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용의 더클래식] 따뜻한 ‘교향곡’을 남겨 준 아버지 ‘하이든’

사람들을 배려하고 감싸주었던 따뜻한 음악가 하이든(Franz Joseph Haydn). 생전에 파파 하이든이라 불렸고, 사후에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지금도 사람들의 존경 안에 있다. 1791년 런던의 음악회장에서 하이든의 교향곡 96번 D장조가 초연되고 있었다. 연주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연주 홀 중앙 천장에 매달려 있던 크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꽝! 소리를 내며 갑자기 객석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큰 사고에도 기적적으로 객석에 있던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무사했다. 이유는 청중들이 하이든의 새 교향곡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듣기 위해, 또 연주되고 있는 교향곡에 빠져들어 모두 무대에 바싹 다가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곡에 흥미를 못 느껴 연주 홀 중간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면 자칫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곡 교향곡 96번에는 기적이라는 제목이 새로 붙었다. 대리석 위를 미끄러지듯 발랄하게 춤을 추는 이 선율을 듣고 있으면 우울한 기분이 싹 사라진다. 경쾌한 교향곡으로 일상에서 쌓인 피로를 잊으라는 작곡가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진다. 하이든은 귀족을 위해 많은 음악을 쓰고 그들을 위해 연주하며 돈을 벌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귀족들로 인해 작곡가 하이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그 중 하나가 근사한 드레스를 입고 와서 음악회 내내 꾸벅꾸벅 조는 귀족 부인들이었다. 그런 광경은 특히 느리고 조용한 2악장에서 자주 목격되곤 했는데, 재치 넘치는 작곡가 하이든은 이를 골려 줄 재미있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바로 느린 2악장에서 느리게 진행되다 갑자기 매우 빠른 템포를 가미시켜 조는 귀족 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교향곡 94번 G장조이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에는 놀람이라는 제목이 붙게 되었다. 이 일화로 유명한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은 하이든이 남긴 교향곡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교향곡 94번 D장조 놀람, 교향곡 96번 D장조 기적, 교향곡 45번 F sharp단조 고별, 교향곡 100번 G장조 군대, 교향곡 101번 D장조 시계 등 우리가 한 번쯤 들어봄 직한 재미있는 제목의 교향곡들은 모두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이 만든 작품이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음악을 통해 청중을 보듬었던 포근한 작곡가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란 명성에 걸맞게 106곡의 멋진 교향곡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인류에게 선물한 작품들은 멋진 교향곡만이 아니다. 그는 교향곡에 못지않은 뛰어난 68곡의 현악 4중주곡을 남겼는데, 그 탁월함을 따라올 작품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또한 현악 4중주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음악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음악의 어머니 헨델

헨델을 영국의 국가적 음악가로 만들어준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 음악적 영향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 중 하이든과 베토벤이 대표적이다. 하이든은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듣고 자신의 첫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작곡했고, 베토벤은 나는 모차르트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헨델의 음악을 알기 전의 생각입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에게 있어 헨델은 음악적 우상이었다. 베토벤은 헨델의 음악을 교과서로 삼아 항상 그의 음악을 연구했고, 심지어 병중에서도 그의 음악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초연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작품 메시아, 이 작품은 메시아란 뜻 그대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임이 틀림없다.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리는 두 사람, 바흐와 헨델! 두 사람은 후세에 붙여진 수식어와는 달리 평생 만난 적도 없었고, 전혀 다른 음악적 성향이 있었으며,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1685년 같은 해에 독일에서 태어나고 말년에 같은 돌팔이 안과 의사에 의해 완전히 실명했다는 것이다. 헨델은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된 바흐와는 달리 독일 할레에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지만, 법률가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의 반대로 음악의 길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고 할레대학 법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오로지 음악이었고, 결국 법대를 그만둔다. 17살에 함부르크 가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를 거쳐 21살이 되던 해에 이탈리아로 떠나, 당시 유행하던 가극을 공부하여 가극작곡가로서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1710년 휴가차 방문한 런던과 깊은 인연이 되어, 후에 조국 독일을 버리고 영국인으로 귀화한다. 헨델은 영국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 때문인지 그의 유명한 작품은 모두 왕실과 관계가 깊다. 영국의 국왕 조지 1세가 여는 파티음악으로 작곡한 수상음악과 조지 2세의 승전을 기념하여 만든 왕궁의 불꽃놀이가 그 좋은 예이다. 독실한 기독 신자였던 바흐가 신을 위해 교회 음악을 만들었다면, 헨델은 왕을 위해 왕실음악을 만들었다. 이것이 이 두 사람의 음악적 색깔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헨델은 바흐처럼 말년에 눈병에 걸려 작곡은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연주마저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죽기 일주일 전까지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지휘했다. 헨델은 위대한 음악가와 가난한 음악가를 위해 1천 파운드를 남긴 채, 평생 가정도 꾸리지 않고 전 세계를 누비며 음악을 펼치다 1759년 74세로 화려했던 삶을 마감한다. 세속적인 삶이었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인간미 넘치는 아름다운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헨델! 그는 역시 다정한 음악의 어머니이다.

[정승용의 더 클래식] 인간미 넘치는 음악의 메시아 헨델

1743년 헨델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3부로 나뉘어져 있는 이 곡은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총 53곡으로 구성된 곡인데, 마침 2부의 마지막 곡인 제42곡 할렐루야 합창이 장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아름답고 웅장한 곡이 연주되고 있을 때, 공연을 감상하고 있던 영국의 왕 조지 2세는 자신도 모르게 이 장엄한 음악에 이끌려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부터 할렐루야 합창을 기립해서 듣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오라토리오 메시아! 헨델 필생의 음악이라고 부르기에 주저함이 없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람을 단숨에 전율시킬 만큼 대단한 위력을 가진 음악임이 분명하다. 이날의 공연이 끝난 후 한 유력 신문은 이 사건을 메시아가 전해준 황홀감에 청중은 그만 말을 잃었다라고 대서특필했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drich Haendel)! 우리가 음악의 어머니라 부르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마치 인간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처럼, 헨델의 메시아는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보듬어 안으며 음악의 구원자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우리에게 숨 막히는 감동을 전해 주는 걸작들은 그것이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어떤 예술 장르이건 간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 모든 걸작들은 혹독하고 쓰라린 배경을 안고 탄생했다는 것이다. 마치 시궁창 속의 고고한 연꽃처럼. 걸작을 탄생시킨 각 장르의 예술가들은 시궁창 속에서도 고고히 피어나는 연꽃처럼 그 시린 아픔을 극복한 후 빛나는 예술과 마주할 수 있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도 예외 없이 이런 과정을 거쳤다. 헨델은 1710년 영국 땅에 발을 디딘 후,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작곡에만 전념해야 했던 헨델은 작곡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오페라 사업에 손을 뻗었다가 결국 실패하고 만다. 헨델은 그 충격으로 병까지 얻어 힘겨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에게 1741년 기회가 찾아온다. 아일랜드 총독과 더블린 필하모닉 협회에서 새 곡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 요청을 받았던 당시 헨델은 그것이 자신에게 다시 명성과 부를 안겨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헨델은 무언지 모를 어떤 것에 홀린 사람처럼 작곡하기 시작한다. 그는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은 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오직 작곡에만 몰두했고, 단 24일 만에 대작 메시아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듬해 1742년 더블린 자선음악회에서의 초연은 대성공이었고, 1743년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의 공연은 국왕을 벌떡 일어나게 할 만큼 대단했으며, 작품의 규모만큼 감동의 규모도 매우 컸다. 감동은 물결처럼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헨델의 메시아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무려 34회나 연주된다. 이로 인해 헨델은 영국의 국가적인 음악가로 존경을 얻게 되었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바로크 음악의 대표주자 바흐

