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앉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비평사, 2001
오늘의 ‘나’는 몇 번의 선택으로 누적된 존재일까? 내셔널지오그래픽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하루에 150개 이상의 선택을 한다고 한다. 그 기준에 따르면 오늘의 ‘나’는 연속적으로 3백만 번 넘게 선택을 한 결과인 셈이다. 선택은 본인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애초의 다짐을 벗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초등학교 때 나의 꿈은 장교가 되는 것이었지만 결과는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라는 지금의 위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그 과정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인생은 흥미롭다. 마음먹은 대로 인생이 결정된다면 얼마나 따분하겠는가?
흔히들 인생을 ‘길’에 비유한다.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일 것이다. 인생의 길은 늘 목적을 동반한다. 목적의 삶은 ‘되기’의 욕망이며, 좀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한 보편의 노력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보편의 욕망들이 삶의 치명적인 굴레가 되기도 한다. 이럴 때 시인들은 인생의 다른 길을 보여준다.
장석남 시인의 〈길〉이라는 시는 ‘되기’의 욕망으로 끙끙대는 세속의 길에서 한 발 벗어나게 함으로써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아름다운 서정(抒情)의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번잡한 욕망의 도시에서 벗어나 팥배나무가 있는 자연 속에서 시인은 하얀 꽃잎들과 바위가 하나로 어우러진 투명한 풍경을 감상한다.
꽃잎과 바위의 만남은 아무런 목적과 욕망이 없는 미적(美的)인 마주침 그 자체다. 그 풍경은 “꽃잎들이 내려온” 사연들의 기막힌 경치이며, 시인의 맑은 눈이 포착한 서정의 세계다. 꽃잎이 내려온 수직의 길은 세속의 수평적인 길과는 다른 질감을 갖는다. 꽃잎의 길은 하늘에서 내려온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길이다. 그 길을 다 걸어보고 싶다는 시인의 염원은 그 내막조차 아득하고 깊어서 절로 가슴에 와닿는다.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는 〈가지 않는 길〉이라는 시에서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라고 읊었다. 그의 시에 일견 공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적게 간 수평의 한쪽 길보다 나만이 갈 수 있는 수직의 길을 선택하고 싶다. 욕망의 거친 길에서 잠시 벗어나 “꽃잎들이 내려온 길”을 찬란히 걷고 싶은 연말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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