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⑥ 정몽주와 경기사상

‘불사이군’의 최후 고려인… 한국정신문화의 뿌리가 되다
조선 건국 반대하다 개성 선죽교에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책임윤리 정치가로 조선 도학의 시조

⑥ 정몽주와 경기사상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이 문제는 역사상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일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적 현상이다.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이 하나라의 걸왕을 몰아냈던 경우가 그렇고, 주나라를 창업하며 은나라 주임금을 쫓아냈던 무왕의 역사적 사례가 그렇다. 다만 왕정시대에는 피를 흘리며 역성혁명을 통해 못난 군주를 갈아치웠지만, 그야말로 민주시대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헌법과 절차에 의해서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역사는 무능하고 부패한 임금을 위해 절의(節義)를 지키며 섬길 것인가 아니면 어지러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리더십을 도모할 것인가 하는 역사적 선택 앞에서 망설이게 한다. 고려 말도 마찬가지다. 포은 정몽주는 절의를 선택한다. 이 절의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5월이면 경기도 용인에서는 포은문화제가 열린다. 또한 포은아트홀에서 창작 오페라 포은 정몽주가 공연되기도 한다. 

정몽주의 신도비
정몽주의 신도비

그는 조선 창업을 반대하다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포은은 조선 창업 당시에는 간신(姦臣)으로 낙인 찍혀 개성 주변에 가매장 되었다.(태조1년 12월 16일) 간신 정몽주가 화려하게 충신으로 되살아난 것은 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를 회유했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서였다. 양촌 권근은 태종이 즉위하자 “수성(守成)할 때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전대(前代)에 절의를 다한 신하를 상 주어...후세 인신(人臣)의 절의를 장려해야” 한다고 청하였다.(태종 1년 1월 14일) 태종은 곧 정몽주의 절의를 포상했다.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조선 건국에 아무런 공로도 없는 ‘최후의 고려인’ 정몽주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만고의 충신’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이로써 포은 정몽주는 한국정신문화의 상징이 됐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포은 정몽주의 초상
포은 정몽주의 초상

그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으나 주로 경기에서 살았다. 그런데 고향도 아닌 용인에 왜 무덤이 있을까. 태종은 자신이 죽인 포은 정몽주를 복권시키면서 개성 풍덕에 있는 가묘를 경북 영천으로 이장(移葬)하게 한다. 이장 행렬이 용인 풍덕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상여의 명정(銘旌ㆍ죽은 사람의 관직 등을 적은 천)이 날아가 버렸다. 후손들이 따라가 명정이 떨어진 곳을 보니 보기 드문 천하의 명당이라 그 자리를 묘 자리로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하나는 포은 아들의 며느리 고향이 용인인데 그 아들이 사람을 시켜 아버지 묘 자리를 용인에 미리 잡아 놓았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두 가지 설 모두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이성계의 아들로서 권력의 헤게모니를 다투던 이방원일 때는 정적 정몽주를 죽여야 했지만 최고 권력자 임금 태종이 되고 보니 포은 정몽주 같은 ‘절의 있는 선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먼저 포은을 정치적으로 복권시킨 다음 이장을 허락(태종6년 1406년)한 것은 아닐까. 경북 영천에 포은 정몽주 무덤이 있은들 무슨 정치적 효과가 있겠는가. 무덤을 영천으로 이장할 아무런 당위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의리의 사나이’ 정몽주의 무덤은 왕궁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에 있어야 그만이다. 경기는 그런 땅이다. 용인을 포은의 무덤자리로 선택한 것은 태종의 비밀스런 고도의 정치적 프로젝트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태종이 무덤의 이장을 허락한 것은 개성의 ‘고려충신’을 용인의 ‘조선충신’으로 전환시키겠다는 혐의가 짙어 보인다. 그럼에도 포은의 혼백은 ‘조선충신’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덤을 이장한 후 처음에는 조선 국왕이 내린 관직명이 새겨진 비석을 무덤 앞에 세웠었는데 어느 날 뇌성벽력이 쳐서 비석이 쪼개졌다는 것이다. 후손들이 포은의 혼백이 노해서 그런 줄 알고 포은의 혼백을 위로하며 다시 고려 관직명만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용인시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의 모역
용인시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의 모역

정몽주가 조선의 개국을 끝까지 반대하자 이방원은 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며 회유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如此亦何如如彼亦何如)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 (萬壽山原頭葛榮綴亦何如)