선배 음악가 비발디를 무척 존경했기에 상당수의 비발디 작품을 편곡하기도 했던 바로크 음악의 대표주자 바흐가 훗날 비발디보다 존경받게 된 것은 바흐 작품이 주는 독창성 때문일 것이다. 바흐는 당시 음악의 전통과 여러 다양한 양식을 자신의 천재적인 개성 속에 담아 독특한 음악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바로크 시대의 사상이었고 결국 바흐에 의해 그 이상은 실현되었다. 바흐의 음악에는 당대의 바로크 양식뿐 아니라 훗날 이어질 고전주의 양식까지 암시하는 많은 특성이 들어 있었기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났던 것이다. 오늘날 음악계에서는 바흐의 음악은 성경의 구약이고, 바흐는 음악의 신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의 바흐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바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생계수단으로 음악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별한 첫 번째 아내와 재혼한 아내 사이에서 바흐는 무려 스무 명의 자식을 두었고, 생계를 위해 작품을 써야만 했다. 하지만 바흐는 늘 자상한 아버지였다. 아이들 모두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온 가족이 기악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것을 바흐는 무척 기뻐했다. 특히 그는 아이들과 쳄발로에 앉아 서로 다른 음색으로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아내와 자식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바흐. 그 일이 결국 작품을 쓰는 것이었으니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바흐의 음악적 성과는 바흐의 이런 가족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흐의 작품 중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은 아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 인벤션은 장남 프리데만을 위해 작곡되었는데 바흐의 모든 음악에는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마음이 밑바탕에 깔렸던 것이다. 말년에 바흐는 잘못된 각막 수술 탓에 시력을 잃는다. 시각장애인이 된 상황에서도 바흐는 결코 작곡을 중단하지 않는다. 바흐는 사위와 제자를 통해 자신이 불러주는 대로 곡을 받아 적게 하는데 이렇게 작곡된 작품이 오르간을 위한 18곡의 코랄이다. 동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가난한 음악가 바흐는 1750년에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이 시신은 다른 곳에 묻혀 있다가 1950년에 그가 27년간 봉직했던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로 옮겨져 현재까지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 바흐의 음악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담백한 맛이 난다고 할 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바흐는 성스럽고 고귀한 기독교 음악을 많이 작곡했고, 그러다 보니 작품들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정제된 언어처럼 한 음 한 음이 깊은 의미를 품은 듯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바흐의 작품이 퇴색되지 않고 시공을 초월하여 더한 빛을 발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깊이 있는 단순함, 그리고 튼튼한 기초에 바탕을 둔 보편적인 음악. 그래서 바흐의 작품은 그 어떤 장르에서 아무리 변형하여도 그 원곡의 토대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묵묵하고 한결같지만, 오래오래 질리지 않는 바흐의 작품은 그렇게 오늘날까지 전 장르를 망라하여 굳건히 서 있는 것이다. 영원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전부 다르고 모두 새로운 음악 명문가의 바흐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1685년 독일 중부의 튀링겐 주 중서부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약 200여 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 가계, 즉 음악 명문가였다.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였던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며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렇듯 음악이 깊게 배인 가풍은 바흐를 자연스럽게 음악으로 이끌었다. 어린 시절 바흐는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Johann Ambrosius Bach)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당시의 대 작곡가인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의 제자였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Johann Christoph Bach)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우던 그는 형이 베낀 악보를 반년 동안 달빛 아래에서 필사했고, 당숙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며 음악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18세로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곧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했고, 1703년 한때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그해 8월에는 아른슈타트의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다. 아른슈타트 시대(1703~1707)는 오르간의 연주와 작곡에서 바흐가 개성적인 양식의 기초를 굳힌 중요한 시대이다. 이후 바흐는 바이마르 시대(1708~1717), 쾨텐 시대(1717~1723) 동안 여러 도시의 교회와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 바흐는 좋은 환경 속에서 쾨텐 영구거주를 한때 결심하기도 했었으나, 1723년 여러 사정 때문에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그는 독일 바로크의 중요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에 선출되었다. 1749년 5월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까지 잃은 바흐는 1750년 7월 28일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27년간, 이곳 라이프치히에 머무르며 교회 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사실상의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가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대(1723~1750)로 불리고 있다. 그에게 또 우리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 푸가 기법(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푸가 기법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한 모든 장르에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의 작품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고 전부 새롭다는 것이다. 200곡이 넘는 칸타타를 비롯하여 오르간곡, 기악곡, 성악곡 그리고 실내악곡 등은 그의 능력의 한계선이 도대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대표곡을 꼽기가 민망할 정도로 모든 곡이 유명하며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게다가 그 방대한 작품들이 하나같이 명곡들뿐이니 이것이 누구도 바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자

