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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 물구나무서서 읽는 ‘열하일기’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다. 스펙은 초라하진 않았다. 집권층인 노론(老論) 출신이었다. 압록강을 건널 때가 불혹(不惑)이었다. 바야흐로 18세기 후반이었다. 이국(異國)은 낯설었다. 모든 게 기이했다. 벽안(碧眼)의 얼굴들도 흔하게 눈에 띄었다. 작은 나라에서 온 선비에게는 그렇게 보였겠다.

▶사신단이었던 친척 형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중국행에 가세했다. 하지만 자유로웠다. 격식을 갖춰야 할 위치에 있지 않아서였다. 눈에 보이는 문물을 끊임없이 눈에 담았다. 밤마다 뒷골목을 누비게 한 동력은 호기심이었다. 중국의 겉과 속이 오롯이 스테레오로 펼쳐졌다. 광활한 대륙의 대서사(大敍事)였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선비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물구나무서서 보는 광경 그 자체였다.

▶이렇게 쓰인 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오랑캐의 나라로만 알았던 청나라는 책 속에서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문명국이었다. 청나라 타도가 국시(國是)였는데, 찬양했으니 금서로 지정되는 건 당연했다.

▶선비들이 숨죽이고 읽었다. 원본은 하마터면 잿더미로 사라질 뻔했다. 후손이 책을 불태우려다 식구들이 막았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열하일기’ 원본은 매장됐을지도 모른다. 조선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내용이 주류여서 집안을 거덜낼 수도 있었다. 그 위험의 핵심은 “오랑캐 나라라도 배울 건 배우자”였다.

▶연암은 건륭제의 칠순잔치 축하사절단 비공식 단원으로 중국을 찾았다. 1780년이었다. 건륭제는 더위를 피해 별장이 있는 열하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은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다. 연암이 대륙에 발을 내디딘 건 딱 이맘때였다.

▶그가 중국을 찾았을 때 프랑스에선 혁명이 싹트고 있었다. 미국에선 독립전쟁이 한창이었다. 정조의 개혁은 단행됐지만,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연암이 300년 시공을 넘어 보내는 메시지는 그래서 명쾌하다. 하루 동안 북대서양에서 85억t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여름 끝자락에 ‘열하일기’를 꺼낸 까닭도 분명하다. 알량한 기존 질서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의 도도한 흐름도 거부하지 말자. 역사의 준엄한 명령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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