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현장체험] 무예 24기 시범단

214년전 정조대왕 지키던 호위무사들은 살아있다
휙~ 휙~ 휙~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마음만 武士

길든 야생마는 온유하다. 자유로운 영혼과 가공할 힘을 갖고 있지만, 마부의 통제를 수긍하며 기꺼이 그의 발이 된다. 하루에 천릿길을 내달았다고 전해지는 적토마는 길든 야생마의 표본이다. 여포와 조조에 이어 세 번째 주인인 관우를 만난 적토마는 그가 전장에서 산화(散華)하자 네 번째 주인인 오나라 장수 마충을 거부하고 기꺼이 관우의 저승길을 따랐다.

짐승도 저런데 하물며 사람은 어떤가? 조선 후기 국왕을 보위하던 군대 ‘장용영(壯勇營)’. 정조대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최정예 무사들을 규합, 이 군영을 조직했다.

선군이었던 정조가 황망히 서거한 지 214년이 흘렀지만, 장용영의 후예들은 여전히 수원 화성행궁에서 그를 지키고 있다. 주군의 혼을 지키는 무예인, 바로 ‘무예 24기 시범단’이다. 수원문화재단의 협조를 얻어 일일 단원으로 참여했던 지난달 17일은 나도 장용영의 무사였다.

■팔달산 정기 받은 무림의 고수들

이날 오전 9시, 구름 낀 하늘 아래 화성행궁 신풍루 앞 광장은 한산했다. 산들바람을 가르며 북군영을 찾았다. 장용영의 최정예 무사들로 구성된 외영(外營) 병력이 숙직했던 이곳에는 단원들이 둥글게 서서 몸을 풀고 있었다. 아마 수련을 시작한 듯했다. 벙벙한 흰색 민복을 입은 장정이 둘러선 모습은 사극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때마침 찾아온 수원문화재단 관광공연팀 직원 엄주용씨의 안내로 통성명 기회가 주어졌다. 사나이들 앞에서 주눅이 들 순 없었다. 더욱 힘차게 자신을 소개했다. “오늘 일일 단원으로 함께할 경기일보 박·성·훈입니다. 무예 24기 시범단으로 함께할 수 있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말을 맺고는 찬찬히 단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무림의 고수를 연상케 하는 풍채를 지녔다.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한 피부에 부리부리한 눈빛의 송승민 사범(34)과 눈이 마주쳤다. 영락없는 조선시대 장수의 모습이 나를 압도했다.

이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풀던 배국진 사범(44)은 머리와 수염을 기른 모습이 마치 도인을 연상케 했다. 치렁치렁한 장발을 휘날리는 ‘검객’ 최형국 사범(38)은 왕의 곁을 지키는 호위 무사와 같은 인상이었다.

■청룡언월도 휘두르던 관운장을 따라

나는 송 사범과 수련을 시작했다. 민복으로 부랴부랴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와 오주일씨(26), 오성영씨(25), 조재현씨(27) 등 3명의 신입단원과 함께 섰다. 나와 신입 3인방은 한 손에 월도(곤봉에 초승달을 닮은 날을 단 무기)를 든 채 정립한 후 서로 인사를 나누고서 훈련을 시작했다.

송 사범이 “신월상천(新月上天)”하고 외치자 단원들은 이를 복창하고서 앞으로 나아가 오른 주먹으로 앞을 한번 치고 한걸음 뛰어 뒤를 돌아보며 월도를 휘둘렀다. 이어 송 사범이 “맹호장조(猛虎張爪)” 하고 외치자 월도를 휘두르며 오른편으로 세 번 돌아 물러나 제자리에 이르렀다. 모든 동작이 무술 훈련 교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나온 그대로였다.

단원들의 능숙한 동작으로 18개의 동작이 이어졌지만, 송 사범의 눈에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송 사범은 각 동작이 완료될 때마다 자세를 잡아주는 일을 반복했다.

옆에서 비슷하게 흉내 내기도 버거워하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송 사범은 나를 열외해 오성영 단원의 손에 맡겼다. 과제는 ‘오관참장(五關斬將)’이었다.

일시적으로 조조에게 몸을 맡겼던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가고자 적장 6명을 베고 5개 관문을 돌파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이 동작은 오른편을 돌려치고 쓸어서 왼편을 한번 치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서 앞을 향해 월도를 힘있게 내리치면 마무리된다.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천하를 호령하던 관운장의 기개를 내가 십 분의 일이라도 흉내 낼 수 있을까? 어릴 적 그 흔한 태권도 한번 배워보지 못한 내가 그 현란한 기교를 쫓아가려니 몸이 굳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보무당당한 등장…무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이윽고 첫 번째 무예24기 공연 준비가 분주히 시작됐다. 단원들이 복장을 갖춰 입고 시범에 필요한 무기와 베기 시연에 사용될 볏단과 대나무 등을 챙겼다. 내게도 조선시대 무관 의상이 주어졌다. 파란 철릭을 떨쳐입고 머리에 상투와 붉은색 머리띠를 두르니 진짜 무관이 된 듯했다.