[정승용의 더클래식] 음악의 아버지 바흐

우리에게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만약 바흐가 1700년대가 아닌 지금 이 시대에 활동하는 작곡가였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아마도 그는 최고의 부를 누리며 사는 음악가(작곡가) 중 한 명일 것이다. 끊이지 않고 전 세계에서 연주되고 있는 그의 작품, 그리고 그의 곡을 주제로 한 수많은 변주곡. 저작권 수입만 해도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1700년대를 살다간 바흐는 가난에 찌들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음악을 통해 몸부림쳐야 했던 무명의 작곡가였다.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그의 이름과 업적 때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얘기가 있다. 바흐(Bach)는 독일어로 실개천, 시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바흐는 바흐(Bach)가 아닌 메어(Meer)라고 불러야 한다며 그의 업적에 큰 경의를 표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베토벤이 접한 바흐의 작품들은 졸졸 흐르는 작은 실개천이 아니라 바다만큼 넓고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889년 바르셀로나의 한 악기점 구석에서, 당시 바르셀로나 음악원에 재학 중이었던 13살의 한 소년이 수북한 먼지 속에 쌓여 있는 낡은 악보 뭉치를 발견했다. 우연히 발견한 이 악보를 펼쳐든 소년은 가슴 벅차오르는 희열 속에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홀로 악보를 탐구하고 연습한 끝에 비로소 이 곡을 세상에 알렸다. 이 연주 이후 이 작품의 가치가 알려지면서 오늘날 첼리스트들의 필수 레퍼토리가 되었는데, 이 작품은 바로 바흐의 그 유명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고, 이 작품을 바르셀로나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이 작품의 가치를 바로 알아본 이 소년이 바로 세상에 다시없을 만큼 뛰어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였다. 어쩌면 세상에 알려지지도 못한 채 그대로 묻힐 뻔했던 바흐의 위대한 작품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흐가 세상을 떠난 지 140여 년이 지나서야 소년 카잘스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되어 오늘날 우리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카잘스는 60세가 되어서야 이 곡을 음반으로 녹음했다. 바흐가 궁정악장 직위를 받고(1717), 그의 쾨텐 시대를 열어간 1717~1723년 사이에 쾨텐(Koethen)에서 작곡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섯 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독주 악기로서 첼로의 가능성을 보여준 위대한 작품이자 첼로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곡이다. 바흐 시대까지만 해도 첼로는 베이스 선율을 담당하는 저음 현악기로서 멜로디를 뒷받침하는 통주저음 악기로 인식되었다. 길게 지속되는 베이스 성부 위에 멜로디가 전개되는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악기는 주로 바이올린 같은 높은 음역의 악기들이었다. 통주저음이나 앙상블을 이루는 일체의 악기를 배제한 채, 오직 한 대의 첼로만으로 모음곡을 구상한 것은 그 아이디어만으로도 이미 파격적이었다. 20세기 초, 파블로 카잘스가 악보를 재발견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연주되고 있으며, 무반주 첼로 음악의 핵심이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더클래식] 종교음악이란?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칸타타와 수난곡 등 수많은 종교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도 필생의 역작은 다름 아닌 종교음악의 한 분야인 오라토리오이다. 얼핏 기독교 음악을 종교음악이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그 중의 각각의 장르인 모테트, 칸타타, 오라토리오, 수난곡, 레퀴엠, 코랄의 정확한 의미는 무얼까?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모테트(Motet) 중세에서 현대까지 긴 역사를 가진 모테트는 무반주 합창곡으로 종교적인 내용의 가사를 지녔다. 르네상스 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고전파 이후에는 교회 음악의 쇠퇴로 급속히 하향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모차르트, 브람스의 작품이 합창 음악으로 중요한 레퍼토리를 이루고 있다. 칸타타(Cantata) 기악곡이란 뜻의 소나타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성악곡이란 뜻이 있다. 일정한 줄거리를 가진 것을 소재로 한 큰 규모의 성악곡을 말한다. 내용에 따라 세속 칸타타와 교회 칸타타로 나뉘는데, 독일의 음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오라토리오(Oratorio) 17~18세기에 가장 성행했던 음악 형태로, 종교적인 내용을 지닌 대규모의 음악극이다. 성서에 입각한 극적인 대본을 독창, 합창,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오페라와 달리 동작이나 무대장치가 필요치 않다. 오페라와 비슷한 형식이지만, 오페라보다 합창의 비중이 더 크며, 이야기의 줄거리는 해설자가 따로 낭송한다. 바흐와 헨델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하이든에게 이어져 전형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수난곡(Passion) 수난곡은 그야말로 수난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 수난은 바로 그리스도나 그 밖의 성서에 나오는 인물의 수난을 주제로 만든 것이다. 신약성서의 어느 복음서이냐에 따라 마태오 수난곡, 마르코 수난곡, 루카 수난곡, 요한 수난곡 등으로 불린다. 수난곡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었지만, 발달한 것은 16세기 이후부터이다. 미사곡(Missa)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식에 쓰이는 음악을 일컬어 미사곡이라 한다. 이 미사곡은 다섯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키리에(Kyrie), 대영광송(gloria), 크레도(Credo), 상투스(Sanctus), 아뉴스 데이(Agnus dei)가 그것이다. 레퀴엠(Requiem) 죽은 사람을 위한 진혼곡인 레퀴엠은 라틴어 안식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레퀴엠의 정식 명칭은 죽은 자를 위한 진혼곡이지만 가사의 첫 시작이 레퀴엠(안식을).으로 시작되어 그냥 줄여서 레퀴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례 미사의 한 부분으로서 아주 오랜 전통을 가졌지만, 점차 연주회용의 성격이 짙어졌다. 많은 작곡가가 레퀴엠을 만들었지만, 그중에 모차르트의 미완성 레퀴엠이 단연 걸작으로 꼽힌다. 코랄(Chorale)은 개신교의 합창곡으로 예배에서 사용하는 성가를 말한다. 독일 특유의 리듬과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화합’하여 ‘하나’ 된 소리 ‘Towards one’

