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현장체험]고고학자_ ‘북한산성 행궁지’ 발굴현장을 가다

‘숙종의 행궁’ 얼마나 크고 화려했을까?… 잃어버린 역사의 재구성

5살 딸내미의 요즘 꿈은 ‘인어공주’가 되는 거다. 인어공주처럼 곱디고운 목소리를 흉내내며 노래 부르기에 여념없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귤, 초콜릿, 삼겹살이 되겠다고 한 것에 비해면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엄마 입장에선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답답하기도 하다. 그 답답함은 매일 남다른 꿈을 꾸는 딸내미가 ‘도대체 커서 뭐가 될까?’ 하는 걱정에서 온 것이다.

솔직히 대한민국 엄마라면 ‘사’자 들어간 직업 싫어할 사람 없다. 나도 그렇다.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업, 돈 많이 버는 직업이면 최고 아닌가 생각한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 딸가진 부모로서 딸내미가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효율성에 입각한 편협된 생각이다. 같은 여자로선 딸아이가 죽을 때까지 ‘꿈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계모 아니냐고 비난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딸내미가 ‘꿈꾸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하는 반어법이다. 왜냐, 기자 엄마도 매일 꿈을 꾸기 때문이다.(지면상으로는 공개할 수 없는 꿈이지만) 딸내미가 그저 막연한 미래만 보고 불안해 하는 미련한 사람이 아닌, 유물을 발굴하느라 땅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고고학자처럼 고요하면서도 의미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심정에서 직업체험에 나섰다.

도전 직업은 바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옛 인류의 생활, 문화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주된 일이 ‘고고(考古)’하는 것이니 마냥 ‘고고(孤高)’할 것이라 생각했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내가 생각했던 고고와는 거리가 먼 ‘고고(孤苦, 외롭고 가난하다)’였다. 그 고고한 체험이야기를 지금부터 공개한다. 

■ 숙종 때 최대 프로젝트 ‘북한산성’ 행궁지, 내ㆍ외전 등 124칸…1915년 을묘년 산사태로 파괴 

지난 6월 5일 오전, 북한산의 백운대, 보현봉, 문수봉, 나월봉, 의상봉, 원효봉 등 여러 봉우리를 연결해 쌓은 고양 북한산성의 행궁지(사적 제479호) 유물발굴현장을 찾았다.

숙종 37년(1711) 때 지어진 북한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연이은 외세의 침입을 겪으면서 강을 건너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행궁의 필요성을 절감한 숙종이 강한 의지를 갖고 완성한 행궁이다. 왕이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궁궐이 바로 행궁이니 얼마나 크고, 화려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발굴현장으로 향했다. 북한산성문화사업단 박현욱 연구원이 함께 했다.

현장까지 가려면 무려 1시간을 걸어야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등산은 솔직히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푸르른 6월 북한산의 맨얼굴과 조우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임에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멀었어요? 아이고 다리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 조사원들은 매일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벌써 엄살 부리면 안되는데…”라며 웃는 박현욱 연구원의 감칠맛 나는 북한산성 이야기가 그나마 등산의 힘겨움을 덜어주었다.

“행궁지는 4천130평 규모의 경사진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해 주요건물인 내전과 외전을 중심으로 배치하고 그 주변에 부속건물과 수라간, 측소, 삼문 등을 두었습니다. 외곽에는 담장을 둘렀고 건물 전체의 규모는 124칸으로 그 가운데 임금과 왕실 일가족이 생활하는 침전인 내전이 28칸, 왕이 신하들과 집무를 보는 정전인 외전이 28칸입니다.”

박현욱 연구원의 입을 통해 숙종의 최대 역점사업(?)에 걸맞는 북한산성 행궁의 으리으리한 규모가 공개되는 순간 “그런데 왜, 어떻게 없어진 거죠?”라는 질문을 던졌다.

“1912년 영국 성공회가 대여해 피정지로 사용하던 행궁은 1915년 을묘년 북한산 지역에 내린 집중호우와 산사태로 소실됐습니다. 무려 34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졌다고 하니…. 거기다 일제가 행궁 건축물을 헐어가 북한산성은 폐허나 다름없이 변해간 거죠.”

1925년 산사태로 소실돼 터만 남게 된 북한산성 행궁지를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지난 2011년부터 발굴하고 있는 현장은 앙상한 뼈대만 남은 미이라를 연상케했다. 내ㆍ외전을 합쳐 124칸에 달해 꽤 웅장했다는 느낌은 박현욱 연구원이 준비한 자료사진을 통해서만 엿볼 수 있었다. 땅 속에 묻힌 북한산성 행궁의 모습 드러내기 위해 발굴현장에는 발굴조사단장(조유전), 책임조사원(김성태), 조사원(박현욱), 준조사원 2명, 보조원 2명과 작업인부 5~10명이 팀을 이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 땅에서 파낸 파편들로 잃어버린 시간 재구성…고도의 집중력과 인내심 필요

북한산성 행궁지 유물발굴 현장은 2013년 내전지 1차 발굴을 마치고 2차로 외전지에 대한 발굴이 한창이었다.

역사나 고고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아줌마기자 특유의 근성을 발휘해 일손을 보태는 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박현욱 연구원은 붓과 ‘트롤(발굴용 꽃삽)’을 건네며 유물 발굴이 힘든 작업이라고 살짝 겁을 주었다.