우리도 이와 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여하(如何)’ 즉 ‘어떻게 할 것입니까’ 또는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정중하게 묻지 않고 ‘하여(何如)’ 즉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냐’ 라고 강제하듯 따지고 있다. 그러자 정몽주 역시 단심가(丹心歌)로 응수한다. 비장함이 느껴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白骨爲塵土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也歟)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던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그는 까마귀 같은 친구들을 따라 강남으로 가지 않고 백로가 됐다. 일찍이 스승 이색은 제자 정몽주를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래서 성리학의 종장인 정몽주의 단심가는 절의에 그칠 수 없었다. 1517년 중종 12년에 정몽주는 문묘에 배향되고 그 후손들에게는 사패지 210만평을 하사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조선조 도학(道學)의 시조로 추앙되어 강상의리 정신의 표상으로서 사상사적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차지하게 된다. 이후 조선조 도통(道統)의 계보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신윤리와 책임윤리를 구분한다. 신념윤리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결과보다는 도덕적인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책임윤리는 자신의 결정이 초래할 결과에 무한책임을 지는 태도를 말한다.『맹자』만장 하(萬章 下)에는 성인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치러갈 때 말고삐를 붙잡으며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인가”라고 따지다 결국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 먹다 죽었다는 백이형의 성인이다.(聖之淸者) 둘째는 하나라 걸왕이 국정을 농락하자 탕임금과 더불어 걸왕을 몰아내고 은나라를 세워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던 이윤을 들고 있다.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평범한 보통사람들(匹夫匹婦)이라 하더라도 요순임금의 혜택을 입는 데 참여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밀쳐서 도랑 가운데로 넣은 것처럼 여기며” 스스로 책임을 자임하는(聖之任者) 사람이다.

 

셋째는 작은 벼슬도 사양하지 않고 벼슬길에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으며 늘 화합하고 포용력 있게 주변사람을 품어 인심을 후하게 했던 화해의 상징 유하혜이다.(聖之和者) 네 번째는 속히 떠날만하면 속히 떠나고 오래 머무를 만하면 오래 머물며 은둔할 만하면 은둔하고 벼슬할 만하면 벼슬한 공자이다. 공자는 타이밍을 중시했던 시중(時中)의 성인(聖之時者)이다.

 

이 네 가지 중 포은 정몽주는 도덕적 순수성으로 표상되는 백이형 신념윤리의 정치가라고 할 수 있으며, 정도전은 이윤의 뜻을 품고 벼슬에 나가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꼭 하고 어떤 일을 당해도 회피할 줄 모르는 책임윤리의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정몽주가 시묘살이 하는 정도전에게『맹자』를 보내주자 정도전은 하루에 반장 내지 한 장을 읽으며 책임윤리의 정치가로 거듭난 것이다. 조선조 도통론의 기획은 신념윤리와 사상사적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은 조선을 설계하고 조선은 그 설계도대로 500년을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유교로 정신문화를 바꾸고 역사를 전환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은 도통론의 기획에 의거 한국정치사상사의 사상사적 위상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정도전은 고종 때 유학으로도 으뜸이요 공적으로도 으뜸이라는 유종공종(儒宗功宗)으로 겨우 복권됐지만 500여년의 세월로 축적된 정신문화는 복권명령 하나만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유학은 양손잡이 유학이다. 자신의 신념윤리에 따라 의리를 지키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백성의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책임윤리로 무장한 경세가 또한 필요하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한국정신문화의 두 축이다.『삼봉집』에는 정도전이 정몽주를 위해 쓴 <차운하여 정달가에게 부치다 次韻寄鄭達可夢周>라는 시가 있다.

지란은 불탈수록 향기 더하고 (芝蘭焚愈馨)

좋은 쇠는 갈수록 빛이 더 나네 (良金愈光)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共保堅貞操)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를 하네 (永矢莫相忘)

두 사람은 동문수학하며 마음을 같이 했던 벗으로서 서로 그리워하는 사이다. 정몽주 역시 정도전에게 “처음에 세운 뜻 평생 동안 변하지 않네”라고 응답한다. 이 시의 두 사람처럼 한국정신문화의 두 축인 정몽주와 정도전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그 역할이 경기의 사상적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정신문화의 두 축은 경기사상의 핵심축이기도 하다. 절의의 상징 정몽주 무덤은 용인에 위치해 있고, 공적으로 으뜸인 정도전의 삼봉기념관은 평택에 자리하고 있다. 모두 경기이다. 경기는 역사의 두 수레바퀴를 다 품고 있다.

정몽주의 모친이 지은 '백로가'가 새겨져있는 비석
정몽주의 모친이 지은 '백로가'가 새겨져있는 비석

절의와 사공(事功),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중심으로 한국의 정신문화를 재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조선의 유학은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소용돌이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는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의 틀에서 벗어나고, 또한 도통론적 기획으로 정도전처럼 사공(事功)을 중시했던 사상가들을 배제할 것이 아니라 더 폭넓은 시각으로 서로 포용하는 사상적 시각교정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좀 더 생산적인 경기사상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 힌트는 정몽주 무덤 옆에 묻혀 있는 연안이씨 저헌(樗軒) 이석형의 넘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계일정신(戒溢精神)이 아닐까 그 경구가 자꾸 눈에 밟힌다.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