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일몰(日沒)

못다 읽은 사랑의 얼굴… 되돌아보려는 또다른 사랑

 

일몰(日沒)

       - 황인숙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두건을 쓰고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역광 속에서

그림자처럼 스쳐 인파 너머로

넘어가는 너를 돌아보면서

네 개도 내게도 낯선

거리를 돌아보면서

내 모든 고인(故人)들을 돌아보면서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사. 2016.

다른 사람의 얼굴은 나의 얼굴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사랑하고 있는 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모든 말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말을 시작하는 것이 얼굴이다. 그 점에서 얼굴은 말한다”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굴로 말한다. 그의 슬픈 얼굴은 나의 슬픈 얼굴이다. 나는 그의 얼굴이 말하는 것에 위로를 보내야만 한다. 사랑이란 상대의 얼굴이 나에게 ‘명령’하는 것에 헌신하고 투신하는 것이다. 얼굴의 명령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한 사랑의 윤리다. 사랑의 명령은 강요나 억압이 아니다. 책임이다.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읽어내지 못하면 그 어떤 사랑도 결국엔 파국을 맞는다. 응답과 책임의 문제는 연인 사이의 사랑은 물론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도 적용되는 윤리적 당위일 것이다.

황인숙 시인의 <일몰>은 조용하고 쓸쓸하고 외롭고 안타까운 여러 개의 감정들이 동시적으로 밀려와 읽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두드린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겹겹의 감정들을 시인은 ‘일몰’의 풍경에 담아 제시한다. 시의 문맥으로 보면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무슨 연유로 그리 됐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두건을 쓰고/네 얼굴을 알아볼까 역광 속에서”라는 표현을 통해 ‘너’를 향한 화자의 사랑이 아주 깊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두건을 쓰기보다는 ‘내 얼굴’을 알아볼까 봐 두건을 쓴다. 그런데 시인은 ‘네 얼굴’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네 얼굴’이 곧 ‘내 얼굴’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보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아직도 남아있는 사랑의 감정을 내밀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 2행의 표현을 ‘그’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두건을 쓰고 역광에 서있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 이별이 누구의 잘못 때문인지를 따지는 것은 유치하다. 그것은 사랑했던 시간들에 대한 훼손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얼굴에서 말의 시작을 찾지 못했고, 그로인해 서로가 서로의 말에 응답하지 못해 엇갈렸다는 사실이다. 얼굴에 담긴 명령에 응답하지 못하는 사랑은 ‘낯선’ 얼굴이 되고 ‘고인’이 된다.

사랑은 힘들고 아프다. 그러나 우리를 살게 하는 무한의 힘이다. “내 모든 고인(故人)들을 돌아보면서”라는 마지막 구절은 회한의 쓸쓸함이라기보다는 못다 읽은 사랑의 얼굴을 되돌아보려는 또 다른 사랑의 시작으로 읽고 싶다. 너의 얼굴에 대한 나의 무조건적인 환대, 그것이 사랑의 윤리일 것이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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