저마다 음색이 다른 악기들이 모여 화음을 만들어 낸다면 어떨까? 무엇보다도 마음을 맞춰 서로 자제하고 배려하고 협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듣기 거북한 불협화음을 내고 말 것이다. 서로 하나가 되어 하모니를 이뤄야 하는 실내악곡, 교향곡 그리고 협주곡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실내악곡(Chamber Music) 실내악곡은 소규모의 음악 형태로써 17세기 초 귀족들의 응접실에서 시작하였다. 3~5명의 연주자가 실내나 작은 홀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제1 바이올린, 제2 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첼로로 구성된 현악 4중주 그리고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된 피아노 3중주 등과 현악 합주가 가장 많이 연주된다. 부르는 이름은 연주자 수에 따라 달라지는데, 3중주는 트리오, 4중주는 콰르테트 그리고 5중주는 퀸테트 등으로 부른다. 위에 소개한 피아노 3중주는 대부분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되지만, 예외로써 브람스의 3중주 작품 중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호른 편성,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편성의 곡들도 있다. 실내악곡 연주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점은 과연 무엇일까? 그건 바로 화합이다. 제아무리 독주 실력이 뛰어난 솔리스트들이 모여 함께 실내악을 연주한다 한들, 다른 악기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좋은 연주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교향곡(Symphony) 관현악을 위해 작곡된 가장 대규모의 기악곡으로 100여 명에 가까운 연주자들이 각자의 악기를 가지고 한꺼번에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곡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클래식 악기들을 이곳에서 모두 볼 수 있다. 교향곡은 심포니(Symphony)라고도 불리는데 심포니는 원래 이탈리아어의 신포니아(Synfonia)에서 파생된 용어로써 다양한 음들이 함께 울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교향곡은 17세기 오페라가 탄생할 시기의 신포니아가 발전해, 18세기에 비로소 하나의 떳떳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최초의 교향곡 작곡가는 이탈리아 출신 사마르티니인데, 그는 주로 음악회용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 후 교향곡은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며 생애에 140여 곡의 교향곡을 작곡한 하이든에 의해 협주곡을 대체하는 장르로 발전하였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거치며 황금기를 이룩하였다. ■협주곡(Concerto) 독주 악기가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맞서서 연주하기엔 역부족인 듯 보이지만, 독주 악기의 음은 결코 오케스트라의 음에 묻히지 않고 오히려 경쟁을 하듯 더 당당히 큰 소리를 내며 오케스트라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협주곡이다. 투쟁하다, 경쟁하다라는 뜻이 있는 협주곡(Concerto), 즉 콘체르토라는 말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 화려한 기교를 가진 독주 악기가 대립하듯 연주하는 곡의 양식을 뜻한다. 협주곡의 특징이라 한다면, 바로 오케스트라 반주 없이 혼자 자유롭게 연주하며 기교를 뽐내는 독주 악기의 연주, 즉 카덴차(Cadenza)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The클래식]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 베를린·빈 필하모닉

독일에 본거지를 두고 전 세계를 순회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우뚝 서 있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의 오케스트라를 주도하는 두 개의 커다란 산맥이다. 이 두 오케스트라는 닮은 듯 서로 다른 개성을 뽐내며 클래식의 최고봉을 향해 달리는 선의의 동반자이다. 이들이 가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전 좌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남기곤 한다. 오케스트라의 최고라는 이들. 바로 지금 그들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쳐 보려 한다. 베를린 필과 빈 필! 세계적인 악단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이들 모두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런 정식 명칭을 달고 첫 공식 연주회를 한 것은 1842년. 이들은 무려 180여 년의 전통을 가졌다.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정식 명칭을 달고 연주를 시작한 것은 1887년. 빈 필에 비해 햇수가 조금 뒤지지만 그래 봐야 오십 보 백 보이다. 현재 빈 필과 베를린 필이 찬사를 받는 데에는 이런 오랜 역사를 발판 삼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들 두 악단의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태생부터가 다른 이 두 악단은 일단 음색에서부터 확실한 차이가 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나라 독일에서 탄생한 베를린 필은 다소 차갑지만, 칼같이 매우 정확한 연주로 정평이 나있다. 이에 반해 빈 필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빈의 기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보수적이지만 매우 정감 넘치고 우아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또 단원 구성과 지휘자 여부를 놓고 빈 필과 베를린 필은 각각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빈 필의 경우, 상임 지휘자를 두고 있지 않다. 연주할 때마다 개원 지휘자를 초빙하는 방식을 채택하는데, 빈 필 단원의 개인기는 너무나 탁월하며 결속력 또한 강해 어떤 지휘자가 와서 지휘하더라도 최상의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들은 여자 단원을 공식적으로 두지 않았었는데, 이는 명실공히 여성 차별이라고 하여 세계 여성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아 최근엔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이와는 반대로 베를린 필은 상임 지휘자를 두고 있는데, 베를린 필을 거쳐 간 역대 지휘자들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세계 최고의 지휘자였다. 단원의 입단에서도 빈 필에 비해 굉장히 열려 있어, 독주 기량이 뛰어난 단원들이 널리 포진하고 있다. 빈 필과 베를린 필, 베를린 필과 빈 필! 이 두 악단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선의의 관계를 유지하며 음악적 우정을 돈독히 다져오고 있다. 만약 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면, 베를린 필하모닉의 홈그라운드 베를린 필하모닉 홀과 빈 필의 홈그라운드 무직페어라인(Musikverein)에서 이들의 연주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시대에 따른 음악과 음악가

시대에 따른 유행이 있듯 음악도 시대에 따라 어느 한 시대를 휩쓰는 거대한 물결이 있다. 그 거대한 음악의 물결을 타고 작곡가들은 음악을 만들었다. 그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음악사조라고 부른다. 바흐, 모차르트 등 음악가 개개인의 일생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바흐는 어떤 물결을 탔고 모차르트는 또 어떤 물결을 탔는지를 아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음악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려 한다. ■ 르네상스 음악 문예부흥을 뜻하는 르네상스, 15~16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는 1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기독교의 규범에서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앞세우는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은 예술의 한 장르인 음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르네상스 음악은 다성음악 양식이 발전했고, 교회 음악도 예술적으로 높은 경지를 차지한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교회 음악의 완성기를 이룬 팔레스트리나가 있다. ■ 바로크음악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바로크 시대는 르네상스가 끝난 후 17세기~18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간 계속된다. 바로 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은 안정된 균형미를 따졌고 음악도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었는데,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뭔가 좀 비딱하고 비뚤어진 기형적인 모습을 한 음악이었다. 이 시대의 두드러진 현상은 바로 오페라의 탄생과 기악의 발달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탄생한 오페라는 물살을 타고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고, 악기의 발달과 연주 기교의 향상으로 기악곡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마침내 기악곡이 발달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초기 바로크 시대와 후기 바로크 시대로 나눠 볼 수 있다. 초기는 이탈리아의 몬테베르디, 스카를라티, 비발디, 독일의 텔레만, 영국의 퍼셀 등이 있고, 후기는 바흐와 헨델 등이 있다. ■ 고전주의 음악 고전주의 음악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약 80년간 성행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고전주의 시대는 바흐의 죽음에서부터 베토벤의 죽음까지라고 보면 된다. 형식미를 중요하게 여긴 이 시기에 비로소 화성 음악, 소나타, 교향곡, 현악 4중주 등 기악 양식이 탄생했다. 또한, 고전주의 음악가들은 특정 지역이나 민족을 위한 음악이 아닌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전 세계가 공감할 만한 음악을 만들었던 것이다. 대표적 음악가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있다. ■ 낭만주의 음악 고전주의 음악에 반기를 들고 탄생한 낭만주의 음악은 딱딱한 형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감정을 중시하며 개성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페라, 교향곡이 종래의 형식을 벗어났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음향이 확대되었으며, 그 표현에도 매우 다채로웠다. 이런 음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를 지배했다. 슈베르트,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쇼팽, 슈만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 국민주의 음악 19세기 후반 헝가리, 러시아, 보헤미아 등 북유럽을 중심으로 나타난 국민주의 음악은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음악을 추구했다. 음악 소재도 자기 나라의 언어, 자연, 신화, 전설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국민적 공감을 얻으며 발전해 나갔다. 대표 음악가로는 러시아의 글린카,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 체코의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노르웨이의 그리그, 핀란드의 시벨리우스가 있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헷갈리는 소나타와 소나타 형식

