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현장체험] SK 와이번스 ‘배트보이’

번개처럼 빠르게… 배트를 갖고 뛰어라
‘그라운드 종횡무진’ 넘치는 함성 속 던져진 불방망이 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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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 배트보이 일일체험에 나선 박연선 기자가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야구방망이를 수거하고 있다 .
‘두두두두, 다다다다’ 프로야구 KT 위즈의 선두타자 이대형이 안타를 치고 나갔다. 하지만 그는 바람 소리밖에 나지 않을 만큼 빠르다.

 

이 소리는 이대형의 발소리가 아니라, 방망이를 주우러 나간 배트걸의 뜀박질 소리였다.

 

한 경기에 3안타 이상을 치지 않고선, 이들 배트걸보다 먼 거리를 뛰는 선수는 없다.

 

기자는 10일 KT 위즈와 SK 와이번스의 경기가 있는 인천시 남구 문학경기장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그라운드의 꽃 ‘배트보이(걸)’ 체험을 했다.

 

■ 불볕더위 속 체험 스타트… 그리고 호된(?) 신고식

이날은 올 들어 가장 더운 날이었다. 최고 기온은 33도에 달했고, 경기장을 찾은 양팀 관중의 열기는 뜨거웠다. 

특히 배우 서강준이 시구자로 나와 기자 옆을 지나칠 때는 잠시 맥반석 오징어가 된 듯 굴욕을 겪어야 했다. 만으로 꼬박 서른 번째 맞이한 생일치고는 상당히 혹독한 날이었다. 

여러모로 ‘열’ 받는 상황에서 KT 위즈의 방망이가 첫 회부터 덩달아 불을 뿜었다. 선두타자로 나선 이대형이 우익수 앞 안타로 포문을 열더니 SK 와이번스 선발 박종훈을 신나게 두들겼다. KT는 유한준, 이진영의 안타와 김상현의 홈런 등을 묶어 1회에만 5점을 뽑아냈다.

 

KT 선수들은 자신들의 방망이를 배트걸이 아닌 배트보이가 챙겨주는 것이 마뜩찮았는지, 계속해서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들은 헬멧을 쓰고 앉아있는 것만으로 땀이 줄줄 나는 한여름에 한 회에만 무려 8번의 ‘빠던’을 시전하며 호된 신고식을 선사했다.

 

앞서 말했듯 배트보이(걸)은 그라운드의 꽃으로 불린다. 국내 구단 중에는 SK를 비롯해 6개의 팀이 배트보이가 아닌 배트걸을 운영하며 ‘아재팬’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일부 배트걸은 방망이를 줍거나 공을 건네는 것만으로 기사화가 될 만큼 야구팬들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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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 배트보이 일일체험에 나선 박연선 기자가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야구방망이를 수거하고 있다 .

배트보이는 보통 구단에서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직접 고용해 일급제로 운영한다. 이들은 경기시작 1시간 전쯤 구장 내 별도로 마련된 사무실로 출근, 유니폼과 헬멧 등을 착용하고 경기준비를 시작한다.

 

기자는 SK 와이번스측의 도움을 받았다. 일일사수로 나선 3년차 배트걸 김연희(23) 선배와 2년차 손유미(22) 선배의 지시에 따라 등번호 29번이 새겨진 에이스 김광현의 유니폼을 입고 본격적인 경기준비에 나섰다.

 

오늘의 근무위치는 원정팀 KT의 더그아웃인 3루. 경기장을 확인하러 나서는 심판진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눈 후 의자와 공인구를 챙겨 근무위치로 향했다. 개념 없는 배트보이로 찍히지 않으려고 선배들에게 원정팀 더그아웃에서 주의해야 할 점과 배트 수거 타이밍 등을 교육받고 가벼운 조깅으로 몸을 풀었다.

 

■ 오늘 근무지는 3루… 원정팀 방망이를 책임져라!

배트보이의 역할은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한 업무는 아니다. 그라운드 위를 재빠르게 뛰어다닐 체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주심과 원활히 소통하면서 신속하게 공과 방망이를 나르고 파울 볼도 주워야 하기 때문에 룰에 대한 이해도 필수적이다.

 

자칫 인플레이 상황을 방해하거나 방망이회수를 제때 하지 않는다면 경기의 흐름을 그르칠 가능성도 있는 만큼 선수 이상으로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

 

배트보이는 각 위치에 따라 1루 근무자가 홈팀을, 3루 근무자가 원정팀의 야구방망이를 책임지고 관리한다. 아웃 여부와 상관없이 선수가 공을 치고 타석을 벗어나면 뛰어나갈 준비를 한다. 이후 안타나 아웃이 확정되고 주자의 위치 등 판정이 완료되면 재빠르게 방망이를 회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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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수거해 온 야구방망이를 원정팀 KT위즈의 더그아웃에 정리하고 있다.
1루 근무자는 심판에게 공을 건네주거나 마운드에 로진을 갖다 주는 역할이 추가된다.

