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현장체험] 도예가

‘알파고’도 할 수 없는 흙·불·예술혼 결정체 물레여, 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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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상 명장과 함께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린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연승을 이어가던 당시,

‘인간’인 기자의 머릿속에는 불안이 자리잡았다. 언젠가 맞춤법이나 문맥을 틀리지 않고 기사를 쓰는 ‘인공지능 기자’가 개발되는 것은 시간문제고, 이제 막 생애를 시작한 아들녀석이 기계와 경쟁해야 하는 미래는 참혹하게만 그려졌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예술’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남아 있다. 지식과 계산이 아닌 지혜와 미의 영역에서 수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도자기가 그 증거다. 

도예가가 수십년간 매일 흙과 도료, 안료를 만지고 불을 조절해 마침내 완성된 결정체(도자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광주시 초월읍에 위치한 도평요(島坪窯). 도예가로 하루를 체험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도착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곳곳에 대형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30분이나 늦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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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일일체험에 나선 이지현기자가 광주시 초월읍 도평요 조선백자연구소에서 소민 한일상 명장의 안료도색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광주시 도예명장으로 이름난 소민(小民) 한일상(韓日相) 작가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해 놓고 흙 한번 만져보지 않은 초보 제자의 결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명장’이라는 타이틀의 위압감에 바짝 긴장한채 허둥지둥 인사를 드렸는데 다행히 스승의 표정은 온화했다.

홀로 작업장에 앉아 채색작업을 하던 한 명장은 흙부터 보여줬다. 잘 다져진 흙은 대형 가래떡 모양으로 파레트 위에 얹혀져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피는 크지 않았지만 1천200㎏에 육박하는 무게라고 한다.

“옛날에는 흙을 물에 개서 가라 앉히고, 걸러서 다시 볕에 말려 다른 재료랑 섞고 발로 밟아 공기를 빼는 과정을 일일이 하면서 배웠는데 요즘은 분업화가 됐어요. 도료와 안료도 전문화돼서 작가의 작업은 편해진 셈이죠.”

서둘러 작업장에 들어서자 선배(?)들이 온화한 표정으로 흙을 빚고 있었다. 이들 중 한 남성이 물레를 돌리자 위에 얹힌 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흙 덩어리가 접시가 되더니 순식간에 밥그릇으로 바뀌고 금세 호리병으로 둔갑했다. 

진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술쇼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지휘를 하듯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던 그는 한 명장의 대를 이어 도예가의 길을 걷고 있는 한우람 작가였다. 그의 손짓을 보고 ‘나도 오늘 호리병 하나는 만들 수 있겠군’ 하고 생각했다.

이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와장창’ 깨지는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살살 밟으라는 주의사항을 들은 뒤 물레에 발을 얹어 흙을 잡는 순간, 흙이 덩어리채 날아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아뿔싸. 조금이라도 화사해 보이고 싶어 입고 나온 하얀 바지 위로 흙물과 흙덩어리가 잔뜩 튀어 버렸다. 바지를 버린것은 둘째치고 자존심이 쉬이 회복되지 않았다. 

발을 신경쓰면 손이, 손을 신경쓰면 발이 제멋대로 움직여 흙은 막춤을 추며 뒤틀리기 일쑤였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유명한 물레장면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결론 내릴 즈음 한 명장이 용기를 줬다. “원래 센터 잡는 것(흙 중심 세우기)을 제대로 하려면 몇개월 걸립니다.”

43년 전 도자기를 처음 시작한 한 명장은 발로차서 물레를 돌리며 손 끝의 느낌으로 두께까지 알 정도로 도자기를 빚었다고 설명했다. 페달을 밟기만 하면 저절로 돌아가는 물레로도 접시 하나 만들지 못하는 것은 소질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의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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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상 명장의 도움을 받아 조선백자를 빚고 있다.
결국 센터는 한 작가가 잡아주고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열 손가락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손날까지 힘을 조절해야 겨우겨우 그릇 비슷한 모양이 나왔지만, 호리병은 커녕 제대로 된 접시 하나를 만들지 못했다. 한시간 가까이 성형만 배우며 날려버린 흙값이 걱정될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찰흙처럼 만지는 흙이 나에게만은 유독 쇳덩어리 같아서 힘이 들어간 어깨도 뻐근해 손은 더욱 마음과 다르게 움직였다. 한 명장은 다행히 흙은 다시 활용할 수 있다고 했고, 불행히 내일이면 어깨가 아플거라고 예상했다. 성형 작업이 끝나면 열선이 깔린 테이블에서 바닥을 꾸덕꾸덕하게 말린 도자기는 초벌작업에 들어간다. 

이후 채색까지 한 뒤 다시 유약을 발라 2차로 굽는데 이때는 1천200도 이상의 온도가 가해진다고 한다. 가스식 가마 앞에는 채색까지 마친 도자기들이 도열해 있었다. 한 명장은 2개의 가마 중 하나를 가리키며 “1999년에 작품을 의뢰받아 작업을 하다가 불이 붙었다. 장갑을 끼고 있어서 손을 더 많이 다쳤는데 그 와중에도 작품을 살리려고 애를 썼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어지는 채색작업은 도예가가 정신과 혼을 담는 과정이었다. 1차로 구워진 매끈한 도자기 표면에 섬세한 그림을 그리고 원하는 색감이 나오도록 도료를 혼합해 칠을 하는데, 색깔을 내는 도료의 종류도 많지만 배합 비율과 적정 온도까지 모두 체득해야 한다. 게다가 높은 온도를 견디고 원하는 색감이 나오게 하는 경지는 쉽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한 명장의 작업실에는 채색을 기다리는 커다란 백자들이 가득했다. 소박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세밀한 붓을 든 그는 도자기를 아기처럼 껴안고 색을 입혔다. 원래는 작업대에 올려놓고 채색을 했지만 수십년간 채색 작업을 하다보니 어깨 근육을 다쳤다고 한다. 치료가 필요하지만 수개월간 작업을 못할 게 걱정돼 미루고 있다. 도예가로서 자부심과 작품활동에 대한 갈증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스승의 작업을 지켜보자니 ‘붓을 잡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곡선을 채워나가고 섬세하게 점을 찍어 만든 작품들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한 명장은 붉은색을 내는 진사기법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청화를 그리고 금색 채색을 해 도자기를 3번 굽는 작업을 주로 한다.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은 최근 방한했던 몽골 대통령에게 주는 선물로 전달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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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모양과 기법, 색감이 각각 다른 도자기들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 만으로도 존경심이 생겼다. 1m가 넘는 크기의 작품부터 손바닥 크기의 작품까지 쉬지 않고 활동하는 작가로서 한 명장은 “작품이 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라며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좋은 작가로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도예가로서 이뤄내고 싶은 꿈”이라고 설명했다.

40년이 넘게 도자기를 만들며 높은 명성을 쌓은 한 명장에게서 배우고 느낀 도예가의 삶을 담아내기에 이 지면은 너무나 작다. 

하지만 “하루라도 붓을 잡지 않으면 시간을 버린 것 같아 손해를 보는 기분”이라는 한 명장의 말은 꼭 전달하고 싶다. 누구나 초심을 유지하기는 힘들지만 하루하루 자신의 일에 매진하다보면 처음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는 조언이기 때문이다. 

이지현 기자 

사진=오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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