소나타란 말이 클래식 음악에서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등 악기 명 다음에 따라붙는 숱한 소나타들. 그리고 또 하나 소나타 형식이란 게 있다. 많은 클래식 음악을 점령하고 있는 소나타와 소나타 형식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소나타 소나타는 기악을 위한 독주곡 또는 실내악곡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2악장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나타(Sonata)의 원형은 이탈리아어 동사 소나레(Suonare)로 소리로 알린다란 뜻이 있고, 성악곡을 뜻하는 칸타타(Cantata)의 반대 개념, 즉 기악곡이란 뜻이다. 오로지 사람의 목소리가 최고의 음악으로 인정받던 문예 부흥기(16세기 르네상스까지)에서의 기악은 성악곡의 반주 역할로 만족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17세기 바로크 음악이 시작되던 무렵부터 서서히 기악을 분리 독립시키고자 하는 기운이 싹트면서, 모든 기악곡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으로 소나타가 탄생하게 되었다. 초창기 소나타는 특정한 음악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닌 기악곡 전체를 의미하는 넓은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중기 바로크시대에 이르러 교회 소나타와 실내 소나타로 나뉘어 불렸고 점차 독주악기를 위한 다악장의 기악곡을 가리키며 그 의미가 세분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소나타와 함께 흔히 쓰이는 소나티네(Sonatine)는 작은 소나타를 뜻하며, 소나타와 마찬가지로 2~4악장으로 이루어진 기악곡이다. ▲소나타 형식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를 기본으로 하는 소나타 형식. 같은 소나타란 말로 인해 우리는 소나타와 소나타 형식을 혼동할 수 있다. 하지만 소나타와 소나타 형식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소나타는 바로크 시대를 거쳐 18세기 고전주의 시대를 넘어오면서 오늘날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든에 의해 소나타 형식으로 확립 되었다. 다시 말하면 소나타 형식은 고전주의 시대에 이룬 기악곡의 다른 형식이다. 소나타 형식을 살펴보면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가 기본이다. 절대음악이 원칙이고, 두 가지 이상의 대조되는 복수 악장으로 구성된 소나타 형식은 보통 남성적(제1주제)인 것과 여성적(제2주제)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둘이 합쳐져 하나의 완성체가 된다. 제시부에서는 우선 남성적인 제1주제가 소개되고, 여성적 성격으로 그와 대조를 이루는 제2주제가 이어진다. 하지만 제2주제는 제1주제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제1주제와 친근한 조성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이 두 주제가 합쳐져 계속 반복되면서 듣는 사람에게 제시부의 주제를 확실히 인지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전개부는 앞서 나온 두 주제를 더 느리게 또는 더 빠르게 변경하여 발전시키며, 마지막 재현부에 이르러서는 말 그대로 제시부에서 보여준 것을 재현해 보이며 곡을 마무리한다. 또한, 이런 소나타 형식은 교향곡, 협주곡의 1악장이나 마지막 악장에 사용된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예술의 종합선물세트 ‘오페라’

같은 이야기인데도 어떤 사람이 하면 더 실감 나고 재미있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이 하면 재미없고 지루한 경우가 있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에 온갖 장치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니까 실감 나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언어의 높낮이를 두거나 혹은 노래를 한다거나 하며 말이지요.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소위 이야기꾼이라 부른다. 그런데 클래식 음악에도 이런 이야기꾼처럼 재미있게 음악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르가 있다. 예술의 종합선물세트라고 불리는 오페라(Opera) 이다. 오페라가 다른 클래식 장르에 비해 쉬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오페라에는 분명한 이야기가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희로애락의 감정 등을 노래 가사나 오케스트라 연주를 통해 노골적으로 표현해 주기 때문에 어떤 형식에 따라 그냥 선율만 흐르는 다른 클래식 음악에 비한다면 너무 친절한 오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가사, 대사, 무대 미술, 연기, 연출, 조명, 발레 등 모든 예술이 한데 모여 있어 마치 예술의 종합선물세트라 할 수 있는 오페라(Opera)의 어원은 작품이란 뜻의 오퍼스(Opus)의 복수형에서 출발한다. 비발디, 바흐, 헨델 이전에 이미 완성된 체계를 갖췄던 오페라의 시작은 르네상스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베르디 백작 궁정에서 귀족들의 논의 끝에 탄생한 오페라는 어떤 드라마에 맞춰 서곡, 합창, 중창, 아리아 등 다양한 장르를 한꺼번에 맞볼 수 있어 곧 이탈리아 전역에 퍼지며 사람들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특히 최초의 오페라라고 하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탄생한 다프네에 대한 호응은 대단했고, 이는 이탈리아를 오페라의 본고장으로 인정받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처음 4개의 악기로만 시작된 오페라는 오페라의 아버지라 불리는 몬테베르디에 의해 여러 악기로 발전되었는데, 그는 36개의 악기로 연주하는 오페라 오르페오를 상연,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몬테베르디의 등장 이후로 오페라는 오늘날 같은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오페라는 내용에 맞춰 등장인물이 대화를 나누고 대사를 하는 점에서 연극과 닮았지만, 결정적으로 이 모든 대화를 노래로 처리한다는 점에서 연극과는 다르다. 이때 주인공이 혼자 나와서 부르는 노래를 아리아라고 하고, 대화 형식으로 노래하는 것은 레치타티보라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런 오페라를 또 뮤지컬과 혼동하기도 한다. 뮤지컬은 역시 가사, 대사, 무대 미술, 연기, 연출, 조명, 발레 등이 포함된 예술이란 점에서는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무엇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오페라와는 다르다. 오페라는 음악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데 반해, 뮤지컬은 연극 적인 요소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오페라는 음악을 중심축으로 삼아 연극을 첨가했고, 뮤지컬은 연극을 중심으로 삼아 음악과 춤 등을 가미한 것이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국민악파에 대해

