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바람… 염부의 땀방울 코 끝 짠맛, 보석이 빛난다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살폈다. 옅은 안개가 껴서 그런지 하늘이 흐렸다. 걱정이 들었다.
이날 기자는 일일체험으로 염전을 가기로 했었다. 며칠 전 취재차 염전을 다녀온 동료 기자들은 “날이 흐리면 염전 작업을 하지 않더라”고 귀띔했다.
‘계획이 틀어지면 어쩌나’하는 마음에 염전으로 전화를 했다. 걱정 말고 오후에 오란다. 이게 이날 하루의 시작이었다.
■ 기대 반 두려움 반… 염전 가는 길
기자가 일일체험을 할 장소는 화성시 서신면 매화리에 있는 ‘공생염전’이었다. 다행히 염전을 향해 달리는 도로 위로 햇볕이 내리쬔다. 헛걸음을 하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사무실에서 50분가량 달리니 포도밭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내륙지방에서 재배되던 포도는 요즘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는 갯벌 옆 저지대에서 재배된다고 들었다. 아니라 다를까. 차가 겨우 한 대 지나갈 좁은 옛길을 5분여 더 들어가니 염전이 눈에 들어왔다. 햇볕과 바람, 그리고 바닷물이 공존하는 소금 꽃피는 마을. 공생염전이다.
공생염전은 여러 가구가 소금을 생산하며 산다. ‘공생’이라는 이름도 공평하게 소금판을 분배하고 함께 살아가자는 의미에서 붙었단다. 기자가 찾은 가구는 이곳 공생염전 입구에 자리한 이순용(62)씨의 집이다. 소금이 절반쯤 찬 창고가 붙어 있는 평범한 시골집. 그 뒤로는 소금밭이 펼쳐져 있다. 반갑게 기자를 맞이한 이씨는 “오후 5시에 작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시간을 보니 작업 시작까지 30분 넘게 남았다. 앞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이씨에게 염전 이야기를 들었다.
가 나지 않는다. 소금이 가득한 수레를 들어 몇 발짝 움직이는 게 기자로서 고작이었다.
이씨는 염부로 살아온 게 어언 40년이라고 했다. 부친이 60년 전 일군 염전을 물려받았단다. 고향이 강원도 철원인 이씨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정전 후 집터가 DMZ(비무장지대)로 지정돼 이 곳에 정착해 바다를 막고 염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생염전은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피난민들이 만든 곳이 아니냐’고 묻자 이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와전된 이야기에요. 황해도 사람은 몇 안 돼요. 대부분 나처럼 한국전쟁 정전 후 집터가 DMZ로 지정된 사람들이죠. 예전에는 파주, 연천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는데, 지금은 고향 근처로 돌아가고 얼마 안 남았어요.”
이씨는 최근 기자처럼 체험하고자 이곳 염전을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주말에는 가족 단위로도 오고, 요즘은 초등학생들이 많이 와요. 오늘 오전에도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다녀갔죠. 체험에 이곳 만한 데가 없다고 하네요.
허허.” 이씨가 미소를 짓자 옆에 있던 부인 이진숙(61)씨가 말을 거들었다. “말도 마요. 다른 사람들은 일에 방해된다고 (체험을) 거절하는데, 이 사람은 거절을 못 해요. 덕분에 평소보다 작업을 오래하는 경우도 더러 있어요.” 체험을 하면서 적어도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오후 5시가 되자 이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업을 시작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이씨는 기자에게 하얀 장화를 건넸다. 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화란다. 기자가 장화를 신자 이씨는 소금밭 옆자리에 놓인 대패를 가리켰다. “대패를 갖고 따라오세요. 우선 대패질(고무래로 소금을 모으는 일)부터 해야 해요.”
이씨를 따라나서니 소금밭이 오른쪽 지평선에서 왼쪽 지평선까지 중단 없이 놓여 있다.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 까만 옹기판 바닥 위로 생성되는 작은 소금 알갱이들은 바람에 살랑인다. 이씨는 그 위로 대패를 올렸다. 이어 묵직한 대패질을 시작했다.
대패는 한 치 오차 없이 자로 잰 듯 직선을 그렸다. 몇 번의 대패질로 소금은 수북하게 쌓였다. 이씨를 따라 대패질을 했다. 생각만큼 소금이 모이질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소금 알갱이가 군데군데 남아있다. 대패질이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은 소금 알갱이를 긁어모으기 위해선 대패질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한다.
이씨와 기자가 대패질을 하는 동안 부인 이진숙씨는 모아진 소금에서 잡티와 이물질을 골라냈다. 좀 더 나은 품질의 소금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란다. 기자도 잠시 해봤지만, 바짝 붙어야만 보이는 작은 부유물을 찾는 게 여간 쉽지 않다.
“삽질을 할 때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고 되도록 소금을 밀어내는 게 요령이에요. 상체 힘으로 퍼 올리면 얼마 가지 않아 체력이 떨어져요. 하체를 이용해서 조금씩 삽을 밀면서 소금을 모아야 해요. 저는 요가 한다는 생각으로 해요.”
기자가 맡은 결성지 두 곳의 소금이 얼추 정리되자 “이제 수레에 담을 차례에요”라는 비보(?)가 들렸다. 계속된 삽질에 이제는 현기증까지 나는 듯했다. 이진숙씨가 빙그레 웃었다. “많이 힘들죠? 그래도 체험하러 와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기자님이 처음이에요. 마음이 고맙네.” 이미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힌 터라 칭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 남은 일은 소금이 쌓인 수레를 창고로 옮기는 일이다. 출발 전 동료 기자가 “수레를 옮기는 일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한 번 들어 올려보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무게가 상당하다. 결국 수레를 창고로 옮기는 일은 이씨가 도맡아 했다. 기자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곤 옮겨진 소금 수레를 창고 한구석에 쏟는 것뿐이다.
작업을 마치고 앞마당으로 나와 얼음물을 들이켰다. 물이 맛있게 느껴지는 것도 오랜만이다. 고된 노동이 만들어낸 물의 참맛이다. 목을 적신 후 소쿠리에 가득 담긴 무화과를 하나 집어들었다. 처음 접하는 과일인데 그 맛이 제법 달달하면서도 시원하다.
휴식을 취하던 이씨가 “이제 소금을 거둬들인 결성지에 덧물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차례 소금 꽃이 피면서 떨어진 염도를 보충해주는 작업이란다. 덧물을 넣어 교반시켜 놓은 결정지의 염도는 22~25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이곳 공생염전에서는 덧물을 넣은 결성지의 바닷물을 이틀 동안 증발시켜 염도를 27도 이상으로 올린다. 그럼 비로소 소금 알맹이가 맺히기 시작하는데, 여기선 소금 꽃이 핀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소금 꽃은 해질 녘 무렵 절정을 맞이한다. 이씨가 이날 5시에 소금을 걷는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씨 부부는 염전이 열리는 4월부터 10월까지 이 일을 하루도 예외 없이 되풀이한다.
덧물을 넣는 이씨의 모습을 지켜봤다. 침묵 속에서 이뤄졌다. 그저 묵묵했다. 묵언 수행 중인 선승처럼 다가서기 쉽지 않다. 저녁노을이 길게 누운 시간, 이씨의 노동만큼 숙연한 풍경은 이곳 염전에는 없었다. 소금이 짠 건 이씨와 같은 염부들의 땀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성필기자ㆍ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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