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군 근거지서 화합의 상징으로… 탕평의 기틀 세우다
80대의 할머니 네 분이 계셨는데 마침 그 중 한 분이 산성의 존재를 알고 계셨다. 옛날 학창 시절에 산성터로 소풍을 다녔다고 하신다. “어릴 적 아버지께 산성에 있던 군사들이 물이 부족해 전쟁에서 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러한 전설은 아마도 1728년 3월에 일어난 ‘무신난’ 혹은 ‘이인좌의 난’이 배경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 흙과 돌로 축조한 테뫼식 산성
금광마을을 품고 있는 금광산 7~9부 능선을 따라서 흙과 돌로 축조한 테뫼식 산성으로 길이 1천342m에 이르며 높이 1∼3m, 폭 4m로 축조됐다. 안성시 향토유적 1호로 지정된 곳이다. 산성 정상에 서면 금광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남동쪽 10km지점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 장군이 활약했던 서운산성, 북서쪽 5km 지점에 비봉산성이 마주 보고 있다. 이처럼 금광산성은 서운·비봉산성과 기각지세(角之勢)를 이루고 있어 일찍부터 삼남(三南)을 방어하는 요충이자 한성 방어의 전초기지로서 활용됐다. 특히 1728년 3월, 사로도순무사 오명항의 관군이 이인좌의 반란군을 이 부근에서 대파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금광산성이 언제 축조됐는지에 대한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남하하는 청군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도순무사 오명항이 주민을 동원해 쌓았다는 두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믿기 어렵다.
<영조실록>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쌓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조선보물고적조사료>에 금광산성은 “안성읍의 동남쪽 1리 금광산 위에 있는 2단의 토성으로 둘레가 700간”이라 했으며 <문화유적총람>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을 뿐이다.
금광산성 안에는 금광마을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산제당터가 남아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이 산에서 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은 ‘환국(換局)’을 통해 절대왕권을 구축했다. 환국이란 동서, 노소로 갈라진 정치권의 대립을 활용한 왕권 강화책이다.
집권세력이던 남인을 실각 시키고 서인을 등용한 경신환국(1680), 남인의 후원을 받는 희빈 장씨를 총애해 다시 서인을 실각하고 남인을 등용한 기사환국(1689), 장희빈을 폐비 시키고 서인을 다시 입각한 갑술환국(1694) 등 환국이 벌어질 때마다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허적, 윤휴, 류혁연, 송시열 같은 대학자와 정치가, 장수들도 이때 죽임을 당했다.
숙종의 환국정치는 병자호란의 패배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며 실추됐던 왕실의 권위를 되찾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폐해 또한 엄청났다. 따지고 보면 조선 최대의 비극이라 할 사도세자의 죽음도 환국정치가 잉태한 것이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蕩平)을 정책의 중심으로 내세운 것도 환국정치로 인한 당파간의 뿌리 깊은 원한과 보복이 재현되지 않도록 조치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영조가 즉위한 지 4년 되던 1728년 3월, 조선은 내란에 휩싸였다. 이인좌가 주도했다고 해 ‘이인좌의 난’ 혹은 무신년에 일어난 반란이라고 해 ‘무신난’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인(西人)에서 갈라져 나온 소론(少論)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1724년,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연잉군(영조)이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면서 노론의 지위가 회복됐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소론 과격파들은 갑술환국(1694) 이후 정권에서 완전히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는 군사반란을 계획했다.
이인좌는 충청도와 경기도의 명화적 300여 명을 괴산에 모아놓고 정희량이 이끄는 영남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영남군은 충청도군과 합류해 서울로 진격하고 호남군은 경기의 안성지역의 군사들과 연합해 서울로 진격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영남군을 기다리던 이인좌는 참지 못하고 서둘러 행동을 개시했다. 상두꾼으로 가장한 반란군은 상여 안에 무기를 숨기고 청주성 밖에 대기했다. 일부 군사들은 행인 차림을 하고 청주성 안으로 잠입했다.