서양 음악사를 얘기할 때, 민족주의, 국민주의 또는 국민악파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민족주의 음악(국민주의 음악) 은 한마디로 말하면, 작곡가 나라의 독특한 민속 리듬과 멜로디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의가 내려진다면 물론 모든 작곡가가 민족 음악가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시대의 중요한 점은 작곡가의 의도적인 시도이다. 자기 나라의 특수한 성격, 농민의 춤, 서민들의 노래, 역사적인 사건 등을 자신의 음악에 의도적으로 표현할 때 그것이 바로 민족 음악인 것이다. 19세기에 널리 퍼진 낭만주의로 인하여 유럽 사회에는 인간의 본성이나 개인의 느낌과 생각이 전보다 더 존중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평범하고 소박하며 세련되지 않은 보통의 사람이 전형적인 인간으로 여겨졌고, 낭만주의자들은 그러한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사람들의 삶이 문명화의 과정에서 생길 수도 있는 결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래서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예술가들은 과거에 거의 손대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작품 소재의 가장 소중한 근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국민주의 음악 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19세기에 국민주의 음악이 일어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정치적 국민주의의 발생이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건국되었고,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제 전쟁은 과거와 같지 않아서, 왕을 보위하기 위한 전쟁, 군인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위한 전쟁, 나라의 모든 젊은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되는 그런 전쟁이 되었던 것이다. 음악에서 국민주의 운동은 아마 그런 정치적 갈등이 없었다 할지라도 일어났겠지만, 그러한 정치적 상황이 국민주의 음악을 부추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러한 성격으로 볼 때 국민주의 음악과 민족주의 음악은 같은 내용의 음악으로 국민악파(Nationalist School)음악이라 한다. 국민악파 음악은 낭만파 후기에 싹터서 러시아,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 여러 나라를 중심으로 형성된 자국의 국민성을 강조한 음악으로, 유럽 시민 혁명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슬라브 민족이 주가 되었던 것처럼, 대표적인 작곡가로 러시아의 글린카를 비롯하여 러시아 5인조 큐이,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발라키레프,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체코의 스메타나, 드보르작, 노르웨이의 그리그,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헝가리의 바르톡 등이 있다. 이 시대 음악도 내용이나 기법상에 낭만파 음악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데, 낭만파 음악가 중에서도 민족의 색채를 담은 곡을 작곡한 사람들을 국민악파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THE클래식] 낭만주의 음악의 이해

① 전기 낭만파 19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는 근대 국가들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이 국가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감정과 사상에 눈 뜨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것, 이지와 사고보다는 상상에 의한 것,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과 사상 등이었고, 이러한 경향은 음악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가곡에서는 슈베르트에 의해 시와 음악이 밀접하게 결부된 리트(lied)라는 새로운 표현 형식이 확립되었고, 고전적 형식에 벗어나 즉흥곡랩소디무언가 등의 자유로운 형식에 의한 기악 소곡이 작곡되었다. 또한, 음악이 문학과 회화 등의 다른 예술과 결합하게 됨으로써, 이를 소재로 한 서정적이고 환상적이며, 사실적인 교향시가 많이 작곡되는 등 표제 음악이 발전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 음악가로는 독일 오페라의 거장 베버(17861826), 예술가곡과 즉흥곡으로 서정성이 흐르는 낭만 정신을 이끌어 온 슈베르트(17971828), 무언가의 창시자 멘델스존(18091847), 독일 낭만주의를 절정에 이르게 한 슈만(18101856), 피아노의 시인 쇼팽(18101849) 등이 있다. ② 후기 낭만파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낭만파 음악은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면서 더욱 다채로워져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은 대규모의 악곡이 많이 작곡되었고, 가극화성법관현악법 등이 급속하게 발달하는 한편, 자유로운 표현에 의한 악곡이 작곡되었다. 이탈리아의 베르디(18131901)와 푸치니(18581924), 프랑스의 비제(18381875)등은 사실주의와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작품을 작곡하여 낭만파 오페라는 절정을 이루었고, 독일의 바그너 (1813 1883) 에 의해 음악에 극미술 등이 종합된 악극이 창시되었다. 또 말러(18601911)브루크너(18241896)R .슈트라우스(186411949) 등에 의해 교향시와 교향곡은 더욱 새로운 경지로 발달하였다. 브람스(18331897)는 지나친 표제적 경향을 피하여 고전적 형식을 계승함으로써 신고전파 음악을 낳았으며, 생상스(18351921)는 프랑스의 독자적인 음악 문화를 쌓으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국민 악파 음악의 특징인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음악을 작곡하면서도 보편적이고 세계성을 띤 음악을 작곡한 차이콥스키는 풍부하고 다양한 색채의 음향을 창출하였다. 이 시기 음악에서는 더 풍부한 음향과 색채가 추구되어, 각 악기의 음색을 살린 다양한 악기 편성이 시도되었고, 반음계 진행과 안 어울림 화음이 많이 쓰이는 등의 새로운 작곡 기법이 사용되었다. 즉 무조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금관 악기가 현대식으로 개량되어 플루트트럼펫코넷 등의 악기에 밸브가 부착되었으며, 연주 기술은 고도의 기교를 요하게 되었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낭만주의(Romanticism) 음악

음악사적으로 1820년부터 1900년대 사이를 낭만주의(Romanticism) 음악이라 분류한다. 낭만파 음악은 고전파 이후 19세기에 발전한 음악 사조를 말한다. 낭만파 시기에는 음악 형식의 구조보다는 주관적인 감정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관악기의 중요한 발전을 보게 되어 낭만파 음악의 음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주요 도시에는 음악학교가 세워지면서 뛰어난 음악가들을 훈련하게 되면서 19세기 작곡가들은 이전보다 상당히 기교가 향상된 기악 연주자들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음악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음악의 황금기를 꼽는다면, 음악사에서는 낭만주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쇼팽, 브람스와 차이콥스키 등 수많은 작곡가는 저마다 다양한 개성으로 당시의 청중들을 열광시켰으며, 그들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선율들은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아마도 베토벤 이후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기를 원했고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의 청중들만이 아니라 미래의 청중들까지도 감동시킬 작품을 남기고자 했다. 원래 낭만주의라는 말은 서사적인 중세의 문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말의 어원에서 낭만주의 음악은 무엇보다도 문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많은 음악가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예술계 전체를 지배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꿈과 환상이 가득하고 자연을 예찬하며 정열과 사랑을 담은 문학적인 작품들을 추구했다. 낭만주의 시대에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관현악의 규모와 기능이 확대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 시대의 음악이 궁전이나 교회로부터 공개 음악회장으로 옮겨감으로써 생긴 현상이다. 관현악곡의 중용성이 높아짐에 따라 관현악을 위한 작곡기법으로서 관현악법 자체가 거의 하나의 예술과 같이 되었다. 대략 1820년 경부터 1900년 경까지 발전한 낭만주의 음악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엇일까? 음악의 양식적 특징으로는 강력한 감정 표출이 필요해지면서부터 내용적인 것을 더욱 중시하게 됐다는 것이다. 즉 음악적 표현이 강렬해졌고 작곡가 자신의 주관적인 개성을 드러내는 작품이 많아졌다. 마치 작가가 자서전이나 일기를 쓰듯이 음악가들은 악보 위의 음표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영했다. 이러한 변화와 특징 때문일까? 바로크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 음악이 서로 비슷비슷했던 것과는 달리 낭만주의 음악들은 곡의 특징에 따라 작곡가를 구별해 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정승용 지휘자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고전주의 음악이란

