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진세 칼럼니스트
탱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과 아프리카계 후손들의 음악이 섞이고, 가난한 이주 남성들과 성매매 여성들이 좁은 공간에서 몸을 맞대며 만들어낸 춤. 불안정한 정체성과 외로움, 그리고 말로 다 전하지 못할 슬픔이 축적되어 탄생한 몸짓이었다. 탱고는 처음엔 천박하고 저속한 춤으로 치부되었지만, 오히려 그 안에는 절박한 삶을 견디는 이들의 존엄이 배어 있었다. 정체 없는 땅에 뿌리내리려 했던 자들, 그리고 이름 없이 사랑받고자 했던 자들의 절실한 감정이, 이 한없이 절제된 리듬 속에서 피어났다.
탱고는 격렬한 춤이지만 그 본질은 침묵에 가깝다. 말보다 앞서는 호흡, 손보다 앞서는 중심의 이동, 그리고 음악이 멈출 때 찾아오는 정적. 그것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고요함을 듣고 받아들이는 존재의 리듬이다. 한 사람의 걸음이 멈추면, 상대도 멈춘다. 이 춤은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의 구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만들어내는 감정의 조율이다. 남녀가 몸을 맞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간극의 미학이다.
탱고에는 분명 관능이 있다. 그러나 그 관능은 감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절제와 기다림 속에서 피어나는 정서적 농밀함이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지만 결코 허용되지 않는 거리가 있고, 마음은 가까워지지만 몸은 끝내 다가서지 못하는 간절함이 있다. 이 간격과 조율이 탱고의 품격을 만든다. 그것은 성적 유혹이 아닌, 상호 존중과 긴장 속의 고요한 교감이다. 탱고의 관능은 정제된 절망과 고독이 만들어낸 예술적 에로티시즘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이 춤을 여성의 관능미에만 집중하며, 심지어 동물의 교미에 비유하기까지 한다. 탱고를 성적 환상으로 왜곡하고, 그 속에서 여성의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시선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감각의 타락이다. 탱고는 성적인 시선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춤이 아니다. 여성을 ‘끌려가는 몸’으로만 바라보는 그 시선은, 춤을 본 것이 아니라 욕망에 물든 자기 내면을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탱고를 동물의 섹스에 빗대는 표현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에 대한 인격적 폭력이다.
탱고에서 여성은 단지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리듬의 공동 창조자이며, 감정의 주체로서 남성과 공간을 함께 구성하는 당당한 참여자다. 이 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관계 안에서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인간 사이의 긴밀한 공존을 구현한다는 데 있다. 남성은 리드하되 지배하지 않고, 여성은 응답하되 복종하지 않는다. 그 긴장과 완급 속에서 탱고는 단지 육체적 표현이 아닌,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확장된다.
예술은 보는 이의 수준을 반영한다. 어떤 이는 탱고의 발걸음 속에서 고독을 읽고, 어떤 이는 몸짓 속에서 존엄을 느낀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그 속에서 단지 섹스를 연상하고, 감상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예술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나는 단언하고 싶다. 탱고를 여성의 성적 이미지로만 축소하고, 그 춤을 동물의 본능에 빗대는 작가는 예술을 말할 자격이 없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감각의 폭력이며, 예술이 아닌 모독이다.
탱고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다. 본능을 넘어 감정을 나누고, 고독을 견디며 타인과 교감하는 방식으로서의 춤. 그 안에 숨어 있는 간격, 정적, 여백은 모두 인간만의 정제된 감정과 사유에서 비롯된다. 탱고는 음란하지 않다. 오히려 탱고는 숭고하다. 느림과 멈춤, 기다림과 절제가 만들어내는 내면의 떨림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품격을 마주하게 된다.
예술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타인의 존엄과 예술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 안에서만 빛난다. 감상자의 시선이 욕망에 갇힌 순간, 예술은 소통이 아닌 소비가 되고, 감상은 교감이 아닌 침해가 된다. 탱고는 몸의 예술이기 이전에, 마음의 예술이며, 존재의 윤리이다. 여성의 몸을 관능의 대상으로 소비하지 않고, 감정의 주체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춤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다가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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