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책은 내 운명
매년 한 해를 시작할 때면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을 가슴에 새긴다.
2015년이 시작되던 지난 1월1일 새벽에는 ‘책 100권 읽기’를 수첩에 적었다.
계획대로 1월에는 책 몇 권을 읽었다. 작심삼일이라 했던가. 책을 손에 쥐는 시간은 점차 줄었다.
봄이 시작되는 3월이 되니 연초에 세웠던 계획이 다시 머릿속에 맴돈다. 책 만드는 노력을 몸으로 느껴보면 다시 책장이 손에 잡힐까 싶어 얼마 전 알게 된 출판사 ‘책문’의 이호준 주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지난 6일 오전 9시, “책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 느끼게 해주겠다”던 이 주간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파주출판도시를 찾았다. 평일이긴 했지만 거리는 지나치게 한산했다. 책을 읽는 인구가 줄어든 탓인지 출판 현장 분위기도 침체된 듯했다.
출판사 앞에 마중나온 이 주간은 회의 중이었다며 다짜고짜 회의실로 이끌었다. 이날은 어떤 내용의 책을 만들지 정하는 1차 기획회의가 열렸다. 함께 자리한 팀원들은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어 나가면서 준비한 자료들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처음에는 웃음도 나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서서히 바뀌었다. 회의의 핵심인 ‘어떤 책을 만들어야 사람들이 많이 볼까’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테이블은 사회ㆍ경제ㆍ문화 등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한 각종 자료로 넘쳤다. 팀원들의 목소리도 점차 높아졌다. 웃음기는 사라졌고, 날 선 대화와 높은 언성으로 가득했다.
어지러워진 테이블까지 더해지니 현장은 순식간에 전쟁터 분위기로 변했다. 책을 만들기 위한 출발선에 서는 회의였지만 몸 풀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좋은 책을 독자에게 많이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작부터 치열하게 온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줬다.
이 자리에서 어떤 내용의 책을 만들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회의에서 나온 몇 가지 제안에 대한 자료와 시장 조사를 바탕으로 몇 차례 회의를 더거친 뒤 아이템이 결정된다.
기획 회의에서 나온 아이템을 가장 잘 쓸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하는 일도 추후 진행된다. 떠오르는 인물을 추천하고, 그가 쓴 논문이나 책들을 살피는 과정을 거친 뒤 저자를 정한다. 확정된 저자는 본격 집필에 들어가게 된다. 물론 이 과정도 전쟁 같은 회의를 여러 차례 거친다.
2시간 남짓 진행된 회의를 거치고나니 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주간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어느새 분위기가 이렇게 달아올라요. 시작할 때 방향을 잘 잡아야 나중에 진행이 잘 되거든요. 뭐든지 시작이 중요해요”라고 설명했다.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정신을 붙잡지 못하고 있는데 이 주간은 다른 곳으로 날 이끌었다. 이번에는 마케팅 회의.
기획회의와 시장조사를 통해 만들 책의 방향과 저자가 정해지면 진행되는 단계다. 여기서는 현재 경쟁 상품은 뭔지, 시장동향은 어떤지 등을 살피며 어떤 전략으로 책을 판매할지를 고민한다. 수익과 연결되는 부분이라 회의는 더 치열했다.
신선하면서도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나오면 박수를 치지만, 무난한 의견을 내는 팀원에게는 강한 질책이 쏟아졌다. 멍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주간이 옆에 와 “책 하나 만들려면 기획, 마케팅, 디자인 등 회의가 끊임없이 이어져요.
회의하다가 끝나는 느낌일 정도로 책 만드는 과정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해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치열해질 수밖에 없죠”라고 귀띔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 때쯤 이 주간과 함께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바로 디자인 회의실. 책의 방향과 저자를 결정하고, 수차례 기획, 마케팅 회의를 진행하다보면 저자가 집필을 마치고 원고를 보내오는 시점이 된다. 그러면 저자에게 받은 샘플 원고를 검토하는 ‘윤문’ 작업에 들어가고, 이 작업까지 마치면 책 디자인 회의가 시작된다.
책의 내용을 가장 잘 담아내고,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디자인을 선택하는 작업도 상당히 고되다. 미리 의뢰한 디자인 시안 몇 가지를 놓고 의견을 주고 받는다. 비슷한 디자인의 성공 사례, 그동안의 경험 등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결정한다. 이 디자인 회의도 당연히 여러 차례 진행된다.
동시에 교정ㆍ교열 작업도 시작된다. 저자에게 받은 원고를 눈이 빠지도록 보고, 오타를 찾아내야 한다. 이 과정 역시 서너 차례 반복된다. 책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는 고칠 수가 없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다. 이미지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외부 사진을 써야 하는 경우 사용 허가를 받아야 한다. 대체로 사용 허락을 해주지만 허용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미리 대신할 사진을 찾아두는 것도 업무의 일부다. 그렇게 네 시간 가까이 회의에만 끌려다녔다.
이 주간은 이어 인쇄소 소부실로 이끌었다. 소부는 인쇄에 들어가기 전 필름에 색을 입히는 과정이다. 인쇄 전 배치가 삐뚤지 않은지, 위치는 잘 맞는지 등 최종확인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필름으로 책을 만들게 된다. 소부와 인쇄는 주로 외주업체에 맡기지만 출판사에서도 종종 방문한다. 문제가 없는지 잘 진행되는지 체크하는 것도 책 만드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큰 기계 앞에서 직접 필름도 만져보고, 잉크가 찍히는 전 과정을 지켜봤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다 본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체험’만 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한 권의 책 속에 담기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됐지만 파주출판도시의 거리는 여전히 한산했다. 이호준 주간에게 출판 시장이 침체돼서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이 주간은 “이렇게 된 건 출판계가 그동안 독자들의 바람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독자들의 관심사는 계속 변하는데 출판계는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거든요. 그래도 최근에는 독자들이 어떤 책을 보고 싶어하는지,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어요.
물론 늦었지만 계속 노력하다 보면 다시 좋아지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다. 나 역시 그랬으면 한다. 한산한 파주출판도시의 거리가 치열하게 고민하는 직원들로 가득한 건물 속 사무실처럼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날도 다시 오지 않을까.
신지원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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