고전주의 음악이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의 아주 짧은 시기, 즉, 1750년경부터 1810년경까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에 의해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발전한 음악 사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교회와 귀족중심의 음악이 시민중심의 음악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18세기 후반에 일어난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대두, 바로크 시대의 종교와 귀족들의 절대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 시민혁명 등 이런 사회적인 영향은 음악과 미술, 문화 등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전주의 음악의 특징에 대해 나열 하자면 첫째, 장식적이고 화려한 바로크 시대의 음악 스타일이 선명하고 간결한 음악으로 바뀌었으며 복잡한 대위법 보다는 주요 3화음을 중심으로 한 기능 화성기법이 확립 되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의 3부분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악곡 형식인 소나타 형식이 발전 하였는데, 소나타 형식에서의 남성적인 제 1주제, 여성적인 제 2주제의 조성을 으뜸음과 딸림음과의 관계에서 파악하여 두 주제의 성격적 대비를 갖게 했고, 주제를 유기적으로 전개하는 원리를 확립, 2관 편성의 오케스트라, 그리고 소나타 형식에 바탕을 둔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현악 4중주), 피아노 독주곡과 같은 악곡 형식을 낳음으로서 기악 음악이 발달한 시기이다. 둘째, 악기의 연주법과 기능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연주기교가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악기인 피아노가 널리 번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셋째, 음악도시인 오스트리아 빈을 중심으로 왕성한 음악 활동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비록 그들이 모두 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고전주의의 대표적 작곡가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은 빈으로 이주하여 활동 하였고, 빈에서 생애를 마쳤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 되어지는 빈은 도나우 강, 빈 숲 등 경치가 아름다운 음악 도시로 도시의 시민이나 귀족 모두가 널리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기에 많은 음악가들이 하나 둘 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빈은 고전파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고전파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하이든(1732~1809), 모차르트(1756~1791), 베토벤(1770~1827)등이 있으며, 하이든에 의해 쌓여진 고전주의 음악의 토대를 모차르트가 발전 시켰고, 베토벤에 의해 고전주의 음악이 완성되었다고 흔히 이르기도 한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고전파음악의 시대적 배경

서양 문화사에서 1750년부터 1825년까지는 고전주의 시대로 분류된다. 고전주의 시대는 18세기 후반의 독특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후반은 구체제(프랑스 혁명 이전의 유럽 사회 체제)의 몰락과 새로운 정치ㆍ경제 체제의 확립으로 특정 지워지는 시기였으며 특히 귀족으로부터 중산층으로의 힘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때였다. 이 시기의 지적 생활양식의 향상과 과학의 진보는 특히 눈부신 것이었다. 7년 전쟁(1756~1763)과 미국의 독립선언(1775), 프랑스 혁명(1789~1799), 노불전쟁(1812) 등은 유럽 여러 나라의 급격한 사회 정치적 변화를 촉구하였고, 칸트철학, 볼테르, 루소, 스미스 등의 문학 작품들, 고야, 레이놀즈 등의 예술 작품들은 사람들의 지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켰으며, 종두의 개발(1796)과 산소 및 수소의 발견(1774), 자외선 및 자기 유도의 발견 등을 과학을 크게 발달시켰다. 그 밖에도 증기 기관의 발명과 방적기, 전동기 등의 발명이 산업 혁명을 유도하였다. 고전주의 시대는 이러한 개혁과 계몽, 합리, 과학, 산업의 시대와 함께 그 문을 열었다. 라틴어의 Classicus는 원래 납세자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고, 후에 모범적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전주의라는 말이 사용된 이래 그것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정의되어 왔다. 문학과 예술에서의 가장 우수한 상태를 일컫는 일반적인 의미와 고대 그리스 및 고대 로마의 문화와 관련된 상태를 일컫는 특정한 의미가 그것이다. 그래서 고전주의라는 말 속에는 우수한 것의 극치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욕을 담고 있고, 그와 동시에 그 우수한 것의 극치는 과거에 이미 성립되어 계속 존재해 왔으며, 그것은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다시 도달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자신이 외부와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고전주의자들은 타인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개성이나 개인적인 경험을 예술 작품의 자아를 확대하고 구현하는 작업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당위로 인하여 존재한다고 여겼으며, 예술 작품에 관련된 사고의 명료성과 형식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쏟았다. 결과적으로 고전주의자들은 매우 객관적인 태도로 예술 작품을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고전주의는 예술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의 적절한 통제 및 자제, 논리적 표현과 정교한 기교의 가능성,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통찰력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견해는 예술가들로 하여금 작품 속에서 정연한 질서와 안정성, 화성적 조화를 추구하도록 고무하였다. 그래서 고전주의 예술은 단순 명료하고 법칙에 따른 외적 상태와 자연적이고 유기적이며 긴장에 찬 내적 체험을 결합함으로써 형식과 내용의 이상적인 결합과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그리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영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제목이 없는 음악은 어렵다?

