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갇혀 망각되는… 슬픈 ‘가을 향기’
가을의 향기
- 김현승
남쪽에선
과수원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김현승 전집》, 민음사, 2005.
숭고함이 사라진 시대는 불행하고, 아름다움이 매몰된 삶은 참혹하다. 모든 것의 척도가 ‘돈’으로 귀결되는 맹목의 사회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시간을 우리에게서 가차 없이 앗아가 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흥(感興)’이라는 말을 잊고 기계처럼 무감각하게 산다. 아름답다는 말의 ‘뜻’은 알지만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모른다. 모른다기보다 외면하고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낙엽 지는 날의 쓸쓸함과 첫눈 오는 날의 설렘은 한가한 사람들의 ‘배부른 감정’처럼 여겨진다. 극단적인 예이겠지만, 어떤 이는 “꽃보다 돈이 아름답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의 말은, 모든 감흥이란 돈으로부터 나온다는 무서운 논리의 발현으로 들린다.
세속을 넘어서고자 하는 숭고한 정신과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미(美)의 속삭임이 ‘돈’의 손아귀에 갇혀 망각되는 이 시대의 가을은 과연 풍요롭고 행복한 계절인 것일까? 이 물음으로 나는 김현승 시인의〈가을의 향기〉를 읽어본다. 이 시가 발표된 년도는 정확치 않지만 1963년에 발간된 시집《옹호자의 노래》에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1960년대쯤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후 10년의 시간은 모두에게 어지간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시가 쓰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와 “노을이 타는 내음”, “마른 풀의 향기”와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로 후각화된 가을의 정취는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가슴에 물씬물씬 와닿는다. 냄새는 풍경을 깊고 풍요롭게 만든다. 여기에 ‘당신’의 “떠나는 향기”와 ‘나’에게 남은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가 더해짐으로써 시인의 가을은 아주 짙게 삶의 애틋한 여운들을 풍겨낸다. 익어가는 것과 말라가는 것, 영원한 것과 유한한 것, 떠나는 것과 남는 것, 상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가을의 “풍성한 향기”로 담아내는 시인의 정신이 숭고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상(傷)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을 늘 가슴 한켠에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은 감각의 그릇이다. 그 안에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의 시간들이 담겨있다. 삶이란 그런 두 개의 감각적 시간을 ‘높고 깊은’ 숭고의 정신으로 조율해가는 음악의 시간일 것이다. 돈의 바퀴에 깔려 감흥을 잃은 우리의 몸을 ‘높고 깊은’ 가을의 향기로 다시 일깨우는 것, 그것이 아름답게 사는 ‘방법’이라 믿는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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