통상 두석린갑주나 두정갑주까지 갖춰 입어야 모든 준비가 끝나지만, 혹서 기라서 철릭만 입고 시범에 참여한다고 한다. 송승민 사범은 “지난주까지 갑옷을 입고 시범을 했으니 기자님은 운이 좋은 것”이라면서 “된더위 속에 갑옷까지 입는다면 정말 한증막이 따로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한여름에 갑옷을 입고 전투를 벌이거나 훈련에 나섰을 옛 군인들의 고충이 느껴지는 듯했다.

오전 11시, 본격적인 시범이 시작됐다. 행진을 위해 신풍루를 나서면서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는 장용영의 무사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수십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 무예인의 위용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이었다. 보무당당하게 등장했다가 장내를 한 바퀴 돌고 퇴장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한국 전통무예를 대표하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윽고 무예의 향연이 펼쳐졌다. 활쏘기를 시작으로 맨손으로 적군을 제압하는 권법과 죽장창, 장창 시범이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예도와 쌍검 등 현란한 검법과 1대 1 교전 시연에 관객들은 넋을 잃은 듯 시선을 고정했다.

‘베기 시연’에서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최형국 사범을 비롯한 무사들의 검과 월도가 전광석화처럼 번쩍이자 대나무와 짚단이 산산조각났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연방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감탄하거나 셔터를 눌러대기 바빴다. 공연을 관람하던 미국인 조쉬씨(53·여)는 “한국의 전통무술 시범은 아름다우면서도 강력하다”며 “정조 집권기 조선의 국방력이 동양 어느 나라보다 강인함을 느꼈다”고 감탄했다.

■산악구보에 검술훈련…고된 무예인의 길

장내를 정리하니 점심때가 됐다. 어영부영 식사를 마치고, 오후 1시에 북군영을 다시 찾았다. 때마침 배국진 사범과 오주일, 오성영, 조재현 등 신입 3인방이 몸을 풀고 있었다.

배 사범은 “적당히 소화를 시키셨으면 수련을 시작하자”며 곧바로 솟을대문을 나섰다. 단원들을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팔달산 입구였다.

간단히 몸을 풀고 서장대까지 단숨에 내달리기 시작했다. 평소 운동을 소홀히 한 상태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뜀 걸음으로 오르려니 숨이 차서 몇 걸음도 못 가 퍼지고 말았다.

내가 한없이 뒤처지자 단원들은 산 중턱에서 휴식을 권했다. 배 사범의 독려와 단원들의 응원 속에 한 걸음씩 걷고 뛰다가 마침내 서장대에 올랐다. 탁 트인 시야로 수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자 벅찬 성취감이 느껴졌다. 정조대왕이 군대를 지휘하고 산천을 굽어 살피던 그 자리였다.

배 사범은 “왕이 친히 장용영 군사들을 훈련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며 “외적은 물론 조정 내부에서도 호시탐탐 왕좌를 위협하던 정적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던 데에서 정조대왕의 호연지기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산 후에는 최형국 사범과의 검술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훈련은 검을 들고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고 머리 위에서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며 검을 내리치는 기본적인 검술 동작이었다. 가뜩이나 어설픈 몸짓에 같은 동작을 100번씩 반복하니 팔이 후들거리고 온몸이 쑤셨다. 검객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해 보였다.

■스스로 ‘무예 24기’가 돼가는 단원들

오후 공연을 준비하고자 김도윤 단원(30·한국전통마상무예학교 강사)과 관사로 이동했다. 수원문화재단 바로 옆에 자리한 기와집이었다. 마당 한편에 놓인 큼직한 플라스틱 통에는 베기 시범용 볏짚이 물에 잠겨 있었다. 그와 함께 손수레로 볏짚을 옮기면서 짧은 대화를 나눴다.

쳇바퀴 구르듯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지 않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단순했다. “어차피 좋아서 시작한 일”이란 것이다. 볏짚과 대나무를 준비하고 무기를 나르는 단순 반복 작업이지만, 전통 무예를 계승하려면 이마저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오후 시연에는 오전보다 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고 포토타임이 진행되자 외국인 관광객들은 전통 의상을 입은 시범단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수원에서의 추억을 만들어갔다. 그야말로 무예를 통한 국위선양의 현장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최형국 사범을 만났다. 지난 십여년간 무예24기를 연구해온 그는 “우리나라의 전통무예를 더 깊이 연구하고 계승할 수 있는 전수관 설립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에 달리해줄 말은 없었다. “무예인으로서 앞으로도 자리를 지켜달라”는 말 밖에는. 21명의 단원들은 온몸을 던져 역사를 보존하고 있었고, 스스로 역사가 돼가고 있었다.

박성훈기자 psho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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