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떠올리면 사람들은 아련한 향수에 젖는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이리저리 좌충우돌 부딪히며 상처 받기도 쉬운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추억하기를 좋아한다. 지루한 삶이 싫지만 ‘새로운 삶’을 선택할 용기가 없을 때 사람들은 그 시절을 떠올린다. 불안정함과 불확실함은 반대로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그럴 듯도 하다.
포토경기도 2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가능성과 만났다. 그 안에는 환희와 슬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꿈을 이뤘을까. 다치거나 아프지는 않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섬유예술에 회화화’ 선주주자
장혜홍 섬유예술가
누군가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건 모험이다. 좁고 험한 길, 고생이 뻔하다. 외면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섬유예술가 장혜홍은 그러지 않았다.
서울 출신인 그녀가 대학 졸업 후 프랑스 유학길을 접고 ‘수원행’을 택했을 때가, 1985년이었다. 그녀 나이 스물다섯. 부모님이 좋아하는 미술교사 생활을 하면서, 섬유예술 작품활동을 병행할 수 있다는 점이 그녀를 매료시켰다. 허나, 일과 가정, 그리고 불모지 섬유예술 분야에서의 작품활동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장혜홍은 섬유미술을 전공했음에도, 공예가 표방하는 실용예술에 몸을 담그지 않고 순수예술의 세계에 천착하는 흔치 않는 작가였다. 그녀는 줄곧 일관되게 ‘섬유의 예술화’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
포기, 좌절 없이 그녀는 1997년부터 무려 14년 동안 ‘黑-Black project’를 통해 흑색을 실크에 염색해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전통의 현대화를 상징하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그녀는 모든 색을 함유하는 흑색으로 동양적 사고를 현대미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1998년 1월호 포토경기 인터뷰에서도 섬유예술 개척자로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젊은시절을 만날 수 있다.
그녀의 열정은 1984년~1994년 대한민국공예대전 및 경기미술대전 연 2회 우수상 등 10회에 이르는 화려한 수상실력이 그녀의 열정과 실력을 방증한다.
29년 동안 섬유예술 인생 외길을 걸은 ‘선두주자’답게 그녀의 개인적 체험과 성취는 한국 섬유예술의 성장 및 성숙과 상당 부분 겹친다. 그녀는 섬유예술의 불모지와도 같았던 수원, 뿐만 아니라 경기도에서 그 기반과 명성을 확고히 다진 작가가 됐다.
2014년 장혜홍은 더이상 ‘수원 장선생’이 아니다. 2000년 일본 교토 개인전과 2004년 일본 동경 개인전을 거치면서 평면과 설치미술 형태로 그 영역을 확장한 대규모 프로젝트로 공전의 히트를 치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했기 때문. 그녀의 성공 뒤에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이 있었다.
장혜홍이 29년 동안 고집해온 ‘섬유예술의 회화화’의 정수는 지난해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행궁재(수원시 팔달구 행궁로)’에서 만날 수 있다. 행궁재는 ‘행궁 옆에서 마을을 가꾸고 공부하는 집’이란 뜻으로 그녀가 한국 전통 섬유예술의 아름다움과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미를 동시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겠다는 열망의 결실이다.
작고 소박한 건물이지만 1층에는 제1·2·3전시실, 아트샵과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자리 잡았다. 2층에는 섬유예술연구소와 작업실, 아프리카가나새마을교육재단 한국본부 사무소 등이 있다. 마음껏 한국전통염색을 재현하며 그 찬연한 색을 되살려 우리에게 소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장혜홍은 요즘도 붓을 놓지 않고 행궁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한국 섬유예술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녀의 노력과 변신은 오는 3월 1일 행궁재에서 열리는 개인전 ‘화양연화(花樣年華)’에서 엿볼 수 있다. 또 세계 속 장혜홍의 파워와 실력은 오는 11월 미국 마이애미 공항갤러리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기도 수원에서 시작해 경기도를 뛰어넘어 일본, 프랑스, 미국 등 세계인을 한국의 전통 염색으로 매료시킨 장혜홍 섬유예술가. 그녀는 말한다. “가지 않는 길을 가라고”. 장혜홍은 그 누구도 걷지 않는 길을 수원에서 걸으면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다.
글·사진 _ 강현숙 기자 mom1209@kyeonggi.com
어느덧 환갑 넘은 전통무용계의 거목으로
조흥동 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
월간 ‘포토경기’ 2002년 3월호에는 조흥동 경기도립무용단 예술감독(72)에 대한 기사가 담겨있다. 조 감독의 무용인생이 꼬박 50주년을 맞았다는 내용이다. 동네에서 굿판이 벌어지거나 민요라도 들려오면 자연스레 춤을 추던 9살 소년은 어느덧 환갑을 넘어 국내 전통무용계의 거목이 됐다.
그리고 2014년 2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언뜻 조 감독의 시계는 멈춰있었던 듯 하다. 직함도 그대로이고, 이마에 주름살만 몇개 늘어난 정도다. 하지만 지난 12년 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조 감독은 12년 전 포토경기와 인터뷰에서 도립무용단을 국내 최고로 키우겠다고 밝혔었다. 당시 상황을 묻는 질문에 “그때는 경기도립무용단이 정립이 덜 돼 있었다”라고 운을 뗐다.
조 감독은 2000년 4월 당시 경기도문화예술회관(현재의 경기도문화의전당) 김문무 관장의 삼고초려 끝에 도립무용단 예술감독직을 수락했다.
