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 전통을 잇는 몸짓이여
전력질주한 것도 아닌데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다.
얼굴은 빨개지고 손과 발은 내 몸이 아닌 냥 따로 움직인다.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검은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리는 그 순간, 차분한 음성의 말이 나를 잡는다. “류 기자님, 마음부터 정결히 하세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2일 수원에 자리잡은 무형문화재전수회관 지하 1층.
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승무와 살풀이 춤 예능 보유자인 송악(松岳) 김복련씨의 연습장이자 전수 및 이수 공간이다. 전수회관은 무형 문화재 보존과 발전을 위해 2004년에 설립, 무형 문화재 공연과 전시ㆍ교육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꼭 11년 전 어느 봄날, 이 곳을 홀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문화부 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우리의 춤에 매료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호기(豪氣)로.
하지만 당시 하얀 버선 두어번 신어보고, 손 한 번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채 포기했었다. ‘빨리빨리’가 더 편했던 20대의 나는, 천천히 호흡하며 손끝까지 정신을 집중해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큼 발 내딛는 몸짓에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흐른 시간만큼 당시 실패의 기억은 망각한 채 취재를 핑계로 재도전에 나섰다. 김복련씨를 비롯한 춤꾼들이 보여준 승무와 살풀이의 묘한 끌림을 제대로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뿔싸! 전수회관 연습실에 들어서자 참패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다른 것을 체험해볼껄…’이라는 뒤늦은 후회감도 들었다.
전면에 거울이 부착된 연습실이나 등을 보인 채 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 8호 승무ㆍ살풀이를 추는 신현숙 전수조교의 위엄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승무와 살풀이춤은 고(故) 운학(雲鶴) 이동안 선생이 전수한 화성재인청류의 춤으로, 1991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옥당 정경파 선생에 이어 송악 김복련 선생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화성재인청은 화성에 만들어진 가·무·악(歌舞樂)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예인을 통솔하고 양성했던 곳이다.
여기서 잠깐, 화성재인청을 통해 전승된 승무와 살풀이춤을 알아보자.
경기도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는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이 아니라, 민간연향(民間宴享)에서 무원(舞員)이 흰 장삼을 입고 붉은 띠의 가사를 매고 흰 고깔을 쓰고 추는 춤을 가리킨다. 북놀이과장을 끝내고 고깔과 장삼을 벗어 북에 걸친 후 떠나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대목이 다른 류의 승무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살풀이춤은 흰 수건 두 개로 태극무늬를 그리며 우리나라 특유의 한과 슬픔을 표현한다. 화성재인청류 살풀이춤은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서민무용으로 계승 전파된 춤으로 설명된다.
이처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춤을 추던 중 기자를 본 신현숙 전수조교는 움추린 기자를 한 가운데로 불러 세웠다. 앞서 전화로 승무 살풀이 전수 조교의 하루를 취재하겠다고 약속, 기자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인사를 건네려 다가서자 첫 마디가 “머리는 묶어 올려야겠죠”다.
여부가 있을까. 머리를 하나로 모아 묶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연습실에 있던 10여 명의 여인 모두 긴 치마를 입고 곱게 빗어 넘긴 머리가, 단정 그 자체다. 이들은 10년 이상 승무와 살풀이 등 화성재인청류 춤을 배우고 공연하며 보존하는 전수조교와 이수자 ‘춤꾼’들이다.
맨앞에 서서 춤을 추고 구음을 선창하는 등 연습을 진두지휘하는 신 조교는 김복련 선생의 맏딸이자 승무 살풀이 전수조교다. 현재 박사과정을 밟으며 전통예술의 보전과 대중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는 것은 세대를 거쳐 깊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전수조교로서 이 춤을 올곧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활동하지만,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 지원하는 곳(기관과 정책)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승무와 살풀이가 그러하듯, 그것을 보존 계승하는 전수조교도 익숙한 ‘직업’은 아니다. 그래서 들여다 본 그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연구와 전승이었다.
이날도 오전 10시부터 이수자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쉼없이 승무와 살풀이를 비롯한 화성재인청류 춤과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준 것은 춤 동작도 구음도 아닌, 옷입기였다.
눈인사를 마친 후 신 조교는 흰 버선을 건네고 기자의 몸에 검은 치마를 단단히 묶으며 말했다.
