주).
起視銀河轉 일어나 하늘 보니 은하수가 기울었는데(홍현주)
佳懷問老蟾 달님에게 물어본다. 얼마나 즐거워 보였는지(홍인모).
(<유한당시집>,「연구(聯句)」)
 
또한 영수합은 자녀들의 인성 교육을 위해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를 지어 표현했다. 홍석주가 청나라 연경으로 가자, 성인들의 말씀을 교훈 삼아 항상 몸조심하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며[寄長兒赴燕行中],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라[次季兒寄示韻]는 가르침을 주었고 아들을 떠나보내는 안타깝고 애틋한 정을 글로 담아 보냈다[送別兩兒]. 남편의 시우이자 자식들의 뛰어난 스승이었던 영수합은 조선시대의 현모양처이자 여성 지식인이었다.

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ㆍ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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