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 국민투표는 포퓰리즘 선동… 더 심각한 갈등·분열 초래”
영국의 국민투표를 두고 대의제 민주주의의 실패가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혹평도 나온다. 영국민의 브렉시트 결정은 경제적인 위기에서 비롯됐지만, 국민투표와 정치인의 장밋빛 공약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 장밋빛 공약은 내년 대선을 앞둔 한국사회에서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브렉시트에 담긴 정치적인 구호와 국민투표 과정, 그리고 그 결과가 한국 정치권에 던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윤종빈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47)는 “국민에게 참여정치의 권한을 되돌려주자는 말은 달콤하지만, 독이 든 성배”라며 “정치권의 ‘국민투표 카드’ 남용은 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투표 결과를 놓고 경제적 약자나 소외층의 불만 표출 등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정치학자 입장에서 브렉시트 사태를 어떻게 봤나.
경제적인 문제가 주요 원인으로 꼽히지만, 근본적으로는 유럽 국가와 영국 정치권의 무능함에 대한 영국민의 불만이 표출된 거라고 본다. 유럽연합 내부의 심각한 경제위기와 난민 문제로 경제적 약자들은 일자리와 생계를 위협받았지만, 누구도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정치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국민이 유럽연합 탈퇴라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 거다.
-영국 정치인들에 대한 질타도 이어지고 있다. 정치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국민에게 결정권을 넘겼다는 거다.
맞다. 이번 결과는 간략하게 정치 엘리트들의 포퓰리즘 선동으로 빚어진 정치 실패로 규정할 수 있다. 영국 내부에서 정치인들이 잃어버린 신뢰를 브렉시트라는 구호를 만들어내 정치적인 꼼수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정치 엘리트들의 전략적인 선동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민주주의가 빚어낸 폐해다.
-국민투표는 의회주의를 훼손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많이 치러지고 있지 않나. 이번 브렉시트 국민투표 역시 정치인이라는 대리인이 아닌 국민이 직접 결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어 보인다.
국민투표율은 70%였고, 이 가운데 찬성이 52%였다. 국민 전체를 놓고 보면 실제로는 찬성률이 36%에 불과한 거다. 더 큰 문제는 국민투표가 합리적인 집단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공포와 적대감을 만들어낸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전략적 승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우선,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브렉시트는 영국 내부에서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대의 기능을 하면서 여러 객관적인 검증과 논의를 해야 했지만, 이 과정이 모두 생략됐다. 영국의 정치인들은 왜 유럽연합 탈퇴를 놓고 국민투표가 필요한지, 또 필요하다면 유럽연합과 관련된 객관적인 자료와 찬반 입장을 들어 논의 할 충분한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이러한 숙의과정이 모조리 생략된 채 즉흥적인 선동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의제 정치의 실패, 이로 말미암은 직접 민주주의의 실패로 규정된다.
-한국에서도 국회나 정치권에서 제 역할을 못할 때마다 차라리 국민이 투표로 결정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물론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국회 안에서 건강한 논의를 통해 생산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우리는 정당, 선거, 의회제도라는 좋은 제도적인 장치가 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국민의 요구에 반응하지 못할 때 국민들의 분노가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목소리로 나오는 거다.
-국민뿐만 아니라 정치인들 역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 국민투표 카드를 꺼내 든다. 최근 사드 배치 문제를 두고도 안철수 의원이 국민투표를 거론하지 않았나.
중요한 지적이다. 정치권에서 국민투표를 남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정치인의 책임 회피다. 정치인이 쟁점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입장 및 대안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것은 선동적 포퓰리즘일 뿐이다.
대안을 찾지 못하고, 국민에게 선택권과 책임을 넘기는 행위다. 국민에게 참여정치의 권한을 되돌려주자는 말은 달콤하지만, 독이 든 성배다. 특히 한국은 교섭단체인 정당이 국회를 운영하는 셈이기에 국회에 앞서 정당이 본연의 기능을 회복해야 국민의 분노와 갈등을 사전에 치유할 수 있다. 국민투표 남용은 또 다른, 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국민투표가 직접민주주의로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가.
사안의 경중에 따라 절차적인 민주성이 보완돼야 한다. 국민투표를 하기 전, 시행 여부를 묻는 사전 국민투표를 진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대의제에서 선거는 유권자의 생각을 정치권에 전달하는 공식적인 채널이다. 규범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유권자들이 선거에 참여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또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선거 제도 등을 개편하는 것도 중요하다.
-영국 정치인들은 국민투표에 앞서 브렉시트와 관련해 장밋빛 공약을 남발했다. 내년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와 정치권이 브렉시트 사태를 통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한국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행정수도 이전이나 4대강 사업, 신공항 건설 등의 대형 국책사업 공약이 난무했다. 터무니없는 공약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실익이 없음에도 당선된 이후 이를 강행하는 거다. 당선 후 공약을 이행하는 것보다 불이행이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무조건 이행하지 못하도록 규제해야 한다.
영국 캐머런 전 총리도 지난해 치러진 5월 총선에서 재집권 공약으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내걸었고, 이를 강행했다. 실익이 없는 공약 이행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따라서, 대형국책 사업에 대한 공약은 별도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 정치인들도 감당하지 못할 공약은 자제하고 언론이나 학회 등에서도 타당성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기까지 많은 절차가 남아있다. 영국 사회가 맞닥뜨린 가장 큰 위기는 뭐라고 보는가.
유럽연합 탈퇴 협상과정에서 영국은 국민투표 이전보다 더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게 될 거다. 현재 영국 내부의 정치 지도자, 정당, 의회 모두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지 않나. 의원내각제와 민주주의의 첨병으로 불린 영국 정치권이지만, 유럽연합 탈퇴 이후에 국가 청사진과 비전을 제시할 준비와 능력이 전혀 없었다.
경제적인 불안 등 여러 위기 요인이 있겠지만, 지금 영국 사회가 맞닥뜨린 가장 큰 위기는 ‘웨스트민스터(West minster)’로 불리는 의원내각제 민주주의 모델의 위기다.
-브렉시트 사태는 정치와 선거, 민주주의 등 폭넓은 질문을 세계에 던졌다. 학계에서도 많은 고민과 논의가 있겠다.
정치적인 선동에 휘둘릴 수 있는 다수결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성장주의와 분배주의가 모두 그 결함을 드러내자 경제학에서 성장모델과 분배모델을 결합한 ‘공유경제’ 개념이 나타나지 않았나. 정치학에서도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결합하는 새로운 모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깊어질 거라고 본다.
윤종빈 교수는…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권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는 현실 참여형 학자로 유명하다. 현재 미래정치연구소장, 한국정당학회 부회장, 한국정치학회 이사, 한국의회발전연구회 상임이사, 국회입법조사처 조사분석위원 등을 지내며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정자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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