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영근 農心 ‘주렁주렁’
어린시절 부모님은 수박, 참외, 무, 배추를 기르고 벼농사도 지었다.
어머니는 연로한 지금도 적은 양이지만 집에서 먹을 고추와 상추, 옥수수 등은 텃밭에서 직접 키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농사가 낯설지 않은 것은 부모님의 추억이 서려서이다. 그런데 메르스 여파로 전국 각지의 각종 행사가 취소되거나 연기돼 광주시도 13년만에 처음으로 시의 대표 축제인 퇴촌토마토 축제를 취소했다.
행사규모를 줄여 진행하려던 광주시에 ‘퇴촌토마토축제추진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취소결정을 전달했다.
퇴촌면에서 토마토를 재배하는 100여 농가들은 일정부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행사장을 찾는 손님에게 피해를 줄 수 없어 취소를 결정했다.
일일체험을 앞둔 기자에게 아련한 옛 추억을 돌아보고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농민들의 마음이 짠해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일일 농부로 분했다.
■ 그림같은 토마토 재배하우스 감상도 잠시… 작업 시작!
시 공보담당관실의 협조로 퇴촌면 정지리의 한 농가를 찾은 것이 지난 15일. “토마토 수확 작업은 이른 새벽시간에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일찌감치 집을 나서 새벽 5시께 퇴촌면 정지리 안영근(76)할아버지의 하우스에 도착했다.
40여 년째 토마토를 재배하고 계시는 안 할아버지는 현재 생존해 계시는 분 중에서는 가장 오랜 시간 토마토 농사를 짓고 있다. 하우스는 길이만 140m에 달한다. 높이는 적어도 3m여 이상은 됨직하다.
넓이는 15m에 가깝다. 이 지역에 있는 하우스 중에서는 가장 길이가 길고 전국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길게 뻗은 10여개의 고랑마다 2m가량 자란 토마토 나무가 빽빽하다. 종류도 다양하다. 흔히 보는 일반 토마토부터 방울 토마토와 찰토마토, 알록달록 대추토마토까지 빼곡하다.
토마토 나무 위로는 어른 팔뚝 굵기의 기다란 고무호수가 하우스 끝까지 연결돼 있다. 입구에 설치돼 있는 물탱크에서 연결돼 물을 주거나 영양제를 주입할 때 사용한다.
■ 부족한 일손 탓, 출하 놓쳐 상한 토마토 곳곳에…
할아버지에게 “무엇부터 하면 돼요”라고 묻자 다짜고짜 한 켠에 놓인 채과가위(가지나 오이 등 과일을 딸대 사용하는 가위)를 들고 따라 오라며 외발 손수레에 소쿠리를 싣고 1m 남짓한 넓이의 고랑 사이로 성큼성큼 앞장섰다.
하우스 끝에서 할아버지와 손수레를 사이에 두고 마주섰다. 토마토를 따는 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토마토끼리 부딪혔을 때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꼭지를 바짝 잘라내는 것이 포인트다. 소쿠리 한 개에 약 30㎏~50㎏의 토마토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한개 두개 붉은색 위주로 토마토를 따보니 상한 토마토가 제법 눈에 띈다. 출하 시기를 놓쳐 농익다 못해 상한 것이다. 농익기 전에 출하를 해야 상품성이 높아지는 것인데 70세 노인 두 분이 농사를 짓다 보니 일손이 부족한 탓에 출하를 놓친 것이다. 이렇게 상한 토마토는 바닥으로 떨어지며 자연스럽게 퇴비로 활용된다.
■ 40℃ 하우스 열기가 대수냐? 토마토 따기 ‘불굴의 열정’
따온 토마토를 원두막에 내려 놓고 조금이라도 더 따드리고 싶은 마음에 다시 한번 하우스로 향했다. 하우스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8시를 넘기고 있다. 토마토는 새벽 4시부터 따기 시작해 8시이전에 작업을 마친다고 한다. 새벽시간에 따야 선도가 좋고 보존기간도 길어진다.
무엇보다 8시가 넘으면 뜨거워서 작업이 쉽지 않다. 한낮에는 하우스 실내온도가 40~50℃이상 오르기 때문이다.
이어 할아버지의 경운기를 타고 원두막으로 이동하자 할머니 한 분이 미리 따다 놓은 토마토를 원두막 바닥에 펼쳐 놓고 선별작업이 크기와 상태별로 이뤄지고 있었다. 선별을 거쳐 상태가 좋은 토마토는 바로 박스에 담아 현장에서 판매한다.
필요에 따라 직접 배달을 하거나 택배를 이용하기도 한다. 농익었거나 상처가 난 토마토는 주스용으로 판매하거나 즙으로 만들어 보관해 뒀다가 추석을 즈음해서 선물용으로 판매하고, 막걸리용으로도 납품한다. 한 소쿠리를 채우고 나자 욕심이 생겨 손수레에 두 개의 소쿠리를 얹고 작업에 들어갔다. 처음보다는 속도도 붙었다.
숙였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허리가 뻐근해질 때쯤 소쿠리 5개가 채워졌다. 상품으로 치면 5㎏짜리 토마토 30박스는 딴 셈.
■ 할아버지 따뜻한 인사말에 오늘 하루 피로가 ‘훌훌’
한 소쿠리를 채우기도 전에 땀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세 번째 소쿠리를 채울때쯤에는 등줄기가 축축해지며 땀이 비오듯이 흘러 내렸다. 가져온 다섯개의 소쿠리를 다 채우고 원두막으로 운반했다.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는 나를 향해 할아버지는 “언제든지 토마토가 먹고 싶으면 들러라”는 인사를 잊지 않으신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창일 퇴촌면장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판매 현황을 듣고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행사가 취소되며 농민들은 기존 5㎏ 1박스에 1만5천 원 하던 토마토를 1만2천 원에 판매를 하고 있다. 시는 관내 학교와 기관단체는 물론 기업체와 인접 시군에도 협조 공문을 발송했다. 덕분인지 하루 1천박스에서 1천5백박스의 주문이 일주일 내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퇴촌면은 전 직원을 동원해 농가에서 배달하지 못하는 지역으로는 직접 배달을 돕는 등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나가고 있다.
운전을 하며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자꾸만 졸음이 몰려 왔다. 마음 한편으로 마무리 작업까지 돕지 못하고 온 게 내심 걸리기는 했지만 오길 잘했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기회를 봐서 퇴촌토마토 묘목을 사다가 아이들과 함께 심어 봐야겠다.
광주=한상훈기자
사진=추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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