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선택하는 안목이 여간 비상한 게 아니다. ‘야망의 전설’ ‘장밋빛 인생’에 이어 ‘내 딸 서영이’까지 국민 드라마만 벌써 세 번째니, 이 정도면 ‘출연했다하면 대박’이라고 칭할 만하다. 바로 배우 조은숙을 두고 하는 말.
인형 같은 눈망울에 화려한 옷차림, 도도한 걸음걸이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의 아우라에 어딘가 위축될 법도 했다. 하지만 의외의 털털함과 따뜻한 어투가 기자의 긴장감을 한 방에 무너트렸다.
조은숙은 “출연하는 작품마다 반응이 좋다, 남다른 선택 기준이 있나?”라는 질문에 “어떤 작품이든 기대를 안 한다. 하지만 소위 대박 나는 드라마는 분위기가 남다른 것 같다”고 답했다.
“안목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이번 작품은 유독 ‘잘 될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이례적으로 배우와 감독, 작가뿐만 아니라 전 스태프가 드라마에 푹 빠져 살았거든요. 현장 어디서든 작품 관련 대화들이 오갔어요. 제각기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100%의 역량을 발휘한 느낌? 드라마 곳곳에 퍼져있는 모든 요소들이 최상의 조합을 이뤄낸 결과인 것 같아요.”
조은숙은 ‘내 딸 서영이’에서 비밀의 열쇠를 쥔 윤소미 역을 맡았다. 강기범의 비서실장이자 그의 막내아들인 강성재의 친모이기도 하다. 윤소미는 강 사장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사람처럼 늘 그의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해둔다.
그는 “현장에 가면 늘 부담감에 시달렸다. 전 스태프가 ‘저 배우가 이 장면을 어떻게 소화해낼까’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고 운을 뗐다.
“대본을 통해 그려진 것 이상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어요.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잠시 촬영을 중단한 채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연기한 적도 많아요. 머릿속으로 그린 장면대로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 오묘한 짜릿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자신이 낳은 자식의 곁에서, 당당히 엄마라고 밝히지도 못한 채 지켜봐야만 하는 모성을 연기한 조은숙. 그는 “낳은 정과 길은 정. 이 차이를 실제 경험해 보지 못해 그 감정의 깊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미혼모, 환경적인 이유로 자식과 가슴 아픈 일을 겪어야 했던 모든 이들을 생각하며 연기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자신의 ‘부모님’과 관련해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고도 털어놨다.
“그간 집중 조명되지 않았던 부성을 다룬 만큼, 저 역시 어릴 적 아빠에 대한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내가 바라는 아버지상과 현실의 아버지가 달라 알 수 없는 실망감과 창피함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요. 부정하고 싶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어느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빠에 대한 오묘한 감정들이 떠올랐죠.”
‘내 딸 서영이’는 소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가족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섬세하게 그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특히 ‘부정’에 대한 또 다른 시선과 해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진부한 주말극 소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조은숙은 “이번 작품을 통해 관점에 큰 변화가 생겼다”면서 “때로는 지나친 배려가 오히려 상대방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간에도 지나친 배려, 혹은 당연히 알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결국 무관심을 만들게 된다. 복잡 미묘한 선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자유분방하고 훤칠한 외모를 지닌 동네 연예인 같은 존재였어요. 친구들은 유쾌하고 다정다감한 아버지를 늘 부러워했지만 당시의 난 뭔가 더 근엄하고 자식들을 다독여줄 수 있는 아버지를 원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었던 아버지의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창피했었죠.”
그가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 층 더 깊게 끌어냈다. 작품 내내 ‘서영이’와 같은 선상에서 비슷한 가슴앓이를 했다고 고백했다.
“서영이도 그랬고 저도 그랬어요. 작은 오해로 인한 상황들이 쌓여 어느 순간 풀 기회를 놓친 거예요. 결국 대화로 풀기에 어색한 지경까지 오게 됐죠.”
그는 작품이 끝날 때쯤 어느새 변화된 자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용기가 생겼다고. 마음 속 감정을 어떻게 행동화해야 할 지 해답을 찾았다고 했다.
조은숙은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러하듯이, 우리 엄마 아빠도 무수한 스킨십을 하면서 나를 키우셨을 텐데 작은 포옹조차 어색한 상황이 됐다”며 담담한 어조 말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그의 떨리는 진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얼마 전 엄마 생신이어서 세 딸이 엄마에게 뽀뽀해주는걸 지켜봤어요. 그 때 갑자기 신랑이 ‘왜 정작 딸은 안 해?’라고 하는 거예요. 얼떨결에 저도 엄마에게 가 뽀뽀를 했죠. 순간 ‘이거구나’ 싶더라고요.(웃음)”
조은숙은 ‘내 딸 서영이’는 자신을 배우로서 한 단계 높여줬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성장을 가져다 준 작품이라고 총평했다.
“요즘 들어 아이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 내용도 한 층 깊어진 것 같아요. 내 아이가 어느 순간에도 나를 불편해하지 않도록, 순간의 무관심과 무성의가 아이와 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요. 혹시 사람 간의 관계에서 긴장의 끈을 놓으신 분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바짝 긴장하세요! 하하!”
협력사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한현정 기자 kiki2022@mk.co.kr/사진 팽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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