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 휩쓴 잿더미 속에서… ‘그 날’을 밝혀내다
사회부 기자라면 화재 현장 기사를 쓰면서 머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손이 먼저 타이핑하고 있을 법한 문장이다.
기사를 쓰는 기자들 뿐 아니라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이 문장은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기사 말미에 붙는 당연한 수식어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기자가 일일체험을 가는 날이 아니었다면, ‘종이상자 공장에서 불 났다더라’는 말을 듣고 현장을 취재하러 다녀왔다면, 어김없이 저 문장으로 끝맺음 하는 기사를 썼으리라.
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수원소방서 화재조사분석팀과 함께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하러 직접 나가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더욱이 운이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화재 피해가 커 소방서 자체조사가 아닌 광역화재조사를 나가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원단 창고동에서 난 불은 건물 5동을 모두 태우고 1억5천여만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 ‘종이 공장이다보니 삽시간에 불이 번졌겠구나, 담뱃불일까 누전일까’ 골똘히 생각하며 화재조사 분석팀 사무실로 들어서니 송재용 팀장과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재 현장을 조사하러 나가기 위해 기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요, 화성에서 난 화재 현장조사를 왜 수원소방서에서 가요?” 기자의 우문에 박영문 소방장(45)과 이병익 소방위(47)가 웃음을 짓는다.
경기도 소방은 도내 31개 시·군을 4개 권역으로 나눠 수원과 용인, 부천과 의정부 등 권역별 1개의 중심소방서에 화재조사분석과를 두고, 1명 사망·2명 부상 이상의 인명 피해가 있거나 1천만원 이상의 재산 피해가 발생한 화재, 화재 원인을 규명하기 어렵고 정밀 감식이 필요한 화재에 대해 출동해 조사를 벌인다.
화재가 발생하면 일반 소방서가 현장 출동해 기초 조사를 한 후 자체조사를 벌이거나 광역조사가 필요할 경우 중심소방서에 화재 감식 요청을 하면 중심소방서 내 화재 조사팀이 직접 현장에 나가 화재 감식을 하는 것이다.
사그라들지 않은 불씨를 끄기 위해 소방차량들이 바삐 드나드는 공장에서 우선 현장 관계자들의 진술을 듣기로 했다. 화재를 최초 목격한 직원과 전기·위험물 관리자, 화재 현장에서 초기 대응을 했던 과장 한명이 화재조사관들과 함께 사무실에 모였다.
사고 전 마지막으로 현장을 나온 사람은 누구인지, 발화 건물에 설치된 기계와 전기 시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평소 전기적인 문제는 없었는지, CCTV와 흡연실의 위치는 어디인지, 현장에 소방시설은 어떻게 설치돼 있는지 등 현장 상황 전반에 대한 세세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현장 평면도와 보험 가입현황, 화재발생 전후 상황 등까지 모두 확인하는 등 40여분간의 관계자 진술을 듣고 나니 원단창고 내 전기시설에서 누전이 발생한 것 같다는 추측이 나왔다.
이어 정확한 현장 감식을 위해 방화복을 갖춰입고 불이 난 1공장으로 향했다.
‘엿가락처럼 휜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싶을 정도로 휘어진 철골 구조물들은 내려앉아버렸고 펌프차가 뿌린 물을 머금은 타다 남은 시커먼 종이박스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소방화가 푹푹 빠질 정도로 질척댔다. 무엇보다 매캐한 화재 현장의 냄새는 마스크를 뚫고 들어와 콧속을 후벼파며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곳곳에서 잔불을 끄고 있는 진화 작업이 계속 되고 있었고 최초 목격자가 불을 발견했다는 곳에서부터 현장을 둘러봤다.
박 소방장이 배선반을 찾아 덮개를 열자 손잡이가 타버려 형태조차 없어진 스위치들이 나왔다. 스위치 방향이 위쪽으로 올라가 있다고 말하며 이어 바닥에 흐트러진 전선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전선 두 개가 엉켜붙어 한 몸이 돼 있는 것을 보고, 두개의 전선이 붙어서 불이 난 것인지, 불이 나서 전선이 붙어버린 것인지를 확인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불이 휩쓸고 지난 자리에서 방화 가능성, 전기·기계적 요인, 가스 누출, 인적 부주의 등 수많은 화재 발생 원인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드넓은 화재 현장 곳곳을 둘러보자니 왜 광역화재조사가 필요한지 그 이유가 절실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문득 재산피해 1천만원 이상 화재 현장을 모두 조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소방 공무원은 인력 부족이 가장 큰 문제에요. 화재조사분석팀도 2명씩 3교대로 일하고 있지만 업무가 상당히 많은 편이죠.”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 불이 꺼지면 소방의 일이 끝나는 줄 알았던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화재 현장을 취재하거나 화재 사건 기사를 쓸 때마다 이날의 기억이 떠오를 것 같다. 수원소방서 화재조사관은 오늘도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김예나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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