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휴가철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여행가방 싸들고 산으로, 계곡으로, 강으로, 바다로 간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피서객들도 많고, 한국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려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상당하다.
올해 상반기동안 비행기를 타고 국내외를 오간 여행객들은 무려 4천980만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수준이다. 이중 인천국제공항을 거쳐 국내외를 오간 여행객들은 2천714만3천718명이다. 하루 평균 15만명 이상이 인천공항을 이용한 것이다.
인천공항은 세계 공항서비스평가(ASQ)에서 11년 연속 1위에 빛나는 대한민국 대표공항이다. 그리고 인천공항에는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고급 정보가 있다. 바로 인천공항에서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다는 사실이다.
■ 공항에서 만나는 한국의 전통 ‘왕가의 산책’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고 인천국제공항공사가 후원하는 ‘왕가의 산책’은 조선시대 궁중생활을 재현한 전통 퍼레이드다. 조선시대 임금과 중전, 공주 등 왕족과 상궁, 나인 등 궁녀, 갑사, 좌통례, 위장, 운검, 의장 등 20~25명이 행렬을 이뤄 산책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2010년부터 인천공항 3층 출국장 면세구역과 4층 한국문화거리 등에서 하루 2~4회가량 진행되고 있다. 2009년 처음 특별행사 형태로 시작했는데 관람객들의 반응이 매우 좋아 2010년부터 정식 프로그램으로 안착했다.
2012년과 2014년 2차례에 걸쳐 전문 자문위원단의 고증과 검증을 받았으며, 영조와 정조시대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선시대 궁중의상과 고품격 행사를 보여주고 있다.
햇수로 7년째 접어든 ‘왕가의 산책’은 벌써 8천회 가량 공연을 펼쳤다. 이제는 명실공히 인천공항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춘앵전 공연이나 국악공연, 궁중행악인 취타대(吹打隊), 전통혼례 신행길놀이, 부채춤 등 다양한 전통문화를 선보였으며, 최근에는 왕족의 산책길 재현에 집중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일반인들에게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일도 있었으나 보안구역인 출국장에서 진행되는 공연인 터라 참여가 쉽지 않아서 지금은 오디션으로 선발된 전문 출연진들 중심으로 공연하고 있다.
기자는 ‘왕가의 산책’을 직접 체험할 그 어려운 기회를 잡아냈다.
■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까다로운 보안의 장벽을 뚫고 ‘왕가의 산책’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27일 오전 10시에 ‘왕가의 산책’ 담당인 한국문화재단 윤세용 매니저와 만날 약속을 했는데 그만 보안통과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미리 출입과 촬영 허가를 받아놓았지만, 중간에 착오가 생겨 30분 가까이 시간을 보내버렸다.
11시30분 본 행사에 앞서 분장도 하고, 연습도 하고, 리허설도 해야 하는데 황금같은 시간 30분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서둘러 보안구역 깊숙한 곳에 있는 ‘왕가의 산책’팀 대기실로 이동, 윤 매니저와 만나 ‘왕가의 산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나인이나 상궁 역할이면 좋겠다고 의사를 전달했었는데 윤 매니저는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면서 중전 역할을 제안했다.
시간은 촉박했지만, 중전의 화려한 의상에 걸맞는 분장이 필요했다. ‘왕가의 산책’ 전속인 김민지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움을 받아 거의 변신에 가까운 분장을 받았다. 가체와 의상은 본래 중전 역할인 승혜진씨(24)의 지원을 받아 완성했다. 동선을 확인하거나 리허설을 할 시간도 없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출연진들과 제대로 인사나누지도 못한 채 중전이 되고 말았다. 파트너인 임금 역할의 황성운씨(24)에게 의지하면서 드디어 산책길(?)에 나섰다. 50분가량 걸리는 퍼레이드에서 중전의 가장 큰 임무는 임금과 보조를 맞춰 걸으면서 관광객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함께 사진을 찍어주는 일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가체는 조금 무겁기도 했고, 계속 웃어야 하는 일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나를 향하는 것 같았고, 쉴 새 없이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일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죽어도 중전은 못하겠다고 버텼을거다.
■미소의 힘을 배우다
임금과 너무 떨어져서 걸으면 임금과 중전의 사이가 나빠 보인다고 하고, 너무 붙으면 걷는 게 불편해서 계속 걸음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비록 중전의 머릿속은 하얗고 눈앞은 캄캄한 상태였지만 여행객들은 ‘왕가의 산책’ 행렬을 열렬하게 맞아줬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으면서 손인사를 나눴다. 비행기 시간에 맞추느라 바쁜 걸음이더라도 행렬과 만나면 가던 길을 멈추거나 되돌아오면서 미소로 인사했다. “꺄악~ 눈이 마주쳤어”라고 환호해주는 어린이들이나 함께 사진을 찍어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전하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속으로 ‘넘어지지만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50분 퍼레이드가 끝났다. 출연진들은 대기실로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만나는 여행객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대기실 입구에서는 ‘하아~’ 한숨소리가 먼저 나왔다. 가체에다 여러겹 한복까지 갖춰 입고 있으니 땡볕에 나가 있었던 것처럼 땀이 흠뻑 났다. 좁은 대기실에서 출연진들이 부대끼며 의상을 갈아입고 왔다갔다 해야 하는 터라 더위에 사람의 열기가 더해져 정말 더웠다. 기자는 단 1번 행사에 참여했을 뿐이지만 출연진들은 오늘 하루 동안 모두 4번의 행사를 해야했다. 진심으로 “수고하셨어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인삿말을 건넸다.
초보 중전 때문에 2배로 더 고생한 임금님 성운씨는 “손인사 하는 모양새가 서툴긴 했지만 끝까지 잘 따라와 주고 웃으면서 인사한 건 잘했다”면서 기자를 다독여줬다. 성운씨는 “여행객들이 행렬을 보면서 여행과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즐거운 추억거리로 간직해줬으면 좋겠다”면서 “출연하면서 우리 문화를 더 잘 알게 돼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소감을 표했다. 기꺼이 기자에게 중전을 양보해준 혜진씨는 “여행객들이 ‘왕가의 산책’ 행렬을 보면서 한복이나 한국문화에 관심을 보이고 기억해주는 게 정말 감사하다”면서 “행렬을 하는 동안은 정말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윤세용 매니저는 “인천공항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공간이다. ‘왕가의 산책’은 작은 문화행사지만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면서 “인천공항에서 행렬을 만나거든 따뜻한 눈길과 손인사로 격려해주시면 매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미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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