-표제음악 vs 절대음악-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와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3번. 이 두곡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똑같은 바이올린 협주곡인데 비발디의 곡에는 사계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반면, 모차르트의 곡에는 작품번호만 달랑 붙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제목이 붙어 있는 음악을 가리켜 표제 음악이라고 부르고, 작품번호만 달려 있는 작품을 절대(순수) 음악이라고 부른다. 만약 클래식 초보자가 이 두곡을 놓고 감상한다고 했을 때 어떤 곡이 쉽게 다가올까? 아무래도 사계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곡이 당연히 더 쉽게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계절의 느낌을 표현한 곡이라고 친절하게 사계라는 이름까지 붙여 주었으니, 아무 제목도 달려 있지 않고 달랑 몇 번이라고만 써 놓은 모차르트의 곡보다는 훨씬 감상하기가 쉬울 것이다. 표제 음악과 절대 음악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표제 음악과 절대 음악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그림에 빗대어 비교해 보는 것일 것이다. 과일이나 꽃병을 그린 정물화 같은 것은 정확히 무엇을 그렸는지 대번 알 수 있다. 하지만 화가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 추상화 같은 것은 아무리 고개를 갸웃거려도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이 추상화를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우리는 많은 생각과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추상화 같은 그림은 보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바라본다고 해서 우리는 틀린 감상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제목이 붙어 있는 표제 음악은 그 제목을 바탕으로 감상하면 되겠고, 절대 음악은 감상자가 자신에게 들려지는 그 느낌에 맞춰 감상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밝은 기분에서 감상하는 절대 음악은 밝게 들릴 수도 있고, 같은 절대 음악을 우울한 기분에서 감상할 때는 우울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표제 음악이든 절대 음악이든 클래식음악은 마음으로 들러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제목이 있다면 제목 속에서 감상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제목대로 들을 필요도, 제목이 없다고 해서 난감해 할 필요도 없다. 자, 용기를 내서 어떤 클래식 음악이든 한번 도전해 보자.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THE 클래식] 사랑의 음악 세레나데 & 녹턴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마저도 소음이 될까 걱정되는 깊은 새벽. 오랜만에 밖에서는 시원하게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열어보니 가로등 불빛 사이로 보이는 굵은 빗방울과 소리마저도 시원한 빗소리 간혹 들려오는 천둥소리. 여기에 필자가 두드리는 자판의 리듬 섞인 운율은 한편의 음악을 듣는 듯하다. 대자연의 연주 속에서 필자가 오늘 칼럼을 위해 준비한 자료는 다음 회를 위해 살짝 미루고, 오늘은 밤에 듣는 사랑의 음악 세레나데와 녹턴에 대해 써보려 한다. 사랑의 세레나데, 밤의 야상곡 이라는 표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세레나데와 야상곡(녹턴)은 클래식 음악 중 사랑과 관련된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음악을 들으면서 사랑스럽고 낭만적인 느낌을 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 아름다운 음악 세레나데와 녹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남녀의 사랑을 그린 로맨틱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녀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불러 주기도 하고,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아름다운 피아노곡을 들려주기도 한다. 또 보통 이런 사랑의 음악은 저녁에 연주되어진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이런 류의 음악에 따로 이름을 지어 부르는데 바로 세레나데(Serenada)와 녹턴(Nocturne)이다. 세레나데는 저녁 음악이라는 뜻으로, 이탈리아어 세레노(Sereno)에서 출발한 사랑 노래이다. 18세기에 시작된 기악 형식의 한 가지로, 교향곡보다 작은 규모로 연회의 흥을 돋우는 가벼운 음악을 말하기도 한다. 대표곡으로는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크트 뮤직(Eine kleine Nacht Musik),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등이 있다. 녹턴은 낭만파 시대에 주로 피아노를 위하여 작곡된 소곡으로 밤의 음악이라고 하여 야상곡이라고도 불려진다. 녹턴을 맨 먼저 작곡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일랜드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J.필드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20곡에 가까운 녹턴은 피아노의 시인 쇼팽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쇼팽에 의해 녹턴은 더욱 정교하고 세련된 피아노 소품으로 완성되었다. 녹턴에는 피아노 독주곡 이외에도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중 관현악곡 등이 있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정승용의 THE클래식] 작품번호 속에 숨겨진 비밀

몇 일전 필자는 한 독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필자가 종종 받는 질문이기도 하다. 마음먹고 클래식 음악 한곡을 들어보려 할 때 제일 먼저 부딪히는 문제일 것이다. 바로 곡목 뒤에 붙어 있는 이상한 알파벳이다. Op BWV D Kv Hob 등등. 오늘은 이 기호들에 대한 의문을 모두 풀어보려 한다. 베토벤 교향곡 5번 Op.67이라든가, 바흐 골든베르그 변주곡 BWV988, 슈베르트 소나타 D.384,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5번 Kv.287, 하이든 트럼펫과 오페라를 위한 협주곡 Hob.Ⅶ e-1 등에 나오는 Op BWV D Kv Hob 같은 이상한 기호들은 다름 아닌 그 작품의 작품번호이다. 남긴 곡들이 워낙 많은 까닭에 그것들을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부를 수가 없어 간단하게 번호를 매긴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이름 외에 자신의 번호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작품번호는 일반적으로 Op를 많이 사용한다. Op는 라틴어로 작품을 뜻하는 Opus의 줄임말로 작곡된 순서에 따라 Op 뒤에 번호를 붙인다. 그런데 모든 작곡가의 작품에 Op만 붙는다면 우리가 덜 혼란스러울 텐데, 특정 작곡가에는 또 다른 기호가 붙으니 그 이유는 왜일까? 그것은 작곡가 스스로가 자기 작품을 분류해서 번호를 붙이지 않고, 후세의 음악학자가 특정 작곡가의 작품을 연구하기 위해 나름대로 번호를 붙여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특정 작곡가의 특정 기호를 보기 좋게 정리해보기로 하자. 바흐 작품번호라 부르는 BWV는 바흐의 작품에 붙는 기호로 독일어 Bach-Werke-Verzeichnis의 이니셜을 딴 기호이다. 음악학자 슈미더(Wolfgang Schmieder)가 정리한 것이다. 쾨헬 번호라 부르는 Kv 또는 K: Koechel-Verzeichnis는 모차르트를 연구한 학자 쾨헬(Koechel)에 의해 만들어진 기호이다.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였던 쾨헬은 평소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그의 방대한 작품을 수집하여 정리하게 되었다. 도이치 번호라고 부르는 D는 슈베르트의 작품을 의미 하는데, 오스트리아의 음악학자인 도이치(Otto Deutsch)에 의해 만들어졌다. 호보켄 번호라고 부르는 Hob는 하이든의 작품번호에 적는다. 독일 출신의 전기 작가 호보켄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밖에 WoO란 번호가 있는데, 베토벤의 유작에 한해 이런 기호를 쓰고 있다. 작품번호가 없는 작품이란 뜻의 약자이다. 베토벤의 작품 중에 우리가 널리 부르는 가곡 그대를 사랑해 WoO.123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밖에도 헨델의 작품번호는 HWV(Handel-Werke-Verzeichnis)로 표기된다. 이제 작품번호에 담긴 의문이 조금 풀리셨나요? 자, 그럼 바흐의 곡부터 큰 소리로 읽으면서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정승용 지휘자ㆍ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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