배트보이는 담당구역의 팀이 수비에 들어가면 잠시 숨 돌릴 틈을 갖는다. 

근처에 떨어진 파울 볼을 주워두기만 하면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없다. 이날 초반부터 대량실점을 한 SK는 곧바로 이어진 1회 말 공격에서 고메즈, 박정권의 연속안타와 정의윤의 타점으로 2점을 따라잡았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에 손뼉을 칠 뻔 했지만, 원정팀 KT의 더그아웃인 3루에 있었기 때문에 홈팀을 응원하는 감정표현은 할 수가 없다.

 

1회 초 내내 뒤에 앉아 기자를 한껏 부려 먹던 손유미 배트걸은 “상대방 더그아웃에서 우리 팀 잘한다고 함부로 좋아했다가는 무개념 배트보이로 낙인찍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 의외(?)로 체력 소모 큰 배트보이

1회 경기에만 30분 이상의 긴 시간이 지나고 곧이어 2회초 경기가 시작됐다. 그래도 1회부터 스파르타식 경력을 쌓았더니 2회부터는 일이 한결 수월했다. 방망이를 갖고 오는 동선이나 타이밍이 익숙해지면서 점점 프로 배트보이가 돼가는 것 같았다. 

KT 타선도 잠시 힘을 빼며 보조를 맞췄다. 리드오프로 나선 9번 타자 박기혁이 내야땅볼로 물러났고, 이대형은 내야안타로 빠져나갔지만 이어진 전민수의 타석에서 도루 실패로 아웃됐다. 전민수는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나며 2회 초 공격이 싱겁게 끝났다.

여유가 생기자 공수교대가 이뤄지는 2분의 짧은 쉬는 시간 동안 배트보이의 고충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어떤 점이 가장 힘드냐는 기자의 질문에 3루를 같이 맡았던 손유미 배트걸은 “아무래도 지금 같은 여름이 체력소모도 심하고 땀도 많이 나 힘이 든다”며 “특히 비라도 조금 오는 날이면 그라운드가 미끄럽고 옷이 젖어 곤욕”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비가 와서 우천취소가 되면 그날 일당도 같이 취소된다고 하니, 허구연 의원의 ‘기승전돔’식 해설이 새삼 이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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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경기에 나서기 전 배트걸 김연희씨와 함께 가볍게 몸을 풀고 있다.
■ 짧은 체험이었지만 야구 구성원으로서의 하루 ‘짜릿’

양팀의 소득 없이 2회가 끝나고 곧 3회 초 KT의 공격이 시작됐다.

 

오늘 기자가 체험하기로 한 배트보이 역할은 3회까지. 경기에 방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이닝 제한을 받았다. 이때 타석에 나선 KT 유한준 선수가 떠나는 기자가 아쉬웠는지, 좌중간을 가르는 큼지막한 솔로 홈런으로 1점을 추가하며 방망이를 던졌다.

 

기자는 조용히 뛰어나가 방망이를 주워왔고 양팀의 스코어는 6:2, 4점차로 벌어졌다. 이어진 SK의 3회 말 공격이 별 소득 없이 끝나면서 기자의 배트보이 체험 이닝도 함께 종료됐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체험을 시작한 지 벌써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경기시간으로만 따져도 1시간이 넘는 시간이었는데, 왠지 훌쩍 지나간 느낌이다.

 

김연희 배트걸은 “제가 좋아하는 야구경기에 관람자가 아닌 구성원으로서 직접 참여한다는 게 정말 짜릿하고 뿌듯하다”며 “치어리더 등에 비해 주목도는 떨어지지만 그라운드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는 점에서 항상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이어 “시간 가는 걸 모를 만큼 재밌었다니, 9회까지 다 하고 가는 게 어떠냐”고 제의해 기자를 당혹케 했다. 기자는 선수들이 싫어한다는 핑계를 대고 더그아웃을 빠져나왔다.

 

경기는 7:6, 한 점차 박빙으로 끝나고, 관중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기자는 SK행복드림구장을 바라보며 쉽게 떠나지 못했다. 직접 그라운드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던 그 순간의 재미와 긴장감이 잊히지 않아서다.

 

배트걸들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배트걸의 모습을 통해 기자의 모습을 투영해본다. 참 보람이 넘치는, 꼬박 만으로 서른 번째 기자의 생일이었다. 

 

박연선기자

사진=장용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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