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은 우리 국회 역사에 해괴망측한 기록을 남겼다. 원내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의원 당적이 거래된 이른바 ‘의원 꿔주기’다. 당시 총선에서 자민련은 17석밖에 얻지 못했다.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 필요한 20석에 3석 부족했다. 이에 공동정권의 다른 축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이 소속 의원 3명을 자민련으로 보냈다. 송석찬(대전 유성), 송영진(충남 당진), 배기선(경기 부천 원미을) 의원이 그렇게 맘에 없는 당적 변경을 했다.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주군(主君)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해야 했던 3김 시대였다. DJP의 한 축인 DJ(김대중)가 JP(김종필)를 돕기 위한 결단이었고, 소속 정치인 누구도 거부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론은 그때도 냉정했다.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77%가 ‘의원 꿔주기는 유권자 배신’이라고 답했다. 그래서일까 당적을 옮겼던 의원들이 다음 정치 일정에서 외면받았다. 송석찬, 송영진 두 의원은 이후 정치판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요즘 시대라고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그리고 야권 정계개편의 정국을 맞은 지금 더욱 기승을 부릴 태세다. 경기ㆍ인천 지역 바른정당 소속 현역 의원 5명의 당적 변경이 초미의 관심사다. 김영우 의원은 한국당으로의 당적 변경이 유력히 점쳐진다. 정병국ㆍ유의동 의원은 탈당하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이학재ㆍ홍철호 의원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찌 됐든 지역 주민들이 이들의 당적 변경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나름의 명분들은 있다. 그 옛날 의원 꿔주기 때도 그랬다. 공동정권의 의지를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고 변명했다. 오히려 자신들이야말로 희생자라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하물며 100% 본인 결단으로 움직이는 지금의 당적 변경자들이다. 왜 없겠나. 지난해 탈당 때는 ‘박근혜 부패에 대한 국민 뜻’이라고 했다. 앞으로 탈당 또는 복당을 하더라도 그럴싸한 명분을 얘기할 게 틀림없다. 일일이 트집 잡는 소모전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유권자들 앞에 결정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시늉이라도 하길 권한다. 우리 정치 현실에서 당적이 뭔가.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는 절대적 조건이다. 말로는 ‘개인 능력을 보겠다’ ‘공약 내용을 보겠다’ ‘청렴성을 보겠다’고 한다. 하지만, 선거만 들어가면 현실은 다르다. 후보자의 소속 정당에 따라 운명이 나뉜다. 능력 없고, 거짓말하고, 부도덕한 후보들도 줄줄이 당적 덕택에 의원 배지를 단다. 의원 다수가 이런 선택을 받았다.
이렇게 잉태된 국회의원들이 툭하면 당적을 바꾼다. 바꾸기 전에도 말 한마디 없고, 바꾸고 나서도 말 한마디 없다. ‘내가 잘했습니다’라는 현수막은 넘치도록 내걸면서 ‘주신 당적 바꿔 죄송합니다’는 안내문은 찌라시 한 장 안 돌린다.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유권자의 뜻을 모시는 정치인이라 할 수 있겠나. 정치의 지고지순한 선(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유권자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道理)를 말하는 것이다. 척이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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