“버선을 신고 속바지를 입고 치마와 저고리를 갖춰 입는 것, 단정하게 하는 것이 춤의 첫 번째에요. 자신의 정신세계로 빠지는 길을 내는 거죠. 그래야 정신세계를 마음껏 몸으로 표출할 수 있어요. 자, 이제 여기에 서서 따라해보세요.”
이내 등돌리고 선 신 조교는 이수자들과 함께 동작을 따라해보라고 지시했다.
“하~아나, 두~울, 세~엣, 네~엣’을 천천히 내뱉으며 버선발 끝을 내밀고 양손에 쥔 흰 수건을 한 번에 축 늘어뜨렸다가 다시 휙 등 뒤로 넘기는 등 몸짓 하나하나를 숨죽이고 따라갔다. 분명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데 호흡은 가빠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숨 소리를 들었는 지, 옆에서 춤 추던 김영자(54) 이수자가 “화성재인청춤은 다른 춤보다 훨씬 느려서 마음 급하게 먹으면 못해요. 천천히 하나하나 밟아야만 할 수 있죠”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바를 정(正)자로 살아야…, 바르지 않으면 춤을 출 수 없다”는 깨달음을 덧붙였다.
수 차례 반복한 후 신 조교가 직접 구령을 붙이며 다른 이수자들을 이끌어보라고 했다. “아니 제가, 벌써, 어떻게!”라는 외침은 소용없이 연습실 맨 앞 중앙에 서게 됐다. 떨리는 마음으로 구령을 외치며 손을 뻗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고, 다행히 끝은 찾아왔다.
수 십 년 세월의 무게를 딛고 선 그 발짓을, 측량할 수 없는 깨달음을 담고 펼쳐선 그 손짓을, 하늘과 땅의 한 가운데에서 고르고 고른 호흡을. 단 하루, 단 몇시간만에 흉내내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다.
한겨울 날씨에도 금세 식은땀인지 진땀인지 모를 땀이 흘렀고, 여전히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예리한 버선발의 가벼운 놀림과 손에서 멀어진 수건의 마지막 떨림까지, 김복련 선생과 전통춤을 전승하는 이들의 몸짓 하나하나의 위대함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기억력이 제법”이라며 제대로 배우는 걸 권유하는 김근희(45) 이수자를 비롯해 ‘신참’에게 후한 ‘고참’들 덕에 힘을 냈다.
이어 좀 숨 돌릴까 싶었는데, 모두 장구와 북채를 챙기고 둥글게 모여 앉았다. 이어 구음 “덩 쿵 따, 덩 쿵따, 덩쿵따 덩덩~”을 외치며 장구를 쳤다.
“지금 여러분이 치는 장단은 춤추는 박자에요. 그러니까 춤을 추듯 장구를 쳐야 하는거죠. 다시 해봅시다!”
장구 장단에 춤을 추는 신 조교의 ‘노하우 대방출’에 이수자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장구를 다시 쳤다.
역시 “제대로 체험해보라”며 구음을 선창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목소리를 높였고, 어찌어찌 또 끝을 냈다.
숨을 돌리려는 찰나, 신 조교는 “‘옳~지!’라고 마무리해야죠.”라고 웃으며 다그쳤다. 단 두 음절이지만 배우는 사람의 사기를 높이고 배운 것을 정리하는 수단이라는 설명이다.
따끔하게 기자를 가르치는 신 전수조교에게 목표를 물었다. 그는 “전통예술 분야 전문 기획자가 되어 경기도의 무형문화재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답했다.
21세기의 승무 살풀이 춤 전수조교는 춤꾼, 연구가, 선생, 기획자 등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과거 예인도 그러했으리라.
이처럼 오랜 역사 속 민족의 숨결을 오롯이 간직한 춤과 그것을 전승 보존하는 전수조교의 삶을 단 하루에 맛보기란 역시 불가능이었다.
결국 11년 기자의 ‘승무 살풀이 배우기’는 또 다시 실패했다. 하지만 김복련 선생과 신 조교를 비롯한 전수ㆍ이수자들이 그리는 미래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수천 수만번의 몸짓과 흘린 땀, 그 노력에 배신은 없을테니 말이다.
류설아 기자
사진=추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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