3월15일 새벽 반란군은 일제히 청주 병영으로 돌입했다. 때맞춰 성안의 내응 세력이 성문을 활짝 열었다. 반란군은 병영으로 밀고 들어가 칼을 빼들고 막아서는 병마절도사 이봉상을 죽였다. 반란군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청주성 인근의 상당산성까지 접수해 버렸다. 산성 안에 비축돼 있던 양곡을 군량으로 삼고 무기로 무장한 반란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이인좌는 스스로 ‘삼남대원수’라 부르며 창고를 열어 군사와 빈민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청주목사를 비롯해 점령한 지방의 수령을 새로 임명했다. 이인좌는 안성으로 군대를 이동시켜 청룡산 자락에 주둔했다. 이곳이 금광산성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영남군의 합세를 기다리며 장막을 치고 양곡을 비축해 장기전에 대비했다.
반란 소식을 들은 영조는 소론 출신인 병조판서 오명항을 도순무사, 박문수를 종사관에 임명했다. 이들은 소론출신이다. 소론이 일으킨 반란이니 소론이 평정하라는 것이다. 반란군 토벌의 총책임자인 도순무사 오명항은 지혜로웠다. 양민을 보호하기 위해 지혜를 발휘했다. “적을 사로잡은 자는 상을 주겠으나 참수해 바친 자는 논상(論賞)하지 않겠다” 억울한 죽음일을 막았던 것이다.
오명항은 종사관 박문수에게 명을 내려 철저히 조사해 뚜렷한 혐의가 없는 포로를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인좌가 지휘하는 반란군과 벌인 안성전투에서는 반란군 수백 명이 사살됐다. 이인좌는 500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청룡산 자락으로 물러가 진을 치고 죽산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토벌군도 반군이 둔을 친 곳을 알지 못했다. 적의 첩자를 사로잡아 적병이 위치를 알아냈다. <영조실록>에는 반군이 있던 산을 이렇게 묘사했다.
“청룡산 한 줄기가 수백 보 정도로 길게 구부러져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의 산 아래로 5, 60호의 마을이 있었으며 앞은 평야였다” 오명항은 중군 박찬신에게 보군 3초(哨, 약 360명)와 마군 1초(약 120명)를 나누어 적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아울러 안성 군사를 풀어 적의 도주로를 막도록 지시했다. 적이 토벌군을 보고 산으로 올라가 진을 치고 대응하자 관군이 올려다만 볼뿐 다가가지 못했다. 3월23일 마침내 토벌군은 반란군이 있는 산으로 진격했다.
반란군은 산마루로 올라가 토벌군을 내려다보며 에워싸는 진형인 곡진(曲陣)으로 대응했다. 이인좌는 산마루에서 말을 타고 백기를 휘날리며 군사들을 독려했으나 마침내 전세가 기울어졌다. 반란군의 조총이 대부분 비에 젖어 격발되지 않고 바람마저 역풍이 불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이인좌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주했으나 결국 백성들에게 사로잡혔다. 반란을 진압한 영조의 결단이 돋보인다.
■ 금광산성에서 탕평을 떠 올리다
“조정에서 붕당을 일삼아서 재주 있는 사람을 등용하지 않고 도리어 색목으로 따져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연달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을 지경인데도 그들을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당쟁을 일삼았다. 그래서 우리 백성들이 조정을 업신여긴 지 오래됐다. 그 와해의 형상과 도둑에게 몸을 던지는 일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실로 조정의 허물이다”
이처럼 영조는 반란의 원인을 권력을 독점하는 관료들과 당쟁 탓으로 돌렸다. 이후 영조는 화합하는 정책을 힘차게 펼쳤다. 바로 탕평이다. 영조는 탕평책이라는 새로운 정책으로 사색당파로 분열된 정치권을 화합하도록 힘을 쏟았다. 환국 대신 탕평이라는 대안을 제시해 당쟁을 줄여나간 영조의 지혜로운 선택과 결단을 우리시대의 정치인들도 배우면 어떨까. 금광산성을 둘러보며 품었던 소망의 하나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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