“국내에는 3천여 명의 고고학자들이 활동 중인데 보통 현장을 책임지는 이는 주로 10년 이상된 고고학 전공 또는 경력의 연구원입니다. 이 단계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현장에서의 풍부한 경험이 중요해요. 그리고 유물발굴은 인내와 참을성을 기반으로 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자는 트롤을 잡고 왕이 집무를 보는 공적 공간인 외전지에서 발견된 유물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기 시작했다. 300년 된 북한산성의 과거를 들춰내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처음 하는 트롤작업에 어깨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 금새 몸이 굳어져버렸다. 옆에 있던 차동호 준조사원의 도움으로 아주 천천히 300여 년 전의 북한산성 행궁과 만날 수 있었다.

발굴은 그냥 외롭고 단순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파내고, 긁어내고, 유물노출을 위한 붓질을 하고 단순반복을 이어가다보니 시뮬레이션처럼 300여 년 전 숙종이 신하들과 함께 행궁지를 거니는 모습이 그려졌다. 땅에서 파낸 파편들로 잃어버린 시간을 재구성하는 고고학자의 일은 고행이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3D 직업’(Dirty, Difficult, Dangerous)인데 거기다 ‘거리(Distance)’까지 합쳐져 ‘4D 직종’이 바로 고고학자의 실체라며 자조 섞인 말도 한다고 했다.

차동호 준조사원은 기자의 반복되는 트롤작업과 붓질을 감시(?)하고 도우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보고 “나도 고고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누구나 한번쯤 있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깐요.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 개발에 모든 가치를 두고 문화유산을 마치 개발의 걸림돌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유적은 다 중요합니다. 역사에 묻힌 문화유산을 발견하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찾는 과정은 아마 고고학자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일 겁니다. 저는 땅을 팔 때마다 행복지만 그 행복감과 희열을 맛보기 위해선 희생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고고학은 희소성을 크나 특이하지만 힘든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에 기피하는 경향이 많아요. 저도 발굴 현장에서 궂은 일을 하며 선배들의 호통 속에 발굴 기법을 익혔어요.”

차동호 준조사원을 비롯한 연구원들의 열정과 노력이 안겨준 성과는 컸다. 2013년 북한산성 행궁지 1차 발굴된 내전지는 가운데 마루와 좌우온돌방을 갖춘 28칸 규모이며, 그 중심축에는 어도와 대문, 외전지로 내려가는 계단이 좌우행각으로 둘러싸여 중심영역을 형성하고 있고 이들 중심건물들은 그 재료와 축조방법에서 당시 성숙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으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설한 구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오직 인내와 끈기로 얻은 성과였다.

단순 작업의 지겨움과 발견의 희열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숙명을 지닌 고고학자. 그들은 분명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여는 사람들이다. 숙종의 꿈이기도 했던 북한산성은 1915년 집중호우와 산사태로 사라졌지만 2014년 여름, 경기문화재연구원(원장 조유전) 연구원들에 의해 부활하고 있다.

북한산성 행궁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건물지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게 되며 앞으로 북한산성 행궁지에 대한 정비와 복원 기초자료 확보 및 북한산성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데 목적이 있다. 비록 짧은 시간동안의 1일 체험이었지만 고고학자들의 고단함과 역사적 사명감을 같이 할 수 있어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사진_김시범기자 sbkim@kyeonggi.com


■북한산성(사적제162호)

북한산성은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해 쌓은 산성으로, 규모는 길이 12.7㎞이며 내부 면적은 6.2㎢(약 188만 평)에 달한다. 축성 이후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는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북한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일찍부터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양 도성의 배후에 산성을 쌓아 국난에 대비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실제 축성은 1711년(숙종 37)에야 이루어졌다. 이렇듯 긴 논의 과정과는 달리 성벽을 쌓는 데에는 단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아서 당시 축성기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성벽은 평지, 산지, 봉우리 등 지형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여 쌓았다. 계곡부는 온전한 높이로 쌓았고, 지형이 가파른 곳은 1/2, 혹은 1/4만 쌓거나 여정만 올린 곳도 있다. 봉우리 정상부는 성벽을 아예 쌓지 않았는데 그 길이는 4.3㎞이다.

성벽에는 주 출입시설로 대문 6곳, 보조출입시설로 암문 8곳, 수문 2곳을 두었고, 성벽 바로 옆에는 병사들이 머무는 초소인 성랑 143곳이 있었다.

성 내부 시설로는 임금인 머무는 행궁, 북한산성의 수비를 맡았던 삼군문(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주둔부대인 유영(留營) 3곳, 이들 유영의 군사지휘소인 장대 3곳을 두었다. 또한 군량을 비축하였던 창고 7곳, 승병이 주둔하였던 승영사찰(僧營寺刹) 13곳이 분산ㆍ배치되어 있었다. 성벽의 높이를 지형에 따라 달리 한 점, 성문의 여장을 한 매의 돌로 만든 점, 옹성과 포루를 설치하지 않는 점, 이중성으로 축성한 점 등은 다른 산성과 구별되는 북한산성의 특징이다. 또한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보각(譜閣)이 있었다.

자료제공: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문화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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