김 전 관장이 “공채 소식에 10여 통의 이력서가 들어왔지만 이름을 아는 이가 한명도 없다”며 자기의 임기까지만 같이 있자고 제의를 한 것이다. 어렵사리 감독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당시 도립무용단의 여건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중앙에서는 무용가도 장관에게 직접 건의를 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지만, 지방에서는 춤 춘다고 하면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던 때였어요. 공연을 해도 대극장 1천900석 중 200~300석만이 찰 정도로 열악했죠.”
그러나 지금은 공연을 하면 1천500석이 매진되는 수준까지 왔다. 고정 팬 뿐 아니라 새로운 관객도 많아졌다.
이처럼 도립무용단의 위상이 높아지게 된 것은 조 감독의 노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조 감독은 부임 후 단원 수를 국립 무용단 수준으로 증원시켜줄 것을 도에 건의하고, 도의원들을 설득해 40명 수준이었던 정원을 60명으로 증원시켰다. 그리고 정년제를 적용하지 않아 단원들이 꾸준히 실력을 연마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또한 도내 31개 시·군을 넘어 전국을 무대로 한 순회 공연은 물론, 미국과 호주 등지에서 우리 춤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렸다. 오는 3월에는 캄보디아와 라오스, 미얀마 등지에서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뛰어난 기획력이 돋보이는 도립무용단만의 브랜드 공연도 생겼다. 한국 춤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천년의 유산’과 창작 7년차를 맞은 무용극 ‘태권무무 달하’는 경기도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고향인 이천에 ‘춤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꿈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대신 지난 2012년 4월 조병돈 이천시장의 배려로 이천아트홀 지하에 그의 이름을 딴 ‘조흥동 춤 전수관’이 문을 열어 학생 대상 무료강습을 하고 있다. 전문후학 양성을 위해서는 서울 약수동에 그의 호를 딴 ‘월륜(月輪)춤 보존회’를 열어 조흥동류 입춤, 진쇠춤 등을 전수하고 있다.
그는 “과거에는 선생이 돌아가시면 후학들이 선생의 춤을 재현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금은 무보를 통해서도 전수가 가능해졌다. 한량무와 중부살풀이는 이미 무보를 냈는데 진쇠춤 무보도 내고 싶다”며 “공교롭게도 남성 무용가로서 고참이 됐는데, 남성 춤을 개발 정리하는데 여력을 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_ 박성훈 기자 pshoon@kyeonggi.com
효의 본질과 실천, 큰 울림주는 산실 자리매김
용주사 효행박물관
시작이란 항상 설렌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꼭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건물도 마찬가지다. 지난 2005년 12월(202호) 포토경기 ‘화제의 전시’ 섹션에는 그해 개관한 박물관 이야기를 다뤘다.
정조대왕이 부친인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축조한 화성 용주사(龍珠寺) 내 위치한 ‘효행박물관’이 그곳이다. 기사에는 일반에 공개된 효행박물관 설립 취지와 박물관 전시실과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는 소장품 정보를 담았다.
당시 효행박물관장 대행을 맡고 있던 본각 스님(현 용주사 사회국장)은 “도난이나 유실 등의 이유로 공개되지 못한 유물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데 기쁨이 있다”며 “효행박물관을 통해 관람객들이 효의 본질과 덕목, 실천 등의 몸소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박물관에는 효(孝)를 바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자 했던 정조의 통치사상과 철학을 느낄 수 있는 ‘불설부모은중경판’(도유형문화재 제17호)과 ‘화성능행도’ 등 국보급 유물과 보물 등 150여 점이 전시됐다.
한옥 스타일로 230㎡의 면적에 지하와 지상 각각 1층 규모로 수장고와 전시실 등을 갖춰 효 테마 박물관으로서의 입지를 다져갔다. 이후 10년의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유물의 시간에 박제된 듯한 박물관의 풍경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현재 효행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보승 스님은 “초기 박물관은 ‘유물을 통해보는 효’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주로 전시 목적에 취중했었다”며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효’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1년부터 복권기금 지원 사업에 선정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효행박물관 ‘효 꿈나무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효행문화유산을 토대로 한 스토리텔링과 종이접기, 인경 체험학습 등을 진행하면서 지난해에는 경기도 지정 ‘우수 박물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 스마트 시대에 맞게 내부 시설도 달라졌다. 투박하고 불편했던 매직비전 대신 멀티터치 스크린을 채용한 LCD 디스플레이를 채용해 박물관 내 유물 이야기와 정보를 쉽게 획득하도록 했다.
여기에 기존 ‘아이글래스’를 강화해 아이들이 효에 얽힌 10가지 이야기를 음악과 함께 체험하듯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점도 눈에 띈다.
박물관 기능의 다양화에 따른 공간 문제로 올해 박물관 뒤편으로 전시공간을 확장 계획도 가지고 있다. 아직 예산 수립 등의 문제가 있지만 늦어도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기본에도 충실했다. 수원화성박물관과의 연계 기획전시전과 중국 산시성 효행사찰인 백운사와의 자매결연을 추진했다. 박물관 내·외연의 양질의 발전이 뒤따르면서 지난해 10월에는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보물 제1795호인 ‘안성 청원사 건칠아미타여래불좌상 복장전적’이 오랜 협의 끝에 효행박물관에 모실 수 있게 된 것. 임진왜란 이후 작품으로 갸름한 난형의 얼굴과 가늘고 긴 눈초리 등 평판형의 신체가 특징인 불좌상이다.
보승 스님은 “효는 무너져 가는 우리 사회를 일으켜 세울 아름다운 소통의 방식”이라며 “우리 박물관의 과거 10년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전시뿐만 아니라 대사회교육을 통해 효 사상을 전파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_ 박광수 기자 ksthink@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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